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옥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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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 ==생애== | ||
+ | [[파일:단옥재.jpg|200px|오른쪽|섬네일|단옥재(출처:清代學者象傳)]] | ||
===개요=== | ===개요=== | ||
− | 단옥재(段玉裁, 1735~1815) 중국 | + | 단옥재(段玉裁, 1735~1815)는 중국 [[청]]나라 때의 학자로 자는 약응(若膺), 호는 무당(懋堂)이다. 강소성(江蘇省)에서 출생했다. <br> |
+ | 1760년의 거인(擧人, 중국에서 관리에 추천되거나 등용 시험에 응시하던 자. 또는 그 합격자.)으로 사천성(四川省) 무산(巫山)현의 지현(知縣, [[청]]나라 때의 현의 으뜸 벼슬아치)이 되었으나, 곧 그만두고 학문에 전념했다. 대진(戴震)을 만나 그 제자가 되었고, 소학(小學)과 음운(音韻)에 정통하였다. 저서로 《[[설문해자주]]》 외에 《고문상서찬이(古文尙書撰異)》, 《모시고훈전(毛詩故訓傳》, 《시경소학(詩經小學》이 있다. | ||
===생가=== | ===생가=== | ||
− | 단가(段家)는 본래 | + | 단가(段家)는 본래 [[하남성]]에 살고 있었으나, [[송]]나라가 북방 이민족에게 쫓겨 남쪽으로 옮겨 갈 때 조정과 함께 이사가, [[강소성]](江蘇省)에 정착했다. 강소성 진강부 금단현이 단옥재의 출생지이다. <ref>청나라 행정구획으로는 성(省)의 아래에 부(府)가 있고 府의 아래에 현(縣)이 있었다.</ref> 이 곳은 양자강 하류지역으로, 기후가 온난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으로, 당시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다. |
단가(段家)는 대대로 학문을 해 온 집안이었다. 단가의 사람들도 누구나 다 과거를 치러 과거 시험에 합격하고자 했다. 과거시험은 향시, 회시, 전시의 세 단계<ref>과거시험은 각 성(省)마다 시행하는 향시, 수도 북경에서 실시하는 회시, 마지막으로 황제가 임석하여 실시하는 전시의 세 단계로 나뉜다.</ref>로 나뉘는데 1단계인 향시를 치르려면 부(府)나 현(縣)에 있는 국립학교의 학생이라는 자격이 요구되었다. 그러므로 맨 처음에 현의 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시험을 통과해야하는데, 이를 통과하면 ‘생원’이라고 불린다. 단옥재의 증조부, 조부, 부친은 모두 생원이 되었으나, 세 사람 모두 결국 향시에 합격하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 단가(段家)는 대대로 학문을 해 온 집안이었다. 단가의 사람들도 누구나 다 과거를 치러 과거 시험에 합격하고자 했다. 과거시험은 향시, 회시, 전시의 세 단계<ref>과거시험은 각 성(省)마다 시행하는 향시, 수도 북경에서 실시하는 회시, 마지막으로 황제가 임석하여 실시하는 전시의 세 단계로 나뉜다.</ref>로 나뉘는데 1단계인 향시를 치르려면 부(府)나 현(縣)에 있는 국립학교의 학생이라는 자격이 요구되었다. 그러므로 맨 처음에 현의 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시험을 통과해야하는데, 이를 통과하면 ‘생원’이라고 불린다. 단옥재의 증조부, 조부, 부친은 모두 생원이 되었으나, 세 사람 모두 결국 향시에 합격하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 ||
===출생과 소년시절=== | ===출생과 소년시절=== | ||
− | 단옥재는 옹정(雍正) 13년(1735년), 26세의 단세속과 23세의 모친 사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ref>모친이 단옥재를 잉태했을 때, 그녀는 자신이 네 마리의 양을 낳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단세속은 “양이란 ‘상([[祥]], 상서로운 징조)’을 말한다. 분명히 사내아이 넷이 태어날 것이다.”라고 해몽을 했다. 예언대로 그녀는 후에 단옥재를 장남으로, 아들 넷과 딸 둘을 낳았다.</ref> 이 때는, 청 왕조가 극성기를 맞이한 무렵으로 사회는 완전히 안정되어 있었고, 학문도 최성기를 맞았다. | + | 단옥재는 [[옹정]](雍正) 13년(1735년), 26세의 단세속과 23세의 모친 사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ref>모친이 단옥재를 잉태했을 때, 그녀는 자신이 네 마리의 양을 낳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단세속은 “양이란 ‘상([[祥]], 상서로운 징조)’을 말한다. 분명히 사내아이 넷이 태어날 것이다.”라고 해몽을 했다. 예언대로 그녀는 후에 단옥재를 장남으로, 아들 넷과 딸 둘을 낳았다.</ref> 이 때는, [[청]] 왕조가 극성기를 맞이한 무렵으로 사회는 완전히 안정되어 있었고, 학문도 최성기를 맞았다. |
단옥재는 당시의 관습대로 대여섯살부터 조부에게서 과거를 위해 《[[논어]]》를 학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곱 살 때 조부모가 연이어 세상을 뜨자, 부모의 상을 입기 위해 돌아온 단세속은 친히 단옥재에게 고전의 기초를 가르치다가, 다시 금단을 떠나 자신이 연 ‘비릉연강교관사’라는 서당으로 돌아간다. | 단옥재는 당시의 관습대로 대여섯살부터 조부에게서 과거를 위해 《[[논어]]》를 학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곱 살 때 조부모가 연이어 세상을 뜨자, 부모의 상을 입기 위해 돌아온 단세속은 친히 단옥재에게 고전의 기초를 가르치다가, 다시 금단을 떠나 자신이 연 ‘비릉연강교관사’라는 서당으로 돌아간다. | ||
− | 건륭(乾隆) 12년(1747년), 13세가 된 단옥재는 동시(童試)<ref>동시의 정식 명칭은 학교시(學校試)로, 이 시험은 본래 국립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시험이었다. 학교시도 현마다 실시하는 현시, 부에서 치르는 부시, 본 시험인 원시라는 3단계로 나뉘어 있는다. 원시까지 통과해야 비로소 생원이 된다.</ref>에 응시해, 놀라운 성적으로 합격했다. 이렇게 단옥재는 열세 살 때에 생원이 | + | [[건륭]](乾隆) 12년(1747년), 13세가 된 단옥재는 동시(童試)<ref>동시의 정식 명칭은 학교시(學校試)로, 이 시험은 본래 국립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시험이었다. 학교시도 현마다 실시하는 현시, 부에서 치르는 부시, 본 시험인 원시라는 3단계로 나뉘어 있는다. 원시까지 통과해야 비로소 생원이 된다.</ref>에 응시해, 놀라운 성적으로 합격했다. 이렇게 단옥재는 열세 살 때에 생원이 되었다. 그는 이미 ‘[[사서]]’와 ‘[[오경]]’을 암송할 수 있는 우수한 소년이었다. |
