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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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위치

No. 221, Section 1, Zhishan Rd, Shilin District, Taipei City, Taiwan 111

영업 및 휴무

주중 08:30-18:30 / 주말 08:30-21:00 / 연중무휴

전경

국립고궁박물관 전경.jpg 국립고궁박물관전경2.jpg

소개

대만의 국립고궁박물관은 대영박물관, 루브르박물관, 바티칸박물관, 에르미타주 박물관과 함께 세계 5대 박물관에 속한다. 중국 국민당장개석정부는 모택동공산당 정부에 패해 대만으로 쫓겨가면서도 가장 먼저 방대한 양의 중국 유물을 배에 실어 대만으로 가져왔고 국립고궁박물관의 유물들은 양이 너무 많아서 전부 전시되지 않고 상설전시관에 보관하고 있다. 일각에 따르면 고궁박물관 뒤쪽에 있는 산에 유물들을 보관하고 있다는 소문도 있지만, 대만정부가 유물 보관소의 소재를 극비로 부치고 있어 공식적인 정보는 아니다. 5천년 역사의 중국 보물과 미술품 약 70만점 이상을 보유하고 있으며 옥, 도자기, 회화, 청동의 보물들은 일전 기간씩 순환전시를 한다. 이 모든 작품들을 교체로 전시하려면 수십년이 걸린다고 한다.

설립배경

청말 고궁박물원 건립

본원의 소장품은 송, 원, 명, 청 네 왕조의 궁정 유물을 계승한 것이며, 박물원의 발전은 근대 중국역사의 변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1924년10월 하순, 직계(直系) 군벌의 장성인 펑위샹(馮玉祥,1882-1948)이 베이징정변을 발발하고 섭정내각 총리 황후(黃郛)가 11월4일, 내각회의에서〈청 황실 우대조건 수정안〉을 통과시키면서, 퇴위한 황제 푸이(溥儀, 1906-1967)에게 「당일부터 영원히 황제 존호를 폐지」할 것과 청 황실은 「즉시 자금성에서 나갈 것」을 요구하였다. 다음날 경기경위사령(京畿警衛司令) 루종린(鹿鍾麟,1884-1966)이 경찰총감(警察總監) 장비(張璧), 국민대표 이위잉(李煜瀛,1881-1973)과 함께 자금성 뒤쪽 침전으로 가서 선통(宣統)황제에게 존호를 폐하고 옥새와 궁전을 내놓고 황궁에서 떠날 것을 청하였다. 6일 국무원은 청 황실 사후처리 위원회를 조직하고 이위잉을 위원장으로 초대하여 청 황실의 일원들과 함께 청궁정의 물품을 조사하였다. 2015년4월12일, 청 황실 사후처리 위원회는 고궁을 한번 보고 싶어 하는 사회각층의 기대에 부응하여 특별히〈고궁참관 임시 규칙〉을 발표하고 어화원(御花園), 곤녕궁(坤寧宮), 교태전(交泰殿), 건청궁(乾清宮), 홍덕전(弘德殿), 소인전(昭仁殿), 남서방(南書房), 상서방(上書房) 등의 장소(즉 고궁의 중앙노선)를 개방하고,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오후 1-6시 사이에 관람객들이 관람할 수 있도록 하였다. 9월29일, 청 황실 사후 처리 위원회는 프랑스와 독일 등 각국 황실박물관의 선례에 비추어 고궁박물원을 세우고, 쌍십절 국경일 오후에 개막식을 거행했다.

1925년10월10일, 고궁박물원이 정식으로 문을 열고 5가지 관람노선이 새롭게 만들어져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되었으며, 과거 금지된 구역이던 황제 소유의 궁궐이 세상에 공개되어 국민들이 함께 공유하고 누릴 수 있도록 하였다. 고궁 건립 초기, 불안한 국내 정세와 빈번한 군벌정권의 교체로부터 그 영향을 받았다. 다행히 좡원콴(莊蘊寬,1866-1932), 쟝한(江瀚,1857-1935), 천위안(陳垣,1880-1971)등 문화계 인사들이 후원모임을 조직하여 각 계파의 군벌들과의 중재를 통해 북양정부가 박물원 업무에 관여하는 것을 막았고, 때문에 고궁박물원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발전을 지속할 수 있었다. 1928년6월 국민정부가 북벌에 성공하면서 고궁박물원을 접수하고 <고궁박물원조직법>을 선포하여 고궁이 국민정부 직속임을 명시하고 아울러 이페이지(易培基,1880-1937)를 원장에 임명했다. 이원장의 임기기간동안 조직구조, 유물보관, 소장품 정리 및 관사의 보수와 개축, 전시진열, 출판 등 각 방면에서 모두 장족의 발전이 이루어졌고 중국대륙시기 중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다.


