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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년 12월, 진나라의 도성인 신전(新田)이 있었다고 추정되는 산서성(山西省) 후마시(候馬市)의 동쪽 교외에서 다량의 석편과 옥편이 출토되었다. 약 5.000점 이상이 출토되었으나 그 중 형태와 글자가 명확한 것은 656점 이다. <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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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부분이 위 끝이 뾰족하고 아래는 네모진 규(圭)의 형태이며, 원과 반원 모양인 것도 일부 있다. 길이는 약 18cm~32cm, 너비는 약 2cm~4cm까지 다양하다. 글자체는 춘추 후기의 청동기 명문(銘文)과 비슷하다. 양면에는 붉은 먹(朱)으로 적은 것이 많았는데, 간혹 먹으로 쓰인 것도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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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춘추 말기 진나라 내부에서 신흥 대부 간에 권력 투쟁이 있었던 시기에 작성되었다. 구체적으로는 기원전 497~489년 범중항의 난이 발생했던 시기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975년 후마시에서 추가적으로 발견된 맹서에 신흥 대부 ‘중항인(中行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 ||
+ | '''회맹의 시대'''<br> | ||
+ | 서주 시대에서 [[춘추시대]]로 넘어오면서 주 천자의 권위는 약화되고, 각국의 제후들은 패자(覇者)가 되기 위한 패권 다툼을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대의명분이 중요한 시대였다.<br> | ||
− | + | 첫 번째 패자가 된 제 [[제환공|환공]]은 천자인 주왕을 존중하고 오랑캐를 몰아내어 중원의 질서를 바로 잡겠다는 [[존왕양이]]의 명분으로 [[회맹]]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회맹의 실제 목적은 각국의 제후들이 한자리에 모여 실속 있는 내용의 동맹을 체결하는 것이었다. 춘추시대 중기에서 후기로 들어서면, 각국의 제후 간 뿐만 아니라 국내의 경대부,가신 사이에서도 회맹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하위 계급인 경대부나 가신들도 국정의 실권을 잡으면서 내부 권력 투쟁이 잦아졌기 때문이다. | |
− | + | '''진나라 상황'''<br> | |
+ | 진나라에서도 역시 제후의 실권을 차지하려는 경대부와 가신들의 움직임이 있었다. 진 [[진문공|문공]]이 죽고, 진나라 공실(公室)의 힘이 쇠퇴하면서 신흥대부인 지(知),범(范),중항(中行),조(趙),한(韓),위(魏)가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전개했다. 이 여섯 성씨 중 조씨 일가의 본가와 분가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났는데, 이 내분에 다른 귀족들도 연루되면서 대규모 쟁란으로 발전하였다. <br> | ||
− | + | 내분의 발단은 이러하다. 본가의 주인인 조앙(趙鞅)이 분가인 조오(趙午)에게 500호의 [[위나라]] 백성을 맡긴 적이 있었는데, 3년 후 이 백성들을 돌려 달라고 요구했을 때 조오가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분노한 조앙이 조오를 살해하면서 내분이 발생한다. 조오의 아들인 조직(趙稷)이 중항인, 범길사를 끌어들여 조앙을 공격하였지만 결국 실패하고 범길사와 중항인은 제나라로 망명하였다. 이후, 본가인 조앙의 지배력을 강화하고 본가를 중심으로 일족과 백성들을 단결하기 위해 회맹을 체결하였다. 이 회맹에서 작성한 서약서가 바로 후마맹서이다. | |
+ | '''노나라 상황'''<br> | ||
+ | 당시 [[노나라]]에는 제후인 [[소공]](昭公) 대신 신하인 세 씨족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계손씨, 숙손씨, 맹손씨로 [[노 환공]](桓公)의 혈연이었기 때문에 [[삼환씨]]라고 불렸다. 기원전 517년 소공이 정권 탈취를 꾀하다가 실패하여 [[제나라]]에 망명하였다. <br> | ||
− | + | 기원전 505년은 계손씨의 가장인 계평자가 사망하여 상속 분쟁이 일어났다. 이때 양호(陽虎)라는 가신(家臣)이 소란한 틈을 타서 권력을 장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양호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자 하여 삼환씨의 가장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맹손씨의 공격을 받고 역시 제나라로 망명했다. 그러나 제나라에서 받아주지 않아 결국 진나라의 조씨에게로 도피했다. <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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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계손씨의 혈통이었던 [[공자]]가 이 소식을 듣고 “조씨 일가는 반드시 대대로 소동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 『[[춘추좌씨전]]』을 통하여 전해진다. 그리고 후에 동시대 자료인 후마맹서가 출토됨으로써 공자의 말이 실현되었음이 증명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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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마맹서의 의미== | ==후마맹서의 의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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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일:증후을묘죽간1.jpg|240픽셀|섬네일|오른쪽|증후을묘죽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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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기 문자의 실태=== | ===필기 문자의 실태=== | ||
