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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田齊)는 전국시대인 기원전 386년에 제(齊)나라의 군주가 강(姜)씨에서 전(田)씨로 바뀌게 되었다. [[제]]나라는 [[강태공]]에 의해 세워진 후, [[강태공]]의 후손들이 [[제]]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강제(姜齊)]]라고 일컬었다. 하지만 [[전화]](田和)가 [[제강공]](齊康公)을 유폐시킨 후 [[주]]나라에 의해 [[제]]나라 제후로 정식으로 인정받아 [[강제(姜齊)]]의 명맥은 끊기게 되었다. 국호는 여전히 제(齊) 이지만 서주·춘추시대의 강씨 제와 구별하여 [[전제]](田齊)라고 부른다. | 전제(田齊)는 전국시대인 기원전 386년에 제(齊)나라의 군주가 강(姜)씨에서 전(田)씨로 바뀌게 되었다. [[제]]나라는 [[강태공]]에 의해 세워진 후, [[강태공]]의 후손들이 [[제]]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강제(姜齊)]]라고 일컬었다. 하지만 [[전화]](田和)가 [[제강공]](齊康公)을 유폐시킨 후 [[주]]나라에 의해 [[제]]나라 제후로 정식으로 인정받아 [[강제(姜齊)]]의 명맥은 끊기게 되었다. 국호는 여전히 제(齊) 이지만 서주·춘추시대의 강씨 제와 구별하여 [[전제]](田齊)라고 부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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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5세기 무렵 전걸(田乞), 전상(田常) 부자가 제(齊)나라의 실권을 잡고 B.C 391년 전화(田和)가 정권을 찬탈하여 제후로 인정을 받게되었다. 이후 전제(田齊)라 칭하였다. | 기원전 5세기 무렵 전걸(田乞), 전상(田常) 부자가 제(齊)나라의 실권을 잡고 B.C 391년 전화(田和)가 정권을 찬탈하여 제후로 인정을 받게되었다. 이후 전제(田齊)라 칭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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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나라에서 전(田)씨의 시초 : 공자 [[전경중|완]](完)==== | ||
+ | : [[춘추]] 시대 초기에 [[진]](陳)나라에서 공실의 내분이 일어나 공자 [[전경중|완]](完)이 제나라로 도망쳐왔다. [[제환공]]은 그를 받아들여 조정의 낮은 벼슬 자리를 주었다. 그가 곧 [[제]]나라에서 전(田)씨의 시초이다. 전씨와 [[제]]나라 공실의 유대는 점차 돈독해졌고 [[제환공]]의 총애를 얻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춘추]] 시대 말기에 이르자 전씨 가문은 점차 [[제]]나라의 신흥 세력으로 떠올랐다. 반면 [[제]]나라 공실은 귀족들간의 알력으로 쇠퇴하여 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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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제경공]](齊景公: 재위 기원전 547년~490년) 때 전(田)씨는 대부로 이미 상당한 역량을 갖춘 터였다. 신흥 세력의 대표인 [[전환자]](田桓子)는 공실에 맞설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제나라 공실은 많은 세금을 거두어 들여 점차 민심을 잃었다. [[전환자]]는 공실에서 떠난 민심을 자신에게 돌리기 위하여 머리를 썼다. 그 방법은 백성들에게 춘궁기에 대두(大斗)로 양식을 빌려주고 추수 후 소두(小斗)로 거두어 들인 것이다. 같은 한 말(斗)이지만 대두와 소두는 양에서 많은 차이가 난다. [[전환자]]의 민심 회유 방법은 실효를 거두었다. 많은 백성들이 공실의 착취를 기피하여 점차 전씨 가문에서 양곡을 빌렸다. 백성들의 [[전환자]]에 대한 신망은 점차 높아갔다. 상대적으로 공실의 신망은 허물어져 갔으며, 많은 백성이 공실을 버리고 전씨 가문에 귀의하였다. [[제]]나라 공실의 백성들은 전씨의 은민(隱民)으로 변했다. | ||
+ | ====전(田)씨와 [[제]]나라 공실 간의 3차례의 쟁투==== | ||
+ | : 상황이 이러하니 공실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제]]나라 공실의 구귀족들과 전씨 사이에 세 차례에 걸쳐 쟁투가 발생하였다. | ||
+ | =====첫번째 쟁투(기원전 532년 발생)===== | ||
+ | : [[전환자]]는 도음 주위에 사는 백성인 국인(國人)들을 동원하여 집정 귀족의 우두머리인 란(欒)씨와 고(高)씨를 압도하였고 이들을 국외로 추방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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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전환자]]의 아들 [[전걸]](田乞)이 주축이 되어 대부들을 규합하여 공실을 압박하였다. 공실의 잔류 귀족들은 또다시 패배하여 쫓겨나게 되었고 [[전걸]]는 제나라의 재상이 되어 정치, 군사 대권을 장악하였다. | ||
