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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개요== | ||
− | + | 가의(賈誼)는 [[서한]] 시대의 천재 학자로 「[[과진론]]」에서 [[진]]나라의 흥망을 예리하게 평가한 업적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태평성대인 [[문제]](文帝) 시기에 최연소 박사가 되어 법률이나 관리제도, 예악 문화 등의 제도들을 개정했다. 또한 국가의 운영에 있어서 수많은 의견을 황제에게 올렸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제도를 개정하고 직언을 하는 가의의 모습을 시기한 고관대작들이 그를 모함해 가의는 좌천되었고 곧 요절했다. | |
==정치 사상== | ==정치 사상== | ||
===서한 초기의 상황=== | ===서한 초기의 상황=== | ||
− | 서한 초기에 농민들은 궁핍한 생활을 했는데 그 주요한 원인은 토지사유제로 인해 대토지 소유주들이 소작농으로부터 사적인 세금을 과도하게 거뒀기 때문이다. 조정에서는 민생을 위해 농민들의 토지세를 점차 감면해주었으나, 토지사유제도 아래 전국시대부터 | + | 서한 초기에 농민들은 궁핍한 생활을 했는데 그 주요한 원인은 토지사유제로 인해 대토지 소유주들이 소작농으로부터 사적인 세금을 과도하게 거뒀기 때문이다. 조정에서는 민생을 위해 농민들의 토지세를 점차 감면해주었으나, 토지사유제도 아래 전국시대부터 [[한]]나라 초기까지 대부분의 비옥한 토지는 거의 대지주의 소유가 되었고, 자영농과 반소작농 이외의 많은 농민들이 소작농 신분으로 전락하였다. 이렇게 대지주에 예속된 소작농들은 반드시 그들의 지주에게 세금을 바쳐야 했는데, 그 양은 대략 한 해 수확량의 절반에 해당되었다. 결국 조정의 세금 경감의 실질적 수혜자들은 대토지를 보유한 지주계층이 되었다. 한편 농민들이 져야 했던 경제적 부담은 이외에도 국가에 대한 조세, 인두세, 부역 면제세, 호구세 등이 있었다. 이러한 부담은 궁핍한 농민층에게는 상당히 불리했고, 농민들은 대지주나 고리대금업자들로부터 비싼 이자의 빚을 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거액의 빚을 진 농민들은 결국에 토지를 팔거나 처자식을 팔았고 심지어는 자신을 팔기도 했다. 이에 따라 사람들 사이에서는 근본인 농업보다 말단의 생업인 장사가 가난한 사람에게는 더 도움이 된다는 인식이 팽배해졌다. 그 결과 상업이 기형적으로 확대, 발전되면서 대량의 농업인구가 유실되는 상황이 벌어졌고, 이는 사회적으로 사치를 조장하는 기풍을 만연하게 해 국가의 경제와 정치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
===농업 중시와 물자축적 정책=== | ===농업 중시와 물자축적 정책=== | ||
− | “수확이 나쁜 해에는 부자들이 (곡식을) 빌려주지 않아 가난한 백성들은 굶주리고, 천재로 인해 제대로 수확하지 못하면 벼슬을 팔고 자식을 팔겠다고 청하는 경우도 있다 들었습니다. 얼마 전에도 비가 내리지 않아 사람들이 놀랐다가 비가 한차례 내리자 모두 죽었다 다시 살아난 듯 기뻐했습니다. 천하에 물자비축이 없으면 이와 같은 심한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신서(新書) 中 | + | “수확이 나쁜 해에는 부자들이 (곡식을) 빌려주지 않아 가난한 백성들은 굶주리고, 천재로 인해 제대로 수확하지 못하면 벼슬을 팔고 자식을 팔겠다고 청하는 경우도 있다 들었습니다. 얼마 전에도 비가 내리지 않아 사람들이 놀랐다가 비가 한차례 내리자 모두 죽었다 다시 살아난 듯 기뻐했습니다. 천하에 물자비축이 없으면 이와 같은 심한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신서]](新書) 中 |
− | 서한 초기 열악한 환경에 놓여있는 농민들을 보면서 가의는 그들의 생활이 곤궁하게 된 것과 국가가 비축한 양식이 부족하게 된 이유로 조정의 농업홀시 정책을 꼽았다. 그래서 가의는 국가질서의 선결조건을 백성들의 윤택한 삶으로 보고, 백성들을 부유하게 만든다는 관점에서 농업을 중시하고 물자를 비축하는 정책을 시행할 것을 주장했다. 이는 관자의 민본 사상을 계승한 것인데, | + | 서한 초기 열악한 환경에 놓여있는 농민들을 보면서 가의는 그들의 생활이 곤궁하게 된 것과 국가가 비축한 양식이 부족하게 된 이유로 조정의 농업홀시 정책을 꼽았다. 그래서 가의는 국가질서의 선결조건을 백성들의 윤택한 삶으로 보고, 백성들을 부유하게 만든다는 관점에서 농업을 중시하고 물자를 비축하는 정책을 시행할 것을 주장했다. 