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환공"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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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이름 = 제환공[齊桓公, qí huán gōng ]<br> | |
− | + | |그림 = 제환공의 상.jpg | |
− | + | |출생일 = BC.716년 | |
+ | |사망일 = BC.643년 | ||
+ | |관련 활동 = 정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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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개요== | ||
+ | 성은 강(姜)이고, 씨(氏)는 여(呂)이며, 이름은 소백(小白)이다. [[춘추]](春秋)시대 [[제]](齊)나라 15대 군주로 춘추오패(春秋五霸, 제환공, [[진문공]], [[초장왕]], 오왕[[부차]], 월왕[[구천]]) 중 한 사람이다. <br> | ||
+ | BC 685년에 군주로 등극했다. 강태공(姜太公) 여상(呂尚)의 12대 손이고, 제희공(齊僖公) 녹보(祿甫)의 셋째 아들이다. 모친은 위국(衛國) 사람이다. <br> | ||
− | + | 재위 중에 [[관중]] (管仲)을 재상으로 삼고 개혁을 추진했다. 군정(軍政) 합일과 병민(兵民) 합일 제도를 만들어서 강성해지기 시작했다. BC 681년에 견(甄)에서 송(宋), 진(陳)나라 등 4개국의 제후회맹(諸侯會盟)을 주도했다. <br> | |
− | + | 당시 중원(中原) 화하(華夏) 각 제후국들은 융적(戎狄) 부락 등의 공격을 받고 있어서 제환공은 ‘[[존왕양이]] (尊王攘夷, 왕실은 높이고 오랑캐는 물리친다)’의 기치를 내걸고, 북쪽으로 산융(山戎)을 공격하고, 남쪽으로 [[초]](楚)나라를 정벌하여 중원에서 첫 번째 패주(霸主)가 되었다. 그러나 만년에 관중이 죽고, 역아(易牙), 수초(豎貂) 등의 소인(小人)들을 등용시키는 바람에 끝내는 내란 중에 아사했다. | |
− | + | ==춘추오패의 첫 번째 패자== | |
− | + | 제나라(오늘날 산동성에 위치) 환공(제환공)은 춘추오패의 첫 번째 패자이다. 춘추오패란 중국 춘추시대의 5명의 패자를 뜻한다.>중국에서 제국 또는 제후 간에 맺어지는 회합이나 맹약을 회맹이라고 하는데, 회맹의 맹주가 된 자를 패자라고 한다.<br> | |
− | + | 《순자(荀子)》에 의하면 오패는 제(齊)나라의 환공, 진(晉)나라의 문공, 초(楚)나라의 [[장왕]], 오(吳)나라의 왕 합려, 월(越)나라의 왕 구천을 가리킨다. 혹은 진(秦)나라의 목공, 송(宋)나라의 양공이나 오나라 왕 부차 등을 꼽는 경우도 있다.<br> | |
− | == | + | ==즉위 과정== |
+ | 공자 소백(제환공)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그의 이복형인 제양공이 재위 중이었다. 그러나 그는 정치를 제대로 하지 않았으며 폭정을 일삼았다.<br /> | ||
+ | 그의 포악무도함이 자신에게 까지 영향을 미칠까 염려했던 강소백은 거나라(산동성 거현에 있던 소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였고, 포숙(鮑叔)이 그를 보좌하고 있었다.<br> | ||
+ | 그의 둘째 형님인 공자 규 또한 노나라(현재의 산동성 서쪽)에서 [[관중]]과 소홀의 보필을 받으며 망명생활을 하였다. <br> | ||
+ | 한편 제양공은 이복 여동생이자 노나라 환공의 아내인 문강과 간통하였는데, 노환공이 이를 알고, 제양공에게 따지자 그는 자신의 추문을 막고자 팽생을 시켜 노환공을 부축하는 척하다 갈비뼈를 부려뜨려 죽였다.<br> | ||
+ | 국빈 방문 중이던 최고 지도자를 잃은 노나라에서 제나라를 향한 외교적 항의가 빗발쳤고 그에 대한 비난 여론은 더욱 확산되었다.결국 제나라 대신이었던 연칭과 무지 등이 공모해 쿠데타를 일으켜 제양공을 죽이고, 무지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br> | ||
+ | 그러나 무지는 제나라 임치성 근처 옹림에 놀러갔다가 옹림 사람들에게 시해를 당하고 만다.이에 제나라 중신 가운데 한명인 고혜(高傒)는 몰래 사람을 보내 자신과 친분이 있는 공자 소백에게 빨리 돌아와 왕위에 오를 것을 권하였다.<br> | ||
