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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1946~1949년 | |날짜 = 1946~1949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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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개요== | ||
− | 1946년부터 | + | 1946년부터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타이완 섬으로 이동한 1949년까지 국민당과 공산당이 중국 재건을 두고 대립하여 발생한 중국의 국내전쟁을 의미한다. |
==배경== | ==배경== | ||
− |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포츠담선언 수락과 함께 중국에도 항복하여 8년동안 지속되었던 | + |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포츠담선언 수락과 함께 중국에도 항복하여 8년동안 지속되었던 [[중일전쟁]]은 중국의 승리가 되었다. 그러나 일본이 항복하기 전부터 국민당과 [[공산당]]은 명분과 실리를 누가 더 차지해야 할지에 대해 대립하고 있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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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국민들의 염원인 평화를 강구하기 위해 | + | 중국 국민들의 염원인 평화를 강구하기 위해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의 화평교섭회담이 8월 충칭에서 개최하며 양측은 내전을 피하고 신중국을 건설하는데 합의하는 듯했다. <ref>이 때 합의한 사항은 10월 10일날 발표하였다고 하여 이를 ’쌍십(双十)협정’이라고 부른다.</ref> 그러나 세계적 냉전의 심화와 함께 미군은 적극적으로 국민당을 후원하였으며 합의를 인준하는 과정에서 국민당은 공산당의 복종만을 바라며 양쪽의 마찰은 여전히 심화되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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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결국 국민당은 미군의 지속적인 원조를 토대로 1946년 6월 공산당에 대한 전면적인 군사공세로 전환하며 공산당의 지구를 침공하며 제2차 국공 | + | 결국 국민당은 미군의 지속적인 원조를 토대로 1946년 6월 공산당에 대한 전면적인 군사공세로 전환하며 공산당의 지구를 침공하며 [[제2차 국공 내전]]이 시작되게 된다. |
==전개== | ==전개== | ||
===국민당이 우세했던 초기 정황=== | ===국민당이 우세했던 초기 정황=== | ||
− | 일본군이 항복할 당시, 중국 주둔 일본군과 이에 협조하던 왕징웨이 친일 정부의 군대는 수백만 명에 달했다. 따라서 이 군대들의 투항을 받는 것은 그들의 무기와 지배 구역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이기에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 양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군대를 접수하는 것에 있어 양당이 처한 조건은 매우 달랐는데, 미국 해군의 공군의 수송 지원을 받은 국민당의 군대가 동남 연안 | + | 일본군이 항복할 당시, 중국 주둔 일본군과 이에 협조하던 왕징웨이 친일 정부의 군대는 수백만 명에 달했다. 따라서 이 군대들의 투항을 받는 것은 그들의 무기와 지배 구역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이기에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 양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군대를 접수하는 것에 있어 양당이 처한 조건은 매우 달랐는데, 미국 해군의 공군의 수송 지원을 받은 국민당의 군대가 동남 [[연안 도시]]를 선점하며 빠르게 이 군대를 접수한 것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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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제2차 국공 내전이 발발한 1946년에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병력 차이가 4:1 비율에 달했으며 국민당은 일본과 미국의 최신 무기를 바탕으로 압도적인 전력을 보이며 내전 초기 전투에서 신속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br> | 따라서 제2차 국공 내전이 발발한 1946년에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병력 차이가 4:1 비율에 달했으며 국민당은 일본과 미국의 최신 무기를 바탕으로 압도적인 전력을 보이며 내전 초기 전투에서 신속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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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의 대중동원과 반격=== | ===공산당의 대중동원과 반격=== | ||
