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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요== | ||
+ | '''장의('''張儀)는 위(魏)나라 사람으로 일찍이 [[소진]]과 함께 귀곡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유세술(합종술과 연횡술)을 배웠는데, 소진은 스스로 장의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장의(張儀)는 [[전국]]시대에 활동한 사상가이며 전국 6국이 진과 화친하여 공존을 꾀한 연횡책을 주장했다. 출생년도는 알려지 있지 않으며 기원전 309년 즉 진(秦)나라 무왕(武王) 2년에 위나라에서 재상이 된지 1년만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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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횡책(連橫策)== | ||
+ | [[연횡책]]은 [[전국]]시대 말기 秦이 나머지 六國을 통일하기까지의 과정에서 나온 외교적 술수들중 장의가 주장한 술수를 일컫는 말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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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횡책(連橫策)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면 [[합종책]](合縱策)에 대해서 먼저 알아야 하는데, 합종책은 강대국으로 부상한 [[진]](秦)나라를 전국六國이 견제하기 위해 실시한 외교술이다. 秦이 강대국으로 부상하면서 국가 안보에 위기의식을 느낀 六國에서 수 많은 유세객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 귀곡 선생의 제자인 소진(蘇秦)이 합종책을 주장한다. 소진은 六國간의 소모전이 진(秦)에만 이득이 되는 무의미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진은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秦나라 밑에서 쇠꼬리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닭의 머리가 되자'고 제창하면서 합종책을 주장했다. 여기서 등장한 사자성어가 [[계구우후]](鷄口牛後)이다. 소진은 합종책을 실행하기 위해서 연(燕)의 문후를 설득하고 韓과 魏, 齊와 楚를 차례로 설득하여 결국 합종책을 완성했다. 소진은 이 합종연합의 장이 되어 육국의 재상을 겸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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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러한 합종책에 맞서 등장한 외교적 전략이 연횡책이다. 연횡책은 소진의 동문, 귀곡선생의 제자이자 소진의 친구인 장의(張儀)에 의해서 실행되어진 외교술이다. 장의는 秦의 재상이 되어 육국의 합종책을 무너뜨리고 각 국을 설득해 진과 동맹을 맺게끔 하는 연횡책을 구사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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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의는 합종책에서 楚를 먼저 이탈시키고, 이어 韓과 齊, 趙, 燕을 설득해 연횡책을 실행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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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합종책이 진을 서쪽에 두고 동쪽의 나머지 육국들이 세로의 형태로 연합한 것이라면, 연횡책은 서쪽의 강대국 진과 각 육국들이 가로로 동맹을 맺은 형태이다. 결국 연횡책의 결과 秦은 가까이 있는 나라부터 먼저 공략한 '遠交近攻’의 술책으로 韓과 魏를 먼저 공략하고 趙와 楚와는 화친을 도모해 韓과 魏를 고립시켰다. 이러한 방법을 바탕으로 진은 천하통일을 달성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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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애== | ||
+ | ===초기=== | ||
