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고문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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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초기 국가유교를 바로 세우면서 과거 경전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하지만 진시황의 재위 시절, 분서갱유를 통해 유교 경전은 대부분 소실되었다. 이때 처음으로 경전의 내용을 전수한 사람은 복생이다. 복생은 제남사람으로 이전에 진의 박사였는데 진나라 시대에 분서가 일어날 때, 벽속에 ‘상서’를 숨겼었다. 이후 다시 그 책을 구하였을 때는 수십 편이 없어지고 29편을 얻었다. 그는 이것을 가지고 제노 지역에서 가르쳤었다. 한나라 문제 시기 상서를 배운 사람을 구했지만 복생뿐이 없었다. 이에 문제는 조칙 등을 보내 상서를 배우게 하는데, 이를 적은 것이 바로 금문상서가 되었다. 하지만 한나라가 생기자 책의 소지를 금지하는 법이 폐지가 되고, 그동안 몰래 숨겨두었던 경전들이 하나하나 나타나기 시작했다. 과거 공자가 살던 집의 벽속에서 고문상서가 나온다.
서한 말기, 유흠과 금문박사들의 논쟁으로 인해 금고문 간의 논쟁이 시작이 된다. 이는 고문경의 학관 설립의 문제로 논쟁이 시작되었지만 해석의 차이를 두고 금문과 고문 사이에 논쟁이 일기 시작했다. 고문은 복색이 상서의 본경(本經)이 없는 상태에서 구두로 전하였다는 비판과 함께, 복생이 전한 상서가 20편 남짓에 불과하다고 하며 금문상서를 비판한다. 하지만 경전을 구두로 전달하는 것은 당시에는 일반적인 일이었으며, 금문학자들은 고문학이 오히려 공자의 말을 직접 들어서 적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정한 공자의 전통은 없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