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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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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2대황제 이세황제
 
{{인용문|창작은 나의 인생을 완전하게 해준다. 사람마다 욕망과 감정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현실 생활속에서 그것을 완전히 방출할 수 없기에 창작 과정에 비현실적인 세계에서 마음껏 풀이할 수 있다. 수필은 마치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는 느낌이지만 소설 특히 장편 소설은 일종의 인생을 겪는 것과 같다.|위화|<2008.10.22>}}
 
 
 
{{인물정보
 
{{인물정보
|이름 = 호해(胡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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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호해(胡亥)
|그림 = 호해 프로필.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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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B.C 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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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진(秦)나라 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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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시기 = 진(秦)나라 (재위 : B.C 210 ~ B.C 207)
|별칭 = 이세황제(二世皇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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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 이세황제(二世皇帝)
 
  }}  
 
  }}  
  
  
 
==개요==
 
==개요==
1960년 저장성 항저우시 출신, 본래 국가의 직업 분배에 따라 발치사로 일했으나 1983년 [[「베이징문학」]]에 단편소설을 기재하며 문화관에서 소설가로서 활동. 중국의 3세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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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의 2대황제로서 성은 영(嬴), 이름은 [[호해]](胡亥)이다. [[진시황]]의 18번째 아들로, 승상 [[이사]]와 환관 [[조고]]에 의해 이세황제(二世皇帝)의 자리에 올랐으나, 정치에 관심이 없고 대규모 토목 사업을 강행했으며 민심을 살피지 못했다. 결국 재위 3년만에 자결하고, 진(秦)은 멸망한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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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기간 : B.C 210 ~ B.C 207)
  
 
==생애==
 
==생애==
유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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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의 죽음, 간신들의 역할로 왕위에 오르다===
  위화는 [[문화대혁명]](1966~1976)시기를 겪으며 제대로 된 독서를 수 없는 환경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1973년 (문화대혁명 7년차)에 마을 도서관이 다시 문을 열었고, 이 때부터 소설을 즐겨 읽기 시작한다.  
+
[[시황제]] 37년 10월, 황제는 다섯 번째 지방 시찰 길에는 승상 [[이사]]와 환관 [[조고]], 그리고 시황제가 친히 아끼는 막내아들 [[호해]]가 동행했다. 순행 중 사구에 이르렀을 때, 시황제의 병이 더욱 깊어졌고 황제는 장남 부소에게 왕위를 넘기고자 유서를 남긴다. <br>
당시 거의 모든 문학작품이 독초였던 중국 도서관의 서가에 꽂혀 있는 소설이라고는 20여종 남짓이었고, 하나같이 국내의 이른바 사회주의 혁명문학이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기도 전에 도서관의 책을 다 읽은 위화는 책을 구하기 위해 동네 곳곳을 뒤졌으나 이내 포기하고 마오쩌둥 선집의 1권부터 읽기 시작, 마오쩌둥 사상이 아닌 책의 각주에 쓰인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관해 읽고 흥미를 느낀다.
+
'''해당 유언은 다음과 같다<br>
1973년 말, [[황솨이 사건]]으로 전국의 초등학교와 중학교 학생들이 궐기하여 사도의 존엄을 비판하는 조류가 일었다. 위화 또한 글을 썼는데, ‘춘묘’라는 필명으로 서명한 대자보가 중학교에 선풍을 일으켰다.  
+
:“군대는 [[몽염]]에게 맡기고 함양으로 돌아와 짐의 유해를 맞이하고 장례를 거행하라”''' <br>
문화대혁명 시기 위화의 이런 글쓰기는 고등학교 때까지 계속됐다. 그러다 어느 날 대자보 쓰기에 흥미 없어지고 연극 대본을 써보기로 마음먹었다. 이것이 위화의 첫 번째 문학작품이다.
+
시황제는 장남 부소에게 자신의 장례를 치르고 뒤를 이어 황제가 되라는 뜻을 전했지만 이들 일행은 시황제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고 호해를 황제로 만들 음모를 꾸몄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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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고]]는“아직 천자의 승하도 공표되지 않았고 장례도 하지 않았는데 어찌 이런 일을 승상에게 의논 하겠소? 그렇기 때문에 일각을 다투는 일입니다. 빨리 처리해야합니다.”라며 호해를 설득했고, 이후 승상 [[이사]]를 만나 부소가 왕위에 오른다면 승상으로 [[몽염]]이 기용될 것이고,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 것이라며 위협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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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시황제의 유언을 꾸며 [[호해]]를 태자로 세운 후, 부소에게 내리는 조서를 작성했는데, 서한을 받은 부소는 눈물을 흘리며 자결했다. 이를 [[사구정변]]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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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 군주의 삶, 신하들의 세력다툼으로 조정이 엉망이 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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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황제 집권 1년차<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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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황제 원년, 황제의 나이는 스물 한 살이었고, [[조고]]는 [[호해]]를 허수아비로 만들어 나랏일을 전담했다. 호해는 재위 초기, 어린 나이와 적은 경험으로 백성들의 복종을 걱정하며, 나약하게 보이지 않기를 원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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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황제는 조고와 이를 의논했고, 요동으로 순행을 갔다 돌아온 뒤, 본인을 따르지 않는 대신들과 공자들에 대항할 방법을 고안한다. 조고는 '''“무엇보다도 법을 엄격히 하고 처벌을 가혹하게 해야 합니다. 죄를 지은 자는 연좌제를 적용하여 모든 일가 친척을 죽여 없애고, 궁중에서는 대신들을 없애며 폐하의 가족까지 멀리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시황제께서 임명한 옛 신하들은 모두 파면하고 폐하께서 신임하는 사람만을 가까이 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폐하는 베개를 높이 베고 마음껏 즐기실 수 있을 것입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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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을 들은 호해는 엄격한 법을 만들어 죄를 지은 사람들을 모두 조고에게 처벌하게 하였고, [[조고]]는 즉시 대신들과 여러 공자들을 죽이고,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는 물론 몽염 장군을 비롯한 왕자 12명을 시장에서 공개 처형했다. 또한, 호해는 “아방궁을 버려두고 완공하지 않는다면, 이는 선제께서 거행한 일이 잘못이었음을 밝히는 것이오.” 라며 아방궁을 다시 지었다. 이에 사람들의 불만은 점점 커졌고, 진승·오광의 난이 발생했다.
  