+ | 동시에 공손무지의 시해사건을 알게 된 노나라 장왕 또한 직접 군사를 이끌어 공자 규를 호위하며 제나라로 발 빠르게 움직였고, 동시에 [[관중]]으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가서 소백의 귀국을 저지하라고 명을 내린다. (규가 명령했다는 서술도 있다) | ||
+ | [[관중]]은 밤낮으로 말을 몰아 소백 일행을 따라 잡은 후 기회를 노려 소백에게 활을 쏘았다. 소백이 쓰러진 것을 확인한 관중 일행은 그가 죽은 줄 알고 여유있게 임치(제나라 수도)에 환도하였으나 그는 이미 도착하여 왕위에 올라 있었다. <br /> | ||
+ | 사실 관중의 화살은 그의 혁띠의 연결고리(쇠 부분)에 맞아 빗나갔고, 그는 기지를 발휘해 죽은 것처럼 연기하여 그들을 방심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그는 기회의 순간을 잘 포착하여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 ||
− | + | ==제환공 그리고 관중과 포숙([[관포지교]], 管鮑之交)== | |
− | + | 공자 규가 제위에 실패하자, 노나라는 제나라와 전쟁을 벌이지만 패하였다. 이에 승리한 제환공은 노나라에 공자 규를 죽이고 관중을 소환하라고 명한다.결국 관중은 죄수용 수레에 실려 제나라로 들어와 옥에 갇히게 되었다.<br> | |
− | + | 한편 제환공은 포숙을 재상으로 삼으려 했으나 포숙은 이를 사양하며 자신보다 더 뛰어난 관중을 적극적으로 추천하였다. 그러나 제환공은 “관중이 쏜 활에 나는 죽을 뻔하였다. <br /> | |
− | + | 내가 그를 살려준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지 그를 재상으로 삼으라니 당치도 않은 소리다.”라며 거절하였다.<br> | |
+ | 이에 포숙은 “신하된 자는 누구든 자신의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도리입니다. 관중이 대왕을 쏠 때 그의 마음 속에는 오직 공자 규 밖에 없었습니다. <br /> | ||
+ | 만약 대왕께서 관중을 등용한다면 관중은 반드시 대왕을 위해 천하를 화살로 쏠 것입니다.”라며 계속하여 추천하자 제환공은 관중의 죽음을 일단 면해주었다.<br> | ||
+ | 관중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 포숙은 기회를 보아 다시 제환공에게 간하였다. <br /> | ||
+ | "대왕께서 제게 은총을 베풀어 추위와 굶주림을 면하게 해주신 것에 대해 감격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저는 재주가 부족하여 이 나라를 천하를 호령할 강대국으로 만들 능력이 없습니다. | ||
+ | 제나라만 다스리려면 저나 습붕정도로 충분하지만 패자가 되어 여러 제후를 통솔하는 우두머리가 되고 싶다면 관중 없이는 안 됩니다. | ||
+ | 그러니 지난 원한은 잊어버리고 관중을 과감하게 발탁하십시오.”라며 제환공을 설득하였고, 결국 제환공은 그의 말을 받아들여 관중을 발탁하였다.<br> | ||
+ | 이처럼 제환공의 참모였던 포숙은 친구인 관중이 자신보다 뛰어난 것을 알고, 그에게 재상자리를 양보하였던 것이다. <br> | ||
+ | 관중은 정치가이자 경제전문가로, 그는 농업을 중시하던 당시 풍토와는 다르게 상공업을 가장 중시하였다.<br> | ||
+ | 제나라는 바닷가 쪽에 위치한 나라로, 제염업, 어업, 무역업 등이 특히나 중요하였는데, 이에 관중은 이러한 나라의 모든 입지 조건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국가의 정책을 설정하며 획기적인 발전을 일구어 냈다.<br> | ||
+ | 관중을 통해 제환공은 춘추오패의 첫 패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제환공 뒤에는 관중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관중 뒤에는 포숙아가 있었다.<br> | ||
+ | 사마천의 기록에 따르면 “세상 사람들은 관중의 재능과 덕을 칭찬하기보다는 사람을 알아본 포숙아를 더 칭찬했다”고 하였다. 관중 또한“나를 낳아주신 분은 부모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이었다”라고 고백했다.<br> | ||
− | == | + | ==인재등용(정료지광, 庭燎之光)== |
− | + | 제환공은 인재등용에 큰 관심을 보였다. 앞서 포숙의 권유에 따라 자신을 죽이려했던 관중을 등용한 것과 같이 이러한 그의 열린 인사 정책을 잘 설명해주는 고사성어가 庭燎之光(정료지광)이다.<br /> | |
− | + | 이는 뜰에 횃불을 매달아 밝혀놓는다는 뜻으로, 진정으로 좋은 인재를 기다리는 준비와 마음가짐을 말한다.<br /> | |
− | + | ||
