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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비자는 전국 시대 말기에 활약한 법가 사상가이다. 그는 현실적이고도 엄격한 법률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사상을 펼쳤다. 그의 정치이론은 진(秦)나라와 한(漢)나라가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 한비자는 한나라의 왕족으로 태어났으며 | + | 한비자는 전국 시대 말기에 활약한 법가 사상가이다. 그는 현실적이고도 엄격한 법률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사상을 펼쳤다. 그의 정치이론은 진(秦)나라와 한(漢)나라가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 한비자는 한나라의 왕족으로 태어났으며 [[순자]]에게 배웠다. 그는 한나라에서 왕에게 자주 충언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비자는 그의 능력을 진(秦)나라의 [[진시황|정(政)]]에게 인정받아 진나라로 초대받았으나 [[이사]](李斯)에게 시기로 음모를 받아 죽게된다. |
==일생== | ==일생== | ||
+ | 한비(기원전 약 280년 - 233년)는 전국시대 한나라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출생 연대는 불분명하며, 청년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그는 유년시절을 옛 정나라의 수도에서 보냈다. 그는 정나라에서의 경험을 『한비자』에 담기도 한다. 정나라 사람들은 논쟁을 즐겨 이를 이론화하고 따라서 현실을 망각하기 일쑤였는데, 어렸을 때를 정나라에서 보냈던 한비 또한 정나라 사람의 기질을 물려받는다. <br /> | ||
+ | 가이즈카 시게키는 논쟁을 즐겼던 한비가 법률 지상주의 정치학에 이끌렸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고 언급한다. <br /> | ||
+ | 한비는 순자에게서 사서육경을 배웠으며, 스승인 [[순자]]의 성악설에 빠져들게 된다. 그는 순자의 영향을 받아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는 당시 사회와 완벽히 반대되는 주장이었고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짐작한 그는 속세를 떠나 산으로 들어간다. 진왕 영정([[진시황]])은 한비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노력하며 한을 침공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그러나 한비는 순자의 제자로서 함께 공부했던 이사의 모략으로 감옥에 갇히고 49세에 자살로 삶을 끝낸다. | ||
− | == | + | ==진나라와 한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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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시 국제정세=== | ||
+ | 한비의 정치사상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당시 한나라 주변의 국제정세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전국]]시대 말기에는 서쪽의 [[진나라]]와 북쪽의 [[조나라]]가 대립하였고, 그후에 두 국가의 장평결전에서 조나라가 패배하고 진시황이 천하 통일을 하게 된다. 당시 진나라의 파죽지세에 이웃나라인 한나라는 자연스레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이웃나라였던 위나라는 진나라의 속국이 되는 협약을 체결하게 된다. 한나라와 진나라는 국교를 체결하는데, 당시 한나라 사람들은 진나라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한비자』 제2편 「존한」에서는 한나라를 "진나라에 예속되어 조세를 납부하고 노역에 복무하기로는 어느 군현을 가릴 것이 없는 데다가, 진나라의 앞잡이가 되어 천하의 원한을 사고, 그 단물은 전부 진나라에 빨려 들어간다"라고 묘사한다. 하지만 이러한 한나라 백성들의 개인적인 감정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는 소국이었기에 진나라의 보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보호를 넘은 예속은 진나라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한비는 이러한 상황에서 한나라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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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시황과 한비=== | ||
+ | 진시황이 한나라를 공격하자 한왕은 급히 한비를 진나라에 파견한다. 진시황의 목적은 그가 즐겨읽은 책의 저자인 한비를 데려오기 위함이었다. 한비는 진나라에 도착한 후 자국인 한나라를 보호하기 위한 상소문을 올렸다. 그는 진나라가 조나라가 아닌 한나라를 침공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이사는 '사실 한비는 어떤 결과가 나와도 상관없다'는 이기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다며 반박한다. 진시황은 이사의 말을 믿었고 이로 인해 한비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된다. 따라서 진시황은 한비가 아닌 이사를 한나라에 파견하게 된다. 그러나 한나라에서는 이사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에 이사는 한왕을 직접 만나볼 수 없었다. 따라서 상소문을 올려 진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여 평화를 유지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한비와 이사 모두 진시황에게 의견을 피력했으나 한비가 진시황의 신뢰를 잃음으로 인해 이사의 정책이 채택되었다는 것이다. | ||
