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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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河南省 漯河市 許愼文化園의 허신상

개요

허신(許愼)은 『설문해자』를 집필한 후한 시대의 학자이다. 허신의 이름은 신愼이며 자字는 숙중叔重인데, 같은 ‘공손하게 삼감’이라는 의미를 지닌 중重을 자字[1]로 한 것이다. 또한, 신愼과 중重 사이에는 ‘신중’이라는 어휘가 있어 글자 사이에 밀접성이 있기도 하다.
허신은 여남 소릉의 사람이다. 여남은 군의 이름인데, 기록에 따르면 여남군에는 37개의 성(집락)이 속하여 있었다. 소릉은 그 성 가운데 하나를 말한다. 현재의 허난성 옌청현, 카이펑에서 남남서로 약 1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허신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후한서·유림전』에 1백여 글자로 간단하게 적혀있다.

"許愼字叔重、汝南召陵人也。性淳篤、少博學經籍、馬融常推敬之、時人爲之語曰、五經無雙許叔重。爲郡功曹、擧孝廉、再遷除洨長。卒于家。初、愼以五經傳説臧否不同、於是撰爲五經異義、又作説文解字十四篇、皆傳於世."

(허신의 자字는 숙중叔重으로, 여남 소릉인이다. 성품이 순독하고, 젊어서부터 경전을 두루 공부하여, 마융이 늘 그를 추대하고 공경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두고 말하길 “오경무쌍허숙증五經無雙許淑重(오경에 있어서는 허신과 쌍벽을 이룰만한 이가 없다)[2]”이라 하였다. 군의 공조가 되고, 효렴으로 기용되었다. 재천하여 효의 장을 제수받았다. 집에서 졸하였다. 허신은 오경의 전과 설의 기록이 일치하지 않음을 보고, 이에 찬술하여 『오경이의 五經異義』를 만들고, 또 『설문해자』 14편을 지었는데, 모두 세상에 전한다.)

경력

"군의 공조(功曹)가 되고, 효렴(孝廉)으로 기용되었다. 재천(再遷)하여 효장(洨長)을 제수받았다.”

허신이 여남군의 공조로 있을 때 효렴으로 등용되어 중앙에 나갔고, 얼마 있다가 재천되어 효장涍長에 재임, 후에는 중앙의 태위부로 전임하였다. 사임 후 향리로 가 벼슬살이를 하지 않고 죽었다.
허신이 실제로 어떤 일을 했는지에 관한 자세한 문헌 기록은 없다. 하지만 『후한서』의 『유림전』에 보면 ‘군君의 공조功曹’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공조는 한나라때 군현의 관청에서 실무를 담당하는 하급관리를 말한다. [3]현재로 치면 ‘근무 평가 담당관’의 일이다. 그의 주요 임무는 관리들의 공로를 조사하여 기록하는 일이었다.
그 후, 허신은 ‘효렴’으로 등용되어 중앙 관료 세계로 진출한다. 효렴은 효성이 있고 행실이 청렴결백한 자를 말한다.[4]
나중에 그는 재천, 즉 한 차례 다시 효렴에 등용된다. 효장涍長의 ‘효涍’는 현의 이름(현재의 안후이성 링비현 부근)이므로, 허신은 그 곳의 장관이었다. 두 차례 효렴직을 맡은 후에 그는 사직한 뒤 향리에서 죽는다.