− | + | 제환공은 인재들을 만나는데 있어서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그는 어느 날 밤에 자신을 만나러 오는 인재들이 깜깜한 정원에서 길을 못 찾아 헤맬 것을 염려하려 횃불로 정원을 밝혀 놓으라고 명령하였다.<br> | |
− | + | 그러나 불을 밝힌 지 한 해가 지났지만 자신을 찾아오는 인재가 한 명도 없었다. 노심초사하던 어느 날 마침내 선지자를 자처하는 한 사람이 찾아와 알현을 청하였다.<br> | |
− | + | 그는“대왕께서 한밤중에도 불을 밝히고 인재를 구하는데 한 해가 지나도록 단 한 사람도 오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br /> | |
− | + | 이는 모든 인재들이 대왕의 지혜로움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했기에 자신들의 능력과 재주가 도움이 되지 못할까봐 아무도 오지 않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제가 비록 점치는 재주는 있다 하나 보잘 것 없는 기술일 뿐입니다. <br /> | |
− | + | 만약 대왕께서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저를 발탁하면 적어도 저보다 뛰어난 인재들이 얼마든지 찾아와 몰려들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br> | |
+ | 이에 제환공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환대하자 정말로 인재들이 몰려들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 ||
− | == | + | ==정치와 외교== |
+ | (1) 패자로 우뚝 선 제환공<br /> | ||
− | + | 제환공 5년에 제나라는 노나라를 공격하였다.<br> | |
− | + | 수세에 몰린 노나라는 제나라에게 땅 일부를 바치면서 휴전 요청을 하였다. <br> | |
− | + | 노나라 왕이 환공과 휴전 조약을 맺으려 할 때, 갑자기 노나라 장군 조말이 단상으로 뛰어올라 환공의 목에 칼을 들이댔다.<br> | |
− | + | 그는 강대국인 제나라가 약한 노나라를 자주 침범하는 것은 도가 지나치기에 제나라가 지금까지 차지한 노나라 땅을 돌려달라고 말하였다.<br> | |
− | 이에 | + | 이에 환공은 위급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그러겠다고 약속하였다. 하지만 그는 한낱 노나라 장군에게 당한 것을 분하게 여겨 그를 죽이고 약속을 어기고자 하였다.<br> |
− | + | 이에 관중이 약속을 저버리면 신의를 잃게 되고, 신의가 없으면 제후들에게 신뢰를 잃게 되어 천하로부터 따돌림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한다고 간언하였다.<br> | |
− | + | 또한 사사로운 이익을 버리고, 제후들의 신망을 받아 큰 이익을 얻으라고 당부하였다. 그의 말에 따라 제환공은 조말과의 약속을 지키며 노나라 땅을 모두 돌려주었다.<br> | |
− | + | 이 일로 인해 제환공은 제후들로부터 높은 숭상을 받으며 제후들이 제나라와 연맹을 결성하기 시작했고 환공 7년, 제나라는 강대국으로 떠오르며 패자로 우뚝 서게 된다. <br> | |
− | + | 이처럼 제환공은 관중의 외교정책에 따라 제후들의 신뢰를 얻고자 하였다. 관중의 외교정책은 강력한 무력으로 제후들을 압박하는 것이 아니라 인의의 덕을 펼쳐서 제후들의 신뢰를 얻는 것이었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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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처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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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2) 존왕양이(尊王攘夷)<br /> | |
− | + | 제환공 23년, 북방의 만족인 산융(山戎)이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침공하였고, 연나라는 제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br> | |
+ | 환공은 패왕의 신분으로 출병하여 산융을 물리치고 중원을 구하였다. 환공이 임무를 완수하고 제나라로 돌아갈 때, 연나라왕 장공이 감사의 표시로 친히 배웅을 하다가 | ||
