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 불상
북위 초기 흉노족 혁련씨는 불학의 중심인 장안으로 쳐들어가 불상을 없애고 승려를 죽였지만 고승 구마라습의 제자 백각선사는 평성에 도착하여 위 무제의 예우를 받았다. 북위는 북량을 멸한(439) 후 수준 높은 기예를 갖추고 있는 양주 장인들을 평성으로 잡아오는 동시에 수많은 승려들을 포로로 잡아 왔기 때문에 평성은 북방의 정치, 문화 및 불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이로부터 금동 불상이 대량 제작되었다.
남방의 경우 동진은 이미 제왕들의 사치경쟁이 시작되었고 이런 시대적 풍조는 뛰어난 명사급 장인들의 경쟁 심리와 실력을 겨루게 만드는 외적 추동력이 되었다. 대규, 대옹 부자는 대표적으로 유명한 불상 제작 장인이다. 양식 면에서 남조 금동 불상은 여유 있는 넉넉한 천의(天衣)의 옷자락 속으로 날아갈 듯 준수한 자태가 돋보이게 하는 기법을 숭상하였다. 이는 남조에서 유행한 속되지 않게 아름다우며 청아한 수골청상(秀骨淸像) 인물의 전형이 불상 제작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남조의 불상 제작은 전반적으로 형체의 윤곽에서 전체적 통일성과 매우 풍부한 장식적 특징을 드러내며 이는 당시 경쟁적으로 사치와 낭비를 숭상했던 풍조에 부응한다.
남조와 북조를 불문하고 금동 조상의 규모는 모두 매우 웅대하고 예술적 기교 역시 날로 완벽해졌으며 이로부터 금동 조상은 완전히 중국화되었고 전성기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