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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개요== | ||
− | + | 일본 나가노 현(長野県)에서 태어난 중국 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이다. 구제(舊制) 오사카 고교(大阪高校)를 졸업해 1931년에 도쿄 제국 대학(東京帝国大学) 문학부(文学部)의 지나문학과(支那文学科)에 입학하였다. 졸업을 앞둔 1934년 3월 다케다 다이준(武田泰淳) 등과 함께 중국문학연구회를 결성하고, 1935년부터 중국문학월보를 간행하며 본격적인 중국문학 연구의 초석을 다진다. 1937년부터 2년 동안 중국의 베이징(北京)에서 유학한다. 1960년대 안보투쟁(安保闘争) 당시 안보 개정안 강행 처리에 항의하여, 당시 몸담고 있던 도쿄 도립대학 인문학부 교수직에서 사퇴하였다. 그 뒤 잡지 『주고쿠』(中国)를 간행하고, 만년에는 루쉰(魯迅)의 문학을 번역하고 연구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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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 ==생애== | ||
+ | 다케우치 요시미는 1910년 10월 2일 일본 나가노 현 미나미사쿠 군 우스다마치에서 태어났다. 1931년 4월 도쿄 제국대학 문학부 지나(支那) 문학과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이던 1932년 8월 외무성의 지나문화사업부에서 주관한 “조선 만주견학 여행”에 참여할 기회를 얻는다. 이때 조선 각지를 거쳐 창춘까지 간 후, 베이징에서 사비로 잠깐 머문 뒤 2개월 후인 10월에 귀국하였다. 34년 3월에 졸업 논문 『위다푸(郁達夫) 연구』를 발표하며 대학 과정을 마친다. 남만주철도에 취직을 기대했던 적이 있지만, 7월 2일 정식으로 거절당했다. 이듬해 3월 1일 오카자키 도시오(岡崎俊夫), 다케다 다이쥰(武田泰淳) 등의 주변 사람들과 함께 중국문학연구회를 결성하였다. 모임을 이어 오면서 ‘중국문학연구회’라는 이름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8월 4일 도쿄 히비야에서 저우쭤런(周作人), 쉬쭈정(徐祖正)의 환영회를 개최했을 당시부터였다고 전해진다. 35년에는 모임의 기관지로서 『중국문학월보』(후에 『중국문학』으로 개칭)를 창간했다. 36년 8월부터 『중국문학월보』의 <루쉰 특집 호>를 편집하기 위해 루쉰의 『고함(吶喊)』, 『화개집(華蓋集)』 등의 작품을 읽는데, 그는 특히 『광인일기(狂人日記)』에 가장 흥미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 팽배해 있던 일본 군국주의 체제 하에서 연구회의 유지가 점점 어렵게 되자, 1943년 연구회를 해산하고 기관지(당시 192호까지 창간됨)도 폐간했다. 37년 10월, 다케우치 요시미는 외무성 문화 사업부의 보조를 받기로 한 뒤, 2년간 어학연수를 하러 베이징으로 출발한다.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41년 5월부터 『루쉰』 집필을 시작하였고, 2년 뒤 12월에 소집 명령을 받고 중국 후베이성에 파견되었다. 이때 복잡한 심정으로 집필을 마친 『루쉰』 원고를 다케다 다이쥰에게 맡겼다. 원고는 다케다 다이쥰의 발문을 붙여서 1944년 12월에 『동양사상총서』의 한 권으로 일본평론사에서 간행되었다. 49년 3월부터 게이오대학의 문학부에 시간강사, 도쿄도립대학 교수 등을 역임하였는데, 60년 5월 안보투쟁에 참여해 미일안전보장개정조약에 반대를 표하는 과정에서 도쿄도립대학 교수직을 사임한다. 전후에는 주로 루쉰 작품의 번역, 평론과 일본문화에 관한 평론, 논문 등을 썼다. 일본 공산당을 비판, 국민문학논쟁, 안보조약변경 반대 운동 등에 참가하고 정치, 사회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다, 1977년 3월 3일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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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년 12월에 다케우치 요시미는 소집 명령을 받고 일개 병사로서 중국에 종군했다. 이때 유언의 심정으로 쓴 『루쉰』의 원고를 다케다 다이준에게 맡겼다. 원고는 다케다 다이준의 발문을 붙여서 1944년 12월에 『동양사상총서』의 한 권으로 일본평론사에서 간행되었다.