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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8일 (금) 04:26 판
진문공(晉文公) | |
---|---|
| |
본명 | 중이(重耳) |
출생 |
기원전 697년 |
사망 |
기원전 628년 |
목차
개요
진 문공(晉文公)은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22대 군주로 제 위왕 이후 두번째로 패업을 달성하게 된다. 성은 희(姬), 휘는 중이(重耳)이며 진헌공의 아들이다. 긴 망명생활동안 익힌 처세술과 뛰어난 리더쉽으로 진나라를 부강하고 안정적인 나라로 만들어냈다.
생애
여희의 난과 망명의 시작
그는 아버지인 진헌공과 대융 출신인 호희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태자는 제강의 아들 신생이었는데, 진헌공의 첩인 여희가 자신의 아들 해제를 태자로 삼기 위해 모략을 세운다. 여희는 신생이 제헌공을 독살하려 한 것처럼 위장하였고, 신생은 어쩔 수 없이 자살하게 된다. 이 사건 이후 중이와 동생 이오는 자신들도 위험에 처할 거라 생각해 근거지로 도주한다. 진헌공은 그 사실을 알고 두 아들에게 모반 의사가 있는 것으로 생각해 발제에게 중이를 공격하라 명령하였다. 중이는 호언의 조언에 따라 척나라로 도주하였고 이때 조최, 위주, 전힐, 개자추 등 충신들의 호위를 받으며 19년에 걸친 긴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망명 이후 진(晋)나라의 상황
진헌공의 죽음 이후 해제와 탁자가 왕위에 오르지만, 장자인 중이를 왕위에 올리려 했던 이극이 여희의 무리를 몰살시켰다. 이극은 중이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제안하지만 혼란스러운 시기에 왕위에 오르는 것을 거절하였고, 이에 기원전 651년 가을 이오가 제후국들의 인정 하에 왕으로 즉위해 진혜공이 되었다.
진목공이 이오를 왕으로 인정한 이유는 이오가 땅을 떼어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약속한 땅을 주지 않았고 진목공은 분노했지만 진(晋)나라를 공격하진 않았다. 이후 진(晋)나라가 흉년이 들자 진(秦)나라에 곡식을 베풀어 줄 것을 요구했다. 주변 신하들이 반대했지만 진목공은 “군주는 악하지만 백성들이야 무슨 죄가 있겠는가.”라고 말하며 곡식을 베풀어 주었다. 그러자 다음해에는 진(秦)나라에 흉년이 들어 진목공은 진혜공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하지만 혜공은 배은망덕하게도 이 틈을 타 군사를 모아 공격을 시도했다. 이 전투에서 결국 진(秦)나라가 승리를 거두고 진혜공은 포로로 잡히지만 이후 석방되었다.
진혜공이 사망한 이듬해 진혜공의 아들 어가 진회공으로 즉위했다. 그는 백부인 중이가 두려웠다. 이에 진나라 신하로서 중이를 따라 국외로 망명한 자들의 부모와 친척들 중 석 달 이내에 망명한 자들을 모두 소환해 기한 내에 돌아오지 많으면 일가족 전부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 하명했다. 호모 형제의 아버지인 호돌은 아들을 부르지 않았고, 진회공은 호돌을 목을 내리쳤다. 이 사건으로 진회공은 중이와 호모 형제의 복수의 대상이 된다.
기나긴 망명생활
중이는 진나라를 떠나 척 땅으로 망명한지 12년째가 되던 해에 제환공의 힘을 빌려 보위에 오를 생각으로 일행과 제나라로 떠난다. 그는 7년 동안 제나라에 머물면서 제환공의 죽음을 비롯해 여러 공자들이 보위를 놓고 혈투를 벌이는 것을 보았다. 조최 등 중이의 일행들은 국정이 어지러운 제나라를 떠날 것을 다짐한다. 하지만 중이는 부인 제강이 있는 제나라를 떠나고 싶지 않아했다. 제강은 중이에게 술상을 차려놓고 취하게 만들어 그를 수레에 태우게 한다. 밤길을 달린지 한참 되었을 때 중이가 술에서 깨어 대노하였지만, 결국 할 수 없이 송나라로 향했다. 전투에서 크게 패해 상황이 좋지 않던 송나라의 양공은 중이 일행에게 양식과 물품을 조달하였고, 며칠 후 초나라에 이르렀다. 초성왕은 군주를 대접하는 예로 중이를 대했다. 초성왕은 중이에게 귀국하게 되면 무엇으로 보답할 생각인지 물었다. 중이는 군주의 은덕으로 귀국한 후, 진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군주를 피해 3사 뒤로 물어날 것이며, 만일 퇴병하겠다는 군주의 명을 얻지 못한다면 직접 군주와 겨뤄보겠다 이야기 했다. 신하인 성득신이 초성왕에게 중이를 제거할 것을 간청하지만, 초성왕은 중이를 뛰어난 인재로 여겨 이를 거절했다. 중이 일행이 초나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진목공이 신하를 보내 그를 진나라로 데려왔다. 목공은 중이에게 회영을 부인으로 맞을 것을 권유했고, 그 둘은 혼인을 하게 되어 ‘진진지의(秦晉之誼)’를 맺게 되었다. 이해 9월, 호돌이 참형에 처해진 사실을 들은 호모 형제가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이를 들은 중이는 진목공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고, 때가 왔다고 느낀 진목공은 흔쾌히 병사를 내어주었다. 그는 오랜 망명생활 끝에 고향을 향해 전진하였다.