===대진(戴震)과의 만남=== | ===대진(戴震)과의 만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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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이 된 다음해, 27세의 단옥재는 북경에서 회시에 첫 도전하지만, 불합격한다. 회시는 3년에 1회 밖에 실시되지 않아, 단옥재는 다음 기회까지 북경에 살면서 ‘경산만선전 관학’의 교습, 즉 국립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 거인이 된 다음해, 27세의 단옥재는 북경에서 회시에 첫 도전하지만, 불합격한다. 회시는 3년에 1회 밖에 실시되지 않아, 단옥재는 다음 기회까지 북경에 살면서 ‘경산만선전 관학’의 교습, 즉 국립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 ||
− | 그리고 관학의 교습으로 있던 시기에 단옥재는 전 생애에 걸쳐 스승으로 존경하게 되는 인물인 대진(戴震)<ref>대진(1723~1777)은 안휘성 휴녕현 사람으로 단옥재보다 12세 연상이었다. 젊어서부터 정밀한 고증 논문을 저술해, 건륭제가 방대한 도서를 집성하여 사고전서(四庫全書 )를 편찬할 때 만권 서적의 교정과 해제를 담당해 고전연구의 성과를 발휘했다. 또한, 고염무 이래의 | + | 그리고 관학의 교습으로 있던 시기에 단옥재는 전 생애에 걸쳐 스승으로 존경하게 되는 인물인 대진(戴震)<ref>대진(1723~1777)은 안휘성 휴녕현 사람으로 단옥재보다 12세 연상이었다. 젊어서부터 정밀한 고증 논문을 저술해, 건륭제가 방대한 도서를 집성하여 사고전서(四庫全書 )를 편찬할 때 만권 서적의 교정과 해제를 담당해 고전연구의 성과를 발휘했다. 또한, 고염무 이래의 고대음운학 연구를 계승, 발전시켰다.</ref>을 만난다. 대진의 좌사 역시 단옥재와 같은 전여성이었다. 대진과 단옥재는 함께 전여성을 좌사로 떠받드는 동문의 관계였으므로, 왕래가 자연스러웠다. 이 때부터 단옥재는 대진을 스승으로 받을었는데, 그 관계는 대진이 세상을 뜨기까지 변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편지가 빈번히 오갔는데, 이는 편지보다는 학술논문에 가까웠다. |
===《육서음운표》, 《설문해자독》의 완성=== | ===《육서음운표》, 《설문해자독》의 완성=== | ||
− | 총 세 번의 회시에서 불합격한 단옥재는 37세가 되었을 때 지방의 작은 관직인 ‘지현’이 되었다. 이 관직은 회시를 아직 통과하지 못한 거인 중에서도 선발되었다. 8년간의 관직 생활을 하며 단옥재는 여가를 이용해 연구하여 | + | 총 세 번의 회시에서 불합격한 단옥재는 37세가 되었을 때 지방의 작은 관직인 ‘지현’이 되었다. 이 관직은 회시를 아직 통과하지 못한 거인 중에서도 선발되었다. 8년간의 관직 생활을 하며 단옥재는 여가를 이용해 연구하여 《육서음운표(六書音均表)<ref>均은 韻의 고자(古字)로 韻과 같다. 발음은 ‘균’이 아니라 ‘운’으로 한다.</ref>》를 완성한다. 《육서음운표》는 단옥재 고음학의 집대성이다. 단옥재는 연구자로서의 그의 생애 전반을 이 책의 완성에 바쳤다고 할 수 있다. |
− | 중국에서는 지식인 필수의 교양으로 시를 지어야했고, 시는 반드시 | + | 중국에서는 지식인 필수의 교양으로 시를 지어야했고, 시는 반드시 각운(脚韻)이 있어야했다. 이에 따라 시짓기에 편리하도록 같은 모음을 지닌 문자를 분류해 모으고 간단히 자의(字義)를 첨가한 ‘운서(韻書)’들이 만들어졌다. 그 중에서도 수나라의 《절운(切韻)》이 대표적이었다. 하지만 《시경》과 같은 춘추전국시대, 또는 한대(漢代)에 사용된 압운은 《절운》계의 운서와 맞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시경》 등의 음운체계를 연구하는 학문이 발달했다. 《시경》 등의 음을 상고음(上古音)이라 하고, 《절운》을 대표하는 음을 중고음(中古音)이라고 한다. |
− | 단옥재는 두 번째의 회시에 실패한 뒤 잠시 고향으로 돌아가, 아우 단옥성과 함께 《시경》이나 그 외의 경서 속 압운을 검토해, 상고음이 17개의 | + | 단옥재는 두 번째의 회시에 실패한 뒤 잠시 고향으로 돌아가, 아우 단옥성과 함께 《시경》이나 그 외의 경서 속 압운을 검토해, 상고음이 17개의 부로 분류된다고 했다. <ref>서로 압운되는 문자의 군을 하나로 묶어 그것을 부(部)라고 한다.</ref> 그 17부의 설을 단옥재는 더욱 확실한 설로 발전시켜, 건륭 40년(1775년) 41세 때에 5종류의 표로 정리해, 뒷날 《설문해자주》의 뒤에 붙게 되는 《육서음운표》가 완성된다. 그리고 건륭 41년 《[[설문해자]]》의 주석에 착수하게 된다. |
건륭 45년(1780년), 70세가 넘은 부친의 뒷바라지를 위해 단옥재는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인 금단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건륭 51년, 단옥재는《설문해자독》을 완성한다. 《설문해자독》은 《설문해자주》를 위한 ‘장편(長篇)’이었다. 장편은 무언가 커다란 저술을 하기 전에 만들어지는 대형의 원고본이다. 이 대형의 원고본을 적절히 정리해 책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 이후 단옥재는 계속해서 연구를 거듭해 《설문해자주》를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 건륭 45년(1780년), 70세가 넘은 부친의 뒷바라지를 위해 단옥재는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인 금단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건륭 51년, 단옥재는《설문해자독》을 완성한다. 《설문해자독》은 《설문해자주》를 위한 ‘장편(長篇)’이었다. 장편은 무언가 커다란 저술을 하기 전에 만들어지는 대형의 원고본이다. 이 대형의 원고본을 적절히 정리해 책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 이후 단옥재는 계속해서 연구를 거듭해 《설문해자주》를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 ||
+ | ===《설문해자주》의 완성=== | ||