+ | <br>이사는 진시황이 한비를 계속 진나라에 머물게 할 경우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며 한비를 모함했다. 이에 진시황은 한비를 감옥에 가두고 심문하였다. 한비는 진시황을 만나 자신이 무죄임을 밝히고자 했으나 일이 잘 풀리지 않았고 결국 그는 독약을 마시고 자살한다. | ||
+ | <br>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사마천]]은 한비를 비운적인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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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본 사상== | ||
===인성론=== | ===인성론=== | ||
− | 한비자는 순자에게 배웠기에 순자와 마찬가지로 성악설을 주장한다. 하지만 순자의 성악설과는 다른 점이 있다. | + | 한비자는 순자에게 배웠기에 순자와 마찬가지로 성악설을 주장한다. 하지만 순자의 성악설과는 다른 점이 있다. 순자는 인간은 악하나 예에 의한 교정으로 착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악은 선으로 개조시킬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반면에, 한비는 인성은 이익을 좋아하지만 변화할 수 없으며 이익에 대한 선호는 인간의 본능과 관련된 것이라 보았다. 한비의 성악설에서는 '성'과 '심' 모두 이익을 추구하고 이 둘은 결합한다. 따라서 이러한 점에서 순자의 인성론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더불어, 한비는 인간을 법과 술에 의해 다스려야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본래 모두 이해 타산적이며 악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해관계에 따라서만 행동한다. 도덕적 규범에 따를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강력하고 단호한 체계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강력하고 단호한 체계가 바로 법과 술이다. 한비에 따르면 악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고려하는 인간들이 모여서 하는 정치는 각자의 이익을 나열하는데 있다. 그의 인성론에는 부자유친, 군신유의 등이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이해타산적인 개인만 존재할 뿐이다. 그의 정치철학은 인간을 비판적이고 냉소적으로 바라본다고 할 수 있다. |
===역사관=== | ===역사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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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관=== | ===사회관=== | ||
+ | 한비는 유가에서의 윤리를 부정적으로 보았고, 그는 자신의 생각을 국가 간의 관계에 투영시켰다. 그는 당시 사회 혼란을 초래한 원인으로 정전제에서 사전제로의 변화로 인한 경대부들의 몰락과 상호 쟁탈을 꼽았다. 그의 인성관에서 보았듯, 사람들이 상호 쟁탈하는 원인은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인간의 이기심 때문이다. 인간들이 상호 쟁탈하게끔 내버려두면 사회는 혼란의 도가니로 빠지기 십상이다. 따라서 이 쟁탈을 중간에서 조정할 중재자가 필요하다. 한비는 '법'이 상호 쟁탈의 중재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리에 반대되는 것이 공리이고, 공리를 대표하는 것이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비는 사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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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 사상== | ||
+ | ===국가관과 군주관=== | ||
+ | 한비는 상고시대 이후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재화가 부족해지면서 분쟁과 쟁탈, 전쟁이 증가했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강력한 힘을 가진 국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군주는 타국가에게 굴복하지 않을 군사력, 경제력과 국내적으로 안정된 통치를 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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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주는 나라가 작을 경우 큰 나라를 섬기고 병력이 약할 때는 강한 군대를 두려워한다. 소국은 대국이 요구하는 것을 반드시 들어주게 되며 강한 군대가 밀어 붙이면 약한 군대는 반드시 굴복하게 되어있다." -『韓非子』 「八姦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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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가와 군주는 사회질서와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강력한 힘을 가져야 한다. 강력한 군주가 생겨남에 따라 새로운 통치방법이 필요해졌고 따라서 한비는 법, 술, 세를 주장하게 된다. | ||