죽음

허신의 탄생과 죽음 또한 뚜렷한 문서 기록이 없기 때문에 확실한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자료를 간접 고증하여 추측해볼 수 있을 뿐이다. 다만, 허신이 1세기에서 2세기에 걸쳐 살았던 인물임은 확실하다.
『후한서』의 『서남이전西南夷傳』을 통해 허신의 탄생과 죽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이 책은 중국의 서쪽, 남방에 있었던 이민족에 관한 책이다. 책의 ‘야랑국夜郞國’ 부분을 보면 “환제 때에 야랑군의 사람인 윤진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신은 미개한 지역에 태어나 예의를 모른다고 하여, 마침내 여남 사람 허신과 응봉을 따라 배워 경서와 도위(점과 점술 관련 과목)를 수학하였다. 학업이 이루어지자 향리로 돌아가 아동에게 가르쳤다. 이에 남방 지역에 비로소 유학의 학풍이 있게 되었다.”는 구절이 있다. 환제는 후한 제10대 황제로, 147년부터 167년까지 한을 다스렸다. 이를 통해 허신이 147년부터 167년까지 살아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설문해자』를 조정에 납부한 것이 121년이었으므로, 『설문해자』를 납부하고도 몇 십년 더 살았던 것을 추측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추정에 불과하다. 허신이 58년부터 147년까지 살았다는 주장 등등 자료마다 그 수치가 각기 다르다.

경력에 대한 논쟁

『설문상표說文上表』는 허신의 아들 허충(許沖)이 부친의 『설문해자』를 조정에 헌상하면서 함께 올린 상표上表이다. 때는 영원永元12년(기원 100년)으로, 『설문해자』가 만들어진지 20년만이었다.
『설문상표』에서 허충은 부친을 ‘고태위남합제주신(故太尉南閤際酒愼)’이라고 불렀다. 이로볼때 허충이 『설문해자』를 조정에 바칠 때 허신은 이미 ‘태위남합제주’라는 관직을 사임한 뒤였음을 알 수 있다. 즉 『후한서』의 『유림전』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아들이 쓴 『설문상표』로 보건데 ‘태위남합제주’가 허신의 마지막 관직이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5]
문제는 ‘태위남합제주(太尉南閤際酒)’가 정말 최고책임자라고 했다면, 이 기록이 『설문상표』에 짧게 나오는 정도로 그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이를 두고, ‘태위남합제주(太尉南閤際酒)’는 차관의 ‘장사’에 해당하는 것이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태위남합제주(太尉南閤際酒)’가 장사의 별명에 불과하다면, 그 관명이 『후한서』의 『유림전』에 나오지 않은 이유가 설명되기 때문이다. ‘태위남합제주(太尉南閤際酒)’가 장사를 말한다면, 그 봉록은 1천석이다. 『후한서』의 『유림전』에 나오는 ‘효장涍長’은 3백석 정도이다. 직위는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 일반적이고, 특별히 좌천됐다는 내용도 문헌에서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효장’에서 ‘태위남합제주’로 승진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설문해자』저술의 배경

분서갱유와 경서의 복원

허신 저술의 배경을 짚어보려면 경학 최대 문제인 금문과 고문 학파의 대립을 알아야한다. 진나라 때, 박사관들이 은, 주의 봉건제를 찬양하며 군현제를 은근히 비판하자, 이사李斯는 어리석은 유가들이 옛 것을 배워서 현대를 비난하고 있으니, 진나라의 기록만 남기고 민간의 『시경』 『서경』, 그 밖의 서적을 모두 태우라고 진시왕에게 제안했다. 진나라 국립대학 교수가 관리하는 서적은 통제대상 밖이었기 때문에, 『시경』 『서경』 등 경전이 모두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유가의 경전이 입은 타격은 엄청났다.
한 나라 때, 조정은 다시 서적 통제를 철폐하고 문헌을 구하기 시작한다. 한나라는 제남의 복생伏生이라는 자가 『서경』을 구두로 전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복생은 진나라의 박사관을 지낸 인물이었다. 조정은 관리를 파견하여 공부하게 이를 하였다. 이렇듯 『서경』 외에도 『역』 『예』 『춘추』와 같은 경전이 복구되면서 이를 따르는 여러 학파가 다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이 학파들은 모두 다 본문이 예서로 적혀 있는 책, 즉 ‘금문’의 경서를 가지고 강의를 했으므로 ‘금문학’이라고 불렸다.