+ | 건륭 57년(1792년), 단옥재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졌다. 그는 여러 가지 병에 걸려 투병 생활을 계속하면서도, 혼자의 힘으로 작업을 해나가, 가경 12년(1807년) 마침내 《설문해자주》를 완성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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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고의 완성 이후 다시 수년이 지나, 가경 18년(1813년) 《설문해자주》의 인쇄가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학자들이 저술한 서적을 자신의 집에서 자금을 내 간행하는 것이 보통이어서, 《설문해자주》도 그러한 형태로 출판되었다. 하지만 이 작업은 원고 자체가 막대한 양의 문자인데다가, 또 문자에 오류가 발생하지않도록 주의를 쏟아야했다. 이에 따라 《설문해자주》는 2년이 걸린 인쇄 끝에 세상에 나왔다. 이 때, 단옥재의 나이는 81세였다. 단옥재 자신이 출판한 책은 단옥재의 서재 이름을 붙여 ‘경운루본(經韻樓本)’이라고 한다. 당시 《설문해자주》는 문은(紋銀)<ref>순도가 1천분의 935 이상 양질의 은으로, 당시 화폐의 대용으로 사용되었다.</ref> 10냥에 거래되었다. 당시 은 20냥은 서민 한 가족의 1년분 생활비라는 점을 고려하면, 《설문해자》의 문은 10냥은 대단한 가격이라고 할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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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망=== | ||
+ | 《설문해자주》는 가경 20년(1815)년 5월에 처음으로 세상에 나왔다. 자신의 온 생애를 바친 저작물이 출판되는 것을 볼 수 있었던 단옥재는 같은 해 9월에 세상을 떴다. 《설문해자주》에 대해 “1천 7백년 이래에 이러한 저작이 없었다.”라는 찬사를 서문에 적었던 [[왕념손]]은 단옥재의 묘지명으로 다음과 같이 적었다. | ||
+ | “대청 칙수문림랑 사천무산현지현 단군 묘지병 병서(大淸 敕授文林郎 四川巫山縣知縣 段君 墓志銘 幷序)” | ||
+ | 단옥재의 유해는 고향 금단현의 서쪽, 대패두의 땅에 묻혔다. 단옥재의 생가와 묘는 현존해있으며 강소성의 문화재로 보호받고 있다.<ref> [http://www2.jslib.org.cn/was5/web/detail?record=90&channelid=266128&searchword=%E7%B1%BB%E5%9E%8B%3D%E5%8F%A4%E5%A2%93%E8%91%AC&keyword=%E7%B1%BB%E5%9E%8B%3D%E5%8F%A4%E5%A2%93%E8%91%AC 단옥재의 묘]</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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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옥재의 《설문해자》 분석방법== | ||
+ | ===≪설문해자≫ 체례 연구=== | ||
+ | 단옥재는 ≪[[설문해자]]≫ 전체를 관철하는 원칙을 발견해, 그 원칙에 의해 본문을 교정하는 방법을 채택했다. 이러한 원칙을 ‘체례(體例:’ 혹은 ‘통례(通例)’라고 부른다. 이 체례의 발견과 응용이 ≪설문해자주≫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이다. ≪설문해자주≫에는 “[[凡]]......”으로 시작하는 문장이 많이 있다. 이는 모두 ≪설문해자≫의 체례에 대해 언급한 서술이다. 이러한 대표적인 체례는 아래와 같다. | ||
+ | <center>“凡合二字成文者, 如璠璵瑾瑜玫瑰之類, 旣擧其義於上字, 則下者不後擧其義. 全書之例如是, 而後人多改亂之.”</center> | ||
+ | 무릇 두 글자가 합하여 하나의 문자를 이루는 것들은, 이를테면 번여(璠璵), 근유(瑾瑜), 매괴(玫瑰)의 따위와 같이, 이미 위 글자에서 그 자의를 들었으면 아래에서 다시 그 자의를 들지 않는다. 전체 책의 체례는 이와 같거늘 후인이 많이 고치고 혼란시켰다. | ||
+ | <center>“凡篆一字, 先訓其義, 若始也, 顚也, 是. 次釋其形, 若从某某聲, 是. 次釋其音, 若某聲, 及讀若某”</center> | ||
+ | 무릇 한 글자를 [[전서]](篆書)로 들고, 먼저 그 자의를 훈해(訓解)한다. 시야(始也)나 전야(顚也)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다음으로 그 형태를 해석한다. “모(某)를 따른다. 某의 성(聲)” 같은 것이 그것이다. 다음으로 그 음을 해석한다. “모([[某]])의 성([[聲]])” 및 “읽기를 某와 같이 한다.” 같은 것이 그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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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렇게 단옥재가 체례를 기록한 것은 수십 조항에 달하는데, 단옥재를 이를 통해 ≪[[설문해자]]≫의 전체를 파악한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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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허해허(以許解許)=== | ||
+ | 《[[설문해자]]》에 기록되어 있는 훈고를 해석할 때, 단옥재는 “『설문』을 가지고 『설문』을 풀이한다.”라는 방법을 자주 이용했다. 허신이 부여한 어떤 훈고를 이해하기 위해 허신이 다른 글자에 부여한 훈고를 이용했다. 즉, 이허해허(以許解許)란 ‘허(許)를 가지고 허(許)를 풀이하였다.’라고 말할 수 있다. | ||
+ | 단옥재는 훈고에 대한 주석을 달 때 ‘첩운(疊韻)을 가지고 훈(訓)을 한다.’고 쓴다. 첩운이란, 두 글자의 운이 똑같은 것을 말한다. 즉, 동음의 글자로 훈(訓)을 하는 ‘성훈(聲訓)’이라는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이에 대한 예시로 [[衣]]에 대한 주석을 보자. 《설문해자》에는 [[衣]]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 ||
+ | “[[衣]] : 의([[依]])이다. 위를 [[衣]]라고 하고, 아래를 상([[常]])이라고 한다. 두 사람을 덮는 형태를 상형한다.” | ||
+ | 이에 대해 단옥해는 아래와 같이 주석을 달았다. | ||
+ | “(一) 첩운을 가지고 훈을 한다. 의([[依]])라는 것은 의(倚)이다. [[衣]]라는 것은 사람이 의지하여 몸을 덮는 바의 것이다.” | ||
+ | “(二) 상([[常]])은 하군(下帬)이다.” | ||
+ | 먼저 “첩운을 가지고 훈을 한다.”라는 주를 통해 성훈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다음으로 “의([[依]])라는 것은 의(倚)이다.”는 《설문해자》에서 의([[依]])에 대한 설해를 이용한 것이다. ‘의(倚)’란 ‘기댄다, 의지한다.’는 뜻으로, [[衣]]자의 주에서 “[[衣]]라는 것은 사람이 의지하여 몸을 덮는 바의 것이다.”라고 한 것은 “[[衣]]란 사람이 그것에 기대어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라는 뜻이 된다. [[허신]]의 해석에 대한 옮고 그름보다는 [[허신]]의 훈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단옥재의 목적이었다. | ||