+ | =====세번째 쟁투(기원전 481년 발생)===== | ||
+ | : [[전걸]](田乞)의 아들인 [[전상]](田常)이 중심이 되어 [[제간공]](齊簡公)과 그를 따르는 대신들과 벌인 싸움이었다. 결국 [[제간공]]은 [[전상]]이 보낸 군대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 [[전상]]은 [[제간공]]의 동생을 군주에 앉혔는데 그가 [[제평공]](齊平公)이었다. [[전상]]은 재상을 맡아 국정을 주물렀다. 그리고 정치 개혁을 단행하고 형벌권을 장악하여 반대 세력을 모조리 몰아냈다. [[전상]]은 기원전 476년에 제나라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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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전양자가 죽고 그의 손자 [[전화]](田和)가 대를 이어 명목상의 군주에 불구하던 [[제강공]](齊康公)을 바닷가로 유폐시키고 [[제]]나라 군주에 올랐다. 기원전 392년의 일이었다. [[전화]]는 [[위문후]](魏文候)에게 청탁하여 삼진(三晉)의 선례에 따라 [[주]]나라 천자가 자기를 제후로 봉해주도록 부탁하였다. [[주안왕]](周安王)이 [[위문후]]의 요청을 받아 기원전 386년에 [[전화]]를 정식으로 [[제]]나라 제후에 봉하였다. 그가 [[전태공]](田太公)이다. [[제]]나라의 첫 군주인 [[강태공]]의 이름에 성만 바꾼 것이다. 이때부터 [[강제(姜齊)]] 시대는 막을 내리고 [[전제(田齊)]]시대가 열렸다. | ||
+ | <ref>박인수,『춘추 전국의 패자와 책사들』, 지음, 석필(2001), pp.195~pp.197</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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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ef>위키피디아, "전제 (전국)", 2017-02-14, <https://ko.wikipedia.org/wiki/%EC%A0%84%EC%A0%9C_(%EC%A0%84%EA%B5%AD)>, 2017-06-24</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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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25일 (일) 23:31 기준 최신판
목차
강제(姜齊)의 시대에서 전제(田齊)의 시대로
전제(田齊)는 전국시대인 기원전 386년에 제(齊)나라의 군주가 강(姜)씨에서 전(田)씨로 바뀌게 되었다. 제나라는 강태공에 의해 세워진 후, 강태공의 후손들이 제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강제(姜齊)라고 일컬었다. 하지만 전화(田和)가 제강공(齊康公)을 유폐시킨 후 주나라에 의해 제나라 제후로 정식으로 인정받아 강제(姜齊)의 명맥은 끊기게 되었다. 국호는 여전히 제(齊) 이지만 서주·춘추시대의 강씨 제와 구별하여 전제(田齊)라고 부른다.
전제(田齊)의 과정 개요
기원전 5세기 무렵 전걸(田乞), 전상(田常) 부자가 제(齊)나라의 실권을 잡고 B.C 391년 전화(田和)가 정권을 찬탈하여 제후로 인정을 받게되었다. 이후 전제(田齊)라 칭하였다.
전제(田齊)의 과정
제나라에서 전(田)씨의 시초 : 공자 완(完)
- 춘추 시대 초기에 진(陳)나라에서 공실의 내분이 일어나 공자 완(完)이 제나라로 도망쳐왔다. 제환공은 그를 받아들여 조정의 낮은 벼슬 자리를 주었다. 그가 곧 제나라에서 전(田)씨의 시초이다. 전씨와 제나라 공실의 유대는 점차 돈독해졌고 제환공의 총애를 얻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춘추 시대 말기에 이르자 전씨 가문은 점차 제나라의 신흥 세력으로 떠올랐다. 반면 제나라 공실은 귀족들간의 알력으로 쇠퇴하여 갔다.
전환자(田桓子)의 민심 공략
- 제경공(齊景公: 재위 기원전 547년~490년) 때 전(田)씨는 대부로 이미 상당한 역량을 갖춘 터였다. 신흥 세력의 대표인 전환자(田桓子)는 공실에 맞설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제나라 공실은 많은 세금을 거두어 들여 점차 민심을 잃었다. 전환자는 공실에서 떠난 민심을 자신에게 돌리기 위하여 머리를 썼다. 그 방법은 백성들에게 춘궁기에 대두(大斗)로 양식을 빌려주고 추수 후 소두(小斗)로 거두어 들인 것이다. 같은 한 말(斗)이지만 대두와 소두는 양에서 많은 차이가 난다. 전환자의 민심 회유 방법은 실효를 거두었다. 많은 백성들이 공실의 착취를 기피하여 점차 전씨 가문에서 양곡을 빌렸다. 백성들의 전환자에 대한 신망은 점차 높아갔다. 상대적으로 공실의 신망은 허물어져 갔으며, 많은 백성이 공실을 버리고 전씨 가문에 귀의하였다. 제나라 공실의 백성들은 전씨의 은민(隱民)으로 변했다.