『루쉰』의 본문은 루쉰의 죽음과 삶에 관해 사실에 근거한 접근을 시작으로 루쉰의 전기에서 발생하는 의문을 되짚고 그의 사상과 작품, 그리고 5장에서는 루쉰이 생각하는 문학과 정치의 관계, 나아가서는 계몽가, 혁명가로서의 태도에 이르기까지 살펴보면서 루쉰에 대한 이야기하고 있다. 다케우치가 『루쉰』이라는 책을 쓰게 된 이유는, 다케우치는 동양은 기본적으로 서구의 근대와는 달리 '근대의 추구'와 '근대의 극복'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풀고 출발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또한 동양은 서구의 근대주의를 추구해야 하지만 서양 근대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노력 역시 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러한 근대성의 문제 또는 새로운 근대의 창출을 목표로 했던 다케우치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루쉰을 그 가능성의 근간으로 삼아서 연구했고 그 연구의 결과로 나온 책이 『루쉰』 인 것이다. | ||
+ | ===근대적 초극=== | ||
− | + | ===방법으로서의 아시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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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우치 요시미 문학의 특징== | ==다케우치 요시미 문학의 특징== |
2016년 12월 16일 (금) 14:56 판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 | |
---|---|
| |
출생 |
1910.10.2 일본 나가노현 미나미사쿠 군 |
사망 |
1977.3.3 강소성 상하이(江蘇省 上海) |
가족 | 동생 저우쭤런, 첫번째 아내 주안, 두번째 아내 쉬광핑 |
주요 작품 | 근대적 초극, 루쉰, 방법으로서의 아시아 등등 |
관련 활동 | 중국학자, 문학평론가 |
“ 근현대 중국 국민문화의 어머니
” — 타케우치 요시미(문학 평론가), <근대의 초극>
목차
개요
일본 나가노 현(長野県)에서 태어난 중국 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이다. 구제(舊制) 오사카 고교(大阪高校)를 졸업해 1931년에 도쿄 제국 대학(東京帝国大学) 문학부(文学部)의 지나문학과(支那文学科)에 입학하였다. 졸업을 앞둔 1934년 3월 다케다 다이준(武田泰淳) 등과 함께 중국문학연구회를 결성하고, 1935년부터 중국문학월보를 간행하며 본격적인 중국문학 연구의 초석을 다진다. 1937년부터 2년 동안 중국의 베이징(北京)에서 유학한다. 1960년대 안보투쟁(安保闘争) 당시 안보 개정안 강행 처리에 항의하여, 당시 몸담고 있던 도쿄 도립대학 인문학부 교수직에서 사퇴하였다. 그 뒤 잡지 『주고쿠』(中国)를 간행하고, 만년에는 루쉰(魯迅)의 문학을 번역하고 연구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생애
다케우치 요시미는 1910년 10월 2일 일본 나가노 현 미나미사쿠 군 우스다마치에서 태어났다. 1931년 4월 도쿄 제국대학 문학부 지나(支那) 문학과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이던 1932년 8월 외무성의 지나문화사업부에서 주관한 “조선 만주견학 여행”에 참여할 기회를 얻는다. 이때 조선 각지를 거쳐 창춘까지 간 후, 베이징에서 사비로 잠깐 머문 뒤 2개월 후인 10월에 귀국하였다. 34년 3월에 졸업 논문 『위다푸(郁達夫) 연구』를 발표하며 대학 과정을 마친다. 남만주철도에 취직을 기대했던 적이 있지만, 7월 2일 정식으로 거절당했다. 이듬해 3월 1일 오카자키 도시오(岡崎俊夫), 다케다 다이쥰(武田泰淳) 등의 주변 사람들과 함께 중국문학연구회를 결성하였다. 모임을 이어 오면서 ‘중국문학연구회’라는 이름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8월 4일 도쿄 히비야에서 저우쭤런(周作人), 쉬쭈정(徐祖正)의 환영회를 개최했을 당시부터였다고 전해진다. 35년에는 모임의 기관지로서 『중국문학월보』(후에 『중국문학』으로 개칭)를 창간했다. 36년 8월부터 『중국문학월보』의 <루쉰 특집 호>를 편집하기 위해 루쉰의 『고함(吶喊)』, 『화개집(華蓋集)』 등의 작품을 읽는데, 그는 특히 『광인일기(狂人日記)』에 가장 흥미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 팽배해 있던 일본 군국주의 체제 하에서 연구회의 유지가 점점 어렵게 되자, 1943년 연구회를 해산하고 기관지(당시 192호까지 창간됨)도 폐간했다. 37년 10월, 다케우치 요시미는 외무성 문화 사업부의 보조를 받기로 한 뒤, 2년간 어학연수를 하러 베이징으로 출발한다.