+ | 또 (二)에서 말하는 “상([[常]])은 하군(下帬)이다.” 역시 《설문해자》의 상([[常]])에 대한 해설을 인용한 것으로, 상([[常]])은 치마의 뜻이라는 것을 서술한 것이다. | ||
+ | |||
+ | ===고전에 의한 실증=== | ||
+ | ≪설문해자주≫를 살펴보면, 다량의 서적을 인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단옥재는 ≪[[설문해자]]≫에 보이는 훈고를 경서나 제자(諸子) 등의 고전 속에서 실제로 사용된 용례에 의해 검층하고, 본의로부터 자의(字義)의 발전을 설명하고자 했다. | ||
+ | |||
+ | ===자의(字義)의 변천=== | ||
+ | 한자는 표의문자이므로 원칙적으로는 한 글자가 어휘 하나에 대응한다. 하지만 한자 한 글자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단옥재는 이러한 자의(字義)의 발전 과정을 밝히는 일에서 높은 성과를 이룩했다. 단옥재는 자의의 변천과정에서 ‘[[인신]](引伸)’과 ‘[[가차]](假借)’를 중심으로 설명하였다. ‘인신’은 글자 그대로 ‘뽑아서 늘린다’는 것이다. 본의로부터 의미적 연관을 매개로 파생된 자의를 ‘인신의(引伸義)’라고 한다. 이와 달리 의미적 연관성 없이 다른 동음자의 대용자로 사용되어 본의 이외의 자의가 된 것을 ‘가차의(假借義)’라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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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언(統言)과 석언(析言)=== | ||
+ | 단옥재는 여러 글자가 같은 의미를 지니는 현상에도 주목했다. ‘통언(統言)’은 ‘한데 얽어서 말한다’는 뜻으로 ‘동의어’를 말한다. ‘석언(析言)’은 ‘구별하여 말한다’로 동의어 그룹에서 보이는 작은 의미 차이의 구분을 말한다. 이를 다시 정리하면, ‘통언’은 넓은 의미로 한데 묶어서 말하는 의미이고, ‘석언’은 좁은 의미로 엄밀하게 구별하여 말하는 것을 뜻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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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옥재에 대한 평가== | ||
+ | 1) 강원(江沅)<ref>단옥재의 제자</ref> : “원(沅)은 말한다. 세상에 허신의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가 상당하다고 하지만 그것을 연구함에 얻은 바로서 즉, 학문적 성과로서 선생을 넘어서는 자는 없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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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왕력(王力)<ref>1900-1986, 중국의 언어학자</ref> : “단옥재의 ‘설문해자 연구’는 독보적이고 독창적인 일가의 작품으로 그 영향력은 상당히 크다.”, “그는 허씨 문중의 일대 공신으로 또한 허씨의 가장 비판적인 제자라 할 수 있다. 그는 허씨의 학문을 따라 잡아 허씨의 학문을 초월해냈다.”, “단옥재의 저술 속에서 엿볼 수 있는 정미하고 정당한 논설의 부분은 상당히 많은 것으로 평가되며 학인들로 하여금 찬탄을 자아내게 한다. 비록 결점도 나타나고 있지만 마침내는 이를 소홀히 지나치지 않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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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 왕념손(王念孫)<ref>1744-1832. 단옥재 시대의 또다른 고증학의 거봉</ref> : “아마도 1천 700년 이래 이런 저작은 없을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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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 김정희(金正喜)<ref>1786-1856. 조선 후기의 문신, 실학자, 서화가.</ref> : 김정희는 단옥재의 학문이 엄격하고 정밀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특히 청대 음운학 연구의 흐름 속에 위치하고 있는 단옥재의 성과를 정확하게 평가하는 등 단옥재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하지만 청의 고증학에 대한 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단옥재의 학문에 대해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었다.<ref>양원석 ( Won Seok Yang ). "19세기 조선(朝鮮)에서의 단옥재(段玉裁) 학문에 대한 인식 및 『설문해자주(說文解字注)』 수용 양상." 우리어문연구 39.- (2011): p.131</ref> | ||
==여담== | ==여담== | ||
+ | ===단옥재의 성격=== | ||
+ | 단옥재 집안은 대단히 다혈질적이었다고 한다. 단옥재가 퇴임 후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다리에 종기가 나서 고생했다. 친척 중에 미신을 믿는 사람이 있어 조상의 묘를 이장해야 한다고 해서 이장를 하려다 산(山)의 주인과 불화가 생겼다. 이 때, 단옥재의 삼촌이 그 산 주인을 때려서 죽게 했고, 결국 이 사건으로 온 가족이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 ||
+ | |||
+ | 또한,《설문해자주》를 읽다 보면 그의 다혈질적인 성격을 볼 수 있다. 단옥재의 분위기를 그대로 살리면 '천박한 놈, 얄팍한 놈'이라고 직역할 수 있는 천인([[淺]][[人]])이라는 단어가 무려 342번이나 사용되었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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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공에게 보낸 편지=== | ===유태공에게 보낸 편지=== | ||
