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골문
갑골문(甲骨文)은 지금으로부터 약 3,300년 전 상나라(B.C.1600~B.C.1046)후기 은허(殷墟) 시기에 사용됐던 문자로서 한자의 원형이다. 갑골문은 귀갑수골(龜甲獸骨)의 약칭이다. 갑(甲)은 거북의 뼈를 의미하고 골(骨)은 짐승의 뼈를 의미한다. 여기에 새겨진 문자를 갑골문이라고 한다.
목차
갑골문의 발견
갑골문은 淸 光緖 24년(1898년) 금석학자(金石學者) 왕의영(王懿榮,1845~1900)에 의해 처음 확인되었다.
왕의영은 병에 걸려 약재를 사서 병을 치료하고 있었다. 한약방에서 조제해 온 약재에는 '용골(龍骨)'이라는 뼈 조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용골'이라는 뼈에는 자신이 연구하던 금문과 비슷한 문자의 흔적을 발견했다.그는 바로 한약방에 '용골'을 판매한 약재상을 소개해 달라고 요청했고 얼마 후 한약방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산동(山東)의 골동상 범유경(范維卿)은 12관의 '용골', 즉 갑골을 가지고 베이징의 왕의영을 찾아왔다. 왕의영은 그 갑골에 새겨진 문자를 보고 감정한 결과 금문보다 훨씬 앞선 상나라 시대의 문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왕의영은 1900년에도 범유경와 조집제(趙執齊)로부터 수천 편의 갑골을 구입했다. 그러나 왕의영은 그해 의화단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서양 연합군이 북경에 쳐들어 온 것을 막지 못한 책임을 지면서 스스로 우물에 빠져 자결했다. 그가 수집했던 갑골은 제자인 유악(劉鶚)이 물려 받았다. 유악은 1903년 왕의영으로부터 전해 들은 갑골에 대한 이야기와 갑골편을 선별해 <철운장귀(鐵雲藏龜)>라는 최초의 갑골문에 관한 책을 펴냈다.
왕의영이 약재로 구입한 용골에서 갑골문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해서 중국문자 관련 거의 모든 책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1931년 북경에서 발행된 화북일보(華北日報)라는 신문에 처음 실린 것으로, 그 이전의 기록은 아직까지 확인된 것은 없다.
- 이 해(1899년) 유악이 북경을 여행하면서 왕의영의 사저에 머물렀다. 이 때 왕의영이 학질에 걸려서 약으로 쓸 귀판을 야채시장 입구에 있는 달인당(達仁堂)에서 구입하였다. 철운이 귀판에 전문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왕의영에게 보였는데, 두 사람은 크게 놀랐다. 왕의영은 예전에 금문을 배워 이것이 고대의 물건임을 알고, 약방에 가서 이 귀판의 내력을 캐물었더니 하남의 탕음과 안양에 사는 주민들이 땅에서 파낸 것이라고 하였다. [1]
한편 이보다 앞선 1898년 천진의 맹정생(孟定生)과 왕양(王襄,1876~1965)이 처음 발견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왕의영이 감정했던 당시만 해도 이런 갑골이 어디에서 출토 되었으며, 그것의 성질에 대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었다. 1908년에 이르러서야 나진옥(羅振玉)이 처음으로 갑골의 출토지점이 하남성 안양(安陽)의 은허(殷墟)라는 사실을 밝혀내었으며, 이어서 그와 왕국유(王國維)는 은허라는 곳이 바로 상나라의 후기 수도였다는 사실을 고증해 내었다. 갑골의 발견과 은허의 성질에 대한 추정은 드디어 1928년부터 은허에 대한 대대적이고도 종합적인 발굴이 이루어지도록 했으며, 중앙연구원 역사연구소에서 1928년부터 1937년까지 총 15차례에 걸친 발굴을 했다.
이 은허의 대대적인 발굴은 바로 중국 현대고고학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갑골의 발굴은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고고학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발굴 결과 은허에서는 상나라 때의 갑골이 대량으로 발견되었으며, 은허는 원수(洹水) 남쪽 강변의 소둔(小屯)마을을 중심으로 하여 그 면적이 약 24 ㎢에 이르는 대형 유적지였다. 이곳은 일찍이 북송시기 때부터 이미 명문을 지닌 상나라 때의 청동기가 출토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지는 곳이기도 했다.