항일 전쟁기간의 국보사수 여정

1931년, 일본 관동군이 9.18사변을 발발하고 동북지역을 침략하면서 베이징과 톈진(天津)의 정세가 매우 위급해졌다. 고궁은 만일에 대비하여 중요한 소장 유물을 선택하여 상자에 보관하고 피난을 위한 사전 준비를 시작했다. 1933년 초, 일본군이 산해관까지 접근해 오면서 베이징은 위기에 빠졌고 고궁이사회는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유물들을 남쪽 상하이로 옮겨가기로 결정했다. 2월6일부터 총 13,427상자와 64포대에 담긴 유물들을 다섯 무리로 나뉘어 이송을 시작했고, 5월23일 운반이 대부분 완료되었다. 유물진열소를 비롯하여 중앙연구원, 이화원(頤和園), 내정부(內政部), 국자감(國子監), 선농단(先農壇) 등의 유물도 함께 옮겨졌는데, 그 수량은 6,194상자와 8포대에 달한다. 이듬해 2월 국민정부는「국립 베이징 고궁박물원 임시조직 조례」를 공포하고 고궁과 그 이사회를 행정원 직속으로 개정했다. 5월 마헝(馬衡,1881-1955)이 원장 직에 임명되고 상하이에 보관된 유물과 베이징에 남겨진 유물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1935년 고궁은 초청에 응하여 상하이에 보관된 중요한 유물들로 영국 런던에서 열리는 「중국 예술 국제 전시회(International Exhibition of Chinese Art)」에 참가하여 열렬한 반응을 얻었다. 1936년12월 난징 차오톈궁(朝天宮) 고궁 분원의 보관 수장고가 완공되면서 남쪽으로 이송된 유물들이 상하이에서 남징으로 운반되어 수장고에 보관되었다.

1937년, 77노구교(蘆溝橋) 사변이 발발하고 남쪽으로 옮겨졌던 유물들을 다시 세 경로로 나누어 후방으로 이송했다. 첫 번째(남로) 유물은 총 80상자로, 베이징에서 시작하여 한코우(漢口), 우창(武昌), 창사(長沙), 구이린(桂林)을 거쳐 구이양(貴陽)에 도착한 후, 다시 쓰촨(四川)성 바셴(巴縣)으로 운반되었다. 두 번째(중로)는 9,331상자에 달하는데, 한코우, 이창(宜昌)을 거쳐 충칭(重慶)에 도착한 후, 다시 이빈(宜賓)을 거쳐 러산(樂山)에 도착했다. 세 번째(북로)는 모두 7,287상자로, 쉬저우(徐州), 정저우(鄭州), 시안(西安)과 바오지(寶雞) 그리고 한중(漢中)을 거쳐 청두(成都)에 도착한 후, 다시 어메이(峨嵋)로 운송되었다. 전쟁기간 동안, 비록 고궁의 업무는 보존과 보호가 중심이 됐지만, 몇몇 국내외 전시에도 참가하기도 했다. 1940년 초 고궁은 첫 번째(남로) 운반 유물 중에서 회화, 태피스트리, 옥기, 청동기 백 점을 선별하여, 소련의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개최된「중국예술전시회」에 참가했다. 1942년 연말, 고궁은 또 중앙도서관 충칭 분관에서 열린 제3회 전국미술전시회에도 참여했다. 1943년12월부터 1944년4월까지, 마헝 원장은 전시 민심의 사기진작을 위해 다시 첫 번째(남로) 운반 유물 중에서 서화명작을 엄선하여, 충칭 중앙도서관과 구이저우(貴州省)성립 예술관에서 「국립 베이징 고궁박물원 서화전시회」를 개최하였다.