− | 1947년 3월 국민당은 공산당의 주요 기지였던 옌안(延安)을 점령하기도 했지만 이는 공산당이 의도한 전투 방식이었다. 공산당은 국민당군에 정면으로 대응하기 보다는 후퇴하면서 병력 보존과 확충을 중시하며 자기 영토의 안정과 동원체제를 강화하는 데 주력했다. 특히 공산당은 주거지는 내주는 대신 병력을 우회하여 게릴라전을 펼치는 방법으로 국민당군을 교란시키는 작전을 주로 사용했다.<br> | + | 1947년 3월 국민당은 공산당의 주요 기지였던 [[옌안]](延安)을 점령하기도 했지만 이는 공산당이 의도한 전투 방식이었다. 공산당은 국민당군에 정면으로 대응하기 보다는 후퇴하면서 병력 보존과 확충을 중시하며 자기 영토의 안정과 동원체제를 강화하는 데 주력했다. 특히 공산당은 주거지는 내주는 대신 병력을 우회하여 게릴라전을 펼치는 방법으로 국민당군을 교란시키는 작전을 주로 사용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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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한 농촌지역에서의 | + | 또한 농촌지역에서의 [[토지개혁]]과 생산 조직화 등을 전개하며 공산당의 정치적, 경제적 기반을 강화하고 [[민족주의]], [[사회혁명]]을 앞세워 농민들이 공산당군에 전쟁수행을 지원하게 했다. 따라서 공산당군은 [[대중동원]]과 함께 앞선 정보력, 병참의 우월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이 때 만주지역에서 공산당군에 자원입대한 병사만 160만 명에 달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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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시 | + | 당시 [[만주]]는 공업 시설이 집중된 곳으로 양당 모두에게 전략적으로 중요성이 큰 곳이었고 국민당군은 이 만주로 진격하게 된다. 그러나 이 만주를 둘러싼 전투에서 국민당에게 뒤쳐지던 공산당이 반격할 기회를 얻게 된다. 공산당군은 서북 산악 지대에서 항일 전쟁을 수행한 경험을 바탕으로 추운 만주 전자에서도 잘 견딜 수 있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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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사전 지하공작을 통해 각지의 민중의 협조를 받을 수 있었다. 이때 무리하게 점령지를 늘린 국민당군은 병력을 지나치게 분산시키는 전략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었는데, 공산당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기습작전과 국민당군의 보급을 차단하는 습격으로 국민당군을 순식간에 고립시키며 많은 병력과 무기들을 빼앗게 된다.<br> | 또한 사전 지하공작을 통해 각지의 민중의 협조를 받을 수 있었다. 이때 무리하게 점령지를 늘린 국민당군은 병력을 지나치게 분산시키는 전략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었는데, 공산당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기습작전과 국민당군의 보급을 차단하는 습격으로 국민당군을 순식간에 고립시키며 많은 병력과 무기들을 빼앗게 된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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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당군과 공산당군의 비교==== | ====국민당군과 공산당군의 비교==== | ||
− | 먼저 국민당군은 수많은 파벌로 구성되어 있었고 대부분은 장제스를 반대하는 | + | 먼저 국민당군은 수많은 파벌로 구성되어 있었고 대부분은 장제스를 반대하는 [[군부]]였다. 군부가 장제스에게 충성하는 황푸파와 서북[[군벌]]의 바오딩파, 광시군벌의 광시파 등으로 나뉘다 보니 서로 협력이 되지 않았고 국민당군은 통합된 군대가 아니라 이질적인 군대가 연합한 연합군에 가까웠다. 결속감이 없기에 서로 협력을 거부했고 공을 다투며 전투력을 스스로 갉아먹었고 적진 깊숙이 무리하게 진격하다 사방에서 포위 섬멸 당하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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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공산당군은 지휘권을 통일하여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었고 강력한 결속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불리한 상황에서도 항복하지 않고 전열을 유지하며 후퇴했기에 전선이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일선의 지휘관들은 상층부의 구체적인 지시가 내려오지 않아도 주변의 우군과 협력하는 등 능동적으로 전세를 이끌었다.