− | 후마맹서는 최초로 발견된 | + | 후마맹서는 최초로 발견된 춘추시대의 유일한 필기 문자 자료이다. 후마맹서가 발견되면서 춘추시대 필기 문자의 실태가 처음으로 명확해졌다. 또한 가장 오래되고, 잘 정리된 필기 자료라고 할 수 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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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나라의 [[갑골문]]이나 도자기, 구슬 등의 파편에서도 모필(毛筆)로 쓴 문자를 발견할 수 있지만, 단편적인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에 필기 문자 자료로써의 의미는 적다. <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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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마맹서의 글자체에서는 모필 특유의 탄력성이 드러난다. 처음 글자를 쓸 때는 강하게 누르기 때문에 시작 부분이 두껍고, 그 다음 탄력을 이용하여 붓을 조금 들어 올린 후에 한 번에 빼버리기 때문에 중간 부분이 살짝 들려 있으면서 마지막 부분이 가늘고 뾰족한 모양을 띠게 된다. 이는 후대 [[삼절법]]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다 | ||
===과두문자와의 연관성=== | ===과두문자와의 연관성=== | ||
+ | [[과두문자]]는 중국의 옛 글자의 하나로 시작이 두껍고 마지막이 가늘고 뾰족한 서체를 가리킨다. 육조 시기 이후의 문헌에서 춘추 전국 시대의 필기문자를 가리키면서 과두문자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였다. <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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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나 대부분 그 개념이 막연하고, 문헌마다 나타내는 형태가 다양하기 때문에 실체가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고 있다. <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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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춘추경전집해』후서(後序)를 보면 두예(杜預)가 [[급총서]]를 실제로 본 뒤, 그것을 과두문자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급총서는 위나라 양왕(襄王)의 무덤에서 출토된 죽간으로 된 책이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전국 시대 중후기에 필사된 자료로 추측된다. 만약 급총서의 과두문자가 후마맹서와 같은 필기문자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춘추 시대 말기부터 전국 시대 중후기까지 북방 지역에서 이러한 형태의 필기문자가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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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증후을묘 죽간과의 연관성=== | ||
+ | [[증후을묘]]는 [[호북성]](湖北省) [[수주시]](隨州市)에 위치한 무덤이다. [[전국시대]]의 무덤으로 편종, 칠기상자, 무기, 죽간 등이 발견되었다. 증후을묘에서 출토된 죽간은 후마맹서와 가장 근접한 시기의 필기 자료라고 할 수 있다.<br> | ||
− | + | 후마맹서가 발견된 후마시는 북방, 증후을묘 죽간이 발견된 수주시는 초에 인접한 남방으로 볼 수 있는데 두 필기 자료 모두 비슷한 필법으로 쓰여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적어도 전국 시대 전기까지, 남방과 북방 모두 공통적인 필기 양식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
===다양한 이체자의 존재=== | ===다양한 이체자의 존재=== | ||
− | 후마맹서에는 민간에서 사용하던 대량의 이체자(異體字)가 수록되어 있다. 주조자와 필사자가 달라 오자가 많은 청동기 명문과 달리, 후마맹서는 필사자가 옥편에 직접 쓴 것이기 때문에 오자나 왜곡의 가능성이 적다. | + | 후마맹서에는 민간에서 사용하던 대량의 [[이체자]](異體字)가 수록되어 있다. 주조자와 필사자가 달라 오자가 많은 청동기 명문과 달리, 후마맹서는 필사자가 옥편에 직접 쓴 것이기 때문에 오자나 왜곡의 가능성이 적다. <br> |
+ | 후마맹서를 보면 하나의 글자가 여러 차례 다른 자형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필사과정에서의 오류나 누락이 아니고 당시의 보편적인 서사습관에서 온 이체자인 것이다. [[허신]]은 『[[설문해자]]·서』에서 이러한 문자 사용을 “文字異形”이라고 묘사하였다. | ||
==참고문헌== | ==참고문헌== |
2021년 3월 20일 (토) 02:06 기준 최신판
목차
개요
후마맹서(侯馬盟書)는 춘추 말기 진나라 조씨의 내분과 관련된 맹약서로, 가장 오래된 필기 문자 자료이다. 1965년 산서성 후마시(侯馬市)에서 발굴되었다.