유태공은 단옥재보다 16살 어린 학자로, 학문적 교류 외에도 단옥재의 부탁을 들어주기도 하며 친분을 다졌다. 단옥재가 유태공에게 보낸 편지들을 통해 《[[설문해자]]》 주석의 진행 상태를 알 수 있다. 단옥재의 편지 중 하나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 유태공은 단옥재보다 16살 어린 학자로, 학문적 교류 외에도 단옥재의 부탁을 들어주기도 하며 친분을 다졌다. 단옥재가 유태공에게 보낸 편지들을 통해 《[[설문해자]]》 주석의 진행 상태를 알 수 있다. 단옥재의 편지 중 하나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 ||
− | + |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저의 손녀가 벌써 열여덟이나 됩니다만 아직 약혼자가 없습니다. 소주(단옥재의 거주지)의 여러분들이 추천하여 주시는 연담(혼담)은 상대가 너무 부자이거나 너무 가난하여, 어느 경우든 잘 부합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소주의 풍습은 대단히 사치스럽기에 저는 그 점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만일 진강(유태공의 거주지)에 학문도 잘 하고 그다지 가난하지도 않은 젊은이를 아신다면, 부디 한 사람 소개하여 주십시오. 장가드는 일의 준비에 대하여 저도 가능한대로 하겠습니다. 손녀는 성격도 온화하고 책도 읽고 문자도 압니다. 저도 대단히 예뻐하고 있는 아이이므로, 부디 잘 부탁합니다. | |
이 편지의 내용을 통해 단옥재라는 위대한 학자도 손녀의 결혼을 걱정하는, 평범한 할아버지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이 편지의 내용을 통해 단옥재라는 위대한 학자도 손녀의 결혼을 걱정하는, 평범한 할아버지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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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문헌== | ||
+ | ===단행본=== | ||
+ | # 시라카와 시즈카, 『漢字 백 가지 이야기』, 황소자리, 2005 | ||
+ | # 아쓰지 데쓰지, 심경호 역, 『漢字學 : 설문해자의 세계』, 보고사, 2008 | ||
+ | # 염정삼, 『설문해자주』,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 | ||
+ | # 허신, 금하연 역, 『(漢韓對譯) 단옥재주 설문해자 214부수편』, 일월산방, 201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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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술논문=== | ||
+ | # 양원석 ( Won Seok Yang ). "19세기 조선(朝鮮)에서의 단옥재(段玉裁) 학문에 대한 인식 및 『설문해자주(說文解字注)』 수용 양상." 우리어문연구 39.- (2011): 119-145. | ||
+ | # 오제중. "논문(論文) : 《설문해자주(說文解字注)》의 문자학(文字學) 이론 고찰(考察) - 《설문해자(說文解字),敍》의 단옥재(段玉裁) 주(注)를 위주로." 中國文學硏究 0.55 (2014): 127-151. | ||
+ | # 문수정. "段玉裁 관점에서 본 ‘假借’ 현상과 그 의미 ― ≪說文解字注≫ 주석을 중심으로." 중국학 50.- (2015): 237-25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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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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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중국문자|인물]] |
2021년 5월 31일 (월) 14:37 기준 최신판
목차
생애
개요
단옥재(段玉裁, 1735~1815)는 중국 청나라 때의 학자로 자는 약응(若膺), 호는 무당(懋堂)이다. 강소성(江蘇省)에서 출생했다.
1760년의 거인(擧人, 중국에서 관리에 추천되거나 등용 시험에 응시하던 자. 또는 그 합격자.)으로 사천성(四川省) 무산(巫山)현의 지현(知縣, 청나라 때의 현의 으뜸 벼슬아치)이 되었으나, 곧 그만두고 학문에 전념했다. 대진(戴震)을 만나 그 제자가 되었고, 소학(小學)과 음운(音韻)에 정통하였다. 저서로 《설문해자주》 외에 《고문상서찬이(古文尙書撰異)》, 《모시고훈전(毛詩故訓傳》, 《시경소학(詩經小學》이 있다.
생가
단가(段家)는 본래 하남성에 살고 있었으나, 송나라가 북방 이민족에게 쫓겨 남쪽으로 옮겨 갈 때 조정과 함께 이사가, 강소성(江蘇省)에 정착했다. 강소성 진강부 금단현이 단옥재의 출생지이다. [1] 이 곳은 양자강 하류지역으로, 기후가 온난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으로, 당시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다. 단가(段家)는 대대로 학문을 해 온 집안이었다. 단가의 사람들도 누구나 다 과거를 치러 과거 시험에 합격하고자 했다. 과거시험은 향시, 회시, 전시의 세 단계[2]로 나뉘는데 1단계인 향시를 치르려면 부(府)나 현(縣)에 있는 국립학교의 학생이라는 자격이 요구되었다. 그러므로 맨 처음에 현의 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시험을 통과해야하는데, 이를 통과하면 ‘생원’이라고 불린다. 단옥재의 증조부, 조부, 부친은 모두 생원이 되었으나, 세 사람 모두 결국 향시에 합격하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출생과 소년시절
단옥재는 옹정(雍正) 13년(1735년), 26세의 단세속과 23세의 모친 사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3] 이 때는, 청 왕조가 극성기를 맞이한 무렵으로 사회는 완전히 안정되어 있었고, 학문도 최성기를 맞았다.
단옥재는 당시의 관습대로 대여섯살부터 조부에게서 과거를 위해 《논어》를 학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곱 살 때 조부모가 연이어 세상을 뜨자, 부모의 상을 입기 위해 돌아온 단세속은 친히 단옥재에게 고전의 기초를 가르치다가, 다시 금단을 떠나 자신이 연 ‘비릉연강교관사’라는 서당으로 돌아간다. 건륭(乾隆) 12년(1747년), 13세가 된 단옥재는 동시(童試)[4]에 응시해, 놀라운 성적으로 합격했다. 이렇게 단옥재는 열세 살 때에 생원이 되었다. 그는 이미 ‘사서’와 ‘오경’을 암송할 수 있는 우수한 소년이었다.
