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소군에 대한 역사
왕소군에 대한 역사
왕소군에 대한 가장 사실적인 텍스트는 가장 오래된 텍스트라는 점에서 ‘한서’라고 할 수 있다.
경녕(竟寧) 1년(33년) 선우는 다시 입조하였다. 예우와 [물품] 하사는 처음과 같았으나 의복과 비단, 명주솜을 더 주었는데, 모두 황룡 시기에 [추가로 사여한 양보다] 곱절이었다. 선우는 한 종실의 사위가 되어 자신이 [한의] 친족이 되길 원한다고 스스로 말하였다. 원제 때 이후 궁에 있던 양가자(良家子) 왕장(王牆), 자는 소군(昭君)을 선우에게 하사하였다. 선우가 매우 기뻐하였다. (한서-「흉노전」)
앞서 말했듯이 정말 간결하다. 텍스트의 주체는 원제, 선우 두 명으로 왕소군은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한다. (물론, 왕소군 그녀가 흉노로 감으로써 한과 흉노 사이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지만, 이것은 그녀가 주체적으로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뒤의 -『후한서』는 그 양상이 상이하다.
왕소군은 자가 장으로 남군사람이다 이전 원제의 치세(BC 43-33)에 양가자로 선발되어 액정으로 들여졌다 당시 호한야선우가 내조하자 황제는 조서를 내려서 궁녀 다섯 명을 그에게 하사하였다. 왕소군은 입궁한지 몇 년이 지났건만 황제를 보지 못하여 슬픔과 원망에 싸여 이에 액정령(직책)에게 흉노로 가고 싶다고 청구하였다. 호한야선우가 큰 연회에 참석하여 연회를 마치고 떠날 즈음 황제는 다섯 여인을 불러서 그에게 보여주었다. 왕소군은 풍려한 외모에다가 단장을 하고, 치장을 하니 한궁에서도 빛나게 돋보였고 그녀가 뒤돌아볼 때는 옷이 치렁치렁하게 돌아가는 광경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놀라서 움직일 정도였다. 황제가 그 모습을 보고서크게 놀라서 속으로는 그녀를 궁중에 남겨두고 싶었으나 신뢰를 잃을까 걱정하여 마침내 그녀를 흉노에게 주었다. (後漢書-「南匈奴列傳」)
반면, 『후한서』에는 왕소군이 주체가 되며, 그녀의 의지로 흉노에 간 것으로 제시된다. 이는 ‘양가자(良家子,’라는 어휘를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양가자’는 ‘청빈한 농민 집안의 자제’라는 뜻으로 왕소군이 평민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따라서 역사서인 『후한서』는 평민이라는 지위의 한계를 보여준다. 물론 여성의 지위는 높아졌으나, 아직도 왕소군이라는 여성이 한과 흉노 사이의 수단으로 쓰였다는 점에서 여성학적으로 높게 평가될 변화는 아니다. 그리고 따라서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한서』, 『후한서』 와 같은 문학 작품이 아닌 역사서들이 그 내용이 상이하다는 것이다. 『한서』가 후한 시대에 쓰였고, 『후한서』가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의 송(宋)에서 쓰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두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다소 차이가 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혹은 사(史)관의 개인적 의견 차이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왕소군에 대한 가장 사실적인 텍스트라 볼 수 있는 『한서』와 왕소군에 대한 대중적인 인식이 다른 것을 보면 사람들이 알고 있는 왕소군에 대한 이야기들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점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