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41년 5월부터 『루쉰』 집필을 시작하였고, 2년 뒤 12월에 소집 명령을 받고 중국 후베이성에 파견되었다. 이때 복잡한 심정으로 집필을 마친 『루쉰』 원고를 다케다 다이쥰에게 맡겼다. 원고는 다케다 다이쥰의 발문을 붙여서 1944년 12월에 『동양사상총서』의 한 권으로 일본평론사에서 간행되었다. 49년 3월부터 게이오대학의 문학부에 시간강사, 도쿄도립대학 교수 등을 역임하였는데, 60년 5월 안보투쟁에 참여해 미일안전보장개정조약에 반대를 표하는 과정에서 도쿄도립대학 교수직을 사임한다. 전후에는 주로 루쉰 작품의 번역, 평론과 일본문화에 관한 평론, 논문 등을 썼다. 일본 공산당을 비판, 국민문학논쟁, 안보조약변경 반대 운동 등에 참가하고 정치, 사회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다, 1977년 3월 3일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문학
중국의 근대와 일본의 근대
루쉰
1943년 12월에 다케우치 요시미는 소집 명령을 받고 일개 병사로서 중국에 종군했다. 이때 유언의 심정으로 쓴 『루쉰』의 원고를 다케다 다이준에게 맡겼다. 원고는 다케다 다이준의 발문을 붙여서 1944년 12월에 『동양사상총서』의 한 권으로 일본평론사에서 간행되었다.『루쉰』의 본문은 루쉰의 죽음과 삶에 관해 사실에 근거한 접근을 시작으로 루쉰의 전기에서 발생하는 의문을 되짚고 그의 사상과 작품, 그리고 5장에서는 루쉰이 생각하는 문학과 정치의 관계, 나아가서는 계몽가, 혁명가로서의 태도에 이르기까지 살펴보면서 루쉰에 대한 이야기하고 있다. 다케우치가 『루쉰』이라는 책을 쓰게 된 이유는, 다케우치는 동양은 기본적으로 서구의 근대와는 달리 '근대의 추구'와 '근대의 극복'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풀고 출발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또한 동양은 서구의 근대주의를 추구해야 하지만 서양 근대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노력 역시 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러한 근대성의 문제 또는 새로운 근대의 창출을 목표로 했던 다케우치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루쉰을 그 가능성의 근간으로 삼아서 연구했고 그 연구의 결과로 나온 책이 『루쉰』 인 것이다.
근대적 초극
방법으로서의 아시아
다케우치 요시미 문학의 특징
사실 노신이 생전에 창작한 문학 작품의 수는 중편 1편과 단편 32편으로 중국의 대문호라는 칭호에 비해 그 수가 비교적 적은 편이다. 문서 상단에서 언급한 일본의 문학평론가 ‘다케우치 요시미’역시 중국의 근현대 문학 속에서 노신의 영향력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문장이 난해하다는 점을 들어 ‘노신의 소설은 재미가없다’라고까지 평가하였다. 노신 본인 또한 자신의 순수 창작능력에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면서 잡문과 번역 작업에 몰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노신의 문학적 기교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문장을 통해 독자들에게 메세지를 전달하는 방식은 매우 강렬하고 ,깊은 인상과 여운을 심어주는 매력이 있음은 분명하다.
한가지 예로 노신의 순수창작소설 <광인일기>을 살펴보자면, 소설의 줄거리는 결국 광인의 피해망상증이 회복되어 조그마한 관직에 오르는 것으로 결론이 나지만, 노신은 소설의 플롯을 재배열함으로써 광인의 일기 마지막 구절이자 소설의 마지막 문구인 “사람을 먹어본 적 없는 아이가 있을까? 아이를 구해야 한다'의 여운을 극대화 시킨다. 또한, 소설의 서장 부분을 문언문으로, 광인의 일기 부분을 백화문으로 작성하여 문장의 서술양식만으로 범인(凡人)과 광인의 뚜렷한 경계를 형성하였다는 점에서 문학가 노신만의 치밀하며 독창적인 문장구성 방식을 가늠할 수 있다.