<br> | 반면 공산당군은 지휘권을 통일하여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었고 강력한 결속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불리한 상황에서도 항복하지 않고 전열을 유지하며 후퇴했기에 전선이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일선의 지휘관들은 상층부의 구체적인 지시가 내려오지 않아도 주변의 우군과 협력하는 등 능동적으로 전세를 이끌었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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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국민당의 장제스는 수많은 파벌로 나눠진 군부를 믿지 않았다. 지휘관을 불신하다 보니 과도하게 간섭하게 되었고 현지 지휘관을 우유부단하고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게 만들었다.<br> | 그리고 국민당의 장제스는 수많은 파벌로 나눠진 군부를 믿지 않았다. 지휘관을 불신하다 보니 과도하게 간섭하게 되었고 현지 지휘관을 우유부단하고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게 만들었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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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면 공산당의 [[마오쩌둥]]은 | + | 반면 공산당의 [[마오쩌둥]]은 ‘[[16자 전법]]’이라는 추상적인 원칙만을 제시했고 실제 작전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따라서 현지 지휘관들은 능동적이고 빠른 대처로 전략적 우세함을 가질 수 있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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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당의 패퇴=== | ===국민당의 패퇴=== | ||
− | 내전이 전개되는 한편 국민당은 잇따른 경제 정책의 실패와 만연한 부패로 민심을 잃어 가기 시작했다. 치솟는 물가로 통화팽창이 어려워지자 | + | 내전이 전개되는 한편 국민당은 잇따른 경제 정책의 실패와 만연한 부패로 민심을 잃어 가기 시작했다. 치솟는 물가로 통화팽창이 어려워지자 [[화폐개혁]]을 단행했지만 오히려 이로 인해 물가는 폭등했고 부패한 관리들의 약탈로 소비재 또한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다. 또한 국민당은 장악한 지역에서도 토착지도층에 대해 불신으로 일관했으며 이는 강력한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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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심을 잃은 국민당군은 내전이 본격화된 지 약 1년이 지난 1947년 말부터 공산당군에게 공세를 빼앗기게 된다. 1949년 1월 교통의 요지였던 쉬저우(徐州)에서의 전투에서 국민당군이 대패 하게 되며(회해전투, 淮海战役) 국민당군은 이 전투에서 55만명에 달하는 병력을 잃게 되고, 1949년 4월 공산당군은 | + | 민심을 잃은 국민당군은 내전이 본격화된 지 약 1년이 지난 1947년 말부터 공산당군에게 공세를 빼앗기게 된다. 1949년 1월 교통의 요지였던 쉬저우(徐州)에서의 전투에서 국민당군이 대패 하게 되며([[회해전투]], 淮海战役) 국민당군은 이 전투에서 55만명에 달하는 병력을 잃게 되고, 1949년 4월 공산당군은 [[양쯔강]]을 건너며 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난징]]을 함락하게 된다. |
==결과== | ==결과== | ||
− | 난징이 함락된 이후에도 장제스는 중국 최대의 경제 중심지는 | + | 난징이 함락된 이후에도 장제스는 중국 최대의 경제 중심지는 [[상하이]]를 사수하며 항거했으나 간단하게 함락되고 국민당 정부는 이후 [[광저우]], [[충칭]] 등으로 퇴각하게 된다. 이때 1949년 10월 1일 공산당의 마오쩌둥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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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년 12월 27일 국민당이 중국 대륙에서 최종적으로 피신한 | + | 1949년 12월 27일 국민당이 중국 대륙에서 최종적으로 피신한 [[청두]]에서도 패배하자 장제스는 국민당을 대만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공산당은 이후 대만 공격을 검토하지만 미 함대의 견제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며 어쩔 수 없이 포기하게 된다. 이로써 내전은 장제스의 국민당이 [[대만]]으로 이주할 때 사실상 종결된다. |
==참고문헌== | ==참고문헌== |
2020년 12월 26일 (토) 00:12 판
국민당과 공산당이 중국 재건을 두고 대립하여 발생한 중국 국내전쟁 | |
날짜 | 1946~1949년 |
---|---|
위치 | 중국 |
목차
개요
1946년부터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타이완 섬으로 이동한 1949년까지 국민당과 공산당이 중국 재건을 두고 대립하여 발생한 중국의 국내전쟁을 의미한다.
