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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20일 (월) 20:00 기준 최신판
전한 10대 황제 재위기간 BC 74∼BC 49
선제의 즉위
소제 사후 곽광에 의해 창읍왕(昌邑王) 하(賀)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즉위하기 위해 장안으로 오는 도중 부녀자를 납치하고, 신하들과 음주가무를 즐기는 등 추태가 말이 아니었다. 즉위식에서는 천명이 자신에게 계승되도록 하는 의식에서 친배조차 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창읍에서 데려온 신하들에게 요직을 남발하였다. 이 때문에 곽광은 태후의 이름으로 그를 폐위시키고, 여태자의 손자인 병기(病己)를 황제의 자리에 앉혔다. 그가 곧 전한의 10대 황제 선제이다.
선제의 친정
BC 68년 오랜 기간 최고의 권력을 누리던 곽광이 병사했다. 곽광의 집권 시기 요직을 모두 곽광의 친인척들이 맡았으니, 곽광 사후에도 그의 부인 등은 자신들의 세력을 믿고 사치와 방종을 일삼았다. 이에 선제는 그들을 몰아내고 친정(親政)을 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우선 그는 내조의 요직 상서가 가진 정치적 특권을 박탈했다. 또한 이 일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어사대부 위상(魏相)을 승상으로 임명하고, 곽씨 일가가 장악하고 있던 병권을 차례로 몰수하였다.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선제가 황후가 곽씨 일가에 의해 독살당한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일어났다. 이 일로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곽씨 일가는 모반 계획을 세웠으나 계획이 사전에 탄로나 전 곽씨 일가가 죽음을 당하였다. 오랜 기간에 걸쳐 집권했던 곽씨 일가가 무너지자 이로써 선제는 드디어 친정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선제의 통치
선제는 친정을 시작한 이후 유가와 법가를 고루 등용하여 통치의 균형을 맞추었다. 유가출신 관료를 통해 인의정치를 시행하였고 법령을 일률적으로 적용하여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국가 시스템을 만들기위해 법가를 채용하여 통치를 안정시킨 것이었다. 또한 선제는 지방 통치에 큰 관심을 기울였는데, 덕분에 이 시기에는 백성을 사랑과 온정으로 통치한다는 뜻의 순리가 많이 출현하였다. 이를 비롯하여 선제는 염철 전매 제도하에서 소금 가격을 내리고, 백성들을 위해 공전(公田)과 동유(苑囿)를 개방하는 등의 정책을 시행하는 등의 선정을 펼쳤다.
선제의 통치사상은 유가사상에 심취했던 황태자(원제)에게 훈시한 내용을 통해 그 대강을 이해할 수 있다.
'“한왕조에는 본래 독자적인 제도가 있어서 패도(법가)와 왕도(유가) 양측이 함께 사용되고 있다. 유가의 학설만을 따라 주의 정책을 채택할 수는 없다.'
'특히 일반적으로 유가는 상황에 따라 판단하지 못하면서 옛 제도만을 옳다 하고 지금의 것은 쓸모가 없다고 하여 사람들의 판단을 호도하고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이해하지 못한다.'
' 어찌 유가의 무리들에게 정책을 위임할 수 있겠는가.' [1]
- ↑ 이춘식, <중국고대사의 전개>, 신서원, 1986, p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