전(田)씨와 제나라 공실 간의 3차례의 쟁투
- 상황이 이러하니 공실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제나라 공실의 구귀족들과 전씨 사이에 세 차례에 걸쳐 쟁투가 발생하였다.
첫번째 쟁투(기원전 532년 발생)
- 전환자는 도음 주위에 사는 백성인 국인(國人)들을 동원하여 집정 귀족의 우두머리인 란(欒)씨와 고(高)씨를 압도하였고 이들을 국외로 추방하였다.
두번째 쟁투(기원전 489년 발생)
- 전환자의 아들 전걸(田乞)이 주축이 되어 대부들을 규합하여 공실을 압박하였다. 공실의 잔류 귀족들은 또다시 패배하여 쫓겨나게 되었고 전걸는 제나라의 재상이 되어 정치, 군사 대권을 장악하였다.
세번째 쟁투(기원전 481년 발생)
- 전걸(田乞)의 아들인 전상(田常)이 중심이 되어 제간공(齊簡公)과 그를 따르는 대신들과 벌인 싸움이었다. 결국 제간공은 전상이 보낸 군대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 전상은 제간공의 동생을 군주에 앉혔는데 그가 제평공(齊平公)이었다. 전상은 재상을 맡아 국정을 주물렀다. 그리고 정치 개혁을 단행하고 형벌권을 장악하여 반대 세력을 모조리 몰아냈다. 전상은 기원전 476년에 제나라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 전상이 죽고 그의 아들 전반(田盤)이 대를 이으니 그가 바로 전양자(田襄子)이다.
전제(田齊)시대를 연 전반의 손자 전화(田和)
- 전양자가 죽고 그의 손자 전화(田和)가 대를 이어 명목상의 군주에 불구하던 제강공(齊康公)을 바닷가로 유폐시키고 제나라 군주에 올랐다. 기원전 392년의 일이었다. 전화는 위문후(魏文候)에게 청탁하여 삼진(三晉)의 선례에 따라 주나라 천자가 자기를 제후로 봉해주도록 부탁하였다. 주안왕(周安王)이 위문후의 요청을 받아 기원전 386년에 전화를 정식으로 제나라 제후에 봉하였다. 그가 전태공(田太公)이다. 제나라의 첫 군주인 강태공의 이름에 성만 바꾼 것이다. 이때부터 강제(姜齊) 시대는 막을 내리고 전제(田齊)시대가 열렸다.
역대 군주
대수 | 시호 | 휘 | 재위 | 비고 |
---|---|---|---|---|
경중(敬仲) | 완(完) | |||
맹이(孟夷) | 치(穉) | |||
맹장(孟莊) | 민(湣) | |||
문자(文子) | 수무(須無) | |||
환자(桓子) | 무우(無宇) | |||
희자(僖子) | 걸(乞) | |||
성자(成子) | 항(恒) | |||
양자(襄子) | 반(般) | |||
장자(莊子) | 백(白) | |||
도자(悼子) | 《죽서기년(竹書紀年)》에 보이며, 휘는 알려져 있지 않다. | |||
1 | 태공(太公) | 화(和) | 기원전 386년 ~ 기원전 385년 | 기원전 386년, 전제의 군주로 등극하였다. |
2 | 섬(剡) | 기원전 384년 ~ 기원전 375년 | 《죽서기년》에 보이며, 환공에게 시해된뒤 폐위되어 시호가 없다. | |
3 | 환공(桓公) | 오(午) | 기원전 374년 ~ 기원전 357년 | |
4 | 위왕(威王) | 인제(因齊) | 기원전 356년 ~ 기원전 320년 | |
5 | 선왕(宣王) | 벽강(辟彊) | 기원전 319년 ~ 기원전 301년 | |
6 | 민왕(湣王) | 지(地) | 기원전 300년 ~ 기원전 284년 | |
7 | 양왕(襄王) | 법장(法章) | 기원전 283년 ~ 기원전 265년 | |
8 | 건(建) | 기원전 264년 ~ 기원전 221년 | 진(秦)에게 멸망하여 시호가 없다. | |
담(儋) | 기원전 209년 ~ 기원전 208년 | |||
가(假) | 기원전 208년 | 제왕 건의 동생 | ||
시(市) | 기원전 208년 ~ 기원전 206년 | 전담의 아들 | ||
도(都) | 기원전 206년 기원전 205년 |
|||
영(榮) | 기원전 206년 ~ 기원전 205년 | 전담의 동생 | ||
광(廣) | 기원전 204년 | 전영의 아들 | ||
횡(橫) | 전담, 전영의 동생 |
Hao3aloha (토론) 2017년 6월 24일 (토) 19:06 (KST)
- ↑ 박인수,『춘추 전국의 패자와 책사들』, 지음, 석필(2001), pp.195~pp.197
- ↑ 위키피디아, "전제 (전국)", 2017-02-14, <https://ko.wikipedia.org/wiki/%EC%A0%84%EC%A0%9C_(%EC%A0%84%EA%B5%AD)>, 2017-0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