+ | 그만 제나라 영토 50여리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당시엔 오직 천자만이 국경을 넘어 배웅할 수 있었다.)<br> | ||
+ | 이를 발견한 제한공은 “예로부터 제후의 송별은 국경을 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제가 연나라 왕께 무례를 범하였네요.”하면서 사과의 표시로 장공이 밟고 온 영토를 연나라에게 할양하였다.<br> | ||
+ | 그 후 연나라는 ‘제환공의 공덕이 연나라에 머물다’라는 의미로 연류(燕留)라고 이름 붙였고, 이곳을 거점으로 북방의 대국이 될 수 있었다. <br> | ||
− | + | -> 제환공은 춘추 시대의 정치적, 외교적 명분으로 처음으로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내세웠다. 이는 주나라 천자를 떠받들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뜻이다. <br> | |
+ | 당시 오랑캐는 남쪽의 초나라로, 초나라가 점점 강성하여 중원의 나라들을 넘보자 초나라를 상대하기 위해 다음의 구호를 내세워 중원의 나라들을 지키고자 하였다.<br> | ||
− | + | ==제환공의 말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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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제환공은 42년간 재위하며 거의 70세까지 통치하였다. 그러나 말년에 그는 정치를 망치고 말았다.포숙과 관중이 먼저 세상을 떠난 뒤, 말년의 제환공 주위에 역아, 개방, 수조 라는 세 명의 간신이 있었다. <br> | |
− | 제환공 | + | 관중은 위 세 명의 간신을 가까이 하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으나, 제환공은 그들이 자신을 기쁘게 해준다면서 가까이 하였다. <br /> |
− | + | 하지만 제환공이 병석에 눕자 세 명의 간신들은 제환공을 농락하며 그를 세상으로부터 단절시켰고 나아가 그를 별궁에 숨겼다. 결국 제환공은 그곳에서 생사를 오고가며 굶어죽고 만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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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참고자료== |
+ | 1) <난세에 답하다(사마천의 인간 탐구)>, 김영수 저<br /> | ||
− | + | 2) <사기 속의 인물이야기>, 사마천 저(엄광용)<br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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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47744&cid=40942&categoryId=33403 두산백과, 춘추오패] | ||
− | + | [[분류:인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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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28일 (수) 14:12 기준 최신판
제환공[齊桓公, qí huán gōng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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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BC.716년 |
사망 |
BC.643년 |
관련 활동 | 정치 |
목차
개요
성은 강(姜)이고, 씨(氏)는 여(呂)이며, 이름은 소백(小白)이다. 춘추(春秋)시대 제(齊)나라 15대 군주로 춘추오패(春秋五霸, 제환공, 진문공, 초장왕, 오왕부차, 월왕구천) 중 한 사람이다.
BC 685년에 군주로 등극했다. 강태공(姜太公) 여상(呂尚)의 12대 손이고, 제희공(齊僖公) 녹보(祿甫)의 셋째 아들이다. 모친은 위국(衛國) 사람이다.
재위 중에 관중 (管仲)을 재상으로 삼고 개혁을 추진했다. 군정(軍政) 합일과 병민(兵民) 합일 제도를 만들어서 강성해지기 시작했다. BC 681년에 견(甄)에서 송(宋), 진(陳)나라 등 4개국의 제후회맹(諸侯會盟)을 주도했다.
