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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이러하니 공실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제]]나라 공실의 구귀족들과 전씨 사이에 세 차례에 걸쳐 쟁투가 발생하였다. | :*상황이 이러하니 공실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제]]나라 공실의 구귀족들과 전씨 사이에 세 차례에 걸쳐 쟁투가 발생하였다. |
2017년 6월 24일 (토) 18:39 판
전상(田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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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전항(田恆) |
국적 | 제(齊)나라 |
본관 | 진(陳)나라 |
별칭 |
陳恒(진항) 田成子(전성자) 陳成子(진성자) |
가족 | 아버지 전환자(田僖子) 전걸(田乞) |
자녀 | 전양자(田襄子) 전반(田盤) |
시호 | 성(成) |
생존 시대 | 춘추시대 |
신분 | 제나라 대부 |
목차
개요
- 원래 이름은 전항(田恆)이라고 한다. 전상(田常)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한나라 시대에, 한문제의 이름 인 유항(刘恒)을 회피하기 위해서 였다.
- 전(田)씨 일가는 전(田)으로도, 진(陳)으로도 불리곤 한다. 춘추 시대 초기에 진(陳)나라에서 공실의 내분이 일어나 전항의 조상인 공자 완(完)이 제나라로 도망쳐왔다. 제나라 군주인 제환공은 그를 받아들여 조정의 낮은 벼슬 자리를 주었다. 그가 곧 제나라에서 전(田)씨의 시초이다. 당시에는 전(田)과 진(陳)의 발음이 같았다고 한다.
- 죽은 후에, 시호인 성(成)과 당시 경대부(卿大夫)를 존경의 의미로 불렀던 자(子)를 합쳐 진성자(陳成子) 혹은 전성자(田成子)라고 불렸다.
생애
- 기원전 485년, 전상은 아버지 전걸의 지위인 대부를 계승 받았다, 그 후에 제나라 대부 포식(鲍息)을 부추겨서 제도공(齐悼公)을 죽이게 한 후 제간공(齐简公)을 왕으로 세웠다. 전상과 감지(阚止)는 제나라의 제나라의 좌우상을 담당하였다. 기원전 481년, 전상은 전씨 종친들의 세력을 규합하여 정변을 하였다. 제간공(齐简公)은 투쟁에서 패해 공실을 버리고 도망을 갔으나 전상이 군대를 보내 서주에서 감지(阚止)과 제간공을 죽였다. 전상은 제간공(齐简公)의 동생 오(鰲)를 왕으로 세웠으니, 이 사람이 제평공(齐平公)이다. 평공이 임금 자리에 오르자 전상은 그의 재상이 되어 제나라 국정을 주물렀다. 포(鲍), 안(晏) 등 여러 일가들을 모두 다 죽였다. 그리고 정치 개혁을 단행하고 형벌권을 장악하여 반대 세력을 모조리 몰아냈다.
“ 덕치는 백성이 좋아하는 것이니 군주께서 행하십시오. 형벌은 백성들이 싫어하는 것이니 이 신이 집행하겠습니다.
” — 전상
- 이후 백성들은 제후인 평공을 두려워하지 않고 형벌을 주는 전상만을 오직 두려워하였다. 전상은 또한 자신의 사유 토지를 크게 늘려갔다. 제나라 안평(安平)의 동쪽 땅을 떼어 내어 전씨의 봉읍으로 삼았다. 이리하여 개인의 봉읍 면적이 공실 소유의 토지보다 많아졌다. 전상은 계속하여 대두(大斗)로 양식을 빌려 주고 소두로 거둬 들이는 방법으로 민심을 더욱더 얻어나가기도 하였다. 전상은 이제 제후가 될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는 이미 삼가분진(三家分晉)으로 독립하여 신흥 세력이 된 한(韓), 조(趙), 위(魏)의 대부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제후들의 신망을 얻기 위해 일찍이 제나라가 빼앗은 노나라와 위나라의 땅을 돌려주었다. 강제(姜齊)의 국조가 끝나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였다. 이렇게 해서 전상은 기원전 476년에 제나라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주변 국가의 평론
논어 헌문(憲問)편
- 전상이 제간공(齊簡公)을 죽였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공자는 3일 동안 재계(齋戒)했고, 노애공(魯哀公)에게 제나라를 토벌하라고 요청했다. 노애공(魯哀公)은 계손비(季孫肥)한테 가서 알려주라고 하였다. 공자가 계손비에게 가서 알려주며 요청했으나 결국에는 거절당했다. 후세에 계손비의 행동 때문에, 계손비는 역신(逆臣)이라고 지적되었다.
고서의 기록
장자(莊子),《남화경(南華經), 거협(胠篋)》
“ ” — 장자(莊子), 《남화경(南華經), 거협(胠篋)》
한비자(韓非)
“ ” — 한비자(韓非)
- 이는 후세에 인용되는 성어인「竊鉤者誅,竊國者侯(절구자주 절국자후: 허리띠 고리를 훔친 자는 벌을 받지만, 나라를 훔친 자는 제후가 된다.)」의 유래이기도 하다.
역사
- 역사에 따르면 전상이 제나라 키가 7척 이상의 여자를 첩으로 골랐다고 한다. 후궁은 100명이였다. 후궁이 손님을 만나는 것은 금지하지 않았다. 전상이 죽었을 때, 70명의 아들이 옆에 있었다고 한다. 전상의 아들인 전반(田盘)이 아버지의 지위를 계승 받았다.
강제(姜齊)의 시대에서 전제(田齊)의 시대로
개요
- 기원전 5세기 무렵 전걸(田乞), 전상(田常) 부자가 제(齊)나라의 실권을 잡고 B.C 391년 전화(田和)가 정권을 찬탈하여 제후로 인정을 받게되었다. 이후 전제(田齊)라 칭하였다.