고문학의 출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예서보다도 훨씬 옛 시대의 문자인 고문으로 적힌 경서가 출현하였다. 특히 고문 경서가 부각됐던 시점은 성제成帝의 시대이다. 성제는 유향 등 세 사람에게 궁중 소장의 서적을 조사하게 했다. 유향은 조사를 통해 목차를 작성하는 등의 역할을 했다. 유향의 아들 유흠은 계속해서 경전 서적을 조사, 분류했다. 그는 『춘추좌씨전』등을 연구하여, 원래의 유학과는 다른 새로운 해석을 발전시켰다. 그의 연구는 널리 받아들여지고, 고문학파는 점점 세력을 강화하게 된다. 결국 후한에 와서는 고문학파가 주류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고문과 금문은 동일한 경서여도 글자의 해석이 달랐고, 더 나아가 담고 있는 세계의 통치원리, 철학까지 달랐다. 이 둘은 단순히 해석 차이가 아닌 철학의 문제였고, 유학이 둘로 갈라질 만큼 그 차이가 컸다. 예는 다음과 같다. 『춘추』를 해석한 전傳에는 『공양전』 『곡량전』 『좌씨전』 등이 있는데, 앞의 둘이 금문이고, 『좌씨전』은 고문이다. 앞의 두 금문 전은 『춘추』에 있는 표현에 철저하게 구애된다. 반면 『좌씨전』과 같은 고문 전은 많은 에피소드를 도입해 『춘추』에 내포된 철학과 원리를 부각시키려고 했다.

금고문논쟁

무제 때의 유학은 관학의 지위에 올라, 국가는 공식적으로 유학을 공부하는 학문 관직을 만든다. 이것이 오경박사다. 하지만, 이에 오른 유학자들은 경서를 관리가 되기 위한 도구로 인식해 원래의 학문 취지에서 멀어져 갔다. 이렇게 되자, 오경박사에서도 학파의 정통성을 다투는 데만 열중하게 된다. 이에 유흠을 비롯한 고문파들은 금문학이 관학화 됐다며, 고문 경서가 공자의 뜻을 더 올바르게 전한다고 주장하였다. 유흠의 학풍은 신선한 것으로 세상에 받아들여진다.
유흠의 시대 때 정권을 잡고 있었던 것은 왕망王莽이다. 왕망은 왕실의 정권을 빼앗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나라 이름을 신新이라고 짓는다. 그는 고문의 경서를 이용해 자신의 정권을 정당화시킨다. 예를 들어 정권탈취를 태고 시대에 성천자 요堯가 성인 순舜에게 제위를 양보한 고사를 본뜨는 행위로 정당화시키는 식이었다. 그는 특히 『주례』를 중요하게 여겼다. 당시 유학자들은 이상적인 시대가 주나라에 있다고 믿었고, 정책 등 여러 방면에서 주 왕조로 회귀하고자 하였다. 왕망은 자신의 통치원리를 『주례』에서 찾으려고 하면서 유학자들에게 지지를 얻고 정권의 정통성을 확립하려고 했다.
왕망의 신新은 15년 만에 끝나고, 유수(후 광무제)가 한 왕실을 부활시킨다. 왕망을 타도한 후한은 다시 금문파를 채용한다. 하지만 금문학은 관학화, 왕망에 의한 타도 등으로 약해져 있었다. 또한, 고문파 역시 오랜 시간 동안 견고한 체계를 만들어 온 상태였다. 고문파는 정권에 상관없이 자신들의 연구 성과를 누적해 갔다. 이렇게 금문과 고문은 더욱 격렬하게 대립하게 된다. 장제章帝때는 백호관에서는 금문과 고문 학파의 대토론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곳에는 허신의 스승인 가규賈逵가 고문학파로 참가하였다.
허신 또한 이 때문에 고문학파로 분류되기는 하나, 허신은 금문의 학문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는 금문 경서에 탁월한 부분이 있다면, 이를 긍정해 사용하기도 했다. 또한, 고문경의 설이 아닌 금문 쪽에 찬성하기도 했다. 이러한 열린 학문의 자세를 갖춘 허신의 담긴 저술은 고문과 금문의 극심한 대립 상황에서 절충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설문해자』저술의 동기

"생각건데 문자란 학문의 근본이며, 군왕에 의한 통치의 기초이다. 또한 앞 시대 사람들이 후세에 모범을 드리우는 도구이자, 동시에 후세 사람들이 앞 시대를 배우는 도구이다. 그러므로 『논어』 『학이』편에는 “근본이 정해짐으로써 비로소 도가 생겨난다.”고 하였고, 『역』 『계사전』에서는 “천하의 진실로 심오한 것을 이해하면서, 더욱이 혼란 시키는 일이 없다.”