이는 관자의 민본 사상을 계승한 것인데, [[관자]]는 “백성들의 삶이 넉넉하지 못했는데도 세상이 잘 다스려진 경우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라고 강조한 바 있다. 따라서 가의는 백성들에게 농업을 위한 안정된 여건을 조성해준다면 타고난 본성대로 열심히 일하며 재화를 비축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효과로 조정은 백성들을 수월하게 통치할 수 있을 것이며 조세수입의 측면에서도 유리할 것이라 보았다. 또한 당시 외부적으로는 [[흉노]]의 침략이 빈번했는데 이렇게 국력을 비축하면 유사시에 대비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
===상업 탄압과 사치 금지 정책=== | ===상업 탄압과 사치 금지 정책=== | ||
− | “백성들은 튼튼한 것을 버리고 교묘하게 장식하는 일에만 힘써 서로 경쟁하고 있습니다. 하루면 만들던 것들이 지금에 와서는 열흘이 걸려도 쉽게 만들 수 없지만, 1년은 쓸 수 있었던 것이 지금은 반년이면 부서지고 맙니다. 시일을 들여 정교하게 만들었어도 써보면 쉽게 망가지고 맙니다. 또 농사를 짓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농민들이 생산해낸 식량을 축내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천하가 궁핍한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에게 말단적인 일을 하게 하면 백성들은 크게 빈곤해지지만, 백성들에게 근본적인 일을 하게 하면 백성들은 크게 부유해지는 것입니다.” -신서(新書) 中 | + | “백성들은 튼튼한 것을 버리고 교묘하게 장식하는 일에만 힘써 서로 경쟁하고 있습니다. 하루면 만들던 것들이 지금에 와서는 열흘이 걸려도 쉽게 만들 수 없지만, 1년은 쓸 수 있었던 것이 지금은 반년이면 부서지고 맙니다. 시일을 들여 정교하게 만들었어도 써보면 쉽게 망가지고 맙니다. 또 농사를 짓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농민들이 생산해낸 식량을 축내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천하가 궁핍한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에게 말단적인 일을 하게 하면 백성들은 크게 빈곤해지지만, 백성들에게 근본적인 일을 하게 하면 백성들은 크게 부유해지는 것입니다.” -[[신서]](新書) 中 |
가의는 백성들 사이에 만연한 상업을 숭상하고 사치와 향락을 추구하는 풍조가 심각한 사회적 병폐가 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이를 방임할 경우 반드시 사회적 질서를 해치고 국가 경제의 근간을 위태롭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농업을 중시하고 물자를 비축해야 한다고 하는 주장 아래 조정에서는 반드시 이 풍조도 제지해야만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한편 이러한 현상은 농민들이 농업 생산에 종사하지 않고 상업에 종사하게 하여, 결국에는 곡식이 부족해지고 상업으로 벌어들인 재화로 사치와 향락에 빠지는 사태를 초래할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부유한 상인들은 복식에 있어서 오히려 제후를 능가해 천자와 맞먹으며 군주를 범하고 등급제도와 질서를 파괴했다. 결과적으로 가의의 중농억상 정책을 통해 그가 농업을 국가의 기간산업으로 바라봤음을 알 수 있다. | 가의는 백성들 사이에 만연한 상업을 숭상하고 사치와 향락을 추구하는 풍조가 심각한 사회적 병폐가 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이를 방임할 경우 반드시 사회적 질서를 해치고 국가 경제의 근간을 위태롭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농업을 중시하고 물자를 비축해야 한다고 하는 주장 아래 조정에서는 반드시 이 풍조도 제지해야만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한편 이러한 현상은 농민들이 농업 생산에 종사하지 않고 상업에 종사하게 하여, 결국에는 곡식이 부족해지고 상업으로 벌어들인 재화로 사치와 향락에 빠지는 사태를 초래할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부유한 상인들은 복식에 있어서 오히려 제후를 능가해 천자와 맞먹으며 군주를 범하고 등급제도와 질서를 파괴했다. 결과적으로 가의의 중농억상 정책을 통해 그가 농업을 국가의 기간산업으로 바라봤음을 알 수 있다. | ||
