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교와 불교"의 두 판 사이의 차이
Impeccable13 (토론 | 기여) (→도교) |
Impeccable13 (토론 | 기여) (→도교) |
||
9번째 줄: | 9번째 줄: | ||
== 도교 == | == 도교 == | ||
− | <br>확실한 교설도 없으며 제창한 교조도 없는 것이 특징인 [[도교]]는 내세보다 현생의 삶 자체에 기본적인 전제를 두고 욕구 추구를 근본적인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끊임없는 전쟁과 왕권 찬탈이 이루어지는 혼란한 정치적 상황속에서 지식인들은 세속적인 현실을 떠나 자연속에 은거해 자신의 내면을 수양하고자 했고 자연스레 도가 사상은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죽림7현]]의 [[ | + | <br>확실한 교설도 없으며 제창한 교조도 없는 것이 특징인 [[도교]]는 내세보다 현생의 삶 자체에 기본적인 전제를 두고 욕구 추구를 근본적인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끊임없는 전쟁과 왕권 찬탈이 이루어지는 혼란한 정치적 상황속에서 지식인들은 세속적인 현실을 떠나 자연속에 은거해 자신의 내면을 수양하고자 했고 자연스레 도가 사상은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죽림7현]]의 [[청담]]사상이 있는데, 이들은 [[유가]]들이 격식있게 옷을 차려입거나 깨끗하게 머리와 수염을 깎는 것을 비웃으며, 남루한 옷을 입거나 수염을 깎지 않고 손님을 맞이할 때는 알몸으로 나서는 등의 자기해탈을 추구했다. 또한 깊은 산 속에 은거하며 당시 권력자들과 한 통속이 되지 않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자신의 인격과 절개를 지키고자 했다. 이렇게 자연 속에서 정치에서 벗어난 자연속의 자유로움을추구한 자들을 은사라고 한다. 도가사상이 도교라는 종교로 일체감을 갖게 된 것은, 후한 말 장각(張角)의 [[태평도]]와 삼장(三張)의 오두미도에서 나름의 교법을 갖고 그것에 기초한 교단이 조직된 후 동진 말과 남북조 초가 되어서이다. 이렇게 도가사상은 남북조 시대에 들어 도교라는 하나의 종교로서 통합되어 간다. 도교는 충실한 삶과 그러한 삶을 무한히 연장하려는 욕구를 신비적 실천이나 수양에 의하거나 혹은 초인간적인 힘에 의지하여 달성하고자 한다. 초기 도교 신도의 핵심 구성원은 유망 농민이거나 파산 또는 궁핍한 농민이었다. 도교는 한중 지역에서 종교왕국을 건설한 사천의 성한(成漢)정권에서 세력을 확대한 바 있고, 북위 시대 구겸지의 활약으로 [[불교]] 대신 국교의 지위를 차지한 적이 있으며, [[남조]] 도교에서 보듯이 어용·관방화한 측면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반왕조적·민중적 성격의 종교였다. |
2016년 6월 21일 (화) 17:42 기준 최신판
위진남북조 시대의 민중들은 북방 유목민의 남침과 그치지 않는 전쟁 그리고 그로 인한 사회적 혼란으로 하루하루 생활하기가 힘들었다. 때문에 정신적 위안과 안식을 얻을 수 없었다. 이렇게 정신적으로 황폐한 민중들에게 그들의 의식을 안정시켜 줄 사상이 필요했는데 이러한 현실의 배경으로 불교, 조로아스터교가 서역을 통해 도입되었고, 도교가 교단을 구축하며 종교로서 위상을 확립했다. 특히 불교와 도교는 민중들에게 크게 사랑을 받아 곳곳에 사원이 건축되었다. 뿐만 아니라 불상과 신상들이 조각되었고 종교화가 그러져 예술 활동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사회적 혼란과 불안은 민중들에게만 위협을 준 것은 아니었으며 이민족과 소수 문벌 귀족 들이 관직을 독점하면서 지식인 계층은 관직을 얻기 힘들었다. 그리하여 지식인 계층에서 종래 입신양면의 인생관을 버리고 ‘더러운 속세’를 초탈하여 은둔 생활을 지향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들은 술과 시, 노래를 벗 삼았고 기이하고 충동적 행동을 일삼으며 현실 세계를 조롱하였다. 그들의 허무·염세주의적인 경향은 현실에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려 했기 때문에 그들은 자연히 무위자연을 주장하는 노장 사상과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은둔 생활을 주장하는 불교의 선종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들은 허무와 무위자연의 노장사상을 기본으로 삼아 일체의 현실적 욕망을 털어 버리고 도덕을 경시하며 현실에 초월하는 세계관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청담 사상이다. 이런 청담 사상은 당시 사회에서 선진적 사고로 인식되어 관리들 사이에서도 유행했는데 그 결과 관리들은 무사안일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니까 청담 사상을 일면 사회· 정치의 기강을 흐려 놓기도 한 셈이다.