허신에게 학문의 근본을 경학을 의미했다. 그리고 경학은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규범을 배우는 필수적인 일이었다. 경서에 올바른 해석을 얻기 위해서는 문자 한 글자 한 글자의 올바른 해석을 해야 했다. 그는 이런 경서 해석에 기초적 방법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한, 백호관 회의를 통해, 관학으로서의 금문과 비정치적 실증주의적 경향의 고문의 조화 필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에, 『설문해자』를 만든다.

허신의 문자관

허신은 문자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만물을 조망해보려 했다. 이는 『설문해자』에서 ‘만물을 두루 통찰하고(萬物威觀)’, ‘변화의 이치를 알 아서 궁극의 진리를 규명하고자(知化第莫)’ 한다고 말한 것을 보아서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허신은 변화 발전하는 구체적인 현실에서 드러나는 다양성을 분석하고, 종합해 판단하는 문자의 구조론을 만들려 했다. 그는 단순히 문자의 형상으로 의미 해석을 하는 폐해를 고치고, 문자의 근원적인 원리로 회귀하게 하는 틀을 만들어보려 했다. 즉, 언어를 구성하고 있는 ‘소리’와 ‘의미’의 변화라는 역사적인 제약을 극복하는 ‘불변’의 틀을 만들어보려 했던 것이다. 이는 언어문자가 반영하고 있는 역사적인 속성과 어느 정도는 배치되는 것일 수 밖에는 없다.
『설문해자』는 총 본문 14권, 자서 1편으로 이루어진다. 기본 표제글자는 9333자이고, 해설은 총 13만 3411자로 이루어진다. 그는 최초로 한자를 부수법에 의해 분류하였으며, 자형의 구조를 육서법에 근거해 해설하였다.

허신에 대한 비판

20세기 초 갑골문자가 발견되고 나서, 『설문해자』는 문자자학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게 된다. 비과학적이고 미신에 가득 찬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다음은 중국 갑골문 권위자인 후허우쉬안이 비판한 내용이다.

"갑골문의 발견과 연구에 의하여 『설문해자』 가운데 적어도 10분의 2,3이 정정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허신의 이 책 속에는 종교적 미신의 색채와 철학적 주관에 의한 견해들이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허신이 숫자와 간지 글자를 해석한 것은 마치 완벽한 음양오행설과도 같다. (중간 생략) 그의 책은 ‘하늘과 사람의 관계를 궁구하고 고금의 변화에 통하여 일가의 말을 이룬’ 저술이라고는 말하 수 있으나, 과학적인 문자학의 저술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설문해자』에 갑골문이 발견된 현재 시점과 같은 논리적 잣대를 들이미는 것은 옳지 않다. 『설문해자』는 고대 문자를 체계적으로 해석한 중요한 참고서이고, 한자의 근원을 연구하고 한자의 구조 형태에 따라 이론적으로 상세히 밝혀낸 책이다. 또한, 『설문해자』는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주도면밀하게 구축된 문자에 의한 세계관, 고대 중국의 우주가 들어있다. 『설문해자』는 하나의 철학책이다. 『설문해자』는 『설문해자』대로, 갑골문은 갑골문 대로 다른 가치가 있는 것이다.