배경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포츠담선언 수락과 함께 중국에도 항복하여 8년동안 지속되었던 중일전쟁은 중국의 승리가 되었다. 그러나 일본이 항복하기 전부터 국민당과 공산당은 명분과 실리를 누가 더 차지해야 할지에 대해 대립하고 있었다.
중국 국민들의 염원인 평화를 강구하기 위해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의 화평교섭회담이 8월 충칭에서 개최하며 양측은 내전을 피하고 신중국을 건설하는데 합의하는 듯했다. [1] 그러나 세계적 냉전의 심화와 함께 미군은 적극적으로 국민당을 후원하였으며 합의를 인준하는 과정에서 국민당은 공산당의 복종만을 바라며 양쪽의 마찰은 여전히 심화되었다.
결국 국민당은 미군의 지속적인 원조를 토대로 1946년 6월 공산당에 대한 전면적인 군사공세로 전환하며 공산당의 지구를 침공하며 제2차 국공 내전이 시작되게 된다.
전개
국민당이 우세했던 초기 정황
일본군이 항복할 당시, 중국 주둔 일본군과 이에 협조하던 왕징웨이 친일 정부의 군대는 수백만 명에 달했다. 따라서 이 군대들의 투항을 받는 것은 그들의 무기와 지배 구역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이기에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 양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군대를 접수하는 것에 있어 양당이 처한 조건은 매우 달랐는데, 미국 해군의 공군의 수송 지원을 받은 국민당의 군대가 동남 연안 도시를 선점하며 빠르게 이 군대를 접수한 것이다.
따라서 제2차 국공 내전이 발발한 1946년에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병력 차이가 4:1 비율에 달했으며 국민당은 일본과 미국의 최신 무기를 바탕으로 압도적인 전력을 보이며 내전 초기 전투에서 신속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공산당의 대중동원과 반격
1947년 3월 국민당은 공산당의 주요 기지였던 옌안(延安)을 점령하기도 했지만 이는 공산당이 의도한 전투 방식이었다. 공산당은 국민당군에 정면으로 대응하기 보다는 후퇴하면서 병력 보존과 확충을 중시하며 자기 영토의 안정과 동원체제를 강화하는 데 주력했다. 특히 공산당은 주거지는 내주는 대신 병력을 우회하여 게릴라전을 펼치는 방법으로 국민당군을 교란시키는 작전을 주로 사용했다.
또한 농촌지역에서의 토지개혁과 생산 조직화 등을 전개하며 공산당의 정치적, 경제적 기반을 강화하고 민족주의, 사회혁명을 앞세워 농민들이 공산당군에 전쟁수행을 지원하게 했다. 따라서 공산당군은 대중동원과 함께 앞선 정보력, 병참의 우월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이 때 만주지역에서 공산당군에 자원입대한 병사만 160만 명에 달했다.
당시 만주는 공업 시설이 집중된 곳으로 양당 모두에게 전략적으로 중요성이 큰 곳이었고 국민당군은 이 만주로 진격하게 된다. 그러나 이 만주를 둘러싼 전투에서 국민당에게 뒤쳐지던 공산당이 반격할 기회를 얻게 된다. 공산당군은 서북 산악 지대에서 항일 전쟁을 수행한 경험을 바탕으로 추운 만주 전자에서도 잘 견딜 수 있었다.
또한 사전 지하공작을 통해 각지의 민중의 협조를 받을 수 있었다. 이때 무리하게 점령지를 늘린 국민당군은 병력을 지나치게 분산시키는 전략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었는데, 공산당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기습작전과 국민당군의 보급을 차단하는 습격으로 국민당군을 순식간에 고립시키며 많은 병력과 무기들을 빼앗게 된다.