당시 중원(中原) 화하(華夏) 각 제후국들은 융적(戎狄) 부락 등의 공격을 받고 있어서 제환공은 ‘존왕양이 (尊王攘夷, 왕실은 높이고 오랑캐는 물리친다)’의 기치를 내걸고, 북쪽으로 산융(山戎)을 공격하고, 남쪽으로 초(楚)나라를 정벌하여 중원에서 첫 번째 패주(霸主)가 되었다. 그러나 만년에 관중이 죽고, 역아(易牙), 수초(豎貂) 등의 소인(小人)들을 등용시키는 바람에 끝내는 내란 중에 아사했다.
춘추오패의 첫 번째 패자
제나라(오늘날 산동성에 위치) 환공(제환공)은 춘추오패의 첫 번째 패자이다. 춘추오패란 중국 춘추시대의 5명의 패자를 뜻한다.>중국에서 제국 또는 제후 간에 맺어지는 회합이나 맹약을 회맹이라고 하는데, 회맹의 맹주가 된 자를 패자라고 한다.
《순자(荀子)》에 의하면 오패는 제(齊)나라의 환공, 진(晉)나라의 문공, 초(楚)나라의 장왕, 오(吳)나라의 왕 합려, 월(越)나라의 왕 구천을 가리킨다. 혹은 진(秦)나라의 목공, 송(宋)나라의 양공이나 오나라 왕 부차 등을 꼽는 경우도 있다.
즉위 과정
공자 소백(제환공)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그의 이복형인 제양공이 재위 중이었다. 그러나 그는 정치를 제대로 하지 않았으며 폭정을 일삼았다.
그의 포악무도함이 자신에게 까지 영향을 미칠까 염려했던 강소백은 거나라(산동성 거현에 있던 소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였고, 포숙(鮑叔)이 그를 보좌하고 있었다.
그의 둘째 형님인 공자 규 또한 노나라(현재의 산동성 서쪽)에서 관중과 소홀의 보필을 받으며 망명생활을 하였다.
한편 제양공은 이복 여동생이자 노나라 환공의 아내인 문강과 간통하였는데, 노환공이 이를 알고, 제양공에게 따지자 그는 자신의 추문을 막고자 팽생을 시켜 노환공을 부축하는 척하다 갈비뼈를 부려뜨려 죽였다.
국빈 방문 중이던 최고 지도자를 잃은 노나라에서 제나라를 향한 외교적 항의가 빗발쳤고 그에 대한 비난 여론은 더욱 확산되었다.결국 제나라 대신이었던 연칭과 무지 등이 공모해 쿠데타를 일으켜 제양공을 죽이고, 무지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무지는 제나라 임치성 근처 옹림에 놀러갔다가 옹림 사람들에게 시해를 당하고 만다.이에 제나라 중신 가운데 한명인 고혜(高傒)는 몰래 사람을 보내 자신과 친분이 있는 공자 소백에게 빨리 돌아와 왕위에 오를 것을 권하였다.
동시에 공손무지의 시해사건을 알게 된 노나라 장왕 또한 직접 군사를 이끌어 공자 규를 호위하며 제나라로 발 빠르게 움직였고, 동시에 관중으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가서 소백의 귀국을 저지하라고 명을 내린다. (규가 명령했다는 서술도 있다)
관중은 밤낮으로 말을 몰아 소백 일행을 따라 잡은 후 기회를 노려 소백에게 활을 쏘았다. 소백이 쓰러진 것을 확인한 관중 일행은 그가 죽은 줄 알고 여유있게 임치(제나라 수도)에 환도하였으나 그는 이미 도착하여 왕위에 올라 있었다.
사실 관중의 화살은 그의 혁띠의 연결고리(쇠 부분)에 맞아 빗나갔고, 그는 기지를 발휘해 죽은 것처럼 연기하여 그들을 방심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그는 기회의 순간을 잘 포착하여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제환공 그리고 관중과 포숙(관포지교, 管鮑之交)
공자 규가 제위에 실패하자, 노나라는 제나라와 전쟁을 벌이지만 패하였다. 이에 승리한 제환공은 노나라에 공자 규를 죽이고 관중을 소환하라고 명한다.결국 관중은 죄수용 수레에 실려 제나라로 들어와 옥에 갇히게 되었다.