전쟁승리 후, 고궁은 서쪽으로 옮겼던 유물들을 바셴, 어메이, 러산의 순서로 충칭으로 이송시켜 한 곳에 모아, 다시 수로를 따라 베이징으로 돌려보냈는데, 모든 귀송 업무는 1947년 연말에 마무리되었다. 이 기간 동안 고궁은 쓰촨성 주민들의 민족유물 보호를 위한 노력과 협조에 보답하기 위해, 특별히 러산 사무소 유물 중 역대 서화 명품을 골라 1946년 말 청두 중정공원(中正公園) 교육관을 빌려 전시를 열었고 이는 훗날「8년 항일 전쟁 이후, 문화사에 있어 성대한 행사」로 일컬어진다.

다른 한편, 중앙박물원 준비처도 항일전쟁 기간 동안 일본을 피해 서쪽 쓰촨 지역으로 옮겨갔다. 중앙박물원은 1933년 교육부 행정원의 승인을 거쳐 난징에 설립되었고, 중앙연구원 산하 역사어언연구소(歷史語言研究所) 소장 푸쓰녠(傅斯年,1896-1950)이 준비처 책임자로 임명했다. 중앙박물원의 소장품은 중앙 정치회의 제 377차 회의 의결내용에 따라 내정부 유물진열소 유물이 이관된 것이다. 1937년 연말, 중앙박물원 준비처는 명령에 따라 서쪽으로 이송되는데 두 번째로 운반된(중로) 고궁의 유물들과 함께 수로를 통해 한커우로 옮겨진다. 이듬해 초 다시 쓰촨으로 이송됨에 따라 사무소를 신스(新市)에 개설하고 또 충칭대학으로부터 땅을 빌려, 중앙연구원과 함께 사피바(沙坪壩)에 임시 소장고를 지었다. 1939년5월 준비처는 쿤밍(昆明)으로 이전하여 업무를 보는 것에 대한 허가를 받는다. 또, 고궁박물원의 두 번째로 서쪽으로 이송된 소장품들과 함께 다시 쓰촨성 러산으로 운반된다. 1940년 여름, 중앙박물원 준비처는 명령에 따라 다시 후방으로 철수하게 되었고, 중앙연구원 역사어언연구소 등의 기관과 함께 쓰촨성 난시(南溪) 리좡(李莊)으로 옮겨간다.

1945년8월, 일본이 모조건 항복을 선포하면서, 중앙박물관 준비처는 전시상황에서 해제되었다. 리좡과 러산에 보관되었던 유물들은 1947년12월까지 모두 다시 수도로 이송되었다. 이듬해 5월, 준비처의 인문관이 준공되고 이를 기념하여 특별히 고궁박물원과 함께 성대한 연합전시회를 개최했다.


국공내전 전세 역전 이후, 대만으로 이송 과정

1948년 가을, 국공내전의 전세가 역전되면서 11월10일 고궁의 상무이사 주쟈화(朱家驊,1893-1963), 왕스졔(王世杰,1891-1981), 푸쓰녠, 쉬홍바오(徐鴻寶,1881-1971), 리지(李濟,1896-1979), 항리우(杭立武,1903-1991)등은 웡원하오(翁文灝,1889-1971)이사장의 자택에 모여 회의를 열고 중요한 소장품을 선별하여 타이완으로 후송하는 것에 대해 논의했다. 또한, 주쟈화 선생은 중앙도서관 소장의 희귀본 도서들도 함께 옮길 것을 건의하였고, 푸쓰녠 선생은 중앙연구원 산하 역사어언연구소 고고학 관련 유물도 함께 타이완으로 옮겨오도록 했다. 12월초, 중앙박물원은 이사회 회의를 열고, 가장 중요한 소장품을 골라 대만으로 이송하도록 하는 한편, 그 나머지 소장품에 대해서도 교통편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운반해 오도록 하는 방안을 통과시켰다. 당일 고궁의 첫 번째 유물 320상자와 중앙박물원 준비처유물 212상자가 해군이 파견한 중딩룬(中鼎輪)에 실려 지룽(基隆)에 도착했다. 이 배에는 중앙연구원 역사어언연구소, 중앙도서관, 외교부의 유물과 도서, 조약문서를 포함한 총240상자도 함께 실려 운반되었다. 1949년1월6일, 두 번째 유물을 운반한 투자유치국의 하이후룬(海滬輪)이 닻을 올렸다. 고궁소장 유물 1,680상자, 중국박물원 준비처의 486상자 외에, 중앙연구원 역사어언연구소, 중앙도서관, 베이징도서관의 유물과 도서, 역대지도가 포함되어 그 수량이 1,336상자에 달한다. 30일 세 번째 유물 운반을 담당한 해군 쿤룬호(崑崙號) 운수함이 출항했는데 그 안에 고궁유물 972상자, 중앙박물원 준비처의 154상자, 중앙도서관의 122상자가 실렸다.