대진(戴震)과의 만남
건륭 25년(1760년), 단옥재는 향시에 응시해 합격했다. 향시에 통과하면 거인(擧人)의 칭호와 회시에 응시할 자격이 부여되었다. ‘거인’은 이미 훌륭한 예비관료로, 그 자격만으로도 지방의 고관에 임명될 수 있었다. 향시에 통과해 ‘거인’이 된 단옥재는 얼마 뒤 수도 북경으로 가서, ‘좌사[5]’인 전여성의 집에서 생활하면서 회시의 수험 준비를 시작했다. 이 때 단옥재는 고염무(顧炎武)[6]의 《음학오서(音學五書)》를 탐독하였다. 이를 계기로 단옥재는 고대음운학을 연구하기로 결심했다. 거인이 된 다음해, 27세의 단옥재는 북경에서 회시에 첫 도전하지만, 불합격한다. 회시는 3년에 1회 밖에 실시되지 않아, 단옥재는 다음 기회까지 북경에 살면서 ‘경산만선전 관학’의 교습, 즉 국립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관학의 교습으로 있던 시기에 단옥재는 전 생애에 걸쳐 스승으로 존경하게 되는 인물인 대진(戴震)[7]을 만난다. 대진의 좌사 역시 단옥재와 같은 전여성이었다. 대진과 단옥재는 함께 전여성을 좌사로 떠받드는 동문의 관계였으므로, 왕래가 자연스러웠다. 이 때부터 단옥재는 대진을 스승으로 받을었는데, 그 관계는 대진이 세상을 뜨기까지 변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편지가 빈번히 오갔는데, 이는 편지보다는 학술논문에 가까웠다.
《육서음운표》, 《설문해자독》의 완성
총 세 번의 회시에서 불합격한 단옥재는 37세가 되었을 때 지방의 작은 관직인 ‘지현’이 되었다. 이 관직은 회시를 아직 통과하지 못한 거인 중에서도 선발되었다. 8년간의 관직 생활을 하며 단옥재는 여가를 이용해 연구하여 《육서음운표(六書音均表)[8]》를 완성한다. 《육서음운표》는 단옥재 고음학의 집대성이다. 단옥재는 연구자로서의 그의 생애 전반을 이 책의 완성에 바쳤다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지식인 필수의 교양으로 시를 지어야했고, 시는 반드시 각운(脚韻)이 있어야했다. 이에 따라 시짓기에 편리하도록 같은 모음을 지닌 문자를 분류해 모으고 간단히 자의(字義)를 첨가한 ‘운서(韻書)’들이 만들어졌다. 그 중에서도 수나라의 《절운(切韻)》이 대표적이었다. 하지만 《시경》과 같은 춘추전국시대, 또는 한대(漢代)에 사용된 압운은 《절운》계의 운서와 맞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시경》 등의 음운체계를 연구하는 학문이 발달했다. 《시경》 등의 음을 상고음(上古音)이라 하고, 《절운》을 대표하는 음을 중고음(中古音)이라고 한다.
단옥재는 두 번째의 회시에 실패한 뒤 잠시 고향으로 돌아가, 아우 단옥성과 함께 《시경》이나 그 외의 경서 속 압운을 검토해, 상고음이 17개의 부로 분류된다고 했다. [9] 그 17부의 설을 단옥재는 더욱 확실한 설로 발전시켜, 건륭 40년(1775년) 41세 때에 5종류의 표로 정리해, 뒷날 《설문해자주》의 뒤에 붙게 되는 《육서음운표》가 완성된다. 그리고 건륭 41년 《설문해자》의 주석에 착수하게 된다.
건륭 45년(1780년), 70세가 넘은 부친의 뒷바라지를 위해 단옥재는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인 금단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건륭 51년, 단옥재는《설문해자독》을 완성한다. 《설문해자독》은 《설문해자주》를 위한 ‘장편(長篇)’이었다. 장편은 무언가 커다란 저술을 하기 전에 만들어지는 대형의 원고본이다. 이 대형의 원고본을 적절히 정리해 책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 이후 단옥재는 계속해서 연구를 거듭해 《설문해자주》를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설문해자주》의 완성
건륭 57년(1792년), 단옥재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졌다. 그는 여러 가지 병에 걸려 투병 생활을 계속하면서도, 혼자의 힘으로 작업을 해나가, 가경 12년(1807년) 마침내 《설문해자주》를 완성한다.
원고의 완성 이후 다시 수년이 지나, 가경 18년(1813년) 《설문해자주》의 인쇄가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학자들이 저술한 서적을 자신의 집에서 자금을 내 간행하는 것이 보통이어서, 《설문해자주》도 그러한 형태로 출판되었다. 하지만 이 작업은 원고 자체가 막대한 양의 문자인데다가, 또 문자에 오류가 발생하지않도록 주의를 쏟아야했다. 이에 따라 《설문해자주》는 2년이 걸린 인쇄 끝에 세상에 나왔다. 이 때, 단옥재의 나이는 81세였다. 단옥재 자신이 출판한 책은 단옥재의 서재 이름을 붙여 ‘경운루본(經韻樓本)’이라고 한다. 당시 《설문해자주》는 문은(紋銀)[10] 10냥에 거래되었다. 당시 은 20냥은 서민 한 가족의 1년분 생활비라는 점을 고려하면, 《설문해자》의 문은 10냥은 대단한 가격이라고 할 수 있다.
사망
《설문해자주》는 가경 20년(1815)년 5월에 처음으로 세상에 나왔다. 자신의 온 생애를 바친 저작물이 출판되는 것을 볼 수 있었던 단옥재는 같은 해 9월에 세상을 떴다. 《설문해자주》에 대해 “1천 7백년 이래에 이러한 저작이 없었다.”라는 찬사를 서문에 적었던 왕념손은 단옥재의 묘지명으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대청 칙수문림랑 사천무산현지현 단군 묘지병 병서(大淸 敕授文林郎 四川巫山縣知縣 段君 墓志銘 幷序)”
단옥재의 유해는 고향 금단현의 서쪽, 대패두의 땅에 묻혔다. 단옥재의 생가와 묘는 현존해있으며 강소성의 문화재로 보호받고 있다.[11]
단옥재의 《설문해자》 분석방법
≪설문해자≫ 체례 연구
단옥재는 ≪설문해자≫ 전체를 관철하는 원칙을 발견해, 그 원칙에 의해 본문을 교정하는 방법을 채택했다. 이러한 원칙을 ‘체례(體例:’ 혹은 ‘통례(通例)’라고 부른다. 이 체례의 발견과 응용이 ≪설문해자주≫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이다. ≪설문해자주≫에는 “凡......”으로 시작하는 문장이 많이 있다. 이는 모두 ≪설문해자≫의 체례에 대해 언급한 서술이다. 이러한 대표적인 체례는 아래와 같다.