진문공 시대의 시작
기원전 636년 봄, 진목공의 도움으로 중이는 진나라에 도착한다. 이 소식을 들은 진회공은 도주하였고, 대부들은 중이를 영접하기 위해 곡옥 땅으로 달려왔다. 중이는 그날로 강도에 입성해 긴 망명생활을 접고 62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된다. 군주로서 일할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서둘러 국가 상황을 돌보기 시작했다. 먼저, 숨어있던 진회공을 처형해 호돌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한다. 그리고 그는 망명을 같이했던 사람들과 국내에서 내응한 사람들에 대한 논공행상을 한 뒤 나라를 안정시키는 데 온 정성을 기울였다. 인재들을 널리 구한 뒤 적소에 임용하였으며, 세금을 감경하였다. 또한 상거래를 편리하게 하고, 재정의 쓰임새를 줄였으며, 전량을 풍부히 비축했다. 진문공은 오랜 망명생활로 인해 백성들의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일련의 개혁 조치로 진나라의 피폐한 기풍을 완전히 새롭게 바꿔놓았다.
춘추전국의 제2의 패자에 등극하다
진문공이 패업을 달성하는 데 마지막까지 걸림돌이 된 것은 남방의 강국 초나라였다. 초나라는 계속해서 중원의 정치판도에 간섭하고자 하였다. 이리하여 기원전 632년, 진과 초 사이에 '성복 전투'가 일어났다. 이때 일찍이 초나라 성왕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문공은 진나라 군대를 전장에서 3사 퇴보시켜 진을 치고 있다가 대결하여 개전한지 6일만에 초군을 격퇴시켰다. 이 약속을 지킴으로서 패할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무력이 아닌 인의(仁義)를 실천해 사람들의 마음을 얻게 된다. 주양왕은 진나라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친히 정나라의 형웅까지 순시를 나왔고, 그를 맞기 위해 진문공은 천토에 행궁을 짓고 회맹을 소집하니 이것이 유명한 '천토회맹'이다. 제나라 환공의 규구회맹 이래 가장 성대한 것이었으며, 이때 주왕은 진문공에게 후백의 칭호를 내렸다. 후백이란 제후들 중의 영수를 가리키는데 이는 진문공이 명실공히 중원의 패자가 되었음을 뜻한다.
9년 동안의 짧은 재위기간에도 불구하고 천하를 호령한 진문공은 기원전 628년 겨울, 69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평가
진문공은 대기만성형의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진문공을 좋아하는 이유는 인내하며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군자였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물러남'으로 '나아감'을 대신하는 처세 방식을 대단히 중시한다. 조건이 갖춰지지 않았을 때 무리하게 일을 추진하면 고생만 자처하게 된다. 만일 사실을 받아들이고 전략적으로 양보하고 휴식을 취하며 다시 힘을 축적하면 더 좋은 효과를 볼 수 있다. 진문공은 망명 생활 동안 시기를 엿보며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이극의 왕위에 올라줄 것을 요청했지만 이를 거절했고, 성복의 전투에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약속을 지키며 후퇴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모든 건 '극복'과 '나아감'을 위한 것으로 승리를 이끈 현명한 방법이었다. 그는 '부드러움'과 '물러남'을 통해 춘추오패의 자리에 등극할 수 있었으며, 그가 이룬 위업 때문에 진나라의 판도는 전국 시대 말 진시황에 의해 망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 진문공의 패업은 당연했다. 임기응변의 권모술수도 알고, 만대에 이득이 되는 방략까지 알았기 때문이다
” — 『한비자』,공자
참고목록
name= 춘추오패(春秋五霸) | title= 春秋五霸 |
관련 설화
* 한식의 기원
진문공은 왕위에 오르자 오랫동안 자신을 따르며 고생한 신복들에게 포상을 했다. 특히 개자추는 중이가 굶주리고 있을 때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국을 끓여 중이에게 바친 충신이었다. 진문공은 개자추에게 포상하려 했지만 그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개자추는 주문공을 보좌한 것은 그것이 도리이기 때문이지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함이 아니었다 여겨 진문공이 즉위한 후 바로 산속으로 들어가 어머니와 은거하였기 때문이다. 진문공은 개자추가 산에서 은거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를 찾을 수 있는 묘책을 생각해냈다. 면산에 불을 지르면 효심이 지극한 개자추가 어머니를 업고 내려올 것이라 여겨 군사들에게 불을 지르게 한 것이다. 엄청난 불길이 면산을 휘덮었지만 끝내 개자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몇일 후 버드나무 아래에서 어머니와 까맣게 탄 그의 시신을 발견한다. 개자추의 시신을 본 진문공은 통곡을 하며 울었다. 그는 개자추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면산을 개산이라 칭하고, 그가 죽은 3월 초닷새에 불에 타죽은 개자추를 추모하는 뜻에서 불을 피우지 않고 찬 음식을 먹었다. 이러한 이유로 한식이 생겨나게 됐다.
참고문헌
신동준 《춘추전국의 영웅들 1. 패도로 난세를 평정하다》, 한길사, 2011
이수광 《중국을 뒤흔든 27인의 지략가》, 미루북스, 2011
박인수 《춘추전국의 패자와 책사들》, 석필, 2001
박인수 《제왕과 책사 : 천하를 얻는 용인과 지략의 인간학》, 렁청진,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