청소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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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황제 집권 2년차<br>
책 제목도, 작가도 모르는 독초를 구해 읽었으나 상태가 온전치 않아 소설의 앞과 뒤가 없었다. 덕분에 결말이 없는 책을 읽고 스스로 이야기의 결말을 상상함으로써 창작 열정이 시작이 되었다.
 
문화대혁명이 끝날 무렵인 고등학교 2학년, 독초 소설 가운데 유일하게 뜯겨나가지 않았던 책, 프랑스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의 ‘춘희’를 필사본 형태로 구했으나, 하루밖에 빌려 읽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위화는 친구와 함께 3분의 1가량 읽고 훌륭한 소설이라 생각하여 책을 베끼기 시작한다. 부모님이 퇴근하여 집에 오실 시간 되자 학교로 향했고, 창문을 통해 교실로 들어가 전등 전선 끌어다가 백열등 켜놓은 채, 한 사람이 베끼는 동안 다른 한 사람은 책상을 이어 만든 침대 위에 누워 휴식, 이를 번갈아가며 아침까지 책을 필사했다.
 
 
  
발치사에서 작가로의 탈바꿈
+
겨울에 진섭이 보낸 주장 등의 무리가 서쪽으로 나아가 병사의 숫자가 십만이었다. 이세황제가 크게 놀라 여러 신하들과 상의하였고, 소부 장한이 말했다. “여산에 죄수들이 많으니 그들을 사면하시고 무기를 주어 도적을 무찌르십시오.<br>
당시 중국에서는 개인에게 자신의 직업을 선택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직업은 전부 국가가 분배해주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위화에게 치과의사라는 직업을 분배되었지만, 오후 휴식시간이 되면 항상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병원 창가에 서서 눈 아래 펼쳐지는 소란스러운 거리의 풍경을 부러워했다. 창가에 서면 항상 현 문화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할 일 없이 한가하게 거리를 오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내가 이 자리에 평생 서 있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든 순간 위화는 바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문화관에서 일하기로 결심한 위화가 치과의사라는 직업을 포기하고 문화관에서 일을 하려면 국가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게다가 자신이 문화관에 들어갈 자격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했는데 문화관에 갈 수 있는 방법에는 ‘작곡’, ‘회화’, ‘글쓰기’ 뿐이었다.
 