국민당군과 공산당군의 비교
먼저 국민당군은 수많은 파벌로 구성되어 있었고 대부분은 장제스를 반대하는 군부였다. 군부가 장제스에게 충성하는 황푸파와 서북군벌의 바오딩파, 광시군벌의 광시파 등으로 나뉘다 보니 서로 협력이 되지 않았고 국민당군은 통합된 군대가 아니라 이질적인 군대가 연합한 연합군에 가까웠다. 결속감이 없기에 서로 협력을 거부했고 공을 다투며 전투력을 스스로 갉아먹었고 적진 깊숙이 무리하게 진격하다 사방에서 포위 섬멸 당하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반면 공산당군은 지휘권을 통일하여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었고 강력한 결속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불리한 상황에서도 항복하지 않고 전열을 유지하며 후퇴했기에 전선이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일선의 지휘관들은 상층부의 구체적인 지시가 내려오지 않아도 주변의 우군과 협력하는 등 능동적으로 전세를 이끌었다.
그리고 국민당의 장제스는 수많은 파벌로 나눠진 군부를 믿지 않았다. 지휘관을 불신하다 보니 과도하게 간섭하게 되었고 현지 지휘관을 우유부단하고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게 만들었다.
반면 공산당의 마오쩌둥은 ‘16자 전법’이라는 추상적인 원칙만을 제시했고 실제 작전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따라서 현지 지휘관들은 능동적이고 빠른 대처로 전략적 우세함을 가질 수 있었다.
국민당의 패퇴
내전이 전개되는 한편 국민당은 잇따른 경제 정책의 실패와 만연한 부패로 민심을 잃어 가기 시작했다. 치솟는 물가로 통화팽창이 어려워지자 화폐개혁을 단행했지만 오히려 이로 인해 물가는 폭등했고 부패한 관리들의 약탈로 소비재 또한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다. 또한 국민당은 장악한 지역에서도 토착지도층에 대해 불신으로 일관했으며 이는 강력한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민심을 잃은 국민당군은 내전이 본격화된 지 약 1년이 지난 1947년 말부터 공산당군에게 공세를 빼앗기게 된다. 1949년 1월 교통의 요지였던 쉬저우(徐州)에서의 전투에서 국민당군이 대패 하게 되며(회해전투, 淮海战役) 국민당군은 이 전투에서 55만명에 달하는 병력을 잃게 되고, 1949년 4월 공산당군은 양쯔강을 건너며 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난징을 함락하게 된다.
결과
난징이 함락된 이후에도 장제스는 중국 최대의 경제 중심지는 상하이를 사수하며 항거했으나 간단하게 함락되고 국민당 정부는 이후 광저우, 충칭 등으로 퇴각하게 된다. 이때 1949년 10월 1일 공산당의 마오쩌둥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한다.
1949년 12월 27일 국민당이 중국 대륙에서 최종적으로 피신한 청두에서도 패배하자 장제스는 국민당을 대만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공산당은 이후 대만 공격을 검토하지만 미 함대의 견제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며 어쩔 수 없이 포기하게 된다. 이로써 내전은 장제스의 국민당이 대만으로 이주할 때 사실상 종결된다.
참고문헌
단행본
1. 중국근현대사학회 엮음, 배경한 책임편집 《중국 근현대사 강의》, 한울, 2019
2. 레이 황 지음, 구범진 옮김, 《장제스 일기를 읽다》, 푸른역사, 2010
3. 존 킹 페어뱅크, 멀 골드만 지음, 김형종, 신성곤 옮김, 《신중국사》, 까치, 2018
학술논문
1. 나태종, 「중국의 국공합작과 내전에서 공산당의 승리요인 연구」, 한국동북아논총, 2010
홈페이지
1. 동북아역사넷 (http://contents.nahf.or.kr/item/item.do?levelId=edeah.d_0006_0020_0010_0010)
- ↑ 이 때 합의한 사항은 10월 10일날 발표하였다고 하여 이를 ’쌍십(双十)협정’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