1953년 정주의 이리강(二里崗)상나라 유적지에서도 상나라 때의 갑골이 발견되었고, 이곳에서 발견된 갑골 중 2편에서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글자가 새겨진 갑골의 수가 너무 적어 문구를 해독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이는 발굴이 아닌 채집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 상나라 때의 갑골 연구는 은허에서 출토된 갑골이 실제 대상이 되고 있다. 하지만 정주 지역의 갑골의 발견은 상나라 때의 갑골문이 은허 지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중요한 발견이다.
그 이후, 주나라 유적지에서도 서주시대의 갑골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1954년 산동성 홍동현의 방퇴 마을을 시작으로 북경 창평현의 백부, 섬서성 장안현의 풍호 유적지, 부풍현과 기산현 사이에 광범위하게 위치한 주원(周原)유적지 등 지금까지 모두 네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그중에서도 1977년부터 출토된 주원 유적지에서 발견된 수량이 가장 많다. 기산현의 봉추 마을에서 출토된 갑골은 무려 1만여 편에 이르며, 그 중 글자가 새겨진 것만 해도 3백여 편에 달한다. 서주 갑골문의 발견은 갑골학 연구의 범위를 한층 확대시켜 주었다.
갑골문의 시기 구분
은허에서 출토된 갑골이 반영하는 시기의 경우, 지금까지 명확한 근거가 밝혀진 것으로는 제23대 무정(武丁)에서부터 제30대 제을(帝乙) 시기에 이르는 복사들이다. 제20대 반경(盤庚)으로부터 제22대 소을(小乙)까지의 복사와 마지막 제31대 제신(帝辛) 시기에 속하는 복사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발견된 갑골문 중 무정(武丁) 시기에 속하는 갑골의 수량이 가장 많아 갑골 전체 수량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1993년 동작빈(董作賓)은 <갑골문시기구분연구예(甲骨文斷代硏究例)>라는 논문에서, 은허에서 출토된 갑골의 시기를 다음과 같은 다섯 시기로 구분하였다.
제1기: 반경, 소신, 소을, 무정 시기
제2기: 조경, 조갑 시기
제3기: 름신, 강정 시기
제4기: 무을, 문정 시기
제5기: 제을, 제신 시기
갑골문의 성격
갑골문은 상나라 시기의 문자지만 상나라 문자와 갑골문은 다른 개념이다. 상나라 시기에는 갑골문 이외에도 청동기나 토기,석기,옥기 등에 새겨진 글자들이 현존하고 있으며 죽간 등에 쓰인 문자도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갑골문이 상나라 때의 모든 문자라고 할 수는 없다. 실제로 갑골문은 제한적인 성격을 지닌 비교적 특수한 문자이다. 왜냐하면 갑골문은 그 대부분이 상나라의 왕실에서 행했던 점복에 관련된 글자만이 제한적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갑골문이 상나라 때의 문자를 대표한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금까지 발견된 갑골문의 개별 글자수는 약 5000여 자에 달한다. 이러한 숫자는 오늘날 중국을 비롯한 한국 및 일본에서 사용되고 있는 상용한자 수가 약 2000~3000여 자임을 고려한다면 상당히 방대한 숫자이다. 이렇게 볼 때 갑골문은 이미 초기단계가 아닌 상당히 발전한 단계의 한자로 볼 수 있다. 이는 개별 글자 수가 많다는 사실에서 뿐만 아니라 글자 구조의 복잡성과 발전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갑골문자의 독음(讀音)은 단음절로 1자 1음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합문(合文)의 형태도 있다. 또한 10 이상의 숫자도 모두 기본적으로 합문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합문은 그 형태면에서 볼 때는 한 개의 글자이지만 실제로는 두 글자가 합쳐진 것으로 읽을 때는 두 음 모두를 읽어야 한다. 이와 같은 합문형식은 중국 고문자에서 비교적 장기간 사용된 것으로서 서주(西周)의 금문(金文)에서 자주 나타날 뿐 아니라 진간(秦簡)이나 한간(漢簡)에서까지도 나타난다.
중국 고대의 문자학자들은 한자의 여러가지 구성형태에 근거하여 육서(六書)라는 한자의 구성원칙을 내놓았다. 동한(東漢)때의 허신(許愼)은 한자를 지사(指事), 상형(象形), 형성(形聲), 회의(會意), 전주(轉注), 가차(假借)로 분류하고 있다.