후마맹서의 출토
1965년 12월, 진나라의 도성인 신전(新田)이 있었다고 추정되는 산서성(山西省) 후마시(候馬市)의 동쪽 교외에서 다량의 석편과 옥편이 출토되었다. 약 5.000점 이상이 출토되었으나 그 중 형태와 글자가 명확한 것은 656점 이다.
대부분이 위 끝이 뾰족하고 아래는 네모진 규(圭)의 형태이며, 원과 반원 모양인 것도 일부 있다. 길이는 약 18cm~32cm, 너비는 약 2cm~4cm까지 다양하다. 글자체는 춘추 후기의 청동기 명문(銘文)과 비슷하다. 양면에는 붉은 먹(朱)으로 적은 것이 많았는데, 간혹 먹으로 쓰인 것도 있다.
후마맹서의 시대적 배경
춘추 말기 진나라 내부에서 신흥 대부 간에 권력 투쟁이 있었던 시기에 작성되었다. 구체적으로는 기원전 497~489년 범중항의 난이 발생했던 시기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975년 후마시에서 추가적으로 발견된 맹서에 신흥 대부 ‘중항인(中行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회맹의 시대
서주 시대에서 춘추시대로 넘어오면서 주 천자의 권위는 약화되고, 각국의 제후들은 패자(覇者)가 되기 위한 패권 다툼을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대의명분이 중요한 시대였다.
첫 번째 패자가 된 제 환공은 천자인 주왕을 존중하고 오랑캐를 몰아내어 중원의 질서를 바로 잡겠다는 존왕양이의 명분으로 회맹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회맹의 실제 목적은 각국의 제후들이 한자리에 모여 실속 있는 내용의 동맹을 체결하는 것이었다. 춘추시대 중기에서 후기로 들어서면, 각국의 제후 간 뿐만 아니라 국내의 경대부,가신 사이에서도 회맹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하위 계급인 경대부나 가신들도 국정의 실권을 잡으면서 내부 권력 투쟁이 잦아졌기 때문이다.
진나라 상황
진나라에서도 역시 제후의 실권을 차지하려는 경대부와 가신들의 움직임이 있었다. 진 문공이 죽고, 진나라 공실(公室)의 힘이 쇠퇴하면서 신흥대부인 지(知),범(范),중항(中行),조(趙),한(韓),위(魏)가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전개했다. 이 여섯 성씨 중 조씨 일가의 본가와 분가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났는데, 이 내분에 다른 귀족들도 연루되면서 대규모 쟁란으로 발전하였다.
내분의 발단은 이러하다. 본가의 주인인 조앙(趙鞅)이 분가인 조오(趙午)에게 500호의 위나라 백성을 맡긴 적이 있었는데, 3년 후 이 백성들을 돌려 달라고 요구했을 때 조오가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분노한 조앙이 조오를 살해하면서 내분이 발생한다. 조오의 아들인 조직(趙稷)이 중항인, 범길사를 끌어들여 조앙을 공격하였지만 결국 실패하고 범길사와 중항인은 제나라로 망명하였다. 이후, 본가인 조앙의 지배력을 강화하고 본가를 중심으로 일족과 백성들을 단결하기 위해 회맹을 체결하였다. 이 회맹에서 작성한 서약서가 바로 후마맹서이다.
노나라 상황
당시 노나라에는 제후인 소공(昭公) 대신 신하인 세 씨족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계손씨, 숙손씨, 맹손씨로 노 환공(桓公)의 혈연이었기 때문에 삼환씨라고 불렸다. 기원전 517년 소공이 정권 탈취를 꾀하다가 실패하여 제나라에 망명하였다.