평가와 비판
노신은 고전문학을 가리켜 '기만의 문학이자 아름다운 수의에 덮인 주검'이라 묘사하였는데, 항상 완벽하고 행복한 결말을 맺는 전통 희극이 사람들의 의식을 마비시켜 자신들의 암울한 현실을 아무런 사고와 비판 없이 받아들이게 하는 원흉이라 평가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기만 문학을 비판하면서 "가면을 벗어 던지고 참답고 심각하게 인생을 들여다보고 그것의 피와 살을 그려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는데, 노신 문학의 사실주의는 이러한 사고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노신의 사실주의는 인물이나 사물의 표면적인 모습을 있는 그대로 투영하거나 묘사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사실주의를 추구하는 문학이나 예술이 반드시 그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작품을 창작하는데 있어서도 노신은 현실의 특정한 사건이나 인물을 있는 그대로 모델로서 사용하지 않고 여러 인물군상들과 함께 생활하고 깊이 있게 관여하여 그들의 본질적인 특징과 보편성을 잡아내어 표현하였는데, 이러한 방법으로 탄생한 대표적인 캐릭터가 바로 '아Q'라 할 수 있다. 아Q는 현실에 존재하는 특정한 개인을 모티브 삼은 게 아니며, 노신이 고향 사람들과 주변 인물들에 대한 전형화를 통해 만들어진 그 당시 중국 민중의 표상이다. 노신적 사실주의와 전형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캐릭터의 영향력은 단순히 중국 민중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실로 그 생명력이 대단하다고 볼 수 있는데, 국적을 막론하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아Q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며, 실례로 <아Q정전>이 연재되던 시기에 노신의 주변인들을 포함한 중국 민중은 소설 속 아Q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고한다. 프랑스 작가 로맹 롤랑은 아Q의 이야기는 중국인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며, 현대인들과 많은 사람의 이야기'라고 언급한 바가 있다.
중국어문화학과와 다케우치 요시미
마오쩌뚱
앞서 언급하였다시피, 마오는 노신을 상당히 높게 평가하며, 중국 혁명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인물이라고까지 표현하였는데, 이러한 평가를 당시의 정치적인 맥락 아래서 판단하여야 할 필요성이 있다. 모택동과 그의 공산당원들이 중화인민공화국을 건설하는 데 있어 실질적인 혁명운동과 투쟁을 벌인 주체(하드웨어)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으나,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신적 기틀과 사상(이른바 소프트웨어)을 확립한 인물이라고 보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혁명의 당위성으로 내건 공산주의와 이를 기반으로 한 혁명적 사상은 당시 중국 인민들에게도 생소하였을 뿐만 아니라 모택동 본인조차 그 방향성을 확립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모택동은 혁명을 달성하는 데 있어서 본인과 당에 부족한 소프트웨어, 즉 사상적인 측면을 중국 최초의 근현대 작가이자 대문호인 노신을 통해 보충하고자 하였다. 모택동은 때로 노신의 작품에 새로운 해석을 더 하거나 왜곡하였으며, 공산 혁명의 당위성을 확보하고자 노신을 공산 혁명의 ‘성인’으로 추대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표면적인 작업과는 별개로 모택동 개인이 노신이라는 인물과 그의 작품에 대해서 심도 있는 이해를 바탕으로 높이 평가하였는지는 다소 회의적이다. 모택동은 오로지 노신이 중국 인민들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심이 있다는 점에만 초점을 맞췄으며 1938년 한 강연에서 “농공 간부들이 글을 배웠다면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문장을 짓는 데 있어서 결코 노신보다 뒤처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는데, 이러한 발언은 문학가로서 노신의 성취를 깎아내렸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1950년대 반우파 운동이 한창인 시기, ‘만약 노신이 지금 살아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지인의 질문에 ‘감옥에 갇혀 계속 글을 쓰거나 돌아가는 사태를 보며 침묵하였을 것’이라 응대하였다. 이러한 답변 역시 모택동 노신을 정치적 도구로 이용했을 뿐 그의 문학 작품에서 표출되는 사상에 대해서는 반대하고 있다는 점을 뒷밭침해 주는 근거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만약 노신이 중공성립 때까지 살아있었다고 가정해보자면, 노신 역시 마오를 강도 높게 비판하였을 것이다. 노신은 생전에 문학이 혁명의 도구나 정치선전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부정하는 인물이었으며, 또한 예술가가 본연의 예술성을 잃어가면서까지 작품 속에서 본인의 혁명이론을 실천하려 한다면 그것은 표면적으로만 그럴싸해 보이는 문학이라 비판하였던 적이 있다. 이러한 노신의 성향을 고려한다면 분명 마오의 연안문예강화에도 반대했을 것이라 예상한다.
