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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서의 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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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초는 글자와 글자 사이의 연결은 없고 한 글자 중의 필획이 연결되는 현상을 보이고 예서의 필획 특성이 남아 있는 서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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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敦煌)의 한간(漢簡)이나 거연(居延)에서 출토된 거연한간 초서(漢 成帝 2년)는 필획이 연결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이는 장초의 특징이다. 후한 이후 이러한 민간에서 유행한 초서는 서예가들의 노력으로 엄격한 규범이 형성되어 황제에게 올린 상서에도 사용할 정도가 되었다. 사유(史游)의 <급취편(急就篇)>의 자체를 대표로 꼽는다. 장초는 <급취장(急就章)>의 ‘章’에서 연유되었을 뿐 아니라 ‘章’자에는 조리·법칙이라는 의미가 있어 금초보다는 규범적이라는 뜻에서 장초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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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楷書)가 만들어진 후 해서의 기초 위에 또 흘려 쓰는 초체(草體)가 형성되었는데, 여기서는 필획 간의 연결은 물론 위아래 글자와도 연결되는 현상을 보여 예서 필획의 특성이 완전히 소실되었다. 이러한 형체를 금초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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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초는 한나라 말 장지(張芝)에게서 발아하여 동진(東晉)의 왕희지(王羲之)에 이르러 최고봉을 이루었다. 진대(晉代) 이후 서예가들은 해서나 행서에 근거한 초서를 쓰게 되면서 그 근원이 다원성을 띠게 되어 수많은 초서이체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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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시대 초서이면서 예서체가 짙은 <공양전전(公羊傳磚)>은 일반인들이 즐겨 쓰던 서체이다. 일먕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이라고도 하는 유가 경전 중의 하나로 구전되어 오다가 한초(漢初)에 이르러서 금문경학자들이 정치이론을 펴기 위해 글로 써 놓았다. 전국 진한시대 유가사상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된 이 전은 초서이면서 예서풍을 보이며 음각되어 있다. 후한시대 서법 예술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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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초는 전혀 구속이 없이 자유분방한 필세의 초체를 말한다. 광초는 당대의 장욱(張旭)의 <두통첩(肚痛帖)>에 이르러 실용성을 완전히 벗어나 예술의 경지로 돌입한다. 따라서 난해하고 실용성이 결여된 탓에 단지 서예가들의 전유물이 되어 서법 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송대 황산곡(黃山谷)의 <이백의구유시(李白憶舊遊詩)>는 광초의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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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5일 (월) 16:29 판

초서의 개념

초서는 한대에 형성되었던 자체의 일종이다. 당나라에 이르러서는 특성에 따라 장초(章草)·금초(今草)·광초(狂草)로 구분하였다. ‘草’자는 고대에는 거칠다·간편하다로 풀이할 수 있었다. 초서의 ‘草’는 대개 이러한 뜻을 취했을 것이다. ‘초서’에는 넓은 뜻과 좁은 뜻의 두 가지가 있다. 넓은 뜻의 초서는 시대를 막론하고 거칠게 쓴 것은 모두 포함시킬 수 있다. 좁은 뜻의 초서는 곧 일종의 특정한 자체로서의 초서는 한 대에 비로소 형성된 것이다. 대략 동진(東晉) 시대로부터 당시의 신체(新體) 초서와 서로 구별하기 위하여 한대의 초서를 장초라고 불렀다. 신체 초서는 상대적으로 말하여 금초라고 불렀다. 문자를 신속하고 간편하게 쓰려는 요구는 문자의 사용과 때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어 일찍이 상대 갑골문이나 주대 금문에서도 간략한 자체와 흘려 쓰는 필적을 볼 수 있다. 후한 장제(章帝, 76-88) 때 두도(杜度)는 서첩 만들기를 좋아했는데 장제는 두도에게 초서로 칙령을 작성하도록 하는 등 초서는 매우 중시되던 자체였다. 그러나 초서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공식서체는 아니었다.

허신의 <설문해자>에 ‘한흥유초서(漢興有草書)’라고 한 것은 초서가 일종의 서체로 공식화 된 효시가 된다.

초서의 구분

장초

장초는 예서(隸書)의 기초 위에 형성되었다. 예서가 형성된 뒤 끊임없이 쓰기 편리한 방법이 시도되었는데 이는 초서의 발단이 되었다. 예서를 간결하고 신속하게 쓰기 위한 실용성의 추구는 결국 예서의 특성을 변화시켜 새로운 서체인 장초를 낳았다. 장초는 글자와 글자 사이의 연결은 없고 한 글자 중의 필획이 연결되는 현상을 보이고 예서의 필획 특성이 남아 있는 서체이다. 돈황(敦煌)의 한간(漢簡)이나 거연(居延)에서 출토된 거연한간 초서(漢 成帝 2년)는 필획이 연결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이는 장초의 특징이다. 후한 이후 이러한 민간에서 유행한 초서는 서예가들의 노력으로 엄격한 규범이 형성되어 황제에게 올린 상서에도 사용할 정도가 되었다. 사유(史游)의 <급취편(急就篇)>의 자체를 대표로 꼽는다. 장초는 <급취장(急就章)>의 ‘章’에서 연유되었을 뿐 아니라 ‘章’자에는 조리·법칙이라는 의미가 있어 금초보다는 규범적이라는 뜻에서 장초라고 하였다.

금초

해서(楷書)가 만들어진 후 해서의 기초 위에 또 흘려 쓰는 초체(草體)가 형성되었는데, 여기서는 필획 간의 연결은 물론 위아래 글자와도 연결되는 현상을 보여 예서 필획의 특성이 완전히 소실되었다. 이러한 형체를 금초라 한다. 금초는 한나라 말 장지(張芝)에게서 발아하여 동진(東晉)의 왕희지(王羲之)에 이르러 최고봉을 이루었다. 진대(晉代) 이후 서예가들은 해서나 행서에 근거한 초서를 쓰게 되면서 그 근원이 다원성을 띠게 되어 수많은 초서이체를 보여주고 있다. 후한시대 초서이면서 예서체가 짙은 <공양전전(公羊傳磚)>은 일반인들이 즐겨 쓰던 서체이다. 일먕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이라고도 하는 유가 경전 중의 하나로 구전되어 오다가 한초(漢初)에 이르러서 금문경학자들이 정치이론을 펴기 위해 글로 써 놓았다. 전국 진한시대 유가사상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된 이 전은 초서이면서 예서풍을 보이며 음각되어 있다. 후한시대 서법 예술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광초

광초는 전혀 구속이 없이 자유분방한 필세의 초체를 말한다. 광초는 당대의 장욱(張旭)의 <두통첩(肚痛帖)>에 이르러 실용성을 완전히 벗어나 예술의 경지로 돌입한다. 따라서 난해하고 실용성이 결여된 탓에 단지 서예가들의 전유물이 되어 서법 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송대 황산곡(黃山谷)의 <이백의구유시(李白憶舊遊詩)>는 광초의 걸작이다.

위에서 살펴본 각 초서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서체 구분 주요특징 바탕서체
초서 장초 한 글자 중 필획이 연결됨 예서
금초 한 글자 및 글자간의 필획까지 연결됨 해서
광초 자유분방한 초서체

초서의 형성과정

참고문헌

1.1 초서의 개념 1.2 초서의 구분 1.2.1 장초 1.2.2 금초 1.2.3 광초 1.3 초서의 형성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