+ | 장의는 [[위]]나라 사람으로 [[소진]]과 함께 [[귀곡자]] 아래서 수학했다. 그는 공부를 마치고 제후들을 찾아다녔는데 매번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어쩌다 [[초]]나라 재상과 술을 마신 적이 있었는데 그 재상이 고리 옥을 잃어버렸다. 가난하고 평소에 품행이 좋지 않았던 장의가 의심을 받았고, 매를 수백 대나 가했지만 그가 버텨내며 수긍하지 않자 결국 놓아주었다. 집으로 돌아온 장의의 모습을 본 아내가 하소연하자 자신의 혀가 아직 있으니 괜찮다는 농담을 통해 그의 성격을 알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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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진]](蘇秦)과의 일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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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의가 유세를 위해서 돌아다닐 당시에 소진은 이미 조왕에게 합종의 약속을 받아내어 탄탄대로를 걷고 있었다. 소진은 진나라가 제후를 공격하여 합종의 약속이 깨지고, 실패할 것이 두려워 진나라에서 기용될 만한 사람을 생각한 끝에 사람을 시켜 장의를 자극하여 자신에게 청을 하도록 하였다. | ||
− | + | 장의는 이에 조나라로 가서 이름을 밝히고 소진을 만나길 청했다. 소진은 문지기에게 그에게 알리지 말라고 주의를 주는 한편 또 며칠 동안 떠나지 못하게 했다. 그런 다음 그를 만나서는 당 아래에 앉게 하고 머슴들이 먹는 음식을 내려주었다. 이어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그대의 재능을 가지고도 자신을 이렇게 곤욕스럽게 만들다니! 내가 그대를 부귀하게 만들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대를 거두기에 부족한 것 같네”라며 장의를 나무라며 요청을 거절하고는 장의를 떠나가게 했다. | |
+ | 장의는 옛 친구인 소진이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반대로 치욕을 당하자, 진나라로 들어가서 조나라를 곤경에 처하게 하고자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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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진은 장의가 떠난지 얼마 뒤에 그의 사인(舍人)에게 "장의는 유능한 인재이고 진나라의 권력을 잡을 수 있는자는 장의 밖에 없다. 하지만 가난하여 진 혜왕을 알현할기회가 없다. 나는 그가 작은 이익에 안주하지 않고 큰 뜻을 이루도록 일부러 모욕을 준 것이다. 그대는 나를 대신해서 그를 몰래 보살피도록 하라”라고 말하며 바로 조왕에게 말해서 돈과 마차를 내고, 사람을 시켜 장의를 가만히 따라가게 한 다음 그와 함께 먹고 자면서 차츰 그와 가까워지게 해서는 마차와 돈을 주어 쓰고 싶은 곳에 쓰게 하되 알리지 않게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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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침내 장의는 진 혜왕(惠王)을 만났다. 진 혜왕은 장의를 객경(客卿)으로 삼고 제후들을 토벌하기 위한 계책을 세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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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의가 진 혜왕의 객경이 되자 소진의 사인이 장의에게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장의는 “그대 덕분에 좋은 자리를 얻어 이제 그 덕에 보답하려는데 어째서 떠나시겠다는 게요?”라고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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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때에 소진의 사인은 “신은 그대를 모르고, 그대를 아는 분은 바로 소군(蘇君)이십니다. 소군께서는 진나라가 조나라를 토벌함으로써 합종이 어그러질 것을 걱정하셨는데, 그대가 아니면 진나라의 정권을 잡을 사람이 없다고 보시고, 일부러 그대를 화나게 자극한 다음 신으로 하여금 몰래 그대의 비용을 돕게 하셨습니다. 모두가 소군의 계책입니다. 지금 그대가 기용되었으니 돌아가 알리고자 합니다.”라고 했다. | ||
+ | |||
+ | 이 말을 듣고 난 장의는 소진이 있는 조나라 대신 예전 유세객 시절에 자신을 매질했던 초나라에 “내가 처음 당신과 술을 마시면서 내가 벽옥을 훔치지 않았는데 당신은 내게 매질을 했다. 당신은 네 나라를 잘 지켜라. 내가 이제 반대로 성을 훔치러 갈테니!”라는 격문을 쓰게 된다. | ||
+ | |||
+ | ===장의의 활약=== | ||
+ | ====진 혜왕 설득==== | ||