갑골문에서도 위의 여섯 가지 형태를 모두 찾아낼 수 있지만 상형, 형성, 가차 의 세 종류가 더욱 빈번하게 나타난다. 지금까지 확인된 갑골문자를 살펴보면 초기, 즉 상(商)왕 무정(武丁)을 전후한 시기의 갑골문 중에는 상형자가 비교적 많다. 말기인 상(商)왕 제을(帝乙), 제신(帝辛)의 시기에 이르면 상형자는 점차 감소하고 형성자가 더욱 증가하는데, 이처럼 당시에 많은 문자가 음과 의미를 갖춘 기본적인 토대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은허(殷墟) 갑골문은 이미 엄격한 체계를 갖춘 고문자라고 할 수 있다.
갑골문의 특징
갑골문의 다양한 명칭
글자를 새겼다는 의미에서 계문(契文), 은계(殷契), 갑골각사(甲骨刻辭)라고 하고, 점을 친다는 의미에서 복사(卜辭),은허복사(殷墟卜辭)라고 한다. 또한 점을 친 사람을 정인(貞人)이라하여 정복문자(貞卜文字)라고도 부른다. 출토된 지역의 이름을 따서는 은허문자(殷墟文字), 은허서계(殷墟書契)로도 불린다.
갑골에 새겨진 이유
거북의 등은 둥근 반구형 모습으로 하늘을 나타내고, 편평한 배딱지는 대지는 편평하다는 고대 중국인들의 생각과 흡사하다. 거북의 배딱지는 중국인의 우주관을 담고 있는 亞형을 닮아 있어 상나라 사람들은 우주의 실제 상황인 亞와 거북의 모습을 동일시 하였다. 여기서 亞는 우주의 중심을 의미한다. 상왕조 귀족들의 무덤이나 묘실, 상왕실과 관계되는 친족, 귀족 등의 족휘를 나타내는 청동기 금문에 '亞'의 형태가 나타나 있다. 상왕조가 이처럼 '亞'를 표기한 것은 우주의 중심인 '아'가 바로 상나라라고 생각 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거북도 '亞'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신성한 신탁을 기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거북은 예로부터 장수하고 신성한 동물로 여겨져 신비의 영물로 인정받았다. 중국 고대신화에서 인간을 창조한 것으로 알려진 여와(女娲)라는 여신이 하늘을 떠받치기 위해 거북의 발을 이용했다는 기록이 거북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상나라는 원시시대의 유목생활에서 농경시대로 넘어가는 단계에 있었다. 따라서 주변의 소규모 부족들을 규합하고 통일시키려면 강력한 제재수단이 필요했기 때문에 신탁에 의지를 하였다. 그 때 거북은 신탁을 받는 도구로서 채택되었다.
갑골문자의 형태
현재 남아 있는 갑골문자를 살펴보면 완전히 오늘날의 한자의 특성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거에 어떤 사람들은 중국의 한자를 방괴자(方塊字)라고 불렀는데 갑골문 역시 이러한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갑골문 중에는 먼저 붓으로 그렸다가 후에 칼로 새겨진 극소수의 큰 글자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인 모든 글자가 전문적인 청동칼로 거북껍데기와 소뼈의 표면에 직접 새겨졌기 때문이다. 거북껍데기와 소뼈는 모두 비교적 단단하여 새겨진 선들이 거의 직선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절대 다수의 자형이 방형이나 장방형을 이루었다.
이러한 독특한 문자의 예술은 오늘날까지도 보존되어 어떤 필체의 한자를 쓰든지 간에 여전히 방형이나 장방형의 모양이 주류를 이루는 것이다. 또한 갑골문에는 이미 적지않은 편방자(偏方字)가 있으며 그 형체를 살펴보면 일부 문자의 새김 방법이 오늘날의 것과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문자들은 이미 3천여년 전에 그 기본 형태가 갖추어졌을음 알 수 있다.
갑골문의 구성
정인의 역할
수집된 갑골들은 '정인(貞人)'이라는 특수 집단이 관리했고, 점복을 했다. 정인이란 요즘 시대의 무당과 같은 역할을 했던 사람이다. 당시의 무당은 신과 교감을 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점복의 해독, 즉 신탁의 길흉은 왕이 직접 풀이하지만 신에게 묻는 행위는 정인이 담당했다. 그리고 점복의 결과가 나오면 이를 기록하는 것도 정인의 역할이었다. 갑골문에는 모두 120여 명의 정인이 갑골을 관리-정리-기록했다고 한다.
