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고문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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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漢)대의 금고문학(今古文) 논쟁

한나라 초기 국가유교를 바로 세우면서 과거 경전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하지만 진시황의 재위 시절, 분서갱유를 통해 유교 경전은 대부분 소실되었다.

법과 무기로 세상을 강압적으로 다스리고자 했던 진시황은 결국 분서갱유(焚書坑儒)의 역사적 오명을 남겼다. 나라가 건립된 후 (秦)의 분서갱유를 거쳐 시경, 서경 등 유가 경전은 정도가 다르게 파괴되었고 많이 소실되었다. 한조(漢朝) 통치를 위해 필요한 의식 형태를 건립하고 진나라 때 불에 타서 끊어진 학문을 회복하기 위해 서한 조정에서는 한혜제(漢惠帝) 4년에 민간 협서(挾書) 금지령을 폐지하고 조서를 내려 천하의 유서(遺書)를 거두어들임으로써 경서의 정리가 시작되었다.

유가 경전의 정리는 주로 진(秦)에서 요행히 남은 박사와 유학자들에 의거했으며 그들의 암송에 의한 기록을 글로 정리해 냈는데 그때에 통행되는 예서(隷書)체로 써서 책으로 묶었기 때문에 후에 그것을 금문경(今文經)이라 불렀다.

이때 처음으로 경전의 내용을 전수한 사람은 복생이다. 복생은 제남 사람으로 이전에 진의 박사였는데 진나라 시대에 분서가 일어날 때, 벽속에 ‘상서’를 숨겼다. 이후 다시 그 책을 구하였을 때는 수십 편이 없어지고 29편을 얻었다. 그는 이것을 가지고 제노 지역에서 가르쳤었다. 한나라 문제 시기 상서를 배운 사람을 구했지만 복생뿐이 없었다. 이에 문제는 조칙 등을 보내 상서를 배우게 하는데, 이를 적은 것이 바로 금문상서가 되었다. 하지만 한나라가 생기자 책의 소지를 금지하는 법이 폐지가 되고, 그동안 몰래 숨겨두었던 경전들이 하나하나 나타나기 시작했다. 과거 공자가 살던 집의 벽속에서 고문상서가 나온다.

고문경(古文經)은 서한 말기에 탄생되었다. 고문경학에서 근거로 삼은 경전은 진(秦) 이전에 유행된 고주문으로 쓴 것이기에 고문경이라 불렀다. 고문경전의 원천은 세 가지이다. 하나는 한무제(漢武帝) 때 노공왕(魯恭王) 유여(劉余)가 공자의 옛집을 허물 때 얻은 『일례(逸禮)』, 『고문상서(古文尙書)』이고, 두 번째는 한성제(漢成帝) 때 궁중의 비밀 장서를 정리하면서 발견한 『좌씨춘추』이며, 세 번째는 민간에서 얻은 것으로 노(魯)나라의 환공(桓公), 조(趙)나라의 관공(貫公), 교동(膠東)의 용생(庸生)이 소장한 고문경전이다. 새로 발견된 이런 고문경전은 글자가 금문경과 달랐을 뿐만 아니라 문자가 더 많거나 달랐으며 어떤 경서의 편장은 금문보다 더 많았고, 어떤 경전은 금문본에는 없는 것이었다.

서한 말기, 유흠과 금문박사들의 논쟁으로 인해 금고문 간의 논쟁이 시작이 된다. 이는 고문경의 학관 설립의 문제로 논쟁이 시작되었지만 해석의 차이를 두고 금문과 고문 사이에 논쟁이 일기 시작했다. 고문은 복생이 상서의 본경(本經)이 없는 상태에서 구두로 전하였다는 비판과 함께, 복생이 전한 상서가 20편 남짓에 불과하다고 하며 금문상서를 비판한다. 하지만 경전을 구두로 전달하는 것은 당시에는 일반적인 일이었으며, 금문학자들은 고문학이 오히려 공자의 말을 직접 들어서 적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정한 공자의 전통은 없다고 주장했다.

연구 방법의 차이

경서에서 금고문 두 개 파의 분기는 그들이 근거로 삼는 경전의 내원(來源)이 같지 않는 데서 표현될 뿐만 아니라 경학가들이 경전을 연구하는 방법이 다른 데서도 반영된다.

금문경 학자들은 유가 경전을 자기들의 정치 견해를 발표하고, 옛 것에 의해 제도를 개변시키는 도구로 삼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경전의 진위에 대한 고증과 경전 본의에 대한 탐구를 중시하지 않았고 통치계급의 수요에 적응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그들은 경전을 해석할 때 흔히 음양, 명가, 법가의 사상을 모두 흡수하여 그것을 경전의 뜻에 가져다 맞추었고 옛 사람들의 ‘미묘한 언어와 원대한 뜻(微言大義)’을 설명하는 데 신경을 썼으며 마음대로 경전을 발휘하였다. 따라서 흔히 번쇄한 경향이 나타났는데『한서』의 유림열전에는 “한 가지 경이 백만여 어(語)이고 그것을 연구하는 거장들이 천여 명에 달했다”라고 나와 있다.

고문경 학자들은 이와 반대였다. 그들은 유가 경전을 역사적 자료로 삼았기에 경전을 엄격히 지켰다. 경전의 뜻이 명확해야 성인의 도(道)가 명확해질 수 있다고 인정한 그들은 훈고에 착안점을 두고 경전의 본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 힘썼다. 고문경 학자들은 고대 문헌에 대한 정리 연구를 통해 후세에 진실하고 믿을 만한 문화 전적을 적지 않게 보존해 두었으며 새로운 학술 연구 풍조를 개척했다.

