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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진]]나라 말기부터 [[한]]나라 초기까지 유방을 중국의 패자로 만든 정치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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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기== | ||
+ | ===[[유방]]의 신하(臣)=== | ||
+ | 지금 중국의 강소성 서주시 그 당시 패현 풍읍에서 태어나 자랐다. 당시 아버지를 따라 법 관련 공부를 하고 패현의 서기로 일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정장(亭長)(=고대의 관리직 이름)을 하던 유방이 패현에서 여산까지 만리장성을 인부를 데리고 가다가 실수를 하여 망탕산에 숨어 살게 된다. 그러나 점점 유방을 따르는 이들이 많아지고 세력이 커지게 된다. 이를 알게 된 소하는 현령에게 유방을 천거하여 패현의 수문장을 권하고 즉시 [[번쾌]]에게 달려가 유방을 산 속에서 모셔오게 한다. 그러나 현령이 도중에 마음을 바꾸어 유방을 들이지 못하게 하자 소하와 그의 부하 조참은 바로 현령을 죽이고 유방을 패현령으로 모시어 지방을 다스리게 한다.{{인용문|유방이라는 사람에게는 세상을 바꿀 커다란 운이 따르고 있다!<br>}}소하를 비롯한 [[조참]], 번쾌 등의 인물과 함께 진나라를 부수고 후에 한나라를 건국하는 과정의 시작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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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나라 반란=== | ||
+ | BC 207년, [[진승]]과 [[오광]]의 반란이 일어나 진나라는 큰 혼란에 빠져있었다. 이 반란이 불씨가 되어 전국 각지에 농민과 지방 세력들의 반란이 끊이질 않았다. 오히려 유방은 이러한 반란에 편승하기보다 잠시 물러나 세력을 키우는 것에 집중했다. 더욱이 장량까지 무리에 합류하여 항량으로 하여금 병사를 빌리고 소하는 병사를 먹일 군량과 보급물자들을 철저히 관리하여 점차 [[항우]]에 맞설 대항마로 유방 세력의 규모를 키워나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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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양]]에 들어가 대륙의 지도와 호적을 얻다==== | ||
+ | 초 회왕의 유방 밀어주기를 통해 유방은 항우보다 손쉽게 함양에 들어가고 [[약법삼장]](約法三章)을 발표해 진나라를 옭아매는 악법들을 없애 진나라 사람들에게 환대를 얻는다. 그러나 본디 유방은 술과 여자를 밝히는 사람이기에 함양의 [[아방궁]]과 궁녀들 그리고 온갖 금은보화에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된다. 주변 가신들은 유방을 사치와 향락에 빠트리지 않게 장량이 철저한 법을 제정해 진나라의 재산을 함부로 손대지 못하게 했다. 이 와중에 소하는 나라의 창고에 들어가 두 가지의 물건을 훔쳤으니 그것이 당시 대륙의 지도와 백성 호적이었다. 타고난 보급과 관리의 달인인 소하는 지금 당장의 재산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유방이 나가야 할 새로운 나라의 건국과 천하통일의 대업을 위해 뒤에서 차근차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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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신을 유방에게 천거하다==== | ||
+ | 함양을 정복한 항우는 스스로를 패자라 칭하고 원칙 없는 논공행상으로 제후를 봉했다. 위험 분자라고 낙인 찍힌 유방은 [[파촉]](=지금의 사천 지방)으로 귀양 보내지듯이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장량의 말을 따라 [[잔도]]의 길을 불태워 항우에게 다시는 나갈 뜻이 없음을 표시했다. 이는 장량의 계책이었고 한중 땅에서 다시 항우와 대적할 수 있는 힘을 기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유방의 군사는 점점 도망가는 수가 많아지고 이는 장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유방은 소하마저 도망을 갔다는 소식을 듣자 절망에 빠졌다. 그러나 소하는 도망간 것이 아니라 바로 [[한신]]을 데려오기 위함이었다. 한신은 그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한나라의 대장군의 자리에 앉아 군사력을 키워나갔다. 그에 발 맞춰 이 험난한 파촉 땅에서도 소하의 나라살림은 가히 부족함이 없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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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하를 평정하다==== | ||