각 기관의 유물을 담은 상자들이 타이완에 도착한 후, 양메이(楊梅)에 보관된 중앙연구원 역사어언연구소의 유물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타이완 제당업 주식회사의 타이중(臺中) 설탕공장에 보관됐다. 1949년8월, 행정원은 전시상황에 응하여 특별히 고궁박물원, 중앙박물원 준비처, 중앙도서관 등 기관을 국립중앙 박물원과 도서관 연합 관리처(약칭 연관처)로 통합하고 교육부에서 총괄하였다. 1950년4월 연관처가 타이중 우펑(霧峰)의 베이거우(北溝)에 지은 유물수장고가 완공되고 타이완으로 옮겨온 유물 전부를 수장고에 보관하였다. 5월 행정원은 고궁박물원과 중앙박물원 준비처 이사회를 다시 조직하여 공동이사회를 만들고 두 이사회의 직권을 대리했다. 1953년3월, 4년에 걸친 타이완 이송 유물에 대한 조사가 완비된다. 비록 전쟁기간 동안 수로와 육로를 통해 유물들이 여러 곳을 거쳐 옮겨졌지만 손상을 입은 예는 극히 적었다. 1956년12월, 베이거우 전시실이 준공되고 다음해 3월에 대외 관람이 시행되었다. 또한 연관처에서는 출판을 통해 널리 알리기 위한 작업으로 각종 목록과 도록을 간행했는데, 이들 자료는 지금까지도 중국미술사 연구에 중요한 참고가 되고 있다.

1961년5월, 연관처는 미국의 초청으로「중국의 국보(Chinese Art Treasures)」라는 주제로 전시회를 개최하여 미국 각계로부터 격찬을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부는 베이거우가 외떨어진 곳에 위치하여 내외국인들의 관람에 어려움을 겪게되자, 타이베이 근교 와이솽시(外雙溪)에 새 박물관 건립 계획을 세우게 된다. 1965년8월, 박물관 신축 공사가 완공되고 행정원에서는 중앙박물원 준비처의 타이완 이전 유물들을 고궁박물원에 합병시키고 〈국립고궁박물원 관리위원회 임시조식 규정〉을 발표하여 관리위원회를 행정원에 예속시킨다. 당월, 제1회 관리위원회에서 왕윈우(王雲五,1888-1979)선생을 주임위원으로 선출하고, 다시 장푸총(蔣復璁,1898-1990)선생이 원장 직을 맡는 안을 통과시킨다. 11월12일 국립고궁박물원 타이베이 신관이 준공되어 문을 연 개막식 당일, 서예와 명화를 비롯하여 청동기, 직물과 자수, 자기 및 옥기, 완상품, 도서, 문헌 등 각종 유물들이 전시되었다. 총 1,573점의 유물이 6곳의 전시실과 8곳의 화랑에 배치되었고, 다음날부터 신관이 정식으로 대외 개방되었다.

유물과 관리

국립고궁박물원의 소장품은 중국 미술품이 주종을 이루며, 많은 명품을 소장하고 있기 때문에 고궁박물원은 “중화(中華) 문화의 보고” 라고 불린다.

유물을 대만으로 옮긴 이후 잠시 타이중(台中) 우펑(霧峰) 베이꼬우(北溝)에 1965년까지 보존했었다. 국립고궁박물원과 중앙박물원 주비처가 통합되면서 타이베이 스린(士林) 와이쐉시(外雙溪)에 위치한 신관이 개방되어 전시되었다. 두 기관이 타이완으로 옮겨온 유물은 원 고궁박물원 소장품인 기물 46,100점, 서화 5,526점, 도서문헌 545,797점과, 원 중앙박물원 소장품인 기물 11,047점, 서화 477점, 도서문헌 38점으로 총 608,985점에 달하여 그 수량만으로도 이는 가장 방대한 규모의 중화민족 문화자산이라 할 수 있다.