불교
불교가 본격적으로 중국에 정착하게 된 것은 서역과 관련이 깊은 유목민들이 화북을 지배한 오호십육국 시대부터였다. 불교는 호조군주들에게 화이론적 차별의 대상이 아니었다. 또한 초자연적인 힘으로 재난을 물리치고 전쟁에서도 예견 능력을 발휘하는 신이승(神異僧)은 그 시대 상황과 부합하여 특별한 존재로 부각되었다. 불도징이 후조 왕조에 영입되었고, 그의 제자 동안은 전진 왕조에서 크게 활약했다. 특히 부견은 구마라습을 데려오고자 여광에게 7만의 병사를 주어 쿠차를 정복하게 하였을 정도였다. 돈황에 석굴이 개착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구마라습은 후진 왕조에게 국사가 되어 3000명의 제자를 모아 불경 번역에 힘썼고, 그 결과 8년 동안 74부 384권을 번역하여 불교 교리를 중국에 소개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운강 및 용문 등지의 대석굴 조영이 모두 이민족 왕조 하에서 이뤄졌다는 것은 불교와 호족정권의 밀접성을 말해준다.
오호 · 북조 시대의 불교는 민중의 종교라기보다 황제의 종교였다. 운강석굴 가운데 '담요오굴(曇曜五窟)'로 알려진 대불들이 황제의 모습을 띤 것이라든지 북위 태무제와 북주의 무제시기 양차에 걸쳐 폐불이 단행된 것도 불교가 국가에 종속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황제는 당금의 여래”라고 인정한 북조 불교는 “사문은 왕자(王者)에게 경례하지 않아도 된다.”는 입장을 고수했던 남조 불교와는 달랐다. 특히 네 번에 걸쳐 삼보의 종이라 칭하며 사원에 자신의 몸을 위탁하였고 그때마다 신하들이 수억 전을 사원에 지불하고 황제를 다시 찾아와야 했던 양무제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불교가 이 시대에 이르러서 성행하게 된 것은 난세의 지속과 민중의 아픔이라는 시대상과 연관이 있다. 그러나 도교와 비교할 때 역시 불교는 국가 또는 황제의 종교로서의 성격이 짙었다.
도교
확실한 교설도 없으며 제창한 교조도 없는 것이 특징인 도교는 내세보다 현생의 삶 자체에 기본적인 전제를 두고 욕구 추구를 근본적인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끊임없는 전쟁과 왕권 찬탈이 이루어지는 혼란한 정치적 상황속에서 지식인들은 세속적인 현실을 떠나 자연속에 은거해 자신의 내면을 수양하고자 했고 자연스레 도가 사상은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죽림7현의 청담사상이 있는데, 이들은 유가들이 격식있게 옷을 차려입거나 깨끗하게 머리와 수염을 깎는 것을 비웃으며, 남루한 옷을 입거나 수염을 깎지 않고 손님을 맞이할 때는 알몸으로 나서는 등의 자기해탈을 추구했다. 또한 깊은 산 속에 은거하며 당시 권력자들과 한 통속이 되지 않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자신의 인격과 절개를 지키고자 했다. 이렇게 자연 속에서 정치에서 벗어난 자연속의 자유로움을추구한 자들을 은사라고 한다. 도가사상이 도교라는 종교로 일체감을 갖게 된 것은, 후한 말 장각(張角)의 태평도와 삼장(三張)의 오두미도에서 나름의 교법을 갖고 그것에 기초한 교단이 조직된 후 동진 말과 남북조 초가 되어서이다. 이렇게 도가사상은 남북조 시대에 들어 도교라는 하나의 종교로서 통합되어 간다. 도교는 충실한 삶과 그러한 삶을 무한히 연장하려는 욕구를 신비적 실천이나 수양에 의하거나 혹은 초인간적인 힘에 의지하여 달성하고자 한다. 초기 도교 신도의 핵심 구성원은 유망 농민이거나 파산 또는 궁핍한 농민이었다. 도교는 한중 지역에서 종교왕국을 건설한 사천의 성한(成漢)정권에서 세력을 확대한 바 있고, 북위 시대 구겸지의 활약으로 불교 대신 국교의 지위를 차지한 적이 있으며, 남조 도교에서 보듯이 어용·관방화한 측면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반왕조적·민중적 성격의 종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