+ | 4년의 긴 [[초한상쟁]]의 시대에 유방 세력에는 전쟁에서 전략 참모 한신이 있었다면, 뒷편으로는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는 보급을 맡아 살림하던 소하가 존재했다. 필요할 때마다 군량미를 조달하고 각종 필요한 무기와 갑옷까지 차질없이 준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소하만이 아닌 소하의 일가 전체가 유방을 지지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점이다. 후에 논공행상에도 소하 일가의 공적이 높게 평가를 받고 사기에도 단순히 인물 개인의 열전이 아닌 '소상국[[세가]]'로 따로 편찬이 될 만큼 소하를 기준으로 주변의 노력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결국 초나라를 [[사면초가]]의 상황으로 몰아 마지막의 승리는 한나라가 거머쥐게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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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기== | ||
+ | ===한나라의 건국=== | ||
+ | ====논공행상에서 공적이 많고 적음을 따지다==== | ||
+ | 기나긴 시간동안 전쟁을 거치고 수많은 사람들이 유방의 밑에서 일을 했던만큼 그 공적들의 순위를 나열하는 것은 매우 민감하고 어려운 문제였다. 이에 유방은 소하를 [[차후]](酇侯)에 봉하고 제후들 중 가장 많은 식읍 7,000호를 하사받았다. 이에 여러 공신들이 반발하기를 {{인용문|「우리들은 모두 몸에 갑옷을 두르고, 병장기를 손에 들고 전투에 친히 참가하여 많게는 100여 회, 적게는 10여 회에 걸쳐 했습니다.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고, 적군의 땅을 평정해서 모두가 크고 작은 전공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지금 소하는 우리와 함께 전투에 참가하여 힘들여 싸워 세운 공로가 있다고 어떻게 말 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단지 필묵을 잡고 입으로만 전쟁을 하고 전투에는 한 번도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오히려 소하의 공을 우리들 맨 위에 놓으시려합니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입니까?」}}<br> 하고 [[고조]]에게 질문하자 고조가 그 신하들에게 사냥의 도리를 아느냐고 묻자 알고 있다고 답했다. 그러자 사냥터에서 사냥개의 역할을 아느냐고 다시 고조가 묻자 역시 알고 있다고 신하들은 답을 했다. 그러자 유방은 이렇게 대답했다.{{인용문| 「사냥을 할 때 짐승을 추격하여 물어뜯어 잡는 일이 사냥개의 역할이고 짐승의 종적을 추격하여 숨어 있는 곳을 사냥개에 알리는 일은 사냥꾼의 임무이다. 지금 그대들이 한 일이라고는 간신히 짐승 몇 마리를 잡아왔을 뿐으로 공로로 말하면 단지 사냥개가 세운 공로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짐승들의 소재를 파악하여 사냥개들에게 그 목표를 분명히 알려주어 잡아 올 수 있도록 한 소하의 공로는 마치 사냥꾼이 세운 공로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 동안 여러분들은 혼자 따랐고, 많아봐야 2-3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소하는 자기들 종족들 수십 명으로 하여금 나를 따르게 하여 천하를 횡행하며 전쟁을 치르게 했다. 어찌 그의 이러한 공적을 잊을 수가 있겠는가?」}}<br> 이에 모든 신하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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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상의 자리에 올라 법을 제정하다==== | ||
+ | 소하는 진나라의 6가지 법을 골라 내어 3가지의 법률을 추가해 다시금 한나라의 [[율령]] 제도를 정비하기에 이르는데 이를 <<[[구장률]](九章律)>>이라고 부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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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야소하, 패야소하]](成也蕭何,敗也蕭何)==== | ||
+ | 건국 이후, 기원전 196년에 한나라에 [[진희]](秦豨)의 반란이 일어나게 되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유방이 직접 떠나게 된다. 유방의 후계 문제나 제후 문제에서 좋지 않은 눈길을 받게 된 한신은 [[여태후]](呂太后)에게 제거 당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한신을 확실하게 포박하고 죽이기 위해 여태후가 계책을 논한 사람이 바로 소하였다. 파촉 땅에서 소하로 인해 날개를 달고 유방의 밑에서 천하를 호령했으나 마지막 또한 소하로 인해 날개를 잃고 추락하여 목숨을 잃게 되고 만 것이다. {{인용문| 성야소하, 패야소하(成也蕭何,敗也蕭何)<br>'성공하는 것도 소하에게 달려 있고, 실패하는 것도 소하에게 달려 있다.'}} <br> 유방은 소하에게 이를 치하하여 [[상국]](相國)에 봉하고 5,000호의 식읍을 추가로 하사한다. 앞으로의 한나라에 한신의 존재는 도움이 되지 않으며 소하가 일찍이 이를 제거해 준 것에 대한 공로라고 볼 수가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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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후=== | ||