===민간의 화폐 주조 금지 정책=== | ===민간의 화폐 주조 금지 정책=== | ||
− | + | [[한]]나라 [[문제]]시기에는 민간차원의 화폐 주조를 허가하는 정책이 시행되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사회 전반에 걸쳐서 불량화폐의 유통과 위조화폐의 남용이라는 폐단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각지에서 주조된 화폐는 그 품질이 제각각 다른 바람에 민간에서의 무역활동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게다가 화폐주조를 통해 얻는 이윤이 큰 것을 알게 된 백성들이 농사일을 버리고 이에 뛰어들자 농업이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따라서 가의는 조정에서 민간의 화폐 주조를 금지하는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화폐의 주원료인 구리도 쉽게 구할 수 없도록 백성들이 사적으로 이를 채굴하는 것 또한 엄격하게 금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하면 조정은 화폐의 기준을 확립해 민간에서의 분쟁을 감소시킬 수 있고, 농업에 전념하도록 할 수 있으며, 화폐 가치의 경중과 수량을 조절할 수 있어 시장의 물가를 안정시킬 수 있는 등의 이점이 있다고 피력하였다. | |
==과진론(過秦論)== | ==과진론(過秦論)== | ||
− | 가의는 전한 초기에 | + | 가의는 [[전한]] 초기에 ‘[[진]]을 비판하여 논한다’는 의미의 『[[과진론]](過秦論)』을 지었는데, [[진]]의 역사를 재평가하기 위함이었다. 가의는 상, 중, 하의 세편의 글로 진이 흥성한 이유와 단기간에 망하게 된 이유를 상세히 분석하고 있다. 전체적인 논리는 진이 역취(逆取)에는 성공했으나 순수(順守)에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상편에서는 진나라가 흥성한 과정과 패망한 이유를, 중편에서는 통일 이후의 형세를, 하편에서는 진나라 말기 농민들이 봉기한 상황을 논하고 있다. 대략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
+ | *상편) 진나라는 지리적인 이점과 웅대한 지략을 바탕으로 수 세대에 걸쳐 동쪽의 여섯 나라들을 약화시켜 결국에 중국을 통일했다. 하지만 [[진시황]] 사후 얼마 되지 않아 진섭이라는 일개 필부의 손에 의해 힘없이 멸망해버렸는데, 그 원인은 바로 [[진시황]]이 공격과 수비의 형세가 다름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
+ | “일개 [[필부]]가 난을 일으키자 나라가 망하고, 천자 또한 다른 사람의 손에 죽어서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무엇 때문인가? 이는 仁義의 정치를 펴지 못했고, 천하를 공격할 때와 지킬 때의 형세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一夫作難而七廟墮, 身死人手, 爲天下笑者, 何也? 仁義不施, 而攻守之勢異也.) | ||
+ | *중편) [[진]]나라는 종주국인 [[주]]나라가 역할을 다하지 못해 여러 나라들이 다투며 백성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졌기 때문이다. [[주]]나라를 뒤이은 [[진]]나라는 백성들의 힘든 삶을 돌보지 않고 오직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데만 힘썼고, [[진시황]]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이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는 백성들의 반발을 샀고, 일개 필부인 [[진섭]]이 반란에 성공한다. | ||
+ | “그러므로 편안히 안정되어 있는 백성들은 함께 더불어 의로운 일을 할 수 있고, 위태로운 지경에 처한 백성들은 함께 어울려 그릇된 일을 하기 쉽다.” (故曰: “安民可與爲義, 而危民易與爲非”, 此之謂也.) | ||
+ | *하편) 뒤이어 황제가 된 삼세 [[자영]]도 실상을 파악하지 못했다. 만일 자영이 평범한 군주의 재질을 갖추었고 그에게 보통 재주의 신하라도 있었더라면, 종묘의 제사라도 이을 정도의 세력은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진시황과 이세를 거치며 사람들은 충언을 하길 두려워했고, 결국 조정에는 간신들만 남아 진 왕조는 단명하게 되었다. | ||
