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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9%8D%EC%BD%A9%EC%9D%98_%EC%97%AD%EC%82%AC 위키백과 홍콩의 역사]<br> | *[https://ko.wikipedia.org/wiki/%ED%99%8D%EC%BD%A9%EC%9D%98_%EC%97%AD%EC%82%AC 위키백과 홍콩의 역사]<br> | ||
*[http://www.koreatimes.com/article/20141027/881687 홍콩 우산혁명, 그 본질은..]<br> | *[http://www.koreatimes.com/article/20141027/881687 홍콩 우산혁명, 그 본질은..]<br> | ||
+ | *[https://news.joins.com/article/23496482 홍콩 사상 최대 103만 시위, 시작은 20대의 치정살인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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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14일 (금) 13:05 기준 최신판
홍콩특별행정구 中華人民共和國香港特別行政區 Hong Kong Special Administrative Regio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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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 |
국가지도 | |
공용어 | 영어, 광동어, 표준 중국어 |
인구 정보 | |
인구 | 7,389,500(2017년 기준)명 |
지리 정보 | |
넓이 | 1,105.6km² |
경제 정보 | |
유통 화폐 | 홍콩달러 |
목차
개요
홍콩(香港, Hong Kong)은 중화인민공화국의 특별행정구 중 하나이다. 북쪽으로는 광동성 선전시와 접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마카오특별행정구와 63km 떨어져 있다.
홍콩의 역사
아편전쟁
홍콩은 진시황 때 중국에 병합되었다. 이후 홍콩이 식민지화되기 전 19세기 청나라 시대, 1840년~1842년 1차 아편전쟁이 일어났다. 이 아편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해서 청나라는 1842년 8월, 영국 함대의 갑판에서 남경조약을 체결해야만 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홍콩은 홍콩 섬, 구룡반도, 신계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영국은 아시아와 서방 국가들 간에 무역을 할 수 있는 항구가 홍콩에 있었기 때문에 홍콩을 아시아 침략의 발판으로 삼기를 원했다. 결국 청나라는 남경조약으로 인해서 홍콩 섬을 영국에 넘겨주어야만 했다. 남경조약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홍콩을 영국에 할양한다.
2. 광저우(廣州)·샤먼(廈門)·푸저우(福州)·닝보(寧波)·상하이(上海) 등 5개 항구를 개항한다.
3. 개항장에 영사를 설치한다.
4. 전쟁 배상금으로 1,200만 달러와 몰수당한 아편의 보상금으로 600만 달러를 영국에 지불한다.
5. 행상(行商) 즉, 공행(公行)과 같은 독점상인을 폐지한다.
6. 수출입 상품에 대한 관세를 제한한다.
7. 청나라와 영국 두 나라 관리의 대등한 교섭을 한다. [1]
1857년 제 2차 아편전쟁이 일어났다. 영국은 애로호 사건을 구실로 하여 광저우로 쳐들어 가 톈진까지 위협했다. 결국 청나라는 다시 한 번 불평등조약을 맺게 되었는데, 이 톈진조약의 체결 이후 1860년 또 다시 영국과 프랑스가 베이징으로 쳐들어오면서 청나라 공친왕과의 협상 끝에 베이징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 때 홍콩은 영국에 구룡반도마저 할양했다.
홍콩의 세 지역 중 두 지역이 할양되고, 1895년에 일어난 청일전쟁 이후 중국이 일본에게 패해서 위태로워지자 영국은 자신들이 가진 홍콩의 두 지역을 지키기를 원했다. 두 지역 외에 홍콩의 신계 지역은 중국과 외국을 이어주는 길목 역할을 하였고 예전 아편 무역의 경유지이기도 했으므로 아주 중요했다.[2] 결국 1898년 영국은 중국을 압박하여 신계 지역을 99년 동안 조차하게 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41년에 일본군이 홍콩으로 쳐들어왔다. 그리고 1945년 8월까지 홍콩을 점령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게 되자 영국은 다시 홍콩을 귀속시키고자 홍콩 총독부를 재건하였다. 이 때부터 조금씩 홍콩의 소유권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는데, 영국은 전쟁 후에도 본인들의 식민지를 유지하기를 원했고, 중국은 홍콩을 다시 돌려 받고 싶어 했지만 국공내전이 격화되면서 남쪽은 돌볼 겨를이 없었다. 이 때 국공내전으로 인해서 많은 중국 본토의 난민들이 홍콩으로 유입되었다.
