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불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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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25일 (화) 16:12 판
여불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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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 ??(한나라 사람임) |
사망 |
?? 진시황 10년 권력에서 물러난 뒤, 자살한 것으로 기록됨. |
생존시기 | 전국시대 |
주요 작품 | 여씨춘추 |
1
그냥쓴거 그냥쓴거
그냥쓴거
2
3
중국의 킹 메이커,투자의 귀재, 나라를 구매한 상인.
생애
여불위는 원래 한나라의 상인으로 전국시대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세상이 돌아가는 흐름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진나라 소양왕의 시절, 소양왕은 안국군을 태자로 삼는다. 안국군에게는 많은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자초[1]는 보잘것없는 대우를 받았고 조나라에 볼모로 가 있었다. 여불위는 조나라의 수도 한단에 갔다가 자초를 본다. 그는 자초를 보자 그의 비범함을 알아채고는 그에게 접근한다. 당시 왕위 서열 순위에서도 한참 뒤로 밀려 있는 자초에게 여불위는 자신의 거의 전 재산을 투자한다. 진나라의 정세를 꿰고 있던 여불위는 자초의 아버지인 안국군이 총애하는 화양부인에게 접근하여 자초를 양자로 삼도록 한다. 아들이 없었던 화양부인은 이에 응하고 자초는 안국군의 후계자가 된다. 당시 여불위에게는 조희라는 첩이 있었는데, (사기 여불위 열전에 따르면) 그녀는 여불위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여불위에 집에 온 자초는 조희를 보고 반해 여불위에게 자신에게 조희를 달라고 했다. 여불위는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조희를 자초에게 바친다.
소양왕 50년 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하려 한다. 이에 조나라 왕은 자초를 죽이려 하지만 여불위는 금 600근을 써서 관리를 매수해 자초를 조나라에서 진나라로 탈출시킨다. 하지만 조희와 그녀의 아들인 정(이후 진시황이 된다.)은 탈출하지 못하고 조나라에 남게 된다. 조나라 왕은 조희와 정을 죽이려 하였으나, 조희가 조나라의 부호의 딸이었기에 죽이지 못한다. 이후 소양왕이 죽고 효문왕이 즉위하니 자초는 태자가 되고 조나라는 이에 조희와 정을 진나라로 되돌려 보낸다.
하지만 효문왕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고 말고 자초가 왕이 되니 장양왕이다. 장양왕은 자신이 왕이 되는데 큰 도움을 준 여불위를 승상으로 삼고 문신후(文信侯)라고 봉한다. 하지만 장양왕도 즉위한 지 3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영정이 즉위하는데 이에 나이가 13살이었다. 때문에 국가의 모든 일은 여불위의 손을 거쳐 진행되었다. 장양왕의 아내였던 조희는 하 태후에 봉해졌는데 하b태후는 사적으로 여불위와 불륜관계를 맺었다
당시 전국시대에는 빈객 모시기를 좋아하는 네 명의 군자가 있었는데, 여불위는 진나라가 인재들을 끌어들이지 못하는 것을 알고는 전국 각지에서 인재들을 불러들인다. 전국에서 불러모은 식객들은 약 3000여명이 되었다. 여불위는 이들이 여태까지 경험한 것을 가지고 책으로 묶여 여씨춘추 라는 책을 편찬하였다. 이 책을 함양 한복판에 펼쳐 놓고는 한 글자라고 더하거나 뺄 수 있다면 천금의 돈을 주기로 하였다. 이는 일자천금이라는 고사성어의 유래가 된다.
몰락
13세에 즉위했던 진시황은 이제 점점 성년이 되었다. 하지만 조 태후와 여불위와의 관계를 그칠 줄 몰랐다. 여불위는 자신과 조 태후와의 외도가 발각이 될 까 두려워 거대한 음경을 가진 노애라는 인물을 몰래 데려와 조 태후와 정을 나누게 하였다. 조 태후는 노애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고 노애는 태후의 권력을 등에 업어 엄청난 권력을 행사하게 되고 거느리는 사람이 수천 명이 되었다. 노애와 조 태후는 자신들이 낳은 아이를 진나라의 왕으로 만들려고 반란을 일으켰다. 진시황은 이 일을 상세히 밝히고 여불위가 관련이 되어있음을 알고 노애의 삼족을 멸하고 노애와 관련된 모든 자들을 처단하였다. 또한 노애와 조 태후 사이에 낳은 아이들을 죽이고 조 태후를 먼 땅으로 내쫓았다. 원래라면 여불위를 처벌하여야 했으나 진나라에서 활약하고 있는 사람 중에 여불위의 빈객 출신들이 많았기에 마음대로 처벌할 수가 없었고 결국 여불위를 하남 지방으로 떠나게 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식객들이나 사신들이 여불위를 찾아가자 위기를 느낀 진시황은 여불위에게 편지를 보내며 옥죄었다. 이에 여불위는 독주를 마시고 자살을 하게 된다.
- ↑ 자초는 화양부인의 양자로 들어가며 얻은 이름이다. 원래 이름은 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