+ | 한신까지 제거하는데 성공한 유방은 소하에게도 의구심을 품기 시작한다. 그러한 낌새를 눈치챈 소하는 일가족을 변방으로 보내버림으로써 모반의 여지가 털 끝 만큼도 없게 하였고 자신 또한 부하들의 조언을 받아 들여 일부러 부정적인 방법으로 사적인 재산을 불려 모아 민간의 평판을 떨어뜨리거나 아예 재산 자체를 국고에 기부를 하여 유방의 추가적인 숙청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BC 193년 고조 유방이 서거한 2년 후에 소하도 따라 숨을 거두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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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가== | ||
+ | [[유방]] : 단지 장막 안에서 머리를 굴려 멀리서 하는 전쟁의 승부를 알 수 있는 건 장량이 저보다 더 잘합니다. 국가를 잘 운영하고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군대의 보급과 물자를 잘 제공하는건 소하가 저보다 더 잘합니다. 수 많은 장병들을 거느리고 전쟁을 반드시 이기며 전략을 통해 적을 공격하는건 한신이 저보다 더 잘합니다. 위의 세 사람은 모두 천재에 해당하며 천하를 얻으려면 위의 세 사람을 모두 얻어야만 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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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마천]] : 소상국은 진나라 때만 하더라도 단지 작은 지방의 관리이며 사람들의 주목을 끌만한 어떠한 일도 하지 못했다. 이윽고 한왕조가 일어서자 소하는 한고조의 후광을 얻어 성실하게 자신의 직책의 임무를 수행했다. 백성들이 진나라의 가혹한 법에 원한을 품고 있다는 정황을 파악하고, 역사의 흐름에 순응하여 옛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제공했다. [[한신]](韓信), [[팽월]], [[경포]](黥布) 등 한나라 창업 공신의 대부분은 주살되었으나, 소하가 이룩한 공적만은 찬란히 빛나 그의 지위는 공신 중에서 제일 높았다. 소하의 명성은 후세에 까지 전해져 주 [[문왕]]을 도와 주나라를 일으킨 [[굉요]](宏夭)와 [[산의생]](散宜生) 등이 이룩한 공적과 비견할만하다고 하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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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문헌== | ||
+ | 사마천, 『사기(세가)』「소상국세가, 조상국세가」2017, 연암서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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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마천, 『사기(본기)』 「고조본기」2017, 연암서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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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증선지, 『십팔사략』「반고 - 한서」2009, 동서문화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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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위키피디아 『소하』 번역 |
2018년 6월 26일 (화) 23:09 기준 최신판
소하(萧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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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BC 257년 중국 강소성 패현 풍읍 |
사망 |
BC 193년 |
생존시기 | 진나라 말기 ~ 한나라 초기 |
관련 활동 | 정치 |
목차
개요
중국 진나라 말기부터 한나라 초기까지 유방을 중국의 패자로 만든 정치가
후에 한초삼걸(한신,장량,소하)로 불리며 건국에 가장 높은 공로를 세웠다고 평가받는 인물
전쟁에서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쟁에 필요한 보급과 물자가 전쟁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주는 위인
초기
유방의 신하(臣)
지금 중국의 강소성 서주시 그 당시 패현 풍읍에서 태어나 자랐다. 당시 아버지를 따라 법 관련 공부를 하고 패현의 서기로 일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정장(亭長)(=고대의 관리직 이름)을 하던 유방이 패현에서 여산까지 만리장성을 인부를 데리고 가다가 실수를 하여 망탕산에 숨어 살게 된다. 그러나 점점 유방을 따르는 이들이 많아지고 세력이 커지게 된다. 이를 알게 된 소하는 현령에게 유방을 천거하여 패현의 수문장을 권하고 즉시 번쾌에게 달려가 유방을 산 속에서 모셔오게 한다. 그러나 현령이 도중에 마음을 바꾸어 유방을 들이지 못하게 하자 소하와 그의 부하 조참은 바로 현령을 죽이고 유방을 패현령으로 모시어 지방을 다스리게 한다.
“ 유방이라는 사람에게는 세상을 바꿀 커다란 운이 따르고 있다!
”
소하를 비롯한 조참, 번쾌 등의 인물과 함께 진나라를 부수고 후에 한나라를 건국하는 과정의 시작이었다.
진나라 반란
BC 207년, 진승과 오광의 반란이 일어나 진나라는 큰 혼란에 빠져있었다. 이 반란이 불씨가 되어 전국 각지에 농민과 지방 세력들의 반란이 끊이질 않았다. 오히려 유방은 이러한 반란에 편승하기보다 잠시 물러나 세력을 키우는 것에 집중했다. 더욱이 장량까지 무리에 합류하여 항량으로 하여금 병사를 빌리고 소하는 병사를 먹일 군량과 보급물자들을 철저히 관리하여 점차 항우에 맞설 대항마로 유방 세력의 규모를 키워나갔다.