1949년 이후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1980년대까지 홍콩은 눈부신 성장을 보였다. 국공내전으로 인해 홍콩으로 건너간 중국 본토인들은 기술과 자본을 가지고 홍콩에서 공장을 설립했다. 이것이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홍콩 공업이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한 이유이다. 먼저 방직과 의류 제조업이 나타났고, 그 후 플라스틱과 가발 제조업이 출현했다. 특히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전자제품, 시계 등 홍콩 제품의 중소제조업이 발달하면서 산업의 급속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3]
홍콩 반환
1980년대에는 홍콩 반환에 대한 협상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1984년 12월 19일, 홍콩을 50년 동안 일국양제 원칙에 의거하여 통치하기로 합의하는 중영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홍콩인들의 80%는 영국이 계속 홍콩을 통치하기를 바랐으며 4퍼센트의 홍콩인들만 중국 본토에 의해 통치되는 것을 원하는 등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는 데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4]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는 날인 1997년 7월 1일이 점점 다가올 수록 홍콩인들의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그 영향으로 1980년부터 1996년까지 홍콩인들 65만명이 해외로 이주했다.[5] 이후에도 중국이 제대로 지키지 않는 일국양제 원칙에 반기를 드는 홍콩인들은 결국 홍콩을 포기하고 계속해서 해외로 이주하였다.
홍콩인의 정체성 문제
1842년부터 1997년까지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 상태였으나 영국 통치 시기에도 완전한 민주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는 없다. 한 마디로 '민주 없는 자유' 상태라고 볼 수 있었다. 홍콩인들은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고 난 이후의 자신들의 정체성 그리고 주체성에 대해서 걱정하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게 된 것이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이후 그들은 홍콩인으로서 독자적인 정체성을 지금 막 발견하려고 하는 중이다.
1997년 이후의 홍콩
우산혁명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기 전 홍콩인들이 우려했던 대로 중국 공산당은 친중파 인사를 홍콩 정부에 심으려고 했다. 또한 홍콩 행정 장관 직선제의 방식에 제한을 두며 계속해서 홍콩의 내정에 간섭하였다. 마침내 2014년, 홍콩 시민들이 우산혁명이라고도 불리는 민주화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우산혁명이 일어난 까닭이 정치적인 민주화에 대한 갈망 때문만은 아니라는 견해가 다수이다. 사실 홍콩은 영국 식민지였을 때에도 완전한 자유를 가졌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전체 선거에 있어서 완전한 직선제 선출 제도를 가지지도 않았다.