+ | |||
+ | ===법(法)=== | ||
+ | 한비의 법사상은 3가지의 특성을 갖는다. 법은 통치의 객관적 기준이며, 소수가 아닌 만인을 위한 통치수단이며, 평등성과 보편성을 가진다. 한비에게 법이 제정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의 인성론과 연결된다. 즉, 인간의 인성은 악하고 인간의 도덕성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법이 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그는 법 제정의 목적은 부국강병과 백성들의 안정된 생활이라 하였다. 또한 그는 사회는 계속 변화하기 때문에 시대에 맞는 법이 시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한비는 법은 3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먼저, 법은 성문화하여 모든 백성에게 공포해야 한다. 다음으로, 법은 절대규범이며 신분의 높낮이에 관계없이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법은 합리적으로 절대적으로 시행되어야 한다. | ||
+ | |||
+ | ===술(術)=== | ||
+ | '술'에 관한 이론은 신불해가 먼저 주장했으나 한비는 술에 관한 이론을 사상적, 그리고 이론적으로 완성시켰다. 한비는 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렸다. | ||
− | + | ::"술은 가슴속에 숨겨두고 있다가 여러 가지 일의 발단에 맞추어 슬며시 여러 신하들을 제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은 드러날수록 좋고 술은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까닭에 현명한 군주가 법을 말하면 나라 안 미천한 자까지 들어서 알지 못함이 없으니 오로지 집안에 가득 찰 일 만은 아니다. 술을 쓴다면 가까이에서 사랑하는 친숙한 이들도 들어 볼 수 없으니 방안이라 해도 가득 찰 수 없다." -『韓非子』「難三8」 | |
− | + | 한비의 사상에서 술의 의미는 통치의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술이 중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아무리 현명한 군주이고, 그가 법과 세를 모두 갖추었다고 해도 그것을 이행할 기술이 없다면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그의 술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하를 다스리는 기술이다. 신하를 다스리는 것과 더불어, 간사한 신하를 경계하는 기술 또한 중시되었다. 그 외에 군주의 통치술, 사람들의 말을 듣는 기술 등이 있다. | |
+ | ===세(勢)=== | ||
+ | 한비가 '세' 사상을 정립하는데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신도'라는 전국시대 조나라 사람이었다. 한비와 신도 둘다 세를 권력 또는 권세로 정의하였다는 것에서 둘의 공통점이 드러난다. 한비에게 세는 다음과 같다. 세는 높은 자리에서 가지게 되는 통제력이고, 포악함을 막을 수 있는 위력이며, 신하를 통제하기 위해 군주가 쥐고 있는 2개의 칼자루와 같으며, 우환을 제거할 수 있는 도구가 된다.<br /> | ||
+ | 한비는 자연적인 세와 인위적인 세를 구분하였다. 그는 자연적 세만으로 국가를 통치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고 여겼고, 따라서 법술과 권력을 더한 인위적 세를 주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더불어, 그는 세가 4가지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세는 군주의 지위를 지켜주며, 군주의 근본적 힘이 되며, 법과 군주의 명령이 실행되도록 하며, 나라를 다스리는 힘이 된다. 결론적으로, 세는 앞서 다룬 법과 술이 잘 시행되도록 일조하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 ||
==참고문헌== | ==참고문헌== | ||
− | + | 가이즈카 시게키, <<한비자 교양 강의>>, 이목 역, 돌베개, 2012 | |
+ | <br>고재욱, 「한비자의 정치사상 연구」, 인문과학연구, 12, 2004. | ||
+ | <br>위키피디아 '한비' | ||
<br>임건순, <<제자백가 공동체를 말하다>>, 서해문집, 2014 ISBN 978-89-74836-80-1 | <br>임건순, <<제자백가 공동체를 말하다>>, 서해문집, 2014 ISBN 978-89-74836-80-1 | ||
[[분류:인물]] | [[분류:인물]] | ||
+ | <br>종청한, <<50인으로 읽는 중국사상>>, 임태홍 역, 무우수, 2007 ISBN 978-89-91334-12-0 |
2018년 6월 27일 (수) 18:31 기준 최신판
한비자 | |
---|---|
| |
출생 |
약 B.C 280 |
사망 |
B.C 233 |
관련 활동 | 법가 |
한비자는 전국 시대 말기에 활약한 법가 사상가이다. 그는 현실적이고도 엄격한 법률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사상을 펼쳤다. 그의 정치이론은 진(秦)나라와 한(漢)나라가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 한비자는 한나라의 왕족으로 태어났으며 순자에게 배웠다. 그는 한나라에서 왕에게 자주 충언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비자는 그의 능력을 진(秦)나라의 정(政)에게 인정받아 진나라로 초대받았으나 이사(李斯)에게 시기로 음모를 받아 죽게된다.