위화는 스무살 때 이를 뽑는 동시에 글쓰기를 시작했다. 이를 뽑는 것은 생계를 위해, 글쓰기는 더 이상 이를 뽑지 않기 위해서였다. 한편 1980년대 단편 소설을 문학잡지에 보내기 시작한 위화는  1983년 11월 <베이징문학>에 단편소설을 기재하며 문화관에 출근하게 되었다.
 
  
==작품==
+
이세황제가 즉시 천하에 대사면을 내린 후, 주장의 군대를 격파하러 보냈다. 이에 이세황제는 진승을 성보에서 죽이고, 항량을 정도에서 무찔렀으며 위구를 임제에서 죽였다. <br>
 +
조고는 이를 견제하며 '''“선제께서는 천하에 군림하여 제압하신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여러 신하들이 감히 그릇된 짓을 하거나 사악한 말을 진언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나이가 한창 젊으신 데다 이제 막 즉위하셨는데 어째서 공경들과 함께 나랏일을 정하십니까? 일이 잘못된다면 이는 신하들에게 약점을 보이는 것입니다. 천자가 ‘짐’이라고 부르는 것은 진실로 군신들의 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뜻입니다"''' 이에 이세는 늘 궁중에 머물며, 조고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며 함께 모든 일을 결정했다. 그 후로 공경들이 천자를 알현할 수 있는 기회가 드물어졌으며, 도적들은 더욱 많아졌다.<br>
  
===단편소설===
+
어느 날, 우승상 풍거질, 좌승상 [[이사]], 장군 풍겁이 간언하여 말했다. “관동 지방에서 도적 떼가 일어나자 진나라가 군대를 일으켜 토벌하니 죽거나 도망치는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멈추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도적들이 많아지는 것은 수송하는 일이 고달프고 세금도 많기 때문이다. 청컨대 아방궁 짓는 것을 잠시 멈추시고 변방의 요역과 운송을 줄여주십시오”<br>
* 첫 번째 기숙사
 
* 18세에 집을 나가 먼길을 가다
 
* 내게는 이름이 없다
 
* 세상사는 연기와 같다
 
* 4월 3일 사건
 
* 무더운 여름
 
  
===장편소설===
+
조고는 본인과 대척하는 신하들을 자연스럽게 제거할 수 있었다. 호해는'''“짐이 즉위하고 두 해 사이에 도적 떼가 일어났는데도 그대들은 막지 못했고, 이제와서는 선제께서 손대신 사업을 버리려 하니 이것은 위로는 선제께 보답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짐에게 충성을 다하지 않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자리에 있는 것이냐?”'''라며 이들의 죄를 심문하게 했고, 풍거질과 풍겁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이사는 옥에 갇혔다 오형을 받았다.
* 가랑비 속의 외침
 
* 인생
 
* 허삼관 매혈기
 
* 형제
 
* 제 7일
 
  
===수필집===
 
* 영혼의 식사
 
*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우리는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 있다
 
* 글쓰기의 감옥에서 발견한 것
 
  
==대표작==
 
===인생(活着)===
 
[[파일:인생.jpg|130픽셀|섬네일|왼쪽|<center>'''「인생」, 1994'''</center>]]
 
<br>
 
<br><br><br><br><br><br><br><br><br><br>
 
----
 
  
===허삼관매혈기(许三观卖血记)===
+
===비극적인 죽음과 진나라의 멸망===
[[파일:허삼관.jpg|130픽셀|섬네일|왼쪽|<center>'''「허삼관」, 2014'''</center>]]
+
이세황제 집권 3년차<br>
<br>
 