+ | “내 대책이 틀리면 나를 죽여도 좋다.” | ||
+ | 장의가 보기에 중요한 것은 내정의 안정감과 군대의 강력함뿐인데, [[진]]나라는 이미 그 둘을 가지고 있으나 산동의 나라들은 갖추지 못했다고 말한다. 산동의 6국은 백성들을 잘 다스리지 못해 그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지 못하지만, 진은 상벌을 명확하게 행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용감하게 적을 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말한다. 이렇듯 진은 군사력이 강하기 때문에 나서기만 하면 합종은 쉽게 부술 수 있다고 설득하며 자신감을 피력한다. | ||
+ | |||
+ | 진이 아직 패왕이 되지 못한 이유는 모신들이 싸움만하고 그 여세를 몰아 뿌리까지 캐내려는 끈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렇게 전쟁을 하고 실리를 얻지 못한다면 패망을 앞당기는 꼴이 되므로, 제후들을 모두 격퇴할 방법으로는 멸망시키는 것 외에는 없다고 주장한다. 이전에 진이 [[초]]나라,[[조]]나라, [[위]]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던 실책을 비판하고 그 이유를 모신들이 졸렬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진나라의 정예 병사는 백만 명이고 상벌은 엄정하며, 지형이 유리하기 때문에 천하의 합종을 부수고도 남는다며 자신의 목숨을 걸고 유세했다. 이에 혜왕은 [[소진]]과 달리 군대를 부리는 능력이 있고, 몇 수 앞을 내다보는 능력이 있었던 그의 말에 설득되었고 6국을 끝장낼 전략가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장의는 기원전 328년 진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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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나라 유세==== | ||
+ | 장의는 위나라가 진을 섬기도록 만들어서 다른 제후들도 따르도록 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위나라로 갔지만 위의 혜왕은 쉽게 그에게 넘어가지 않았다. 이러한 장의의 움직임 이후 소진은 6국에 [[흉노]]까지 합종시켜 천하연합군으로 진을 공격했지만 진은 이 많은 무리를 격파한다. [[초]]는 [[위]]나 [[한]]만큼 합종에 적극적이지 않았고, [[제]]는 끝까지 자리를 지켰으나 삼진(한,위,조)의 군대는 다 달아났기 때문이다. 서로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6국 연합은 진에 의해 깨어지고 말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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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렇게 산동 국가들의 모래알같은 결집력이 드러난 후 장의는 진을 위해 연횡으로 유세했다. 이전의 혜왕은 넘어가지 않았지만 즉위하자마자 합종의 허약함을 느낀 양왕은 상대하기가 수월했다. 장의는 위 양왕에게 위나라의 땅이 방어에 불리하기 때문에 연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부모자식 간에도 이익이 있으면 다투는데 동상이몽의 산동 나라들과 속임수를 쓰는 소진의 계략을 믿을 수 없다고 하며 특유의 직설적인 화법을 사용한다. 이어서 그는 진을 섬기지 않으면 위가 가장 먼저 멸망할 것이라는 협박에 가까운 대안을 제시했다. 합종의 허약함을 알고 있던 위 양왕은 장의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하외(河外)의 땅을 바치기로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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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의의 합종 격파==== | ||
+ | 소진의 6국 연합은 실패했지만 부분적으로는 살아남았고, 장의는 [[초]]나라를 노리기 시작했다. 초는 [[장강]]을 끼고 있었기 때문에 배싸움에 유리했다. 그런데 촉이 만약 진으로 넘어간다면 진이 상류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에 초에게는 재앙이 될 것이 뻔했다. 진은 이 지대를 노렸고 기원전 316년 [[촉]]을 점령해 더욱 강해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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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 혜왕은 [[제]]를 치고 싶었는데 제와 초가 결합하고 있었기에 장의는 초의 회왕을 만나 제와의 관계를 끊는다면 [[상]](商)과 오(於)의 땅 6백리를 바치겠다고 말한다. 