홍콩의 중국 반환 이후 많은 중국 본토인들은 홍콩으로 건너갔다. 크게 늘어난 인구와 함께 극심한 빈부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홍콩 청년들의 실업난과 같은 경제적 어려움이 청년들로 하여금 울분을 토해내도록 했다. 문화적인 갈등 또한 혁명의 촉발에 한 몫을 했다. 홍콩인들에게 있어서 홍콩으로 유입된 본토인들은 그리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본토인들은 경제적으로 홍콩인들에게 뒤쳐지며, 문화적 시민의식 또한 뒤쳐진다고 여겨졌다. 그런데 이들이 홍콩에 자리를 잡고 분유나 각종 생필품들을 쓸어가자 중국 본토인들에 대한 경멸감이 반중 정서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홍콩 전체를 들썩이게 만든 민주화운동은 딱 한 가지의 요인 때문이 아니라 여러 복합적인 요인이 한데 쌓이고 얽히면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영화산업
홍콩인들의 불안감은 영화 산업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아비정전, 중경삼림, 해피투게더, 화양연화, 2046 등의 많은 대표작을 가진 홍콩의 저명한 영화 감독인 왕가위 감독은 영화에서 홍콩 반환에 대한 이야기를 은유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속에서의 주인공들은 방황하기도 하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과 사랑, 헤어짐 속에서 혼란스러워 할 때도 있다. 특히 1980년대와 1990년대 초의 영화에서는 반환 예정일인 1997년이 오기를 마냥 손 놓고 바라 봐야만 하는 홍콩인들의 심리가 영화에 잘 반영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1995년에 개봉한 영화 《중경삼림》에서 특히 그 심리가 잘 나타나 있는데, 두 가지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옴니버스 형식에서 특히 첫 번째로 구성된 이야기에서는 유통기한이 5월 1일인 파인애플 통조림이 이야기의 큰 흐름을 차지한다. 홍콩의 반환 날로 해석될 수 있는 기한인 5월 1일이라는 날짜에 얽매여 있는 주인공의 모습이 마치 1997년 7월 1일에 대한 홍콩인들의 압박감과도 같다고 볼 수 있다.
또한 2004년에 개봉한 영화 《2046》의 제목은 홍콩의 일국양제 원칙의 의거한 정치가 끝나는 해를 의미한다. 이 또한 2046년 이후 홍콩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 우려하는 홍콩인의 심리가 내재되어 있다.
최근 홍콩의 이슈
2019년 6월 9일부터 홍콩에는 우산혁명이 일어난 지 5년 만에 또 한번의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이는 현재 우산혁명을 뛰어넘는 사상 최대 규모 시위로 103만명이 거리로 나서고 있다. 이유는 홍콩 정부가 추진하는 범죄인 인도 법안의 의회 심의를 저지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시위는 한 홍콩인 남성이 대만에서 애인을 살해한 뒤 도주를 벌인 것이 발단이었다. 홍콩과 대만 간에는 범죄인 인도 협정이 없으므로 이 남성이 대만으로 송환되어 기소될 수 없었고, 홍콩 정부 또한 이 남성을 살인죄로 처벌할 수가 없었다. 이에 따라서 홍콩 정부와 친중파 의원들은 범죄인 인도 법안을 맺지 않은 국가와도 범죄자를 인도할 수 있도록 하고자 이 법안을 추진했다. 그러나 홍콩인들이 걱정하는 것은 범죄인 대상 인도 지역에 중국 본토가 추가되는 것이었다. 이 법안을 중국 정부가 악용한다면 홍콩 내에서 중국의 체제를 반대해왔던 인사들이나 인권 운동가들의 신변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서 홍콩에서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고 인권이 침해되며 현재 홍콩의 민주주의 또한 후퇴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하고 있다.
참고자료
- 박광득, 『홍콩반환 20년의 회고와 전망에 관한 연구』, 대한정치학회, 대한정치학회보 25권4호, 2017.
- 김진호, 『홍콩 반환 10년 후 홍콩사회의 중국화 현상』,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연구소, 2007.
- 김하림, 『홍콩 반환과 왕자웨이(王家衛)의 《중경삼림(重慶森林)》』, 중국인문학회, 2006.
- 이병태, 「중국과 대만의 통일정책 비교연구」, 충남대학교, 석사 학위 논문, 2001.
- 류영하, 「중국 민족주의와 홍콩 본토주의: 홍콩 역사박물관의 스토리텔링을 중심으로」, 산지니, 2014.
외부링크
- ↑ (8/29 오늘) 동양과 서양의 패권 가른 난징조약
- ↑ 홍콩 반환 10년 후 홍콩사회의 중국화 현상 p.3
- ↑ 중국 민족주의와 홍콩 본토주의: 홍콩 역사박물관의 스토리텔링을 중심으로 p.242
- ↑ 82年香港革新会民调:只有4%港人希望回归中国
- ↑ 홍콩 반환과 왕자웨이(王家衛)의 《중경삼림(重慶森林)》 p.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