<br><br><br><br><br><br><br><br><br><br>
 
  
==평가==
+
조고는 승상이 되어 마침내 이사를 심판하여 처형했다. [[항우]]가 진나라 장수를 물리치고, 장한의 군대가 퇴각했으며, 연나라, 조나라, 제나라, 초나라, 한나라, 위나라는 모두 스스로 자리에 올라 왕이 되니, 함곡관 동쪽에서부터 거의 모두 진나라 관리를 배반하고 제후들에게 호응했다.<br>
===수상===
 
1998년 이탈리아 그린차네 카보우르 문학상<br>
 
2004년 프랑스 문학예술 훈장 및 미국 반스 앤 노블의 신인작가상<br>
 
2005년 중화도서 공로상<br>
 
2008년 프랑스 꾸리에 엥테르나시오날 해외 도서상<br>
 
  
===작품성===
+
조고는 이세황제가 화가 자신을 살해할까 염려하여 천자를 바꿔 공자 자영을 왕위에 올리려 한다. 그는 이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염락에게 관리를 부르고 군대를 일으키도록 했으며, 이세황제의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는데 죽음 직전에 그는 자신의 잘못을 직접 간언하는 환관을 만나게 된다.“그대는 어찌하여 일찌감치 나에게 알리지 않았는가?”<br>
중국 문학 평론가들은 언어 서술이 매우 간결하다고 칭찬했으며, 미국의 한 문학교수는 영어로 번역된 위화의 언어가 마치 헤밍웨이의 언어 같다고 말했다. 위화의 작품들은 모두 해학적 문체와 극단적인 상황의 연출로 현대 중국사회를 냉소적으로 표현한다.
 
<br>
 
<br>
 
{{인용문|*'''독특한 서사전략과 개성적 인물 제시'''<br>
 
위화의 소설은 중국과 중국인을 보여주되 자기만의 고유한 서사를 통해 개성있게 제시한다. 위화는 세계와 사람을 표현하는 자기만의 고유한 서사방식을 가지고 있는 작가이다.
 
위화는 초기에는 형식실험을 추구하는 단편을 썼다. 그런데 요즘에는 장편만 쓴다. 그는 단편과 장편은 전혀 다른 별개의 장르라고 말한다. 장편을 쓴 뒤로 그는 자신이 독재자에서 민주주의자로 바뀌었다고 한다. 단편을 쓸 때는 소설 속 인물들을 지배하였지만 장편을 쓰면서는 인물이 자기 목소리를 가지고 스스로 말할 수 있도록 변했다는 것이다. 확실히 그의 인물들은 스스로 말하고, 작가는 그것을 중계하고, 독자는 그 중계방송을 듣는다. 그의 소설을 읽는 우리는 독자인 동시에 청자이다. 작가는 흡사 저 옛날 저잣거리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기이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늘어놓던 설서인(說書人) 같다.
 
그의 소설은 이야기, 특히 사람 이야기이다. 그의 소설은 범박하게 말하면 이른바 ‘전'(傳)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푸꾸이전(富貴傳)이고 《허삼관 매혈기》가 허삼관전(許三觀傳)이라면 신작 《형제》는 리꽝터우전(李光頭傳)과 같다. 위화는 오로지 그의 소설 속에만 존재하는 세 사람을 창조했다. 이들 주인공은 온갖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삶에 대한 낙관과 웃음을 잃지 않는다. 숱한 역사적 고난과 굴욕 속에서 피를 열세번이나 뽑으면서도 삶을 포기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세상의 모순을 추궁하면서 그것과 대결하지 않는다.|이욱연, 창비주간논평|<2007.06.05>}}
 
  
 +
:'''“신이 감히 아뢰지 않았으므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신이 일찍 아뢰었더라면 이미 처형되었을 것인데,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겠습니까?”'''. 염락은 병력을 동원하여 이세황제를 향하도록 하였고, 이세황제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br>
  
<br>
+
이후 호해 형의 아들 공자 자영을 진나라 왕으로 삼고, 더 이상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조고는 천하를 누리기를 기대하였으나, 왕위에 오른 [[자영]]은 조고를 찔러 죽이고 삼족을 멸하였다.
{{인용문|*'''순응적 운명론과 낭만적 현실관의 한계'''<br>
 
