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양지인"의 두 판 사이의 차이
(새 문서: 위의 성어를 바로 해석하면, ;송나라 양공(襄公)의 인정'인데 쓸데없이 인정을 베푸는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 |
(차이 없음)
|
2016년 2월 16일 (화) 17:27 판
위의 성어를 바로 해석하면, ;송나라 양공(襄公)의 인정'인데 쓸데없이 인정을 베푸는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인정을 베푸는 것’은 참 좋은 일인데 송나라 양공이 얼마나 도를 지나치는 인정을 베풀었기에 이러한 굴욕적인 사자성어를 후대에 남기게 되었을까?
주나라가 명목적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주변 제후국들이 점점 그 권위를 위태롭게 만들고 있던 춘추시대에 송 양공이 살았다. 흔히 춘추오패라고 하여 제(齊) 환공, 진(晉) 문공, 초(楚) 장왕, 오(吳) 합려, 월越) 구천을 이 시기 제후 간 회맹(會盟)에서 큰 힘을 가진 맹주들로 꼽는다. 춘추시대 송 양공의 지위를 말하자면 누구나가 동의하는 완전한 패자가 아닌 제2순위의 ‘패자 후보’로서 춘추오패를 다음에 부차적으로 언급되는 정도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宋襄之仁이라는 고사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춘추 시대인 주(周)나라 양왕(襄王) 2년(B.C.650), 송(宋)나라 환공(桓公)이 세상을 떠나면서 태자인 자부(玆父)가 양공이라 일컫고 송나라의 왕이 되었다. 그로부터 7년 후(B.C.643), 춘추의 첫 패자(覇者)인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죽고, 송나라에 운석(隕石)이 떨어졌는데 이를 보고 양공은 중원의 패자가 되고자하는 야망을 품기 시작했다.
어느 해 송 양공이 초나라와 통교(通交)한 정(鄭)나라를 친 이유로 초나라가 송나라에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송 양공은 초나라 군사를 홍수(泓水:하남성 내)에서 맞아 싸우기로 했다.
그런데 그는 초나라 전군이 강을 다 건너왔는데도 공격을 하지 않았다. 재상이었던 목이가 참다못해 "적은 많고 아군은 적사오니 적이 전열(戰列)을 가다듬기 전에 쳐야 하옵니다."라고 했으나 양공은 듣지 않았다.
송 양공은 군자는 남의 약점을 노리는 비겁한 짓은 하지 않는 법이라고 주장하며 초나라 군사가 전열을 가다듬은 다음에야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열세(劣勢)한 송나라 군사는 참패했다. 그리고 양공 자신도 허벅다리에 부상을 입은 것이 악화하는 바람에 결국 이듬해 죽고 말았다.
천하의 다른 제후국들과 정정당당하게 맞서 싸울 능력이 갖추어지지 않으면서 주위의 충고를 무시하고 예고되었던 참패의 결과를 얻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가. 춘추시기 모든 국가가 중원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군사력을 기르고 다른 나라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생각을 하고 있는데, 송 양공은 패자가 되기로 자처하였으면서도 현실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쓸데없이 적에게 ‘인정’을 베풀어 그나마 미약한 군사력으로 승부의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었던 초나라와의 싸움에서 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