무릇 두 글자가 합하여 하나의 문자를 이루는 것들은, 이를테면 번여(璠璵), 근유(瑾瑜), 매괴(玫瑰)의 따위와 같이, 이미 위 글자에서 그 자의를 들었으면 아래에서 다시 그 자의를 들지 않는다. 전체 책의 체례는 이와 같거늘 후인이 많이 고치고 혼란시켰다.
무릇 한 글자를 전서(篆書)로 들고, 먼저 그 자의를 훈해(訓解)한다. 시야(始也)나 전야(顚也)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다음으로 그 형태를 해석한다. “모(某)를 따른다. 某의 성(聲)” 같은 것이 그것이다. 다음으로 그 음을 해석한다. “모(某)의 성(聲)” 및 “읽기를 某와 같이 한다.” 같은 것이 그것이다.
이렇게 단옥재가 체례를 기록한 것은 수십 조항에 달하는데, 단옥재를 이를 통해 ≪설문해자≫의 전체를 파악한 것이다.
이허해허(以許解許)
《설문해자》에 기록되어 있는 훈고를 해석할 때, 단옥재는 “『설문』을 가지고 『설문』을 풀이한다.”라는 방법을 자주 이용했다. 허신이 부여한 어떤 훈고를 이해하기 위해 허신이 다른 글자에 부여한 훈고를 이용했다. 즉, 이허해허(以許解許)란 ‘허(許)를 가지고 허(許)를 풀이하였다.’라고 말할 수 있다. 단옥재는 훈고에 대한 주석을 달 때 ‘첩운(疊韻)을 가지고 훈(訓)을 한다.’고 쓴다. 첩운이란, 두 글자의 운이 똑같은 것을 말한다. 즉, 동음의 글자로 훈(訓)을 하는 ‘성훈(聲訓)’이라는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이에 대한 예시로 衣에 대한 주석을 보자. 《설문해자》에는 衣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衣 : 의(依)이다. 위를 衣라고 하고, 아래를 상(常)이라고 한다. 두 사람을 덮는 형태를 상형한다.”
이에 대해 단옥해는 아래와 같이 주석을 달았다.
“(一) 첩운을 가지고 훈을 한다. 의(依)라는 것은 의(倚)이다. 衣라는 것은 사람이 의지하여 몸을 덮는 바의 것이다.” “(二) 상(常)은 하군(下帬)이다.”
먼저 “첩운을 가지고 훈을 한다.”라는 주를 통해 성훈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다음으로 “의(依)라는 것은 의(倚)이다.”는 《설문해자》에서 의(依)에 대한 설해를 이용한 것이다. ‘의(倚)’란 ‘기댄다, 의지한다.’는 뜻으로, 衣자의 주에서 “衣라는 것은 사람이 의지하여 몸을 덮는 바의 것이다.”라고 한 것은 “衣란 사람이 그것에 기대어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라는 뜻이 된다. 허신의 해석에 대한 옮고 그름보다는 허신의 훈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단옥재의 목적이었다.
또 (二)에서 말하는 “상(常)은 하군(下帬)이다.” 역시 《설문해자》의 상(常)에 대한 해설을 인용한 것으로, 상(常)은 치마의 뜻이라는 것을 서술한 것이다.
고전에 의한 실증
≪설문해자주≫를 살펴보면, 다량의 서적을 인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단옥재는 ≪설문해자≫에 보이는 훈고를 경서나 제자(諸子) 등의 고전 속에서 실제로 사용된 용례에 의해 검층하고, 본의로부터 자의(字義)의 발전을 설명하고자 했다.
자의(字義)의 변천
한자는 표의문자이므로 원칙적으로는 한 글자가 어휘 하나에 대응한다. 하지만 한자 한 글자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단옥재는 이러한 자의(字義)의 발전 과정을 밝히는 일에서 높은 성과를 이룩했다. 단옥재는 자의의 변천과정에서 ‘인신(引伸)’과 ‘가차(假借)’를 중심으로 설명하였다. ‘인신’은 글자 그대로 ‘뽑아서 늘린다’는 것이다. 본의로부터 의미적 연관을 매개로 파생된 자의를 ‘인신의(引伸義)’라고 한다. 이와 달리 의미적 연관성 없이 다른 동음자의 대용자로 사용되어 본의 이외의 자의가 된 것을 ‘가차의(假借義)’라고 한다.
통언(統言)과 석언(析言)
단옥재는 여러 글자가 같은 의미를 지니는 현상에도 주목했다. ‘통언(統言)’은 ‘한데 얽어서 말한다’는 뜻으로 ‘동의어’를 말한다. ‘석언(析言)’은 ‘구별하여 말한다’로 동의어 그룹에서 보이는 작은 의미 차이의 구분을 말한다. 이를 다시 정리하면, ‘통언’은 넓은 의미로 한데 묶어서 말하는 의미이고, ‘석언’은 좁은 의미로 엄밀하게 구별하여 말하는 것을 뜻한다.
단옥재에 대한 평가
1) 강원(江沅)[12] : “원(沅)은 말한다. 세상에 허신의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가 상당하다고 하지만 그것을 연구함에 얻은 바로서 즉, 학문적 성과로서 선생을 넘어서는 자는 없다.”
2) 왕력(王力)[13] : “단옥재의 ‘설문해자 연구’는 독보적이고 독창적인 일가의 작품으로 그 영향력은 상당히 크다.”, “그는 허씨 문중의 일대 공신으로 또한 허씨의 가장 비판적인 제자라 할 수 있다. 그는 허씨의 학문을 따라 잡아 허씨의 학문을 초월해냈다.”, “단옥재의 저술 속에서 엿볼 수 있는 정미하고 정당한 논설의 부분은 상당히 많은 것으로 평가되며 학인들로 하여금 찬탄을 자아내게 한다. 비록 결점도 나타나고 있지만 마침내는 이를 소홀히 지나치지 않았다.”
3) 왕념손(王念孫)[14] : “아마도 1천 700년 이래 이런 저작은 없을 것이다.”