기원전 505년은 계손씨의 가장인 계평자가 사망하여 상속 분쟁이 일어났다. 이때 양호(陽虎)라는 가신(家臣)이 소란한 틈을 타서 권력을 장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양호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자 하여 삼환씨의 가장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맹손씨의 공격을 받고 역시 제나라로 망명했다. 그러나 제나라에서 받아주지 않아 결국 진나라의 조씨에게로 도피했다.
계손씨의 혈통이었던 공자가 이 소식을 듣고 “조씨 일가는 반드시 대대로 소동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 『춘추좌씨전』을 통하여 전해진다. 그리고 후에 동시대 자료인 후마맹서가 출토됨으로써 공자의 말이 실현되었음이 증명되었다.
후마맹서의 의미
필기 문자의 실태
후마맹서는 최초로 발견된 춘추시대의 유일한 필기 문자 자료이다. 후마맹서가 발견되면서 춘추시대 필기 문자의 실태가 처음으로 명확해졌다. 또한 가장 오래되고, 잘 정리된 필기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상나라의 갑골문이나 도자기, 구슬 등의 파편에서도 모필(毛筆)로 쓴 문자를 발견할 수 있지만, 단편적인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에 필기 문자 자료로써의 의미는 적다.
후마맹서의 글자체에서는 모필 특유의 탄력성이 드러난다. 처음 글자를 쓸 때는 강하게 누르기 때문에 시작 부분이 두껍고, 그 다음 탄력을 이용하여 붓을 조금 들어 올린 후에 한 번에 빼버리기 때문에 중간 부분이 살짝 들려 있으면서 마지막 부분이 가늘고 뾰족한 모양을 띠게 된다. 이는 후대 삼절법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다
과두문자와의 연관성
과두문자는 중국의 옛 글자의 하나로 시작이 두껍고 마지막이 가늘고 뾰족한 서체를 가리킨다. 육조 시기 이후의 문헌에서 춘추 전국 시대의 필기문자를 가리키면서 과두문자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였다.
그러나 대부분 그 개념이 막연하고, 문헌마다 나타내는 형태가 다양하기 때문에 실체가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고 있다.
『춘추경전집해』후서(後序)를 보면 두예(杜預)가 급총서를 실제로 본 뒤, 그것을 과두문자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급총서는 위나라 양왕(襄王)의 무덤에서 출토된 죽간으로 된 책이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전국 시대 중후기에 필사된 자료로 추측된다. 만약 급총서의 과두문자가 후마맹서와 같은 필기문자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춘추 시대 말기부터 전국 시대 중후기까지 북방 지역에서 이러한 형태의 필기문자가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증후을묘 죽간과의 연관성
증후을묘는 호북성(湖北省) 수주시(隨州市)에 위치한 무덤이다. 전국시대의 무덤으로 편종, 칠기상자, 무기, 죽간 등이 발견되었다. 증후을묘에서 출토된 죽간은 후마맹서와 가장 근접한 시기의 필기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후마맹서가 발견된 후마시는 북방, 증후을묘 죽간이 발견된 수주시는 초에 인접한 남방으로 볼 수 있는데 두 필기 자료 모두 비슷한 필법으로 쓰여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적어도 전국 시대 전기까지, 남방과 북방 모두 공통적인 필기 양식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양한 이체자의 존재
후마맹서에는 민간에서 사용하던 대량의 이체자(異體字)가 수록되어 있다. 주조자와 필사자가 달라 오자가 많은 청동기 명문과 달리, 후마맹서는 필사자가 옥편에 직접 쓴 것이기 때문에 오자나 왜곡의 가능성이 적다.
후마맹서를 보면 하나의 글자가 여러 차례 다른 자형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필사과정에서의 오류나 누락이 아니고 당시의 보편적인 서사습관에서 온 이체자인 것이다. 허신은 『설문해자·서』에서 이러한 문자 사용을 “文字異形”이라고 묘사하였다.
참고문헌
- 후쿠다 데쓰유키, 김경호·하영미 역, 『문자의 발견 역사를 흔든다』, 너머북스, 2016.
- 아츠지 데츠지, 김언종·박재양 역, 『한자의 역사』, 학민사, 1999.
- 강윤옥, 「후마맹서: 이체자의 유형 분석과 특징에 관한 소고」, 『중어중문학』50,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