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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글자 庭는 그 해석에 대해서도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우선 [[금문]]을 근거로 庭은 '집의 막(屋棚) 아래에서 일하는 장소로 해석한다. 庭의 [[금문]]은 사람 한 명이 안쪽 벽이 움푹 들어간 굴 안에서 질그릇을 만드는 모습이며, 庭에 있는 [[廷]](조정 정)은 본래 일하는 장소였다가 이후 조정(朝廷)과 같이 '군왕과 대신이 집무하는 곳'으로 의미가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전서]]로 넘어오면서 [[广]]이 첨가되었는데, 이것은 집의 막 아래에서 질흙으로 작업하는 것을 나타냈다가, 이후 집 앞의 활동 공간으로 그 의미가 확대된 것을 나타낸다.<ref>廖文豪,『汉字树 5-汉字中的建築與器皿』,中国商业出版社, p.46</ref><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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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다른 주장은, [[갑골문]]을 근거로 庭은 '집의 정실이자 대청(크고 넓은 방)'을 뜻하며, 갑골문은 큰 집 안에서 말하고 듣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또한 또 다른 금문을 근거로 庭은 '사람이 여러 계단을 올라가서 대청으로 들어가는 모습'이라고 해석한다.<ref>熊国英 ,『图释古汉字』, 齐鲁书社, 2005, p.216</ref><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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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신]]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庭을 '궁중'으로 해석한다.(庭,宮中也)<ref>출처 : [http://www.zdic.net/z/19/sw/5EAD.htm 漢典]</ref><br> | ||
+ | 이 외에도 庭은 사람들이 길게 늘어설 수 있는(廷) 건출물(广)을 뜻하며, 원래 안채의 한가운데 방이었는데 이후 집 앞의 뜰이나 법정처럼 심판하는 기구나 장소와 같은 뜻이 나왔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ref>하영삼, 『한자어원사전』, 도서출판3, 2014, p.570</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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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주 초기의 지하 혈거(穴居)는 단지 한두 사람만이 휴식할 수 있는 조그마한 공간이어서 주방이 없었다. 그러나 화덕을 넣기에는 충분했기 때문에, 이 시기의 주거에서는 화덕의 흔적이 많이 발견되었다. 상나라 후기에는 가옥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갖가지 형태의 방으로 늘어났고 기능에 따라 명백하게 분류되었다. 갑골 복사에 언급된 방의 명칭<ref>대실(大室), 소실(少室), 동실(東室), 중실(中室), 남실(南室), 동침(東寢), 서침(西寢), 및 청(廳) 또는 정(庭) 등이 있었다.</ref> 가운데 庭이 있다. | ||
+ | 이러한 것은 대형 건축물이어야 분리될 수 있는 것이었다. 상나라 때에는 10개 이상의 방을 가진 궁전이 있었고, 주나라 때에는 20개 이상의 방을 가진 궁전이 있었다. 이 당시 庭의 갑골문은 의식(儀式)적인 회합과 제사의 장소로 사용되는 곳을 뜻했다.<ref>허진웅, 『중국고대사회-문자학과 고고학적 해석에 입각하여』, 1993, 지식산업사, p.262-263 </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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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25일 (화) 22:55 기준 최신판
語源
글자 庭은 어원뿐만 아니라 갑골문 자형에 대한 의견 또한 차이를 보인다. 『汉字树』에서는 오른쪽 표에 있는 갑골문이 지금의 廳으로 되었다고 주장하는 반면[1], 『图释古汉字』에서는 갑골문 자형이 庭와 廳 두 글자의 어원이라고 주장한다.[2]
글자 庭는 그 해석에 대해서도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우선 금문을 근거로 庭은 '집의 막(屋棚) 아래에서 일하는 장소로 해석한다. 庭의 금문은 사람 한 명이 안쪽 벽이 움푹 들어간 굴 안에서 질그릇을 만드는 모습이며, 庭에 있는 廷(조정 정)은 본래 일하는 장소였다가 이후 조정(朝廷)과 같이 '군왕과 대신이 집무하는 곳'으로 의미가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전서로 넘어오면서 广이 첨가되었는데, 이것은 집의 막 아래에서 질흙으로 작업하는 것을 나타냈다가, 이후 집 앞의 활동 공간으로 그 의미가 확대된 것을 나타낸다.[3]
또다른 주장은, 갑골문을 근거로 庭은 '집의 정실이자 대청(크고 넓은 방)'을 뜻하며, 갑골문은 큰 집 안에서 말하고 듣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또한 또 다른 금문을 근거로 庭은 '사람이 여러 계단을 올라가서 대청으로 들어가는 모습'이라고 해석한다.[4]
허신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庭을 '궁중'으로 해석한다.(庭,宮中也)[5]
이 외에도 庭은 사람들이 길게 늘어설 수 있는(廷) 건출물(广)을 뜻하며, 원래 안채의 한가운데 방이었는데 이후 집 앞의 뜰이나 법정처럼 심판하는 기구나 장소와 같은 뜻이 나왔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6]
文化
아주 초기의 지하 혈거(穴居)는 단지 한두 사람만이 휴식할 수 있는 조그마한 공간이어서 주방이 없었다. 그러나 화덕을 넣기에는 충분했기 때문에, 이 시기의 주거에서는 화덕의 흔적이 많이 발견되었다. 상나라 후기에는 가옥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갖가지 형태의 방으로 늘어났고 기능에 따라 명백하게 분류되었다. 갑골 복사에 언급된 방의 명칭[7] 가운데 庭이 있다. 이러한 것은 대형 건축물이어야 분리될 수 있는 것이었다. 상나라 때에는 10개 이상의 방을 가진 궁전이 있었고, 주나라 때에는 20개 이상의 방을 가진 궁전이 있었다. 이 당시 庭의 갑골문은 의식(儀式)적인 회합과 제사의 장소로 사용되는 곳을 뜻했다.[8]
주석
- ↑ 廖文豪,『汉字树 5-汉字中的建築與器皿』,中国商业出版社, p.46
- ↑ 熊国英 ,『图释古汉字』, 齐鲁书社, 2005, p.216
- ↑ 廖文豪,『汉字树 5-汉字中的建築與器皿』,中国商业出版社, p.46
- ↑ 熊国英 ,『图释古汉字』, 齐鲁书社, 2005, p.216
- ↑ 출처 : 漢典
- ↑ 하영삼, 『한자어원사전』, 도서출판3, 2014, p.570
- ↑ 대실(大室), 소실(少室), 동실(東室), 중실(中室), 남실(南室), 동침(東寢), 서침(西寢), 및 청(廳) 또는 정(庭) 등이 있었다.
- ↑ 허진웅, 『중국고대사회-문자학과 고고학적 해석에 입각하여』, 1993, 지식산업사, p.262-2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