초의 모사 진진은 이를 의심하고 제와 몰래 연합을 유지하고 겉으로만 절교한 상태로 있다가 정말로 땅을 줄 때 제와 절교해도 늦지 않다고 말했지만 초 회왕은 그 말을 무시하고 바로 제에 절교 사절을 보냈다. 장의가 이런 약속을 하고 돌아오자 진은 제와 몰래 연합해 초를 고립시켰고, 그 상황을 모른 초 회왕은 제에 군사적인 도발까지 하게 된다. 하지만 장의는 그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6백리가 아닌 겨우 6리의 땅을 주었다. 이러한 사실에 초 회왕이 진을 치려고 하자 다시 진진이 나서서 말렸지만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진과 싸움을 벌여 크게 패하고 말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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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싸움에 패한 후 초 회왕은 검중의 땅을 주는 대신 장의를 초나라로 데려와 가두었지만 금방 빠져나와 뻔뻔스럽게 초왕에게 진과 함께하고 제와 싸움을 할 것을 부추겼다. 진과의 싸움에 이익이 없다는 것을 안 초 회왕은 이를 받아들이고 진과 화친을 맺었다. 그 후 장의는 초를 떠나 한에 가서 진과 [[한]]의 차이를 강조하며 진을 섬기라고 하자 한은 합종을 깨고 진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어서 [[조]]나라로 간 장의는 진에 이미 굴복한 나라들을 이끌고 조를 나누어 가지겠다고 위협해 진을 섬기도록 만든다. 이어서 그는 제나라로 가서 진이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로 제 역시 진을 섬길 수 있게 만들었다. 이리하여 합종은 완전히 깨어졌고 이러한 과정에서 장의의 활약이 돋보였다고 할 수 있다. | ||
+ | |||
+ | ===말년=== | ||
+ | 장의는 그의 전략으로 진나라에 큰 공을 세웠지만 진나라의 관리들은 그의 속임수 때문에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성품이 좋지 않아 다들 그를 경계했고, 진이 사기나 치는 나라로 낙인이 찍혔기 때문이다. 장의가 열국 유세를 마치고 귀국하자 그의 뒤를 봐주던 진 혜왕이 죽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새로 선 무왕은 장의를 싫어했고, 국내 세력을 통합하기 위해 장의를 희생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를 눈치 챈 장의가 무왕에게 제안을 하며 타국으로의 탈출을 계획한다. | ||
+ | |||
+ | 그는 제나라 왕이 장의 자신을 미워하기 때문에 그가 가는 곳이면 분명 공격을 할 것이므로, 그가 위나라로 가면 제나라는 분명히 위나라를 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겉으로 제와 위를 싸우게 하여 진에게 이득이 되는 제안을 하지만, 속으로는 이러한 사실을 이용하여 자신이 진을 벗어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이에 무왕은 평판이 좋지 않은 장의도 보내고 자신도 약간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의 요청을 허락했다. 이렇게 그는 무사히 진을 벗어날 수 있었고, 그 이듬해 위나라에서 자연사했다. | ||
+ | |||
+ | ==평가== | ||
+ | 장의는 진에 큰 도움이 되는 전략가였지만, 언변과 행실에서 [[소진]]에 비길 수 없는 이류였다. 그의 인생은 협잡과 사기의 연속이었지만 그의 정치적인 입지는 강한 진이 뒤에 있던 덕분에 소진보다 높았다. 그의 품행이 문제가 되기는 하지만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가 하는 다른 유세가들에 비해 충과 신이 있었다고 평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장의는 군주의 신임을 얻고, 국제 정세의 조언가로 왕의 곁에서 외교군사전력에 관여했다. | ||
− | + | ===사마천=== | |
− | + | [[사마천]]은 장의에 대한 평가를 세치 혀로 국제사회를 농단한 인물이었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장의에 대한 사마천 평가의 전문을 보면 “삼진에는 권모와 기이한 변화를 부린 인물이 많다. 합종과 연횡을 부르짖어 진나라를 굳세게 한 자는 대개가 다 삼진 출신이다. 장의의 책모는 소진보다 심하였으나 그러나 세상이 장의보다 소진을 미워하는 것은 소진이 죽은 뒤 장의가 소진의 단점을 선전하고 폭로하고 자기의 유세를 유리하게 하여 연횡을 성취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 두 사람은 진실로 위험한 인물인저.”라는 내용이 적혀있다. 이를 통해서 사마천의 간교한 말에 대한 태도를 알 수 있다. | |
− | + | ===[[여씨춘추]]=== | |