목차
일생
한비(기원전 약 280년 - 233년)는 전국시대 한나라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출생 연대는 불분명하며, 청년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그는 유년시절을 옛 정나라의 수도에서 보냈다. 그는 정나라에서의 경험을 『한비자』에 담기도 한다. 정나라 사람들은 논쟁을 즐겨 이를 이론화하고 따라서 현실을 망각하기 일쑤였는데, 어렸을 때를 정나라에서 보냈던 한비 또한 정나라 사람의 기질을 물려받는다.
가이즈카 시게키는 논쟁을 즐겼던 한비가 법률 지상주의 정치학에 이끌렸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고 언급한다.
한비는 순자에게서 사서육경을 배웠으며, 스승인 순자의 성악설에 빠져들게 된다. 그는 순자의 영향을 받아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는 당시 사회와 완벽히 반대되는 주장이었고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짐작한 그는 속세를 떠나 산으로 들어간다. 진왕 영정(진시황)은 한비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노력하며 한을 침공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그러나 한비는 순자의 제자로서 함께 공부했던 이사의 모략으로 감옥에 갇히고 49세에 자살로 삶을 끝낸다.
진나라와 한비
당시 국제정세
한비의 정치사상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당시 한나라 주변의 국제정세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전국시대 말기에는 서쪽의 진나라와 북쪽의 조나라가 대립하였고, 그후에 두 국가의 장평결전에서 조나라가 패배하고 진시황이 천하 통일을 하게 된다. 당시 진나라의 파죽지세에 이웃나라인 한나라는 자연스레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이웃나라였던 위나라는 진나라의 속국이 되는 협약을 체결하게 된다. 한나라와 진나라는 국교를 체결하는데, 당시 한나라 사람들은 진나라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한비자』 제2편 「존한」에서는 한나라를 "진나라에 예속되어 조세를 납부하고 노역에 복무하기로는 어느 군현을 가릴 것이 없는 데다가, 진나라의 앞잡이가 되어 천하의 원한을 사고, 그 단물은 전부 진나라에 빨려 들어간다"라고 묘사한다. 하지만 이러한 한나라 백성들의 개인적인 감정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는 소국이었기에 진나라의 보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보호를 넘은 예속은 진나라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한비는 이러한 상황에서 한나라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진시황과 한비
진시황이 한나라를 공격하자 한왕은 급히 한비를 진나라에 파견한다. 진시황의 목적은 그가 즐겨읽은 책의 저자인 한비를 데려오기 위함이었다. 한비는 진나라에 도착한 후 자국인 한나라를 보호하기 위한 상소문을 올렸다. 그는 진나라가 조나라가 아닌 한나라를 침공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이사는 '사실 한비는 어떤 결과가 나와도 상관없다'는 이기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다며 반박한다. 진시황은 이사의 말을 믿었고 이로 인해 한비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된다. 따라서 진시황은 한비가 아닌 이사를 한나라에 파견하게 된다. 그러나 한나라에서는 이사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에 이사는 한왕을 직접 만나볼 수 없었다. 따라서 상소문을 올려 진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여 평화를 유지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한비와 이사 모두 진시황에게 의견을 피력했으나 한비가 진시황의 신뢰를 잃음으로 인해 이사의 정책이 채택되었다는 것이다.