정인들의 첫 번째 임무는 외지로부터 공납 받은 갑골을 점복에 사용할 수 있도록 정리하고 관리하는 것이다. 정인들은 몸을 정결하게 하고 신에게 제사를 드린 뒤, 수집된 거북을 잡아 점복의 재료로 만들었다. 잘 다듬어진 귀갑은 매끄러운 부분을 앞면, 좀 거친 부분을 뒷면이라 하는데, 뒷면에 홈을 팠다. 이 홈을 찬착(鑽鑿)이라고 하는데 둥글게 판 부분을 찬이라 하고, 타원형에 가까운 것을 착이라고 한다. 이러한 작업을 하는 이유는 점복을 할 때 열이 골고루 전해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 뒤에 정인은 점을 치고, 그 과정과 결과를 기록한 다음 이를 관리하고 보관을 하였다.
점복의 내용
점복은 인간이 하늘의 뜻을 물어 응답을 구하는 신성한 행위이다. 점을 치는 데는 순서가 있다. 정인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 따로 마련된 제단인 향(享)에서 점복 준비를 마치면, 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점복 행사에 참여하면서 점복이 시작된다. 정인은 먼저 몇월 며칠에 누가 어떤 내용을 신에게 묻는다고 고한 다음, 쑥대 같은 것에 불을 붙여 홈을 파 놓은 뒷면에 대여 점을 치면, 앞면에는 복(卜)자가 나타난다. 이 복(卜)의 모양을 보고 왕이 직접 길흉을 판단했다. 복(卜)자의 옆으로 그어진 선이 바르거나 위로 향하면 길(吉)한 것으로, 부정확하거나 밑으로 향하면(凶)한 것으로 풀이했다.
정인은 왕으로부터 풀이된 내용을 듣고 이를 기록하고, 왕이 풀이한 길흉이 맞는지 여부도 기록했다. 이것이 갑골문을 기록한 형식이었다. 날짜와 점을 치는 사람, 즉 정인(貞人)을 기록하는 것을 전사(前辭)라고 했다. 점칠 내용을 묻는 것을 명사(命辭)라고 했고, 점친 결과를 보고 왕의 신탁의 의미인 길흉을 풀이하는 것을 점사(占辭)라고 했다. 마지막 그 결과를 기록하는 것을 험사(驗辭)라고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갑골문에는 점사와 험사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그 이유는 왕이 점친 결과를 보고 천기를 누설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왕이 혼자서 처리할 뿐 정인에게 신탁 내용을 말해주지 않거나, 결과의 기록을 금지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갑골문의 가치
상나라 때의 갑골문은 대부분 점복과 관계가 있다. 당시의 사람들은 점복을 매우 신실하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중요성을 막론하고 언제나 점복에 의해 해결하려고 했다. 따라서 복사(卜辭)의 내용도 뜻밖에 매우 풍부하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회의 여러 다향한 측면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인해 갑골문은 기타의 다른 학문과도 매우 밀집한 관계를 맺으며 도움을 주고 있다.
첫째, 갑골문은 은허문화 등의 시기구분에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 해주었다.
둘째, 갑골문은 신빙성이 높은 1차적 자료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과제로 남았던 많은 역사적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그 중 주원갑골은 商나라와 周나라의 관계사에 대한 규명에 결정적 자료가 될 수 있었다.
셋째, 고대 과학기술의 이해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농업기술을 비롯해 의료기술에 대한 연구에도 갑골문이 큰 역할을 했다.
이처럼 갑골문의 연구는 한자학이나 언어학적인 측면 이외에도 당시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을 이해하는데 매우 주요한 사료임이 틀림없다.
참고문헌
- 하영삼, 『한자의 세계』, 신아사, 2013, ISBN 978-89-8396-831-9
- 신영자, 『갑골문의 비밀』, 문출판사, 2011, ISBN 978-89-94427-12-6
- 심재훈, 『甲骨文』, 민음사, 1990
- 김경일, 『갑골문 이야기』, 바다출판사, 1999, ISBN 89-87180-45-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