− | + | ‘협잡꾼’ 장의에 대해 “장의가 천하에 덕을 베푼 바”라는 문장을 통해 진나라가 장의의 덕을 입었다고 보고 있다. | |
− | == | + | ===제갈량=== |
− | + | [[제갈량]]이 [[오]]나라 인사들과 조정에서 설전을 벌일 때 소진과 장의의 세치 혀를 본받아 오를 설득하러 온 것이 아니냐는 물음에 “소진은 여섯 나라의 인수를 찼고 장의는 진에서 두 번이나 재상을 지냈소. 이들은 모두 나라를 바로잡고 지탱할 꾀를 가지고 있을 이들이었지, 강한 자를 두려워하고 약한 자를 능멸하거나 칼을 무서워하고 검을 피하는 사람들과 비할 이가 아니었소. 그대들은 [[조조]]의 허풍과 속임수 말을 듣고 두려워 항복을 청하면서 감히 소진과 장의를 비웃는단 말이오?”라는 답을 한다. 제갈량은 소진과 장의를 업적을 남긴 인재들로 평가하고 있다. | |
==참고문헌== | ==참고문헌== | ||
− | + | 공원국, <<춘추전국이야기8 합종연횡>>, 위즈덤하우스, 2017. ISBN 9791162200674 | |
− | |||
+ | 사마천, <<史記列傳>>, 김원중 역, 민음사, 2015 ISBN 9788937425967 | ||
[[분류:인물]] | [[분류:인물]] |
2019년 6월 13일 (목) 03:05 기준 최신판
장의 | |
---|---|
| |
출생 |
? |
사망 |
B.C309 |
생존시기 | 전국시대 |
목차
개요
장의(張儀)는 위(魏)나라 사람으로 일찍이 소진과 함께 귀곡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유세술(합종술과 연횡술)을 배웠는데, 소진은 스스로 장의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장의(張儀)는 전국시대에 활동한 사상가이며 전국 6국이 진과 화친하여 공존을 꾀한 연횡책을 주장했다. 출생년도는 알려지 있지 않으며 기원전 309년 즉 진(秦)나라 무왕(武王) 2년에 위나라에서 재상이 된지 1년만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연횡책(連橫策)
연횡책은 전국시대 말기 秦이 나머지 六國을 통일하기까지의 과정에서 나온 외교적 술수들중 장의가 주장한 술수를 일컫는 말이다.
연횡책(連橫策)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면 합종책(合縱策)에 대해서 먼저 알아야 하는데, 합종책은 강대국으로 부상한 진(秦)나라를 전국六國이 견제하기 위해 실시한 외교술이다. 秦이 강대국으로 부상하면서 국가 안보에 위기의식을 느낀 六國에서 수 많은 유세객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 귀곡 선생의 제자인 소진(蘇秦)이 합종책을 주장한다. 소진은 六國간의 소모전이 진(秦)에만 이득이 되는 무의미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진은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秦나라 밑에서 쇠꼬리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닭의 머리가 되자'고 제창하면서 합종책을 주장했다. 여기서 등장한 사자성어가 계구우후(鷄口牛後)이다. 소진은 합종책을 실행하기 위해서 연(燕)의 문후를 설득하고 韓과 魏, 齊와 楚를 차례로 설득하여 결국 합종책을 완성했다. 소진은 이 합종연합의 장이 되어 육국의 재상을 겸하였다.
이러한 합종책에 맞서 등장한 외교적 전략이 연횡책이다. 연횡책은 소진의 동문, 귀곡선생의 제자이자 소진의 친구인 장의(張儀)에 의해서 실행되어진 외교술이다. 장의는 秦의 재상이 되어 육국의 합종책을 무너뜨리고 각 국을 설득해 진과 동맹을 맺게끔 하는 연횡책을 구사한다.
장의는 합종책에서 楚를 먼저 이탈시키고, 이어 韓과 齊, 趙, 燕을 설득해 연횡책을 실행했다.
합종책이 진을 서쪽에 두고 동쪽의 나머지 육국들이 세로의 형태로 연합한 것이라면, 연횡책은 서쪽의 강대국 진과 각 육국들이 가로로 동맹을 맺은 형태이다. 결국 연횡책의 결과 秦은 가까이 있는 나라부터 먼저 공략한 '遠交近攻’의 술책으로 韓과 魏를 먼저 공략하고 趙와 楚와는 화친을 도모해 韓과 魏를 고립시켰다. 이러한 방법을 바탕으로 진은 천하통일을 달성한다.
생애
초기
장의는 위나라 사람으로 소진과 함께 귀곡자 아래서 수학했다. 그는 공부를 마치고 제후들을 찾아다녔는데 매번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어쩌다 초나라 재상과 술을 마신 적이 있었는데 그 재상이 고리 옥을 잃어버렸다. 가난하고 평소에 품행이 좋지 않았던 장의가 의심을 받았고, 매를 수백 대나 가했지만 그가 버텨내며 수긍하지 않자 결국 놓아주었다. 집으로 돌아온 장의의 모습을 본 아내가 하소연하자 자신의 혀가 아직 있으니 괜찮다는 농담을 통해 그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소진(蘇秦)과의 일화
장의가 유세를 위해서 돌아다닐 당시에 소진은 이미 조왕에게 합종의 약속을 받아내어 탄탄대로를 걷고 있었다. 소진은 진나라가 제후를 공격하여 합종의 약속이 깨지고, 실패할 것이 두려워 진나라에서 기용될 만한 사람을 생각한 끝에 사람을 시켜 장의를 자극하여 자신에게 청을 하도록 하였다.