이사는 진시황이 한비를 계속 진나라에 머물게 할 경우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며 한비를 모함했다. 이에 진시황은 한비를 감옥에 가두고 심문하였다. 한비는 진시황을 만나 자신이 무죄임을 밝히고자 했으나 일이 잘 풀리지 않았고 결국 그는 독약을 마시고 자살한다.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사마천은 한비를 비운적인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기본 사상
인성론
한비자는 순자에게 배웠기에 순자와 마찬가지로 성악설을 주장한다. 하지만 순자의 성악설과는 다른 점이 있다. 순자는 인간은 악하나 예에 의한 교정으로 착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악은 선으로 개조시킬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반면에, 한비는 인성은 이익을 좋아하지만 변화할 수 없으며 이익에 대한 선호는 인간의 본능과 관련된 것이라 보았다. 한비의 성악설에서는 '성'과 '심' 모두 이익을 추구하고 이 둘은 결합한다. 따라서 이러한 점에서 순자의 인성론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더불어, 한비는 인간을 법과 술에 의해 다스려야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본래 모두 이해 타산적이며 악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해관계에 따라서만 행동한다. 도덕적 규범에 따를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강력하고 단호한 체계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강력하고 단호한 체계가 바로 법과 술이다. 한비에 따르면 악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고려하는 인간들이 모여서 하는 정치는 각자의 이익을 나열하는데 있다. 그의 인성론에는 부자유친, 군신유의 등이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이해타산적인 개인만 존재할 뿐이다. 그의 정치철학은 인간을 비판적이고 냉소적으로 바라본다고 할 수 있다.
역사관
한비는 변혁을 통해 과거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복고주의를 반대했다. 그는 생산 발전과 인구 증가에 따라 인간의 관계가 변모한다고 여겼다. 그런데 극단적 성악설을 주장하는 한비는 인간의 쟁탈심리를 본능적인 욕구에서 찾지 않았다. 그는 경제적 요인, 인구의 증가 등에서도 그 요인을 찾았다. 또한, 한비는 역사가 흐르고 시대가 변화하면서 그에 맞추어 정치 역시 변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당시 사회의 개혁에 큰 바탕이 되었다.
사회관
한비는 유가에서의 윤리를 부정적으로 보았고, 그는 자신의 생각을 국가 간의 관계에 투영시켰다. 그는 당시 사회 혼란을 초래한 원인으로 정전제에서 사전제로의 변화로 인한 경대부들의 몰락과 상호 쟁탈을 꼽았다. 그의 인성관에서 보았듯, 사람들이 상호 쟁탈하는 원인은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인간의 이기심 때문이다. 인간들이 상호 쟁탈하게끔 내버려두면 사회는 혼란의 도가니로 빠지기 십상이다. 따라서 이 쟁탈을 중간에서 조정할 중재자가 필요하다. 한비는 '법'이 상호 쟁탈의 중재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리에 반대되는 것이 공리이고, 공리를 대표하는 것이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비는 사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정치 사상
국가관과 군주관
한비는 상고시대 이후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재화가 부족해지면서 분쟁과 쟁탈, 전쟁이 증가했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강력한 힘을 가진 국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군주는 타국가에게 굴복하지 않을 군사력, 경제력과 국내적으로 안정된 통치를 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 "군주는 나라가 작을 경우 큰 나라를 섬기고 병력이 약할 때는 강한 군대를 두려워한다. 소국은 대국이 요구하는 것을 반드시 들어주게 되며 강한 군대가 밀어 붙이면 약한 군대는 반드시 굴복하게 되어있다." -『韓非子』 「八姦3」
국가와 군주는 사회질서와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강력한 힘을 가져야 한다. 강력한 군주가 생겨남에 따라 새로운 통치방법이 필요해졌고 따라서 한비는 법, 술, 세를 주장하게 된다.