고궁박물원이 소장하고 있는 유물에는 위에서 언급한 두 기관의 유물 이외에도 그후 다른 기관에서 이관되어 온 것, 외부로부터 기증된 것과 매입한 것 등이 있다. 특히 기증받은 것과 사들인 것이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다.

박물원 유물이 타이완으로 옮겨지기 이전, 베이징 고궁과 중앙박물원에서는 이미 소장품을 늘려왔다. 1934년, 고궁박물원은 간수성(甘肅) 딩시현(定西縣) 청꼬우역(稱鉤驛)에서 출토한 전한과 후한시대를 잇는 신(新)나라 왕망(王莽)시대의 도량형인 권과 형 2점을 사들였고, 항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에는 꿔바오창(郭葆昌) 가족이 기증한 도자기, 독일인 Werner Jannings가 기증한 은과 주나라 시대의 청동기를 소장하게 되었다. 중앙박물원은 류씨선재(劉氏善齋) , 우씨쌍검이(于氏雙劍簃), 용씨송재(容氏頌齋)의 청동기 등을 각각 매입하였는데, 이 모두는 세계적으로도 이름 난 중요한 보물들에 속한다.

타이완에서 다시 박물원을 개관한 이후, 소장품을 보충하는 작업 또한 끊임없이 이루어져왔다. 1969년에 제정된 “국립고궁박물원 소장품 수집방법”이 실시되면서 소장품을 늘리는 작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민간에 대해 공적 및 사적인 기증을 유도하고, 유물 구입 예산을 편성하고, 외부로부터 기증을 받는 등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어 소장품 증대 목적을 달성하여 그 성과는 매우 컸다고 한다.


주요 소장 작품

취옥백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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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고궁박물관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윗부분이 녹색, 아랫부분이 하얀색인 하급 자연옥을 이용해 여치가 앉아있는 배추를 조각해낸 것으로, 번식력이 뛰어난 여치와 메뚜기는 자손번성을 기원하는 의미이다. 청 말기에 광서제의 왕비인 서비가 혼수로 궁중에 갖고온 예물이라는 설부터, 청나라 초에 명나라 출신의 조각가가 배추의 흰색부분은 명나라, 푸른 부분이 청나라를 상징하며 벌레가 배춧잎을 먹는 조각을 통해 반청복명을 기원했다는 설까지 다양한 설화를 갖고있다. 과거 삼성 회장이 이 작품을 구매하려 하자 박물관 측이 절대 팔지 못한다 하여, 얼마를 주면 팔겠냐 했더니 제주도 정도면 생각해보겠다 했다는 일화도 있다. 섬세한 조각이 탁월하게 아름다운 작품이며, 취옥백채 전시관은 입장객 수를 제한하고 있기 때문에 줄을 서서 기다려 봐야한다.

서태후 옥병풍

서태후 옥병풍.jpg 서태후 옥병풍2.jpg

서태후가 27년 섭정때 쓴 옥으로 만든 병풍이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가장 귀한 보물이다.


백자 어린이모양 베개

백자 어린이모양 베개.jpg

당나라 도자기로, 어린아이가 누워있는 모습의 베개이다. 베개의 주재료인 정요자기는 구울 때 숯을 연료로 가마 안의 산화염으로 인해 회색빛이 도는 노란색을 띄는 것이라고 한다.


육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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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겹살 모양의 자연 발생된 돌이다. 돼지껍데기와 살코기의 질감이 생생하다. 취옥백채 바로 뒤에 있다.


비슈 (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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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 옥을 깎아 만든 비슈는 사자의 몸통, 봉황의 날개, 용의 얼굴, 기린의 꼬리를 갖고 있는 상상 속의 동물이다. 전설에 따르면 아무곳에나 배설을 하고 다니다가 옥황상제에게 엉덩이를 맞고 항문이 없어졌다고 한다. 항문이 없어서 만물을 삼키고 배출하지 않는 능력을 갖고 있으니 재물을 모은다는 상징을 갖고 있다. 따라서 중화권의 사업가들이 비슈 조각을 집이나 사무실에 놓는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당삼채

당삼채.jpg

당삼채(唐三彩)란 중국 당대의 도기로 백색 바탕에 녹색, 갈색, 남색 등의 유약을 사용한 것을 말한다. 국립고궁박물관 2층의 당삼채 모음전에 볼거리가 풍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