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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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ethan (토론 | 기여)님의 2016년 6월 10일 (금) 01:2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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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가(藏書家)란 사전적으로 ‘책을 많이 간직하여 둔 사람’을 의미한다. 이 문서에서 지칭하는 장서가란 명청시기에 출판된 도서의 소비자이자 생산자의 기능을 담당했던 출판문화의 주체 중 하나이다.


장서문화의 중심지

장서문화의 역사를 살펴보면 알 수 있는 기본적인 특성은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와 문화, 과학기술이 발전한 시기에 장서 사업이 활발해지고 다수의 장서가가 출현한다는 점이다. 명청시기에는 특히 강남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장서가가 배출되었다. 이는 당시 강남지역이 문화가 발달하고 학술이 창성하여 전반적인 문화소양이 높고 독서의 열기가 고조되었던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강남지역을 중심으로 한 장서가들의 활동은 중국의 명청시기에 두드러졌으며 강남지역의 높은 문화소양을 반영하는 것임과 동시에 이러한 문화적 분위기를 고양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장서문화의 주체

상인

명청시대에 이르면, 여태껏 사회적 약자로만 머물러 있던 상인들이 상업이 발달한 지역에서 혈연이나 지연 등을 연고로 한 거대한 경제력과 조직력을 확보하면서, 이른바 상방(商幫)이라불리는 매우 긴밀한 집단조직을 이루어 낸다. 상방을 결성한 상인들은 그들의 활동을 상업적 거래에만 국한시키지 않았다. 그들은 상업에서 거둬들인 이익을 사회전반에 걸친 문화활동에 투자하면서, 민간의 문화활동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심지어 서적을 간행하고 매입하거나, 또는 그것을 대량으로 소장하는 일에까지 나아갔다. 이렇게 서적을 수장하는 일은 특히 휘상(徽商)과 같은 유상(儒商)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중국과 같은 봉건사회에서 서적을 간행하고 소장하는 일은 그 성격상 관리나 사대부들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데, 여사상 계층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영햐력이 별로 없었던 상인들이 관리나 사대부처럼 전통문화 가운데 주류에 속하는 장서문화의 형성에 크게 기여한 일은 매우 특기할 만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유상이란 유와 상이 결합된 말로서, 유학에 대해 배경이 있는, 글자 그대로 유학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상인을 가리킨다. 사실 황무제(潢武帝)가 “백가를 물리치고 오직 유학만 존중하기”시작한 이래로 유가의 최고 이념은 “학문하고도 여력이 있으면 관리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유학에서는 전통적으로 오랜 세월동안 상인과 상업을 무시하였다. 상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유학이란 학문과 사인이라는 신분은 자신들이 태생적으로 다가갈 수 없는 대상이었다. 그러던 것이 명대 중엽 이후에 이르면 인구증가와 상공업발달과 같은 급격한 사회변화와 정통유학에 대한 사상적 도전이 발생하면서, 상인과 유학이 결합한 유상이라는 새로운 계층이 등장하게 되었다.


장서가의 역할

장서가 출판에 이용되려면 우선 진본(珍本), 선본(善本)을 찾아서 그것을 인쇄의 저본(底本)으로 삼아야 하고, 여기에 여러 차례의 교감과 정리 작업을 거쳐야 한다. 따라서 장서가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교감가이며 출판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장서가 가운데 “장서는 독서만 못하고, 독서는 각서만 못하니, 독서는 그저 자기를 위한 것이지만 각서는 남에게 베풀 수 있기 때문이다.(藏書不如讀書, 讀書不如刻書, 讀書只以爲己, 刻書可以澤人.)”라는 인식을 가지고, 자신의 장서를 이용해 저본으로 삼아 서적을 출판하던 주체들이 많았다.
장서가가 자신의 전적을 이용하여 서적을 출판·전파한 상황을 보면, 그 출판동기와 목적은 제각각 차이가 있겠지만 진귀한 전적의 보급에 큰 공헌을 했다.
장서가의 주체 중 하나였던 유상의 대표적인 특징에 대해 살펴보면, “‘利’는 소인배가 추구하는 바로서, 군자는 이에 앞서 ‘義’를 취하여야 한다.”는 유교적인 사고에 따라 ‘利’를 취하되, ‘義’로써 ‘利’를 취하였다. 이들은 ‘仁者愛人’이란 유교적 철학을 상업경영에 도입하여서, 물질적 기초가 마련되고 나면 장사에서 벌어들인 영리를 사회의 문화사업에 환원하기도 하였다. 유상은 상업경영에서 유가윤리인 절검(節儉)·성신(誠信)을 실천하고, 기꺼이 재산을 기부하여서 마을의 사당을 수리하거나 수리사업과 도로개설·보수를 수행하고, 가난한 자를 돕거나, 학교를 세우는 등의 일을 행했다. 유상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이름을 날리고, 또 가문과 조상을 빛나게 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명청 상인들은 특히 이러한 유상을 중심으로 하여서 중국장서문화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던 것이다.