법(法)
한비의 법사상은 3가지의 특성을 갖는다. 법은 통치의 객관적 기준이며, 소수가 아닌 만인을 위한 통치수단이며, 평등성과 보편성을 가진다. 한비에게 법이 제정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의 인성론과 연결된다. 즉, 인간의 인성은 악하고 인간의 도덕성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법이 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그는 법 제정의 목적은 부국강병과 백성들의 안정된 생활이라 하였다. 또한 그는 사회는 계속 변화하기 때문에 시대에 맞는 법이 시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한비는 법은 3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먼저, 법은 성문화하여 모든 백성에게 공포해야 한다. 다음으로, 법은 절대규범이며 신분의 높낮이에 관계없이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법은 합리적으로 절대적으로 시행되어야 한다.
술(術)
'술'에 관한 이론은 신불해가 먼저 주장했으나 한비는 술에 관한 이론을 사상적, 그리고 이론적으로 완성시켰다. 한비는 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렸다.
- "술은 가슴속에 숨겨두고 있다가 여러 가지 일의 발단에 맞추어 슬며시 여러 신하들을 제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은 드러날수록 좋고 술은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까닭에 현명한 군주가 법을 말하면 나라 안 미천한 자까지 들어서 알지 못함이 없으니 오로지 집안에 가득 찰 일 만은 아니다. 술을 쓴다면 가까이에서 사랑하는 친숙한 이들도 들어 볼 수 없으니 방안이라 해도 가득 찰 수 없다." -『韓非子』「難三8」
한비의 사상에서 술의 의미는 통치의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술이 중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아무리 현명한 군주이고, 그가 법과 세를 모두 갖추었다고 해도 그것을 이행할 기술이 없다면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그의 술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하를 다스리는 기술이다. 신하를 다스리는 것과 더불어, 간사한 신하를 경계하는 기술 또한 중시되었다. 그 외에 군주의 통치술, 사람들의 말을 듣는 기술 등이 있다.
세(勢)
한비가 '세' 사상을 정립하는데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신도'라는 전국시대 조나라 사람이었다. 한비와 신도 둘다 세를 권력 또는 권세로 정의하였다는 것에서 둘의 공통점이 드러난다. 한비에게 세는 다음과 같다. 세는 높은 자리에서 가지게 되는 통제력이고, 포악함을 막을 수 있는 위력이며, 신하를 통제하기 위해 군주가 쥐고 있는 2개의 칼자루와 같으며, 우환을 제거할 수 있는 도구가 된다.
한비는 자연적인 세와 인위적인 세를 구분하였다. 그는 자연적 세만으로 국가를 통치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고 여겼고, 따라서 법술과 권력을 더한 인위적 세를 주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더불어, 그는 세가 4가지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세는 군주의 지위를 지켜주며, 군주의 근본적 힘이 되며, 법과 군주의 명령이 실행되도록 하며, 나라를 다스리는 힘이 된다. 결론적으로, 세는 앞서 다룬 법과 술이 잘 시행되도록 일조하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가이즈카 시게키, <<한비자 교양 강의>>, 이목 역, 돌베개, 2012
고재욱, 「한비자의 정치사상 연구」, 인문과학연구, 12, 2004.
위키피디아 '한비'
임건순, <<제자백가 공동체를 말하다>>, 서해문집, 2014 ISBN 978-89-74836-80-1
종청한, <<50인으로 읽는 중국사상>>, 임태홍 역, 무우수, 2007 ISBN 978-89-91334-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