장의는 이에 조나라로 가서 이름을 밝히고 소진을 만나길 청했다. 소진은 문지기에게 그에게 알리지 말라고 주의를 주는 한편 또 며칠 동안 떠나지 못하게 했다. 그런 다음 그를 만나서는 당 아래에 앉게 하고 머슴들이 먹는 음식을 내려주었다. 이어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그대의 재능을 가지고도 자신을 이렇게 곤욕스럽게 만들다니! 내가 그대를 부귀하게 만들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대를 거두기에 부족한 것 같네”라며 장의를 나무라며 요청을 거절하고는 장의를 떠나가게 했다. 장의는 옛 친구인 소진이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반대로 치욕을 당하자, 진나라로 들어가서 조나라를 곤경에 처하게 하고자 한다.
소진은 장의가 떠난지 얼마 뒤에 그의 사인(舍人)에게 "장의는 유능한 인재이고 진나라의 권력을 잡을 수 있는자는 장의 밖에 없다. 하지만 가난하여 진 혜왕을 알현할기회가 없다. 나는 그가 작은 이익에 안주하지 않고 큰 뜻을 이루도록 일부러 모욕을 준 것이다. 그대는 나를 대신해서 그를 몰래 보살피도록 하라”라고 말하며 바로 조왕에게 말해서 돈과 마차를 내고, 사람을 시켜 장의를 가만히 따라가게 한 다음 그와 함께 먹고 자면서 차츰 그와 가까워지게 해서는 마차와 돈을 주어 쓰고 싶은 곳에 쓰게 하되 알리지 않게 했다.
마침내 장의는 진 혜왕(惠王)을 만났다. 진 혜왕은 장의를 객경(客卿)으로 삼고 제후들을 토벌하기 위한 계책을 세웠다.
장의가 진 혜왕의 객경이 되자 소진의 사인이 장의에게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장의는 “그대 덕분에 좋은 자리를 얻어 이제 그 덕에 보답하려는데 어째서 떠나시겠다는 게요?”라고 했다.
이 때에 소진의 사인은 “신은 그대를 모르고, 그대를 아는 분은 바로 소군(蘇君)이십니다. 소군께서는 진나라가 조나라를 토벌함으로써 합종이 어그러질 것을 걱정하셨는데, 그대가 아니면 진나라의 정권을 잡을 사람이 없다고 보시고, 일부러 그대를 화나게 자극한 다음 신으로 하여금 몰래 그대의 비용을 돕게 하셨습니다. 모두가 소군의 계책입니다. 지금 그대가 기용되었으니 돌아가 알리고자 합니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난 장의는 소진이 있는 조나라 대신 예전 유세객 시절에 자신을 매질했던 초나라에 “내가 처음 당신과 술을 마시면서 내가 벽옥을 훔치지 않았는데 당신은 내게 매질을 했다. 당신은 네 나라를 잘 지켜라. 내가 이제 반대로 성을 훔치러 갈테니!”라는 격문을 쓰게 된다.
장의의 활약
진 혜왕 설득
“내 대책이 틀리면 나를 죽여도 좋다.”
장의가 보기에 중요한 것은 내정의 안정감과 군대의 강력함뿐인데, 진나라는 이미 그 둘을 가지고 있으나 산동의 나라들은 갖추지 못했다고 말한다. 산동의 6국은 백성들을 잘 다스리지 못해 그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지 못하지만, 진은 상벌을 명확하게 행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용감하게 적을 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말한다. 이렇듯 진은 군사력이 강하기 때문에 나서기만 하면 합종은 쉽게 부술 수 있다고 설득하며 자신감을 피력한다.