중기
초한상쟁(楚漢相爭)
함양에 들어가 대륙의 지도와 호적을 얻다
초 회왕의 유방 밀어주기를 통해 유방은 항우보다 손쉽게 함양에 들어가고 약법삼장(約法三章)을 발표해 진나라를 옭아매는 악법들을 없애 진나라 사람들에게 환대를 얻는다. 그러나 본디 유방은 술과 여자를 밝히는 사람이기에 함양의 아방궁과 궁녀들 그리고 온갖 금은보화에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된다. 주변 가신들은 유방을 사치와 향락에 빠트리지 않게 장량이 철저한 법을 제정해 진나라의 재산을 함부로 손대지 못하게 했다. 이 와중에 소하는 나라의 창고에 들어가 두 가지의 물건을 훔쳤으니 그것이 당시 대륙의 지도와 백성 호적이었다. 타고난 보급과 관리의 달인인 소하는 지금 당장의 재산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유방이 나가야 할 새로운 나라의 건국과 천하통일의 대업을 위해 뒤에서 차근차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신을 유방에게 천거하다
함양을 정복한 항우는 스스로를 패자라 칭하고 원칙 없는 논공행상으로 제후를 봉했다. 위험 분자라고 낙인 찍힌 유방은 파촉(=지금의 사천 지방)으로 귀양 보내지듯이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장량의 말을 따라 잔도의 길을 불태워 항우에게 다시는 나갈 뜻이 없음을 표시했다. 이는 장량의 계책이었고 한중 땅에서 다시 항우와 대적할 수 있는 힘을 기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유방의 군사는 점점 도망가는 수가 많아지고 이는 장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유방은 소하마저 도망을 갔다는 소식을 듣자 절망에 빠졌다. 그러나 소하는 도망간 것이 아니라 바로 한신을 데려오기 위함이었다. 한신은 그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한나라의 대장군의 자리에 앉아 군사력을 키워나갔다. 그에 발 맞춰 이 험난한 파촉 땅에서도 소하의 나라살림은 가히 부족함이 없었다.
천하를 평정하다
4년의 긴 초한상쟁의 시대에 유방 세력에는 전쟁에서 전략 참모 한신이 있었다면, 뒷편으로는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는 보급을 맡아 살림하던 소하가 존재했다. 필요할 때마다 군량미를 조달하고 각종 필요한 무기와 갑옷까지 차질없이 준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소하만이 아닌 소하의 일가 전체가 유방을 지지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점이다. 후에 논공행상에도 소하 일가의 공적이 높게 평가를 받고 사기에도 단순히 인물 개인의 열전이 아닌 '소상국세가'로 따로 편찬이 될 만큼 소하를 기준으로 주변의 노력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결국 초나라를 사면초가의 상황으로 몰아 마지막의 승리는 한나라가 거머쥐게 된다.
후기
한나라의 건국
논공행상에서 공적이 많고 적음을 따지다
기나긴 시간동안 전쟁을 거치고 수많은 사람들이 유방의 밑에서 일을 했던만큼 그 공적들의 순위를 나열하는 것은 매우 민감하고 어려운 문제였다. 이에 유방은 소하를 차후(酇侯)에 봉하고 제후들 중 가장 많은 식읍 7,000호를 하사받았다. 이에 여러 공신들이 반발하기를
“ 「우리들은 모두 몸에 갑옷을 두르고, 병장기를 손에 들고 전투에 친히 참가하여 많게는 100여 회, 적게는 10여 회에 걸쳐 했습니다.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고, 적군의 땅을 평정해서 모두가 크고 작은 전공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지금 소하는 우리와 함께 전투에 참가하여 힘들여 싸워 세운 공로가 있다고 어떻게 말 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단지 필묵을 잡고 입으로만 전쟁을 하고 전투에는 한 번도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오히려 소하의 공을 우리들 맨 위에 놓으시려합니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입니까?」
”
하고 고조에게 질문하자 고조가 그 신하들에게 사냥의 도리를 아느냐고 묻자 알고 있다고 답했다. 그러자 사냥터에서 사냥개의 역할을 아느냐고 다시 고조가 묻자 역시 알고 있다고 신하들은 답을 했다. 그러자 유방은 이렇게 대답했다.