한편 제환공은 포숙을 재상으로 삼으려 했으나 포숙은 이를 사양하며 자신보다 더 뛰어난 관중을 적극적으로 추천하였다. 그러나 제환공은 “관중이 쏜 활에 나는 죽을 뻔하였다.
내가 그를 살려준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지 그를 재상으로 삼으라니 당치도 않은 소리다.”라며 거절하였다.
이에 포숙은 “신하된 자는 누구든 자신의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도리입니다. 관중이 대왕을 쏠 때 그의 마음 속에는 오직 공자 규 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대왕께서 관중을 등용한다면 관중은 반드시 대왕을 위해 천하를 화살로 쏠 것입니다.”라며 계속하여 추천하자 제환공은 관중의 죽음을 일단 면해주었다.
관중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 포숙은 기회를 보아 다시 제환공에게 간하였다.
"대왕께서 제게 은총을 베풀어 추위와 굶주림을 면하게 해주신 것에 대해 감격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저는 재주가 부족하여 이 나라를 천하를 호령할 강대국으로 만들 능력이 없습니다.
제나라만 다스리려면 저나 습붕정도로 충분하지만 패자가 되어 여러 제후를 통솔하는 우두머리가 되고 싶다면 관중 없이는 안 됩니다.
그러니 지난 원한은 잊어버리고 관중을 과감하게 발탁하십시오.”라며 제환공을 설득하였고, 결국 제환공은 그의 말을 받아들여 관중을 발탁하였다.
이처럼 제환공의 참모였던 포숙은 친구인 관중이 자신보다 뛰어난 것을 알고, 그에게 재상자리를 양보하였던 것이다.
관중은 정치가이자 경제전문가로, 그는 농업을 중시하던 당시 풍토와는 다르게 상공업을 가장 중시하였다.
제나라는 바닷가 쪽에 위치한 나라로, 제염업, 어업, 무역업 등이 특히나 중요하였는데, 이에 관중은 이러한 나라의 모든 입지 조건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국가의 정책을 설정하며 획기적인 발전을 일구어 냈다.
관중을 통해 제환공은 춘추오패의 첫 패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제환공 뒤에는 관중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관중 뒤에는 포숙아가 있었다.
사마천의 기록에 따르면 “세상 사람들은 관중의 재능과 덕을 칭찬하기보다는 사람을 알아본 포숙아를 더 칭찬했다”고 하였다. 관중 또한“나를 낳아주신 분은 부모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이었다”라고 고백했다.
인재등용(정료지광, 庭燎之光)
제환공은 인재등용에 큰 관심을 보였다. 앞서 포숙의 권유에 따라 자신을 죽이려했던 관중을 등용한 것과 같이 이러한 그의 열린 인사 정책을 잘 설명해주는 고사성어가 庭燎之光(정료지광)이다.
이는 뜰에 횃불을 매달아 밝혀놓는다는 뜻으로, 진정으로 좋은 인재를 기다리는 준비와 마음가짐을 말한다.
제환공은 인재들을 만나는데 있어서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그는 어느 날 밤에 자신을 만나러 오는 인재들이 깜깜한 정원에서 길을 못 찾아 헤맬 것을 염려하려 횃불로 정원을 밝혀 놓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불을 밝힌 지 한 해가 지났지만 자신을 찾아오는 인재가 한 명도 없었다. 노심초사하던 어느 날 마침내 선지자를 자처하는 한 사람이 찾아와 알현을 청하였다.
그는“대왕께서 한밤중에도 불을 밝히고 인재를 구하는데 한 해가 지나도록 단 한 사람도 오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이는 모든 인재들이 대왕의 지혜로움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했기에 자신들의 능력과 재주가 도움이 되지 못할까봐 아무도 오지 않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제가 비록 점치는 재주는 있다 하나 보잘 것 없는 기술일 뿐입니다.