진이 아직 패왕이 되지 못한 이유는 모신들이 싸움만하고 그 여세를 몰아 뿌리까지 캐내려는 끈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렇게 전쟁을 하고 실리를 얻지 못한다면 패망을 앞당기는 꼴이 되므로, 제후들을 모두 격퇴할 방법으로는 멸망시키는 것 외에는 없다고 주장한다. 이전에 진이 초나라,조나라, 위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던 실책을 비판하고 그 이유를 모신들이 졸렬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진나라의 정예 병사는 백만 명이고 상벌은 엄정하며, 지형이 유리하기 때문에 천하의 합종을 부수고도 남는다며 자신의 목숨을 걸고 유세했다. 이에 혜왕은 소진과 달리 군대를 부리는 능력이 있고, 몇 수 앞을 내다보는 능력이 있었던 그의 말에 설득되었고 6국을 끝장낼 전략가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장의는 기원전 328년 진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위나라 유세
장의는 위나라가 진을 섬기도록 만들어서 다른 제후들도 따르도록 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위나라로 갔지만 위의 혜왕은 쉽게 그에게 넘어가지 않았다. 이러한 장의의 움직임 이후 소진은 6국에 흉노까지 합종시켜 천하연합군으로 진을 공격했지만 진은 이 많은 무리를 격파한다. 초는 위나 한만큼 합종에 적극적이지 않았고, 제는 끝까지 자리를 지켰으나 삼진(한,위,조)의 군대는 다 달아났기 때문이다. 서로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6국 연합은 진에 의해 깨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산동 국가들의 모래알같은 결집력이 드러난 후 장의는 진을 위해 연횡으로 유세했다. 이전의 혜왕은 넘어가지 않았지만 즉위하자마자 합종의 허약함을 느낀 양왕은 상대하기가 수월했다. 장의는 위 양왕에게 위나라의 땅이 방어에 불리하기 때문에 연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부모자식 간에도 이익이 있으면 다투는데 동상이몽의 산동 나라들과 속임수를 쓰는 소진의 계략을 믿을 수 없다고 하며 특유의 직설적인 화법을 사용한다. 이어서 그는 진을 섬기지 않으면 위가 가장 먼저 멸망할 것이라는 협박에 가까운 대안을 제시했다. 합종의 허약함을 알고 있던 위 양왕은 장의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하외(河外)의 땅을 바치기로 했다.
장의의 합종 격파
소진의 6국 연합은 실패했지만 부분적으로는 살아남았고, 장의는 초나라를 노리기 시작했다. 초는 장강을 끼고 있었기 때문에 배싸움에 유리했다. 그런데 촉이 만약 진으로 넘어간다면 진이 상류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에 초에게는 재앙이 될 것이 뻔했다. 진은 이 지대를 노렸고 기원전 316년 촉을 점령해 더욱 강해졌다.
진 혜왕은 제를 치고 싶었는데 제와 초가 결합하고 있었기에 장의는 초의 회왕을 만나 제와의 관계를 끊는다면 상(商)과 오(於)의 땅 6백리를 바치겠다고 말한다. 초의 모사 진진은 이를 의심하고 제와 몰래 연합을 유지하고 겉으로만 절교한 상태로 있다가 정말로 땅을 줄 때 제와 절교해도 늦지 않다고 말했지만 초 회왕은 그 말을 무시하고 바로 제에 절교 사절을 보냈다. 장의가 이런 약속을 하고 돌아오자 진은 제와 몰래 연합해 초를 고립시켰고, 그 상황을 모른 초 회왕은 제에 군사적인 도발까지 하게 된다. 하지만 장의는 그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6백리가 아닌 겨우 6리의 땅을 주었다. 이러한 사실에 초 회왕이 진을 치려고 하자 다시 진진이 나서서 말렸지만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진과 싸움을 벌여 크게 패하고 말았다.
싸움에 패한 후 초 회왕은 검중의 땅을 주는 대신 장의를 초나라로 데려와 가두었지만 금방 빠져나와 뻔뻔스럽게 초왕에게 진과 함께하고 제와 싸움을 할 것을 부추겼다. 진과의 싸움에 이익이 없다는 것을 안 초 회왕은 이를 받아들이고 진과 화친을 맺었다. 그 후 장의는 초를 떠나 한에 가서 진과 한의 차이를 강조하며 진을 섬기라고 하자 한은 합종을 깨고 진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어서 조나라로 간 장의는 진에 이미 굴복한 나라들을 이끌고 조를 나누어 가지겠다고 위협해 진을 섬기도록 만든다. 이어서 그는 제나라로 가서 진이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로 제 역시 진을 섬길 수 있게 만들었다. 이리하여 합종은 완전히 깨어졌고 이러한 과정에서 장의의 활약이 돋보였다고 할 수 있다.