그의 소설을 중국과 한국의 독자들은 매우 친숙하게 받아들인 반면 서구 독자들이 낯설고 불편하게 여겼던 것은 인물들의 이런 특징 때문이다. 위화 소설의 인물들은 근대인들, 근대소설 속의 인물들이 아니다. 세계의 숨은 진리를 찾기 위해, 혹은 세계와 대결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 문제적 개인들이 아닌 것이다. 물론 이는 위화 소설의 독보적 장점과 가능성이지만 치명적 약점이자 한계이기도 하다. 그의 소설에서 인물들이 정치적 원인으로 초래된 재난을 운명의 한 형식으로 받아들이거나 현실을 과도하게 낭만적으로 대하여 결국 정치성이 약화되는 것 등은 서사 자체에서 유래하는 약점이자 한계이다.
 
하지만 이러한 약점과 한계까지 포함하여 창조된 인물들이 진짜 중국인이고 그의 소설에만 나오는 독특한 인간형이라는 것을 인정받으면서 위화 문학은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아큐가 루쉰(魯迅)의 소설에만 있듯이, 위화의 인물들은 그의 소설에만 있는 중국인임을 세계문학이 인정한 것이다.”|이욱연, 창비주간논평|<2007.06.05>}}<ref>이욱연, 「한국문학의 길에 위화가 보여주는 것들」,창비 주간논평, 2007.06.05 https://magazine.changbi.com/%ed%95%9c%ea%b5%ad%eb%ac%b8%ed%95%99%ec%9d%98-%ea%b8%b8%ec%97%90-%ec%9c%84%ed%99%94%ea%b0%80-%eb%b3%b4%ec%97%ac%ec%a3%bc%eb%8a%94-%ea%b2%83%eb%93%a4/?cat=476</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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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및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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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승•오광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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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황제 집권 2년차 7월, 대규모 강제 노역이 시작되었고 진승과 오광은 소대장격 인솔 책임을 맡고 있었다. 비때문에 기한 내에 도착할 수 없게 된 진승과 오광은 이들은 나라에 망조가 들었다며 부소와 항연의 행세를 하고 반란을 도모한다. 백성들은 대부분 진나라 왕조에 등을 돌렸고, 진승은 진성을 점령한 후 지방 유지들을 모아 자신의 뜻을 설명했다. <br>
  
 +
진승은 스스로 자리에 올라 초왕이 되었으며, 진현에 머물면서 여러 장수들을 보내 땅을 점령하게 했다. 그들은 진나라를 정벌한다는 명분으로 연합하여 서쪽으로 향했는데,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었다. 동쪽으로 보낸 알자가 와서 반란이 일어났음을 이세황제에게 보고했고, 반란군 내부에 분열이 생겨 장수들은 오광을 죽이고 머리를 진승에게 바쳤다. 이에 패색이 짙어진 진승과 오광의 난을 제압하게 된다.
  
===본인의 평가===
 
위화는 1980년대 혈기와 폭력으로 가득한 글이 성장 배경과 연관이 있다고 말한다. (대환경 - 문화대혁명, 소환경 - 의사 부모님)
 
{{인용문|나는 나의 성장 이력이 1980년대에 내가 그토록 혈기와 폭력으로 가득 찬 글을 쓰도록 결정해놓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나는 초등학교 1학년에 다니고 있었고 문화대혁명이 끝났을 때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였다. 나의 성장은 한 차례 또 한 차례 연이어 벌어지는 가두행진과 비판투쟁대회, 조반파 사이의 무장투쟁을 목도해야 했다. 이것 말고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거리의 집단 패싸움도 지켜봐야 했다. 대자보가 가득 붙어 있는 길거리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치고 지나가는 것이 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습관처럼 겪은 일이었다.|위화|}}
 
하지만, 본인이 살해당하는 생생한 꿈을 꾼 뒤 낮에 썼던 살인에 관한 소설내용을 의식하게 되고, 이것이 반전의 계기가 된다.
 