기타 허신의 저술

허신은 『설문해자』와 『오경이의』를 만들었다.
오경은 위에 나왔듯이 『역』 『시』 『서』 『예』 『춘추』 등 다섯 종료의 경서를 가리키는데, 이 책들은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근본 이념을 기록했다고 당시 사람들이 간주했던 경전들이다. 당시 사람들은 이 책들이 성인聖人의 심오한 진리를 담은 것으로 생각했다. 오경은 일반 사람들이 읽기에 어려웠고, 그 때문에 후세의 학자들이 오경에 해석을 적었다. 하지만, 허신의 시대에는 잘못된 해석이 많았고 허신은 이를 바로잡기 위해 『오경이의』와 『설문해자』를 만들었다. 『오경이의』는 오경에 관한 두 대립되는 학파의 설을 선택하여 통괄하는 것을 목적으로 서술한 책이다. 『오경이의』는 사라져 지금은 그 부분밖에 알 수 없다.
또한 허신은 『회남자』의 주注도 지었다. 『회남자』는 전한 무제 때 회남왕 유안이 편집한 것으로, 도가 사상을 기초로 하여 천체, 자연현상, 인간세계 전체, 처세술[6] 등을 기록한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후에 고유高誘가 만든 『회남자』 주注 가 유행하면서, 허신의 주는 고유의 주 속으로 편입된다. 현재 허신의 주만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참고문헌

단행본

왕닌 외, 김은희 역, 『설문해자와 중국고대문화』, 學古房」, 2010
아쓰지 데쓰지, 심경호 역, 『漢字學 : 설문해자의 세계』, 보고사, 2008
허신 외, 금하연 외 역, 『한한대역 단옥재주 설문해자』, 자유문고, 2015

학술논문

왕은지, 「자성(字聖)허신(許愼)약전(傳略)」, 건지인문학 3권0호, 2010
염정삼 , 「허신(許愼) 문자관(文字觀)의 이론적(理論的)인 축(軸) ― 육서론(六書論)을 중심으로 ―」, 中國文學, 한국중국어문학회, 2004

전자문서

维基百科 许慎 百度百科 许慎

각주

  1. 남들이 부를 때의 이름을 일컫는다. 과거 중국에서는 남의 이름을 입에 올리거나 쓰는 것을 실례라고 여겨, 남이 자신을 부르기 위한 이름을 별도로 지었다. 여자는 혼인, 남자는 관례를 올릴 때 붙인다.
  2. 오경이란 『역』 『시』 『서』 『예』 『춘추』 등 다섯 종료의 경서를 가리키는데, 이 책들은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근본 이념을 기록했다고 당시 사람들이 간주했던 경전들이다. 이 오경에 관한 학식으로 볼 때, 허신을 세상에 ‘비견할 자가 없는’ 인물이라고 한 것이다. ‘오경무쌍’의 ‘무쌍’은 어떤 분야에서 최고의 존재임을 찬미하는 표현이다.
  3. 한나라의 행정은 황제 직할의 군, 현과 제후황이 자치하는 국으로 나눠져 있었다. 군현의 통치에 장관이 파견되었는데, 이들이 현지에서 하급관리를 채용하였다.
  4. 허신이 살던 한나라 때에는 아직 과거 시험이 없었다. 중앙관리 채용은 지방장관이 현량賢良, 방정方正, 직언直言 등의 덕목에 적합한 자를 조정에 추천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5. '태위남합제주(太尉南閤際酒)’는 태위부의 속관이다. 태위부는 군사 사건이나 큰 의옥(죄상이 뚜렷하지 아니하여 죄의 유무를 파악하기 어려운 범죄사건, 또는 정치적인 증수회贈收賄 사건)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그 기관의 장관을 태위라고 한다. 태위는 사도, 사공과 아울러 ‘삼공’이라 불리는 고관으로, 국가 최고 보좌관 가운데 한 사람이다. ‘남합’은 삼공의 거처를 말한다. ‘쇄주’는 어떤 부국部局의 책임자를 말한다. 『속한서續漢書』에 따르면 이는 한 직책 가운데 원장자元長者를 가리킨다고 한다. 즉, 특정 직역 가운데 최고의 지위를 지닌 자를 규정하는 단어이다. 이를 모두 정리하면, ‘태위남합제주(太尉南閤際酒)’는 태위부에 속하여 그 실무를 통할하는 책임자를 말하는 것이다.
  6. 새옹지마의 일화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