쑤쉐린(蘇雪林)
노신과 동시대를 살아갔던 여류작가 쑤쉐린은(蘇雪林:북경여자사범대학 출신으로 1949년 대만으로 넘어가 중국 문학 교수로 활동하였다.) 노신을 적대한 이들 중에서 가장 통렬하게 노신을 비판한 인물일 것이다. 그녀는 노신이 죽고 난 뒤 그에 대한 비판에 더 열을 가하였으며, 노신을 ‘심리적으로 완전히 병들어 있으며 비루한 인격의 소유자’라고 매도하였으며, 그가 좌파 패거리와 문인들로 인해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청년들이 이러한 ‘우상 만들기’를 진정으로 믿고 그의 문장을 읽으면서 정신적으로 오염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노신에 대한 쑤쉐린의 감정적 비난은 크게 2가지의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다. 먼저 전통적인 유교 문학의 계승자인 쑤쉐린의 입장에서 유교적 전통을 ‘식인행위’에 비유하며 가차없는 비판을 가하는 노신은 명백한 이단이자 위협적인 존재였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노신의 문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독한 염세주의의 냄새에 대한 본능적인 반감을 또 다른 비난의 이유로 추측할 수 있다. 그녀는 노신의 문장에 대해 “한 개인의 사상의 암울과 허무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 또한 감탄해 마지않을 수 없는 일이다”고 평가한 바가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노신을 비판한 문학가나 평론가는 비단 쑤쉐린 한 명뿐만이 아니며, 노신이 활동하던 시점부터 지금까지 그의 문학작품과 사상에 대한 비판 담론의 주요 소재로 사용되어왔다. 하지만 노신을 진정 중화전통의 혐오자이자 염세주의로 무장한 비관론자라고 보기는 힘들며, 이러한 비판에 대한 반론을 아래 서술하고자 한다.
반론1: 반전통주의자인가?
노신은 분명 자신의 초기 소설을 통해 유교적 전통을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게끔 하는 식인의 메커니즘에 비유하였으며, 중국인들을 아무런 저항 없이 식인의 메커니즘에 안주하고 있는 식인종들이자 비굴하며 정신승리를 아편 삼는 아Q적 인간으로 묘사한 바 있다. 문장을 통한 노신의 비판은 언제나 날이 서 있으며, 때로는 지독하리만큼 무자비한 면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부모가 아이를 야단친다고 해서 이를 혐오라 볼 수 없듯이, 노신의 칼날과도 같은 비판을 근거하여 그가 중국문화와 중국인들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며 혐오하고 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노신의 문학작품에서 비판과 회의적 색채에 숨겨진 또 하나의 코드는 ‘노스텔지어’라 볼 수 있는데, 이는 노신의 초기 소설뿐만 아니라 후기의 산문집에서도 종종 드러나는 특징 중 하나이다. 후기 산문집인 <아침 꽃 저녁에 줍다>를 노스텔지어적 특징이 잘 드러나는 예로 꼽을 수 있는데, 문장에서 등장하는 어린 노신의 보모인 ‘키다리 어멈’은 민간 신앙을 믿으며 품위 없이 남의 일을 구경하기 좋아하는 인물로 노신이 자신의 문장을 통해 거침없이 비판하던 전형적인 중국인의 표상이다. 하지만 동시에 선량한 마음씨로 어린 노신을 열성적으로 보살피고 아낌없이 사랑을 준 인물이기도 하며, 문장 속 묘사를 통해 '키다리 할멈'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이렇듯 문장 속에서 드러나는 날카로운 비판만큼이나 고향과 민중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 역시 노신 문학의 핵심이라 볼 수 있으며, 중국인들에 대한 노신의 통렬한 비판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들이 아무런 자각 없이 인습의 바다에 빠져 죽는 상황에서 이들을 살리기 위한 처절한 외침이라 보는 것이 더 알맞은 해석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쑤쉐린의 비판과는 달리 노신은 맹목적으로 전통을 비판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노신은 후기 잡문집 <무덤>을 통해서 5.4 시기의 젊은 지식인들이 조건 없이 중국의 전통문화를 열등한 것으로 치부하는 행위에 대해 비난하였으며, 역사적으로 전혀 다른 토양에서 성장한 서구식 모델을 함부로 적용하는 사대주의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 때로는 노신의 애국심과 자국민에 대한 애정이 그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일도 있었는데, 그가 미국의 소설가 펄 벅(Pearl Sydenstricker Buck)과 그녀의 대표작품인 <대지>를 비난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대지>는 펄 벅 개인이 실제로 중국에서 체류하면서 얻은 경험들을 바탕으로 실질적인 고증에 맞게 중국 농민들의 삶을 애잔하게 묘사한 작품이며, 작가 역시 기존의 서구 중심적 오리엔탈리즘에서 벗어난 진정으로 중국을 이해하고자 노력했던 인물이다. 이러한 작품에 비판을 가한 것은 어쩌면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문학창작 활동에 전념했던 노신 스스로에 대한 모순이자, 잠재돼있던 노신의 민족주의적 가치관이 표출되었던 몇 안 되는 사례 중 하나일 것이다.