4) 김정희(金正喜)[15] : 김정희는 단옥재의 학문이 엄격하고 정밀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특히 청대 음운학 연구의 흐름 속에 위치하고 있는 단옥재의 성과를 정확하게 평가하는 등 단옥재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하지만 청의 고증학에 대한 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단옥재의 학문에 대해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었다.[16]
여담
단옥재의 성격
단옥재 집안은 대단히 다혈질적이었다고 한다. 단옥재가 퇴임 후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다리에 종기가 나서 고생했다. 친척 중에 미신을 믿는 사람이 있어 조상의 묘를 이장해야 한다고 해서 이장를 하려다 산(山)의 주인과 불화가 생겼다. 이 때, 단옥재의 삼촌이 그 산 주인을 때려서 죽게 했고, 결국 이 사건으로 온 가족이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설문해자주》를 읽다 보면 그의 다혈질적인 성격을 볼 수 있다. 단옥재의 분위기를 그대로 살리면 '천박한 놈, 얄팍한 놈'이라고 직역할 수 있는 천인(淺人)이라는 단어가 무려 342번이나 사용되었다고 한다.
유태공에게 보낸 편지
유태공은 단옥재보다 16살 어린 학자로, 학문적 교류 외에도 단옥재의 부탁을 들어주기도 하며 친분을 다졌다. 단옥재가 유태공에게 보낸 편지들을 통해 《설문해자》 주석의 진행 상태를 알 수 있다. 단옥재의 편지 중 하나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저의 손녀가 벌써 열여덟이나 됩니다만 아직 약혼자가 없습니다. 소주(단옥재의 거주지)의 여러분들이 추천하여 주시는 연담(혼담)은 상대가 너무 부자이거나 너무 가난하여, 어느 경우든 잘 부합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소주의 풍습은 대단히 사치스럽기에 저는 그 점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만일 진강(유태공의 거주지)에 학문도 잘 하고 그다지 가난하지도 않은 젊은이를 아신다면, 부디 한 사람 소개하여 주십시오. 장가드는 일의 준비에 대하여 저도 가능한대로 하겠습니다. 손녀는 성격도 온화하고 책도 읽고 문자도 압니다. 저도 대단히 예뻐하고 있는 아이이므로, 부디 잘 부탁합니다.
이 편지의 내용을 통해 단옥재라는 위대한 학자도 손녀의 결혼을 걱정하는, 평범한 할아버지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 시라카와 시즈카, 『漢字 백 가지 이야기』, 황소자리, 2005
- 아쓰지 데쓰지, 심경호 역, 『漢字學 : 설문해자의 세계』, 보고사, 2008
- 염정삼, 『설문해자주』,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
- 허신, 금하연 역, 『(漢韓對譯) 단옥재주 설문해자 214부수편』, 일월산방, 2017
학술논문
- 양원석 ( Won Seok Yang ). "19세기 조선(朝鮮)에서의 단옥재(段玉裁) 학문에 대한 인식 및 『설문해자주(說文解字注)』 수용 양상." 우리어문연구 39.- (2011): 119-145.
- 오제중. "논문(論文) : 《설문해자주(說文解字注)》의 문자학(文字學) 이론 고찰(考察) - 《설문해자(說文解字),敍》의 단옥재(段玉裁) 주(注)를 위주로." 中國文學硏究 0.55 (2014): 127-151.
- 문수정. "段玉裁 관점에서 본 ‘假借’ 현상과 그 의미 ― ≪說文解字注≫ 주석을 중심으로." 중국학 50.- (2015): 237-256.
각주
- ↑ 청나라 행정구획으로는 성(省)의 아래에 부(府)가 있고 府의 아래에 현(縣)이 있었다.
- ↑ 과거시험은 각 성(省)마다 시행하는 향시, 수도 북경에서 실시하는 회시, 마지막으로 황제가 임석하여 실시하는 전시의 세 단계로 나뉜다.
- ↑ 모친이 단옥재를 잉태했을 때, 그녀는 자신이 네 마리의 양을 낳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단세속은 “양이란 ‘상(祥, 상서로운 징조)’을 말한다. 분명히 사내아이 넷이 태어날 것이다.”라고 해몽을 했다. 예언대로 그녀는 후에 단옥재를 장남으로, 아들 넷과 딸 둘을 낳았다.
- ↑ 동시의 정식 명칭은 학교시(學校試)로, 이 시험은 본래 국립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시험이었다. 학교시도 현마다 실시하는 현시, 부에서 치르는 부시, 본 시험인 원시라는 3단계로 나뉘어 있는다. 원시까지 통과해야 비로소 생원이 된다.
- ↑ 향시의 실시 책임자
- ↑ 고염무(1613~1681)는 명말청초의 대학자로, 청조 학술의 발전에 기초를 확립한 인물이다. 그의 저서 《음학오서(音學五書)》는 정밀한 고증을 기초로 고대음운학의 기초적 연구와 방법론을 서술한 명저이다.
- ↑ 대진(1723~1777)은 안휘성 휴녕현 사람으로 단옥재보다 12세 연상이었다. 젊어서부터 정밀한 고증 논문을 저술해, 건륭제가 방대한 도서를 집성하여 사고전서(四庫全書 )를 편찬할 때 만권 서적의 교정과 해제를 담당해 고전연구의 성과를 발휘했다. 또한, 고염무 이래의 고대음운학 연구를 계승, 발전시켰다.
- ↑ 均은 韻의 고자(古字)로 韻과 같다. 발음은 ‘균’이 아니라 ‘운’으로 한다.
- ↑ 서로 압운되는 문자의 군을 하나로 묶어 그것을 부(部)라고 한다.
- ↑ 순도가 1천분의 935 이상 양질의 은으로, 당시 화폐의 대용으로 사용되었다.
- ↑ 단옥재의 묘
- ↑ 단옥재의 제자
- ↑ 1900-1986, 중국의 언어학자
- ↑ 1744-1832. 단옥재 시대의 또다른 고증학의 거봉
- ↑ 1786-1856. 조선 후기의 문신, 실학자, 서화가.
- ↑ 양원석 ( Won Seok Yang ). "19세기 조선(朝鮮)에서의 단옥재(段玉裁) 학문에 대한 인식 및 『설문해자주(說文解字注)』 수용 양상." 우리어문연구 39.- (2011): p.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