+ | “속담에 말하기를 ‘지난 일의 교훈을 잊지 않는 것은 앞으로의 일에 스승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군자는 상고의 역사를 살펴보고, 당대의 일에 비춰보고 人事에 적용해 보며, 흥망성쇠의 이치를 고찰하고 권위와 형세가 알맞은 지를 세밀히 살피며, 정책의 선택에 질서가 있으며, 변화하는 데는 시세를 따른다. 이 때문에 평안한 날이 오래 지속되고 사직이 안정되는 것이다.” (鄙諺曰: “前事之不忘, 後之師也” 是以君子爲國, 觀之上古, 驗之當世, 參之人事, 察盛衰之理, 審權勢之宜, 去就有序, 變化因時. 故曠日長久, 而社稷安矣.) | ||
+ | [[한]] 왕조에서 [[진]]이 단명한 이유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도 볼 수 있다. 진을 뒤이어 세워진 것이 한이기에, 이전 왕조의 과오를 지적하며 스스로를 정당화시킬 논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 ||
+ | ==참고 문헌== | ||
+ | *가의(賈誼), 박미라 역, 『신서(新書)』, 소명출판사, 2007. | ||
+ | *양중석, 「진의 단명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 과진론과 아방궁부 비교분석」, 명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8. | ||
+ | *이연승, 「『가의신서(賈誼新書)』에 나타난 새로운 제국 질서의 사상적 기초 -덕(德) 중심의 우주관과 윤리관」,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9. | ||
+ | *조원일, 「가의의 정치사상에 관한 연구」, 동양철학연구회, 2015. | ||
[[분류:인물]][[분류:한나라| ]] | [[분류:인물]][[분류:한나라| ]] |
2019년 6월 25일 (화) 17:33 기준 최신판
가의(賈誼) | |
---|---|
| |
출생 |
B.C 200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
사망 |
B.C 168 |
국적 | 전한(前漢) |
목차
개요
가의(賈誼)는 서한 시대의 천재 학자로 「과진론」에서 진나라의 흥망을 예리하게 평가한 업적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태평성대인 문제(文帝) 시기에 최연소 박사가 되어 법률이나 관리제도, 예악 문화 등의 제도들을 개정했다. 또한 국가의 운영에 있어서 수많은 의견을 황제에게 올렸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제도를 개정하고 직언을 하는 가의의 모습을 시기한 고관대작들이 그를 모함해 가의는 좌천되었고 곧 요절했다.
정치 사상
서한 초기의 상황
서한 초기에 농민들은 궁핍한 생활을 했는데 그 주요한 원인은 토지사유제로 인해 대토지 소유주들이 소작농으로부터 사적인 세금을 과도하게 거뒀기 때문이다. 조정에서는 민생을 위해 농민들의 토지세를 점차 감면해주었으나, 토지사유제도 아래 전국시대부터 한나라 초기까지 대부분의 비옥한 토지는 거의 대지주의 소유가 되었고, 자영농과 반소작농 이외의 많은 농민들이 소작농 신분으로 전락하였다. 이렇게 대지주에 예속된 소작농들은 반드시 그들의 지주에게 세금을 바쳐야 했는데, 그 양은 대략 한 해 수확량의 절반에 해당되었다. 결국 조정의 세금 경감의 실질적 수혜자들은 대토지를 보유한 지주계층이 되었다. 한편 농민들이 져야 했던 경제적 부담은 이외에도 국가에 대한 조세, 인두세, 부역 면제세, 호구세 등이 있었다. 이러한 부담은 궁핍한 농민층에게는 상당히 불리했고, 농민들은 대지주나 고리대금업자들로부터 비싼 이자의 빚을 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거액의 빚을 진 농민들은 결국에 토지를 팔거나 처자식을 팔았고 심지어는 자신을 팔기도 했다. 이에 따라 사람들 사이에서는 근본인 농업보다 말단의 생업인 장사가 가난한 사람에게는 더 도움이 된다는 인식이 팽배해졌다. 그 결과 상업이 기형적으로 확대, 발전되면서 대량의 농업인구가 유실되는 상황이 벌어졌고, 이는 사회적으로 사치를 조장하는 기풍을 만연하게 해 국가의 경제와 정치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농업 중시와 물자축적 정책
“수확이 나쁜 해에는 부자들이 (곡식을) 빌려주지 않아 가난한 백성들은 굶주리고, 천재로 인해 제대로 수확하지 못하면 벼슬을 팔고 자식을 팔겠다고 청하는 경우도 있다 들었습니다. 얼마 전에도 비가 내리지 않아 사람들이 놀랐다가 비가 한차례 내리자 모두 죽었다 다시 살아난 듯 기뻐했습니다. 천하에 물자비축이 없으면 이와 같은 심한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신서(新書) 中