  
===위화와 루쉰===
+
===지록위마(指鹿爲馬)===
{{인용문|중국의 비평가들 은 나를 [[루쉰]]정신의 계승자라고 말한다. 이런 소리를 들을 때면 나는 마음 속으로 몹시 불쾌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내 작품을 폄하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곤 했다.|위화|}}
+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다는 뜻으로, 윗사람을 농락하여 권세를 휘두르는 경우'''
실제로 이 둘의 문학작품은 닮아있다는 평을 받으나 위화는 유년시절의 기억으로 루쉰의 소설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위화는 작품이 재미없다 생각하면 그 작가의 작품 당장 내려놓으나 문화대혁명시기에는 루쉰의 작품 내려놓지 못하고 반복해서 읽었고, 루쉰은 위화가 싫어했던 유일한 작가가 되었다. 문화대혁명 이후 한 번도 루쉰 작품 읽지 않았으나, 1996 어느 영화감독이 루쉰의 소설을 영화화하면서 위화에게 각색과 기획 맡겼고, 이를 계기로 루쉰 소설집을 산 위화는 소설을 영화화하지 말아달라 부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루쉰을 망가뜨리지 맙시다. 루쉰은 정말 위대한 작가거든요”
+
이세황제 집권 2년차 8월 기해일에 [[조고]]가 모반을 일으키기로 하고는 신하들이 따르지 않을까 염려되어 시험을 하고자 한다. 조고는 주요 대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황제에게 사슴을 선물로 바쳤고, “폐하를 위해 귀한 말을 한 마리 데려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세황제가 웃으며 “에이 이게 어떻게 말이란 말이요”라고 하자, 조고는 대신들에게 직접 보이겠다고 말했고, 사슴이라고 답한 자는 살고 말이라 말한 자는 죽었다.  
  
==참고자료==
+
==참고문헌==
  
1. 위화 저, 최용만 역, 「영혼의 식사」, 휴머니스트, 2008<br>
+
1. 사마천, 김원중 「사기본기」, 민음사, 2015<br>
2. 위화 저, 김태성 역,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문학동네, 2012<br>
+
2. 사마천, 김진연 「사기 (1) 토끼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 먹는다」, 서해문집, 2002<br>
3. 위화 저, 이욱연 역, 「우리는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 있다 : 작가 위화가 보고 겪은 격변의 중국」, 문학동네, 2016<br>
+
3. 사마천, 김진연 「사기 (3) 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 보이는 법이다」, 서해문집, 2002<br>
4. 위화 저, 김태성 역, 「글쓰기의 감옥에서 발견한 것」, 문학동네, 2018<br>
+
4.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278042&cid=40942&categoryId=34304 두산백과] <br>
5. 이욱연, 「한국문학의 길에 위화가 보여주는 것들」,창비 주간논평, 2007.06.05
+
5. [https://zh.m.wikipedia.org/wiki/%E7%A7%A6%E4%BA%8C%E4%B8%96 중국위키피디아]

2021년 5월 17일 (월) 17:47 기준 최신판

호해(胡亥)

출생 B.C 230?
진(秦)나라 함양
사망 B.C 207
생존시기 진(秦)나라 (재위 : B.C 210 ~ B.C 207)
별칭 이세황제(二世皇帝)


개요

진나라의 2대황제로서 성은 영(嬴), 이름은 호해(胡亥)이다. 진시황의 18번째 아들로, 승상 이사와 환관 조고에 의해 이세황제(二世皇帝)의 자리에 올랐으나, 정치에 관심이 없고 대규모 토목 사업을 강행했으며 민심을 살피지 못했다. 결국 재위 3년만에 자결하고, 진(秦)은 멸망한다.
(재위기간 : B.C 210 ~ B.C 207)

생애

진시황의 죽음, 간신들의 역할로 왕위에 오르다

시황제 37년 10월, 황제는 다섯 번째 지방 시찰 길에는 승상 이사와 환관 조고, 그리고 시황제가 친히 아끼는 막내아들 호해가 동행했다. 순행 중 사구에 이르렀을 때, 시황제의 병이 더욱 깊어졌고 황제는 장남 부소에게 왕위를 넘기고자 유서를 남긴다.
해당 유언은 다음과 같다

“군대는 몽염에게 맡기고 함양으로 돌아와 짐의 유해를 맞이하고 장례를 거행하라”

시황제는 장남 부소에게 자신의 장례를 치르고 뒤를 이어 황제가 되라는 뜻을 전했지만 이들 일행은 시황제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고 호해를 황제로 만들 음모를 꾸몄다.