“ 「사냥을 할 때 짐승을 추격하여 물어뜯어 잡는 일이 사냥개의 역할이고 짐승의 종적을 추격하여 숨어 있는 곳을 사냥개에 알리는 일은 사냥꾼의 임무이다. 지금 그대들이 한 일이라고는 간신히 짐승 몇 마리를 잡아왔을 뿐으로 공로로 말하면 단지 사냥개가 세운 공로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짐승들의 소재를 파악하여 사냥개들에게 그 목표를 분명히 알려주어 잡아 올 수 있도록 한 소하의 공로는 마치 사냥꾼이 세운 공로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 동안 여러분들은 혼자 따랐고, 많아봐야 2-3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소하는 자기들 종족들 수십 명으로 하여금 나를 따르게 하여 천하를 횡행하며 전쟁을 치르게 했다. 어찌 그의 이러한 공적을 잊을 수가 있겠는가?」
”
이에 모든 신하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승상의 자리에 올라 법을 제정하다
소하는 진나라의 6가지 법을 골라 내어 3가지의 법률을 추가해 다시금 한나라의 율령 제도를 정비하기에 이르는데 이를 <<구장률(九章律)>>이라고 부른다.
성야소하, 패야소하(成也蕭何,敗也蕭何)
건국 이후, 기원전 196년에 한나라에 진희(秦豨)의 반란이 일어나게 되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유방이 직접 떠나게 된다. 유방의 후계 문제나 제후 문제에서 좋지 않은 눈길을 받게 된 한신은 여태후(呂太后)에게 제거 당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한신을 확실하게 포박하고 죽이기 위해 여태후가 계책을 논한 사람이 바로 소하였다. 파촉 땅에서 소하로 인해 날개를 달고 유방의 밑에서 천하를 호령했으나 마지막 또한 소하로 인해 날개를 잃고 추락하여 목숨을 잃게 되고 만 것이다.
“ 성야소하, 패야소하(成也蕭何,敗也蕭何)
'성공하는 것도 소하에게 달려 있고, 실패하는 것도 소하에게 달려 있다.'”
유방은 소하에게 이를 치하하여 상국(相國)에 봉하고 5,000호의 식읍을 추가로 하사한다. 앞으로의 한나라에 한신의 존재는 도움이 되지 않으며 소하가 일찍이 이를 제거해 준 것에 대한 공로라고 볼 수가 있다.
최후
한신까지 제거하는데 성공한 유방은 소하에게도 의구심을 품기 시작한다. 그러한 낌새를 눈치챈 소하는 일가족을 변방으로 보내버림으로써 모반의 여지가 털 끝 만큼도 없게 하였고 자신 또한 부하들의 조언을 받아 들여 일부러 부정적인 방법으로 사적인 재산을 불려 모아 민간의 평판을 떨어뜨리거나 아예 재산 자체를 국고에 기부를 하여 유방의 추가적인 숙청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BC 193년 고조 유방이 서거한 2년 후에 소하도 따라 숨을 거두었다.
평가
유방 : 단지 장막 안에서 머리를 굴려 멀리서 하는 전쟁의 승부를 알 수 있는 건 장량이 저보다 더 잘합니다. 국가를 잘 운영하고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군대의 보급과 물자를 잘 제공하는건 소하가 저보다 더 잘합니다. 수 많은 장병들을 거느리고 전쟁을 반드시 이기며 전략을 통해 적을 공격하는건 한신이 저보다 더 잘합니다. 위의 세 사람은 모두 천재에 해당하며 천하를 얻으려면 위의 세 사람을 모두 얻어야만 합니다.
사마천 : 소상국은 진나라 때만 하더라도 단지 작은 지방의 관리이며 사람들의 주목을 끌만한 어떠한 일도 하지 못했다. 이윽고 한왕조가 일어서자 소하는 한고조의 후광을 얻어 성실하게 자신의 직책의 임무를 수행했다. 백성들이 진나라의 가혹한 법에 원한을 품고 있다는 정황을 파악하고, 역사의 흐름에 순응하여 옛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제공했다. 한신(韓信), 팽월, 경포(黥布) 등 한나라 창업 공신의 대부분은 주살되었으나, 소하가 이룩한 공적만은 찬란히 빛나 그의 지위는 공신 중에서 제일 높았다. 소하의 명성은 후세에 까지 전해져 주 문왕을 도와 주나라를 일으킨 굉요(宏夭)와 산의생(散宜生) 등이 이룩한 공적과 비견할만하다고 하겠다.
참고 문헌
사마천, 『사기(세가)』「소상국세가, 조상국세가」2017, 연암서가
사마천, 『사기(본기)』 「고조본기」2017, 연암서가
증선지, 『십팔사략』「반고 - 한서」2009, 동서문화사
중국 위키피디아 『소하』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