서한 초기 열악한 환경에 놓여있는 농민들을 보면서 가의는 그들의 생활이 곤궁하게 된 것과 국가가 비축한 양식이 부족하게 된 이유로 조정의 농업홀시 정책을 꼽았다. 그래서 가의는 국가질서의 선결조건을 백성들의 윤택한 삶으로 보고, 백성들을 부유하게 만든다는 관점에서 농업을 중시하고 물자를 비축하는 정책을 시행할 것을 주장했다. 이는 관자의 민본 사상을 계승한 것인데, 관자는 “백성들의 삶이 넉넉하지 못했는데도 세상이 잘 다스려진 경우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라고 강조한 바 있다. 따라서 가의는 백성들에게 농업을 위한 안정된 여건을 조성해준다면 타고난 본성대로 열심히 일하며 재화를 비축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효과로 조정은 백성들을 수월하게 통치할 수 있을 것이며 조세수입의 측면에서도 유리할 것이라 보았다. 또한 당시 외부적으로는 흉노의 침략이 빈번했는데 이렇게 국력을 비축하면 유사시에 대비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상업 탄압과 사치 금지 정책
“백성들은 튼튼한 것을 버리고 교묘하게 장식하는 일에만 힘써 서로 경쟁하고 있습니다. 하루면 만들던 것들이 지금에 와서는 열흘이 걸려도 쉽게 만들 수 없지만, 1년은 쓸 수 있었던 것이 지금은 반년이면 부서지고 맙니다. 시일을 들여 정교하게 만들었어도 써보면 쉽게 망가지고 맙니다. 또 농사를 짓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농민들이 생산해낸 식량을 축내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천하가 궁핍한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에게 말단적인 일을 하게 하면 백성들은 크게 빈곤해지지만, 백성들에게 근본적인 일을 하게 하면 백성들은 크게 부유해지는 것입니다.” -신서(新書) 中
가의는 백성들 사이에 만연한 상업을 숭상하고 사치와 향락을 추구하는 풍조가 심각한 사회적 병폐가 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이를 방임할 경우 반드시 사회적 질서를 해치고 국가 경제의 근간을 위태롭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농업을 중시하고 물자를 비축해야 한다고 하는 주장 아래 조정에서는 반드시 이 풍조도 제지해야만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한편 이러한 현상은 농민들이 농업 생산에 종사하지 않고 상업에 종사하게 하여, 결국에는 곡식이 부족해지고 상업으로 벌어들인 재화로 사치와 향락에 빠지는 사태를 초래할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부유한 상인들은 복식에 있어서 오히려 제후를 능가해 천자와 맞먹으며 군주를 범하고 등급제도와 질서를 파괴했다. 결과적으로 가의의 중농억상 정책을 통해 그가 농업을 국가의 기간산업으로 바라봤음을 알 수 있다.
민간의 화폐 주조 금지 정책
한나라 문제시기에는 민간차원의 화폐 주조를 허가하는 정책이 시행되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사회 전반에 걸쳐서 불량화폐의 유통과 위조화폐의 남용이라는 폐단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각지에서 주조된 화폐는 그 품질이 제각각 다른 바람에 민간에서의 무역활동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게다가 화폐주조를 통해 얻는 이윤이 큰 것을 알게 된 백성들이 농사일을 버리고 이에 뛰어들자 농업이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따라서 가의는 조정에서 민간의 화폐 주조를 금지하는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화폐의 주원료인 구리도 쉽게 구할 수 없도록 백성들이 사적으로 이를 채굴하는 것 또한 엄격하게 금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하면 조정은 화폐의 기준을 확립해 민간에서의 분쟁을 감소시킬 수 있고, 농업에 전념하도록 할 수 있으며, 화폐 가치의 경중과 수량을 조절할 수 있어 시장의 물가를 안정시킬 수 있는 등의 이점이 있다고 피력하였다.