반론2: 비관론자 또는 허무주의자인가?
노신에게 낙인찍힌 비관론자라는 타이틀과는 달리 노신은 '희망'이란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헛된 희망을 경계하고 스스로가 희망에 잠식당하지 않도록 노력한 인물이었다. 노신은 <야초>에서 페퇴피의 정의를 인용하여 희망을 "달콤한 말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근거 없는 약속을 늘어놓지만, 결국엔 부질없고 허망한 것"임을 지적하였다. 하지만 반대로 현실의 벽 앞에서 절망하는 것 역시 공허하기는 마찬가지이며 희망의 본질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점도 같이 언급하면서, 결과적으로 현실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에 끊임없이 저항하는 것이 삶에 대한 인간의 올바른 자세라는 것을 문장을 통해 주장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노신이란 인간을 평가하자면 그는 희망을 아편 삼는 낙관주의자도 아니며 더더욱이 절망 앞에서 무릎을 꿇는 비관주의자도 아니다. 오히려 철인(鐵人)과도 같은 정신력으로 현실의 고통에 맞서 투쟁하는 현실주의자에 가깝다. 따라서 그의 지독한 비판과 염세주의적 문체는 대중들로서는 지극히 어둡고 비관적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이는 어쩌면 대중들이 자각하지 못하는 그들의 현실적인 고통과 외로움을 여과 없이 들어내어 직면하게끔 하고자 하는 것이 현실주의자 노신의 진정한 목적이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작품 목록
- 아래 표는 노신의 작품들 중 중문과 수업에서 다루었던 작품들만 따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인 노신 작품목록은 추가예정
제목 | 특징 | 수업과의 연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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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침(呐喊) | 1923년 출판, 노신의 첫번째 단편소설집. 수록된 단편으로 <광인일기>, <고향>, <아Q정전> 등이 있다. |
중국문화사2, 인물로보는근현대중국사회, 중국문학산책 |
무덤(坟) | 1927년 출판, 잡문집 | 인물로보는근현대중국사회 |
야초(野草) | 1927년 출판, 산문시집 | 인물로보는근현대중국사회 |
아침 꽃 저녁에 줍다(朝花夕拾) | 1928년 출판, 산문집 | 인물로보는근현대중국사회 |
참고자료
중국 고전의 아이콘이 공자라면, 근대문학의 아이콘은 노신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중국의 근현대사와 관련된 수업이라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고 볼 수 있다. 2~3학년 수업에 고루고루 등장하니, 적어도 한 학기에 노신 작품 한편 정도는 접할 기회가 생긴다. 특히 2학년 2학기 수업으로 중국문학산책과 인물로보는근현대중국사회를 같이 수강한다면, 학기 말에 가까워지면서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2 수업에서 동시에 노신에 관한 주제를 배울 수 있다. 중국문학산책에서는 주로 노신의 초기 소설작품에 대해서 다루며, 인물로보는근현대중국사회에서는 주로 노신 후기의 산문과 잡문을 다룬다. 배우는 내용 자체는 겹치진 않지만, 노신의 작품을 전반적으로 동시기에 배울 수 있는 절묘한 타이밍이기도 하며, 또한 한쪽 수업에서 배운 내용이 다른 수업에 도움이 되는 등 예상치 못한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참고자료
1) <毛澤東과 魯迅의 관계 재검토> 안영선 저
2) <근대의 초극> 다케우치 요시미 저
3) <루쉰과 저우쭈어런> 쑨위 저
4) <인물 세계사: 현대 중국문학을 대표하는 ‘아Q정전’의 작가 루쉰> 박중서 저
5) <정신계의 전사, 노신> 엄영욱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