만약 대왕께서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저를 발탁하면 적어도 저보다 뛰어난 인재들이 얼마든지 찾아와 몰려들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제환공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환대하자 정말로 인재들이 몰려들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정치와 외교
(1) 패자로 우뚝 선 제환공
제환공 5년에 제나라는 노나라를 공격하였다.
수세에 몰린 노나라는 제나라에게 땅 일부를 바치면서 휴전 요청을 하였다.
노나라 왕이 환공과 휴전 조약을 맺으려 할 때, 갑자기 노나라 장군 조말이 단상으로 뛰어올라 환공의 목에 칼을 들이댔다.
그는 강대국인 제나라가 약한 노나라를 자주 침범하는 것은 도가 지나치기에 제나라가 지금까지 차지한 노나라 땅을 돌려달라고 말하였다.
이에 환공은 위급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그러겠다고 약속하였다. 하지만 그는 한낱 노나라 장군에게 당한 것을 분하게 여겨 그를 죽이고 약속을 어기고자 하였다.
이에 관중이 약속을 저버리면 신의를 잃게 되고, 신의가 없으면 제후들에게 신뢰를 잃게 되어 천하로부터 따돌림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한다고 간언하였다.
또한 사사로운 이익을 버리고, 제후들의 신망을 받아 큰 이익을 얻으라고 당부하였다. 그의 말에 따라 제환공은 조말과의 약속을 지키며 노나라 땅을 모두 돌려주었다.
이 일로 인해 제환공은 제후들로부터 높은 숭상을 받으며 제후들이 제나라와 연맹을 결성하기 시작했고 환공 7년, 제나라는 강대국으로 떠오르며 패자로 우뚝 서게 된다.
이처럼 제환공은 관중의 외교정책에 따라 제후들의 신뢰를 얻고자 하였다. 관중의 외교정책은 강력한 무력으로 제후들을 압박하는 것이 아니라 인의의 덕을 펼쳐서 제후들의 신뢰를 얻는 것이었다.
(2) 존왕양이(尊王攘夷)
제환공 23년, 북방의 만족인 산융(山戎)이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침공하였고, 연나라는 제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환공은 패왕의 신분으로 출병하여 산융을 물리치고 중원을 구하였다. 환공이 임무를 완수하고 제나라로 돌아갈 때, 연나라왕 장공이 감사의 표시로 친히 배웅을 하다가
그만 제나라 영토 50여리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당시엔 오직 천자만이 국경을 넘어 배웅할 수 있었다.)
이를 발견한 제한공은 “예로부터 제후의 송별은 국경을 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제가 연나라 왕께 무례를 범하였네요.”하면서 사과의 표시로 장공이 밟고 온 영토를 연나라에게 할양하였다.
그 후 연나라는 ‘제환공의 공덕이 연나라에 머물다’라는 의미로 연류(燕留)라고 이름 붙였고, 이곳을 거점으로 북방의 대국이 될 수 있었다.
-> 제환공은 춘추 시대의 정치적, 외교적 명분으로 처음으로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내세웠다. 이는 주나라 천자를 떠받들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뜻이다.
당시 오랑캐는 남쪽의 초나라로, 초나라가 점점 강성하여 중원의 나라들을 넘보자 초나라를 상대하기 위해 다음의 구호를 내세워 중원의 나라들을 지키고자 하였다.
제환공의 말년
제환공은 42년간 재위하며 거의 70세까지 통치하였다. 그러나 말년에 그는 정치를 망치고 말았다.포숙과 관중이 먼저 세상을 떠난 뒤, 말년의 제환공 주위에 역아, 개방, 수조 라는 세 명의 간신이 있었다.
관중은 위 세 명의 간신을 가까이 하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으나, 제환공은 그들이 자신을 기쁘게 해준다면서 가까이 하였다.
하지만 제환공이 병석에 눕자 세 명의 간신들은 제환공을 농락하며 그를 세상으로부터 단절시켰고 나아가 그를 별궁에 숨겼다. 결국 제환공은 그곳에서 생사를 오고가며 굶어죽고 만다.
참고자료
1) <난세에 답하다(사마천의 인간 탐구)>, 김영수 저
2) <사기 속의 인물이야기>, 사마천 저(엄광용)
3) 두산백과, 춘추오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