조고는“아직 천자의 승하도 공표되지 않았고 장례도 하지 않았는데 어찌 이런 일을 승상에게 의논 하겠소? 그렇기 때문에 일각을 다투는 일입니다. 빨리 처리해야합니다.”라며 호해를 설득했고, 이후 승상 이사를 만나 부소가 왕위에 오른다면 승상으로 몽염이 기용될 것이고,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 할 것이라며 위협했다.

그리하여 시황제의 유언을 꾸며 호해를 태자로 세운 후, 부소에게 내리는 조서를 작성했는데, 서한을 받은 부소는 눈물을 흘리며 자결했다. 이를 사구정변이라 한다.


허수아비 군주의 삶, 신하들의 세력다툼으로 조정이 엉망이 되다

이세황제 집권 1년차

이세황제 원년, 황제의 나이는 스물 한 살이었고, 조고호해를 허수아비로 만들어 나랏일을 전담했다. 호해는 재위 초기, 어린 나이와 적은 경험으로 백성들의 복종을 걱정하며, 나약하게 보이지 않기를 원했다.

이세황제는 조고와 이를 의논했고, 요동으로 순행을 갔다 돌아온 뒤, 본인을 따르지 않는 대신들과 공자들에 대항할 방법을 고안한다. 조고는 “무엇보다도 법을 엄격히 하고 처벌을 가혹하게 해야 합니다. 죄를 지은 자는 연좌제를 적용하여 모든 일가 친척을 죽여 없애고, 궁중에서는 대신들을 없애며 폐하의 가족까지 멀리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시황제께서 임명한 옛 신하들은 모두 파면하고 폐하께서 신임하는 사람만을 가까이 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폐하는 베개를 높이 베고 마음껏 즐기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호해는 엄격한 법을 만들어 죄를 지은 사람들을 모두 조고에게 처벌하게 하였고, 조고는 즉시 대신들과 여러 공자들을 죽이고,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는 물론 몽염 장군을 비롯한 왕자 12명을 시장에서 공개 처형했다. 또한, 호해는 “아방궁을 버려두고 완공하지 않는다면, 이는 선제께서 거행한 일이 잘못이었음을 밝히는 것이오.” 라며 아방궁을 다시 지었다. 이에 사람들의 불만은 점점 커졌고, 진승·오광의 난이 발생했다.

이세황제 집권 2년차

겨울에 진섭이 보낸 주장 등의 무리가 서쪽으로 나아가 병사의 숫자가 십만이었다. 이세황제가 크게 놀라 여러 신하들과 상의하였고, 소부 장한이 말했다. “여산에 죄수들이 많으니 그들을 사면하시고 무기를 주어 도적을 무찌르십시오.”

이세황제가 즉시 천하에 대사면을 내린 후, 주장의 군대를 격파하러 보냈다. 이에 이세황제는 진승을 성보에서 죽이고, 항량을 정도에서 무찔렀으며 위구를 임제에서 죽였다.
조고는 이를 견제하며 “선제께서는 천하에 군림하여 제압하신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여러 신하들이 감히 그릇된 짓을 하거나 사악한 말을 진언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나이가 한창 젊으신 데다 이제 막 즉위하셨는데 어째서 공경들과 함께 나랏일을 정하십니까? 일이 잘못된다면 이는 신하들에게 약점을 보이는 것입니다. 천자가 ‘짐’이라고 부르는 것은 진실로 군신들의 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뜻입니다" 이에 이세는 늘 궁중에 머물며, 조고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며 함께 모든 일을 결정했다. 그 후로 공경들이 천자를 알현할 수 있는 기회가 드물어졌으며, 도적들은 더욱 많아졌다.

