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조
목차
북방통일을 이룬 북위
(1) 북강남약
(2) 북위의 균전제 시행
북위 태화 9년(485) 10월, 북위는 균전제를 실시했다. 균전제의 원칙은 성년 남자인 정(丁)의 수를 계산하여 경작지인 전(田)을 부여하는 것이다. 균전제는 노예제 잔재가 매우 심한 특정한 역사적 조건 아래 북위 정권이 시행한 일종의 토지 분배 제도로서 봉건 토지소유제에 대한 보완제도다. 동시에 균전제는 떠돌아다니는 노동력을 새로 토지와 결합시켜 자작농의 수와 정부 납세를 확대시켰고 농업 생산 발전과 북위 정권의 봉건화 진행 과정을 촉진했다.
(3) 위 효문제의 개혁
위 효문제는 낙양으로 천도한 후 적극적으로 한화를 주장하고 일련의 개혁 조치를 실시함에 따라 한화는 가속화됐다. 태화 18년(494), 효문제는 중서령 고려에게 고악을 정리하도록 했다. 19년 4월, 효문제는 노성(지금의 산동 곡부)으로 가 친히 공자에게 제를 올리고 얼마 후 관제개혁을 단행했다. 위나라 초기 선비족과 한의 관호(官號)가 함께 쓰이며 혼란된 양상을 보이자 효문제는 천도 후 왕소를 기용하여 관제를 개정하고 위진남조의 제도를 따랐다. 5월 효문제는 호복(胡服) 착용과 선비족 언어 사용을 금하였다. 태호 20년(496), 정월 효문제는 또 성씨를 바꾸도록 명령했다. 동시에 낙양 천도 시 따라온 선비족 사람들은 일률적으로 하남 낙양을 원적으로 삼도록 하고 사후에 북쪽으로 이장할 수 없다고 규정했고 이박에 족(族)의 성(姓)을 정했다. 효문제는 개혁 시 이미 형성되어 있던 한족 지주의 문벌제도를 인정하고 아울러 이것을 선비족 귀족들에게 보급했다. 효문제의 한화 제도 개혁은 일부 보수적 선비족 귀족의 반대에 봉착했다. 태화 20년(496), 태자 탁발순은 평성으로 도주하여 반란을 획책하려 하였으나 효문제에게 발각되어 사형되었다. 같은 해 겨울, 선비족 귀족 목태와 육예는 진북대장군 탁발사예 등과 결탁하여 평성에서 군사정변을 일으켰으나 효문제가 보낸 군대에 진압되어 반란은 평정되었고 이때부터 순조로운 개혁 진행이 보장되었다.
동위와 서위로 분할된 위나라
북위 영희 3년(534), 효무제 원수가 고환의 압박에 불만을 품고 서쪽 장안으로 달아나 우문태에게 의탁하자 고환은 대노했다. 10월 17일 11세이던 청하왕 세자 원선을 다시 황제로 세우니 이 이가 바로 동위 효정제이며 영희 3년을 천평 원년으로 개원하고 업으로 천도했다. 이렇게 되기 전부터 북위는 대 동란을 겪으며 점차 양대 군사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하나는 진양을 근거지로 하는 고환 집단이고 다른 하나는 장안을 근거지로 하는 우문태 집단이다. 영희 3년(534) 5월, 원수는 계엄을 선포하고 하남 등의 주의 군대를 이동시켜 직접 대군을 이끌고 양나라를 정벌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사실 진양(晋阳)을 습격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노회한 고환은 이미 사정을 훤히 알고 선수를 쳐 기선을 제압하기 위하여 역시 양나라를 정벌한다는 명분 하에 20만 대군을 나누어 남하시켜 낙양까지 육박했다. 원수는 다급해지자 우문태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고환은 동관까지 쳐들어가 화음까지 진주했다. 원수는 우문태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낙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같은 해 윤 12월, 우문태는 효문제 원수를 독살하였다. 다음해(535) 정월, 우문태는 남양왕 보거를 황제로 세우니 이가 바로 서위 문제며 대통으로 개원했다. 이로부터 북위는 점차 분열되어 동위 정권은 고환 집단의 독점 아래 있고, 서위 정권은 우문태가 통제했다.
(1) 사원 전투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분열된 후, 대통 원년 우문태와 고환의 양대 집단은 공개적으로 반목하며 각기 정예 부대를 동원하여 한동안 사방에 전화가 일고 도처에 봉화가 올랐다. 대통 3년(537) 8월, 서위에서 기근이 발생하자 서위의 우문태는 동위를 토벌하려 출병하여 동위의 곡식 저장 요지인 항농을 공격 및 함락하여 현지에서 군량을 충당했다. 고환은 자기의 양식 창고가 급습당한 것을 보고 대노하여 즉시 대장 고오조에 3만을 이끌고 항농을 겹겹이 포위하도록 했다. 또한 자신은 친히 20만 대군을 이끌고 포진에서 황하를 건너 위세당당하게 장안까지 쳐들어가 우문태와 생사를 건 마지막 승부를 벌이고자 했다. 우문태는 고환의 맹렬한 기세를 보고 그가 전열을 완전히 정비하기 전에 맹공을 감행하기로 결정하였다. 10월, 우문태는 부족을 이끌고 고환 군대와 60리 정도 떨어진 사원(지금의 섬서 대려 남쪽 난과 위 사이)의 안영에 도착했다. 우문태와 여러 장군들은 의논을 거쳐 부대를 좌우로 나누어 각각 방진을 치고 장사들은 모두 갈대 숲 속으로 매복하여 위곡에서 적을 기다리다 북소리를 듣고 출격하기로 결정했다. 동위 군대는 병사도 많고 세력도 강하며 군력은 서위 군대의 20배에 달했기에 진격하는 내내 의기양양하여 군심이 교만하고 나태했다. 이에 우문태가 군대를 이끌고 공격하자 고환은 대패하여 그날 밤 내내 황하를 건너 도주했다. 사원 전투로 동진이 입은 손실은 무장 병사 8만, 버린 갑옷과 병기가 18만으로 동진의 참패였다. 우문태는 1대 20의 절대적 열세에서 강적을 물리치고 수도로 개선했다.
(2) 우문태의 부병제 창설
서위 대통 9년(543), 서위 우문태는 정식으로 부병제를 창설했다. 대통 8년(542), 우문태는 육군(六軍)을 처음 설치했는데 대대로 전해지는 주나라 제도에 따라 매 군은 1만 2500명이다. 당시 병사의 공급원은 관롱 호족들의 오족 내의 인척인 친당과 동향 사람이었고 군대의 통솔자는 대소 호족으로 충당했다. 사실상 이는 씨족 혈연관계로 조성된 지방군이다. 이것이 바로 최초의 '부병(府兵)'이다. 부병은 대통 16년(550)에 이미 대강의 규모를 갖추었다. 부병 자신의 조세와 노역, 징집은 일체 면제였다. 부병은 평소에는 농사를 짓고 농한기에 훈련을 받았다. 부병의 말, 소, 양 등의 가축과 군량은 일률적으로 통군의 6개 주국대장군이 총괄하였고 별도로 각 부에 낭장 하나를 두어 징집, 복역, 퇴역 등을 관리하게 하였다. 병사는 호등의 고하, 장년 남자인 정구의 다소, 재력 정도에 따라 선발하고 호적은 군부에 속하며 군현에 속하지 않았다. '사병'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부병의 전투력은 매우 강했다. 이것이 바로 우문태가 창건한 부병제다.
참고문헌
『아틀라스 중국사』, 사계절, 박한제 외 4명, 2015
『중국통사2』, 범우, 중국사학회,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