말년
장의는 그의 전략으로 진나라에 큰 공을 세웠지만 진나라의 관리들은 그의 속임수 때문에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성품이 좋지 않아 다들 그를 경계했고, 진이 사기나 치는 나라로 낙인이 찍혔기 때문이다. 장의가 열국 유세를 마치고 귀국하자 그의 뒤를 봐주던 진 혜왕이 죽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새로 선 무왕은 장의를 싫어했고, 국내 세력을 통합하기 위해 장의를 희생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를 눈치 챈 장의가 무왕에게 제안을 하며 타국으로의 탈출을 계획한다.
그는 제나라 왕이 장의 자신을 미워하기 때문에 그가 가는 곳이면 분명 공격을 할 것이므로, 그가 위나라로 가면 제나라는 분명히 위나라를 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겉으로 제와 위를 싸우게 하여 진에게 이득이 되는 제안을 하지만, 속으로는 이러한 사실을 이용하여 자신이 진을 벗어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이에 무왕은 평판이 좋지 않은 장의도 보내고 자신도 약간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의 요청을 허락했다. 이렇게 그는 무사히 진을 벗어날 수 있었고, 그 이듬해 위나라에서 자연사했다.
평가
장의는 진에 큰 도움이 되는 전략가였지만, 언변과 행실에서 소진에 비길 수 없는 이류였다. 그의 인생은 협잡과 사기의 연속이었지만 그의 정치적인 입지는 강한 진이 뒤에 있던 덕분에 소진보다 높았다. 그의 품행이 문제가 되기는 하지만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가 하는 다른 유세가들에 비해 충과 신이 있었다고 평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장의는 군주의 신임을 얻고, 국제 정세의 조언가로 왕의 곁에서 외교군사전력에 관여했다.
사마천
사마천은 장의에 대한 평가를 세치 혀로 국제사회를 농단한 인물이었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장의에 대한 사마천 평가의 전문을 보면 “삼진에는 권모와 기이한 변화를 부린 인물이 많다. 합종과 연횡을 부르짖어 진나라를 굳세게 한 자는 대개가 다 삼진 출신이다. 장의의 책모는 소진보다 심하였으나 그러나 세상이 장의보다 소진을 미워하는 것은 소진이 죽은 뒤 장의가 소진의 단점을 선전하고 폭로하고 자기의 유세를 유리하게 하여 연횡을 성취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 두 사람은 진실로 위험한 인물인저.”라는 내용이 적혀있다. 이를 통해서 사마천의 간교한 말에 대한 태도를 알 수 있다.
여씨춘추
‘협잡꾼’ 장의에 대해 “장의가 천하에 덕을 베푼 바”라는 문장을 통해 진나라가 장의의 덕을 입었다고 보고 있다.
제갈량
제갈량이 오나라 인사들과 조정에서 설전을 벌일 때 소진과 장의의 세치 혀를 본받아 오를 설득하러 온 것이 아니냐는 물음에 “소진은 여섯 나라의 인수를 찼고 장의는 진에서 두 번이나 재상을 지냈소. 이들은 모두 나라를 바로잡고 지탱할 꾀를 가지고 있을 이들이었지, 강한 자를 두려워하고 약한 자를 능멸하거나 칼을 무서워하고 검을 피하는 사람들과 비할 이가 아니었소. 그대들은 조조의 허풍과 속임수 말을 듣고 두려워 항복을 청하면서 감히 소진과 장의를 비웃는단 말이오?”라는 답을 한다. 제갈량은 소진과 장의를 업적을 남긴 인재들로 평가하고 있다.
참고문헌
공원국, <<춘추전국이야기8 합종연횡>>, 위즈덤하우스, 2017. ISBN 9791162200674
사마천, <<史記列傳>>, 김원중 역, 민음사, 2015 ISBN 97889374259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