장서가의 특성

장서가들의 출판활동은 일반의 개인적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출판업자와는 다르다. 서상(書商)의 출판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므로 선택한 저본이 좋지 못하거나 교감이 정확치 않기도 하고, 도서의 장정(裝幀)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심지어 오탈자와 연문(衍文) 등이 심해 오히려 후학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장서가의 출판의도는 이와는 차이가 있었는데, 일부는 자신의 사장(私藏)을 보충하기 위해 출판하는 경우도 있고, 또 일부는 치학(治學)의 목적이나 저술을 발표하기 위해 출판하였으며, 또 그 중에는 개인적인 취미로 하는 이도 있었다. 이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경우는 진귀한 전적(典籍)을 보존하기 위해 출판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장서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책은 출판할 도서 종류의 선택에서부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것이고, 또한 우수한 선본을 저본으로 삼았으며, 저본에 대해 성실하게 교정을 가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질적인 면에서 상당히 우수했다.


명청대 유명 장서가

명청시기에는 강남지역을 중심으로 배출된 장서가가 많았다. 엽성(葉盛), 전겸익(錢謙益), 전회(錢會), 장해붕(張海鵬), 장금오(張金吾), 황비열(黃丕烈), 황정감(黃廷鑒), 구용(瞿鏞), 모진(毛晋) 등이 중국 역사에서 대표적인 장서가들로 꼽힌다.

황비열

황비열(黃丕烈)은 건륭년간에 대장서가였는데, “나는 장서를 즐기며 또한 서책의 간행을 좋아하는데, 바라건대 소장하고 있는 것을 차례로 판각하고 싶구나.(余喜藏書而兼刻書, 欲擧所藏而次第刻之.)”라고 말한 바 있다. 그가 책을 간행할 자금이 없었을 때, 호과천(胡果泉)이 자금을 대겠다고 하자 황비열은 곧 박서정 소장 송본 《輿地廣記》를 선택하여 삼년간 호과천의 힘을 빌어 간행하였다. 이때 황비열은 “이 책이 세상에 사라져 드러나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다. 내가 비록 그것을 얻었으나 책 넣어 두는 궤짝에 들어 있을 따름이었다. 과천 선생이 나를 도와 새길 수 있게 해 주지 않았다면 어찌 사라진 것이 문득 나타날 수 있었겠는가! (是書煙沒不彰久矣, 余雖得之, 第藏之篋笴已耳, 敬非果川先生之助剞劂, 安能使晦者忽顯乎.)”라고 하며 책을 출판하였을 때의 기쁨을 표현하였다.

모진

모진(毛晋)은 명말청초의 유명한 장서루 급고각(汲古閣)의 주인으로 그의 장서는 84,000여 책에 이르는데 모두 급고각과 목경루(目耕樓)에 두었다. 모진은 평생을 도서의 수집에 바쳤는데 명 만력말에서 청 순치년간에 이르기까지 40여 년간 그가 출판한 서적은 600여 종에 이르며, 조판(雕版)만 해도 10만 9천여 편에 달한다. 당시에 “모진의 책이 천하를 다닌다. (毛氏之書走天下).”라는 말이 있었으니 모진의 출판사업이 얼마나 성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모진이 출판한 서적은 지금까지 선본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 유명한 것으로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십칠사(十七史)》·《진체비서(津逮秘書)》·《육십종곡(六十種曲)》 등이 있다.
모진이 서적을 간각한 것은 판매를 위한 것이긴 하지만, 오로지 이윤만을 목적으로 하는 일반 서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다. 우선 그는 거금을 아까워하지 않고 송원(宋元) 판본을 사들였는데, 아예 자기 집 문 앞에 다음과 같은 방문(榜文)까지 붙여 둘 정도였다.

송판본을 가지고 오는 사람이 있으면, 이 집의 주인이 쪽으로 계산해 값을 쳐서 한 쪽당 이백을 낼 것입니다. 구초본(舊抄本)을 가져오는 사람에게는 한 쪽당 사십을 줄 것이며, 요즘의 선본을 가져오는 사람에게 다른 집에서라면 일천을 줄 것을 이 집 주인은 일천 이백을 줄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에 “삼백예순가지 장사 중에 모씨네에 책 파는 것 만한 게 없다네. (三百六十行生意, 不如鬻書于毛氏.)”라는 속언까지 있을 정도였다.

동패

동패(童佩)는 유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상인이었던 용유상인(龍遊商人)으로 아버지를 따라 오(吳)와 월(越) 사이를 왕래하면서, 서적장사를 하였다. 그는 시문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서화금석문(金石文)을 고증하는 데에도 뛰어났다. 그는 곤산(昆山)으로 가서 귀유광(歸有光)에게서 배움을 묻기도 하였으며, 당시의 명사인 왕세정(王世貞), 호응린(胡應麟), 치등(穉登) 등과 교유하였다. 그의 집에는 25,000권의 책들이 소장되어 있었는데, 그중에는 진귀하면서도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서적들이 아주 많았다. 호응린은 그의 장서 서목(書目)을 보고서 “전열된 경사자집의 서적은 모두 섬뜩하리만치 마음에 들어, 나로 하여금 손과 발을 움직이며 춤을 추게 할 정도였다”라고 극히 칭상하고 기린 바가 있다.


참고문헌

장미경, 명청대 강남지역의 출판문화: 출판의 주체를 중심으로, 한국중문학회, 중국문학연구 제35집: pp.103-129, 2007.
권호종 외, 명청상인의 장서문화, 한국중국학회, 중국학보 제60집: pp.73-93,2009.
황지영, 명말청초 과거수험용 서적의 상업출판과 전파, 연세대학교,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