어느 날, 우승상 풍거질, 좌승상 이사, 장군 풍겁이 간언하여 말했다. “관동 지방에서 도적 떼가 일어나자 진나라가 군대를 일으켜 토벌하니 죽거나 도망치는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멈추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도적들이 많아지는 것은 수송하는 일이 고달프고 세금도 많기 때문이다. 청컨대 아방궁 짓는 것을 잠시 멈추시고 변방의 요역과 운송을 줄여주십시오”

조고는 본인과 대척하는 신하들을 자연스럽게 제거할 수 있었다. 호해는“짐이 즉위하고 두 해 사이에 도적 떼가 일어났는데도 그대들은 막지 못했고, 이제와서는 선제께서 손대신 사업을 버리려 하니 이것은 위로는 선제께 보답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짐에게 충성을 다하지 않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자리에 있는 것이냐?”라며 이들의 죄를 심문하게 했고, 풍거질과 풍겁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이사는 옥에 갇혔다 오형을 받았다.


비극적인 죽음과 진나라의 멸망

이세황제 집권 3년차

조고는 승상이 되어 마침내 이사를 심판하여 처형했다. 항우가 진나라 장수를 물리치고, 장한의 군대가 퇴각했으며, 연나라, 조나라, 제나라, 초나라, 한나라, 위나라는 모두 스스로 자리에 올라 왕이 되니, 함곡관 동쪽에서부터 거의 모두 진나라 관리를 배반하고 제후들에게 호응했다.

조고는 이세황제가 화가 자신을 살해할까 염려하여 천자를 바꿔 공자 자영을 왕위에 올리려 한다. 그는 이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염락에게 관리를 부르고 군대를 일으키도록 했으며, 이세황제의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는데 죽음 직전에 그는 자신의 잘못을 직접 간언하는 환관을 만나게 된다.“그대는 어찌하여 일찌감치 나에게 알리지 않았는가?”

“신이 감히 아뢰지 않았으므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신이 일찍 아뢰었더라면 이미 처형되었을 것인데,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겠습니까?”. 염락은 병력을 동원하여 이세황제를 향하도록 하였고, 이세황제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후 호해 형의 아들 공자 자영을 진나라 왕으로 삼고, 더 이상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조고는 천하를 누리기를 기대하였으나, 왕위에 오른 자영은 조고를 찔러 죽이고 삼족을 멸하였다.

관련 인물 및 일화

진승•오광의 난

이세황제 집권 2년차 7월, 대규모 강제 노역이 시작되었고 진승과 오광은 소대장격 인솔 책임을 맡고 있었다. 비때문에 기한 내에 도착할 수 없게 된 진승과 오광은 이들은 나라에 망조가 들었다며 부소와 항연의 행세를 하고 반란을 도모한다. 백성들은 대부분 진나라 왕조에 등을 돌렸고, 진승은 진성을 점령한 후 지방 유지들을 모아 자신의 뜻을 설명했다.

진승은 스스로 자리에 올라 초왕이 되었으며, 진현에 머물면서 여러 장수들을 보내 땅을 점령하게 했다. 그들은 진나라를 정벌한다는 명분으로 연합하여 서쪽으로 향했는데,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었다. 동쪽으로 보낸 알자가 와서 반란이 일어났음을 이세황제에게 보고했고, 반란군 내부에 분열이 생겨 장수들은 오광을 죽이고 머리를 진승에게 바쳤다. 이에 패색이 짙어진 진승과 오광의 난을 제압하게 된다.


지록위마(指鹿爲馬)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다는 뜻으로, 윗사람을 농락하여 권세를 휘두르는 경우 이세황제 집권 2년차 8월 기해일에 조고가 모반을 일으키기로 하고는 신하들이 따르지 않을까 염려되어 시험을 하고자 한다. 조고는 주요 대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황제에게 사슴을 선물로 바쳤고, “폐하를 위해 귀한 말을 한 마리 데려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세황제가 웃으며 “에이 이게 어떻게 말이란 말이요”라고 하자, 조고는 대신들에게 직접 보이겠다고 말했고, 사슴이라고 답한 자는 살고 말이라 말한 자는 죽었다.

참고문헌

1. 사마천, 김원중 역 「사기본기」, 민음사, 2015
2. 사마천, 김진연 역 「사기 (1) 토끼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 먹는다」, 서해문집, 2002
3. 사마천, 김진연 역 「사기 (3) 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 보이는 법이다」, 서해문집, 2002
4. 두산백과
5. 중국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