과진론(過秦論)
가의는 전한 초기에 ‘진을 비판하여 논한다’는 의미의 『과진론(過秦論)』을 지었는데, 진의 역사를 재평가하기 위함이었다. 가의는 상, 중, 하의 세편의 글로 진이 흥성한 이유와 단기간에 망하게 된 이유를 상세히 분석하고 있다. 전체적인 논리는 진이 역취(逆取)에는 성공했으나 순수(順守)에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상편에서는 진나라가 흥성한 과정과 패망한 이유를, 중편에서는 통일 이후의 형세를, 하편에서는 진나라 말기 농민들이 봉기한 상황을 논하고 있다. 대략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 상편) 진나라는 지리적인 이점과 웅대한 지략을 바탕으로 수 세대에 걸쳐 동쪽의 여섯 나라들을 약화시켜 결국에 중국을 통일했다. 하지만 진시황 사후 얼마 되지 않아 진섭이라는 일개 필부의 손에 의해 힘없이 멸망해버렸는데, 그 원인은 바로 진시황이 공격과 수비의 형세가 다름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개 필부가 난을 일으키자 나라가 망하고, 천자 또한 다른 사람의 손에 죽어서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무엇 때문인가? 이는 仁義의 정치를 펴지 못했고, 천하를 공격할 때와 지킬 때의 형세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一夫作難而七廟墮, 身死人手, 爲天下笑者, 何也? 仁義不施, 而攻守之勢異也.)
- 중편) 진나라는 종주국인 주나라가 역할을 다하지 못해 여러 나라들이 다투며 백성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졌기 때문이다. 주나라를 뒤이은 진나라는 백성들의 힘든 삶을 돌보지 않고 오직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데만 힘썼고, 진시황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이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는 백성들의 반발을 샀고, 일개 필부인 진섭이 반란에 성공한다.
“그러므로 편안히 안정되어 있는 백성들은 함께 더불어 의로운 일을 할 수 있고, 위태로운 지경에 처한 백성들은 함께 어울려 그릇된 일을 하기 쉽다.” (故曰: “安民可與爲義, 而危民易與爲非”, 此之謂也.)
- 하편) 뒤이어 황제가 된 삼세 자영도 실상을 파악하지 못했다. 만일 자영이 평범한 군주의 재질을 갖추었고 그에게 보통 재주의 신하라도 있었더라면, 종묘의 제사라도 이을 정도의 세력은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진시황과 이세를 거치며 사람들은 충언을 하길 두려워했고, 결국 조정에는 간신들만 남아 진 왕조는 단명하게 되었다.
“속담에 말하기를 ‘지난 일의 교훈을 잊지 않는 것은 앞으로의 일에 스승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군자는 상고의 역사를 살펴보고, 당대의 일에 비춰보고 人事에 적용해 보며, 흥망성쇠의 이치를 고찰하고 권위와 형세가 알맞은 지를 세밀히 살피며, 정책의 선택에 질서가 있으며, 변화하는 데는 시세를 따른다. 이 때문에 평안한 날이 오래 지속되고 사직이 안정되는 것이다.” (鄙諺曰: “前事之不忘, 後之師也” 是以君子爲國, 觀之上古, 驗之當世, 參之人事, 察盛衰之理, 審權勢之宜, 去就有序, 變化因時. 故曠日長久, 而社稷安矣.)
한 왕조에서 진이 단명한 이유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도 볼 수 있다. 진을 뒤이어 세워진 것이 한이기에, 이전 왕조의 과오를 지적하며 스스로를 정당화시킬 논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참고 문헌
- 가의(賈誼), 박미라 역, 『신서(新書)』, 소명출판사, 2007.
- 양중석, 「진의 단명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 과진론과 아방궁부 비교분석」, 명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8.
- 이연승, 「『가의신서(賈誼新書)』에 나타난 새로운 제국 질서의 사상적 기초 -덕(德) 중심의 우주관과 윤리관」,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9.
- 조원일, 「가의의 정치사상에 관한 연구」, 동양철학연구회,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