내용
- 춘추 시대 초기에 진(陳)나라에서 공실의 내분이 일어나 공자 완(完)이 제나라로 도망쳐왔다. 제나라 군주 환공은 그를 받아들여 조정의 낮은 벼슬 자리를 주었다. 그가 곧 제나라에서 전(田)씨의 시초이다. 전씨와 제나라 공실의 유대는 점차 돈독해졌고 제환공의 총애를 얻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춘추 시대 말기에 이르자 전씨 가문은 점차 제나라의 신흥 세력으로 떠올랐다. 반면 제나라 공실은 귀족들간의 알력으로 쇠퇴하여 갔다.
- 제경공(齊景公: 재위 기원전 547년~490년) 때 전(田)씨는 대부로 이미 상당한 역량을 갖춘 터였다. 신흥 세력의 대표인 전환자(田桓子)는 공실에 맞설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제나라 공실은 많은 세금을 거두어 들여 점차 민심을 잃었다. 전환자은 공실에서 떠난 민심을 자신에게 돌리기 위하여 머리를 썼다. 그 방법은 백성들에게 춘궁기에 대두(大斗)로 양식을 빌려주고 추수 후 소두(小斗)로 거두어 들인 것이다. 같은 한 말(斗)이지만 대두와 소두는 양에서 많은 차이가 난다. 전환자의 민심 회유 방법은 실효를 거두었다. 많은 백성들이 공실의 착취를 기피하여 점차 전씨 가문에서 양곡을 빌렸다. 백성들의 전환자에 대한 신망은 점차 높아갔다. 상대적으로 공실의 신망은 허물어져 갔으며, 많은 백성이 공실을 버리고 전씨 가문에 귀의하였다. 제나라 공실의 백성들은 전씨의 은민(隱民)으로 변했다.
- 상황이 이러하니 공실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제나라 공실의 구귀족들과 전씨 사이에 세 차례에 걸쳐 쟁투가 발생하였다.
- 첫번째 쟁투(기원전 532년 발생): 전환자은 도음 주위에 사는 백성인 국인(國人)들을 동원하여 집정 귀족의 우두머리인 란(欒)씨와 고(高)씨를 압도하였고 이들을 국외로 추방하였다.
- 두번째 쟁투(기원전 489년 발생): 전환자의 아들 전걸(田乞)이 주축이 되어 대부들을 규합하여 공실을 압박하였다. 공실의 잔류 귀족들은 또다시 패배하여 쫓겨나게 되었고 전걸는 제나라의 재상이 되어 정치, 군사 대권을 장악하였다.
- 세번째 쟁투(기원전 481년 발생):전걸(田乞)의 아들인 전상(田常)이 중심이 되어 제간공(齊簡公)과 그를 따르는 대신들과 벌인 싸움이었다. 결국 제간공은 전상이 보낸 군대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 전상은 제간공의 동생을 군주에 앉혔는데 그가 제평공(齊平公)이었다. 전상은 재상을 맡아 국정을 주물렀다. 그리고 정치 개혁을 단행하고 형벌권을 장악하여 반대 세력을 모조리 몰아냈다. 전상은 기원전 476년에 제나라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 전상이 죽고 그의 아들 전반(田盤)이 대를 이으니 그가 바로 전양자(田襄子)이다.
- 전양자가 죽고 그의 손자 전화(田和)가 대를 이어 명목상의 군주에 불구하던 제강공(齊康公)을 바닷가로 유폐시키고 제나라 군주에 올랐다. 기원전 392년의 일이었다. 전화는 위문후(魏文候)에게 청탁하여 삼진(三晉)의 선례에 따라 주나라 천자가 자기를 제후로 봉해주도록 부탁하였다. 주안왕(周安王)이 위문후의 요청을 받아 기원전 386년에 전화를 정식으로 제나라 제후에 봉하였다. 그가 전태공(田太公)이다. 제나라의 첫 군주인 강태공의 이름에 성만 바꾼 것이다. 이때부터 강제(姜齊) 시대는 막을 내리고 전제(田齊)시대가 열렸다.
참고 자료
-출처 : 춘추 전국의 패자와 책사들, 박인수 지음, 석필(2001), p.195~p.197
갑오일(甲午日), 전상이 서주에서 간공을 시해했다. 전상은 간공의 동생 오(鰲)를 왕으로 세웠으니, 이 사람이 평공(平公)이다. 평공이 임금 자리에 오르자 전상은 그의 재상이 되어 제나라 정치를 휘둘렀고, 제나라 안평(安平)의 동쪽 땅을 떼어 내어 전씨의 봉읍으로 삼았다. 평공 8년,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평공이 자리에 오른지] 십 오년만에 죽자. 아들 선공 적이 임금 자리에 올랐다. 선공이 [자리에 오른지] 오십일 년 만에 죽자, 아들 강공 대가 임금 자리에 올랐다. 전회(제나라 대부로 조나라에 투항함) 늠구에서 모반했다. 강공 2년, 한나라 위나라 조나라가 처음으로 제후의 반열에 올랐다. 강공 19년 전상의 증손자 전화가 처음으로 제후가 되어 강공을 바닷가로 옮겨 살게 했다. 강공 26년, 강공이 죽자 여씨(呂氏)들은 마침내 그들의 제사가 끊어지게 되었다. 전씨는 마침내 제나라를 소유하게 되었으며, 제나라 위왕 때에는 천하의 강자였다.
-사기 세가, 사마천 지음 김원중 옮김 민음사 110쪽 201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