공자에 대한 태도의 차이

금문경과 고문경 사이의 중대한 분기는 유가의 창시자인 공자(孔子)를 어떻게 대하는가에서 표현되었다.
금문학자들은 공자는 고대 문화의 소장자(所藏者)이자 보존자일 뿐만 아니라 천자와 덕을 비할 수 있는 소왕(素王)이며 , 육경(六經)은 대부분 공자의 저작이고 그가 ‘옛것에 의거해 제도를 개변시킨’ 의거가 된다. 그러나 육경의 문자는 2차적이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의 말 가운데 “미묘한 언어와 원대한 뜻(微言大義)"에 있다고 했다. 따라서 금문학자들은 육경을 특수하게 『시경』, 『서경』, 『예』,『악』, 『역』, 『춘추』의 순서로 배열하였는데 이 순서는 육경의 사상 내용의 깊이 정도에 따라 배열한 것이다.

이처럼 금문학자는 사(事), 문(文)을 홀시하고 명분을 중시하였으며 흔히 『춘추』로써 자기의 나라를 다스리고 가정을 꾸리는 도리를 토론하였으며 그것을 ‘미묘한 언어와 원대한 뜻’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경서의 내용을 써먹어야 한다며 흔히 시대에 뒤떨어져 경서 속에서 세상들 다스리는 사례(史例)를 찾는 데 급급했다.

반면 고문학자들은 공자는 선사(先師)로서 ‘이미 있는 것을 풀어 말하고 새것을 만들어 내지 않으며, 고대 문화를 진심으로 믿고 좋아하는’ 학자이며 육경은 모두 전대(前代)의 사료(史料)라고 인정하였다. 이런 인식에 근거하여 그들은 육경 배열 순서에 대한 자기들의 견해를 내놓았다. 그들은 육경이 탄생된 시간에 따라『역』,『시』,『서』,『예』,『악』,『춘추』의 순서로 배열하였다. 고문학자들은 공자를 선사로 모셨고 그를 역사가라고 인정했으며 주공(周公)을 숭상하면서 주공이 예악을 제정하였기에 그를 고대문명의 창시자라고 인정했다.

금고문 논쟁

제1차 논쟁 : 유흠(劉歆)과 태상박사(太常博士)

금문경과 고문경 사이의 첫 번째 논쟁은 경전이 어디에서 왔고 또 그 내용을 믿을 수 있는지와 그것을 해석하는 방법을 둘러싸고 벌어졌다.
서한 애제(哀帝) 건평(建坪) 6년에 유흠은 왕궁의 장서실에서 뜻밖에 고문으로 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발견하였다. 그는 전문(傳文)을 인용하여 경을 해석하고 고문경학을 제창하였으며 또한 『모시(毛詩)』, 『일례(逸禮)』, 『고문상서(古文尙書)』등에 박사관을 설정할 것을 공개적으로 요구함으로써 관학 지위에 있는 금문경학에 도전하였다.

이것은 두 학파의 논쟁의 발단이 되었다. 유흠은 금문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점을 주장하였는데 유흠은 무제(武帝) 건원 연간에 발견된 금문 『시』, 『예』, 『춘추』및 그 후에 발견된 『태서(太誓)』는 모두 “책이 완전하지 못하고 빠진 글자가 있으며 한조가 건립된 지 78년이 지났기에 완전한 경서를 떠난 지가 이미 아주 오래였다.”라고 하였다. 이와 동시에 유흠은 고문경의 출처는 믿을 수 있다고 하면서 『일례』, 『서』는 공자의 옛집의 벽 속에서 발견되었고, 『춘추좌씨』는 좌구명(左丘明)이 연구한 것으로서 믿을 만한 문헌이라고 말했다. 또한 유흠은 태상박사에게 글을 보내 “금문경학은 문자나 분석하고 언사를 번쇄하게 만드는 훈고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무엇 하나에도 제대로 능통한 학자가 없어 현실적 대응 능력이 없다.”고 책망하였다.

왕망(王莽)이 섭정하게 되면서 고문경 학파의 처지는 크게 개선되었다. 왕망은 유흠을 국사(國師)로 삼았고, 유흠이 문화 영역에서의 중심인물이 되면서 고문경학도 전기(轉機)가 있게 되었다. 고문경학에서의 복고사상과 주공(周公)이 섭정한 역사적 사실, 그리고 주공이 전장 제도를 친히 제정했다는 설법은 마침 황제가 된 왕망이 복고개제(復古改制)를 실시하는 정치 수요에 부합되었다. 그래서 왕망은 『모시』, 『일례』, 『고문상서』, 『좌씨춘추』, 『주례』에 박사관을 설정하였고 그때부터 고문경학은 사학(私學)이 되어 잠시 동안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왕망의 정권이 무너짐에 따라 고문경 박사관은 즉시 폐제 당하게 되었다.

제2차 논쟁 : 한흠(韓歆)과 진원(陳元), 범승(范升)

지방 호족의 세력을 등에 업고 등장한 광무제(光武帝)는 이른바 ‘광무중흥(光武中興)’을 꾀하면서 통치의 발판으로 왕망 시대의 3대 경학인 금문경학, 고문경학, 참위학을 전반적으로 고르게 이용하였다.

그 이유는 세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왕망과 농민기의(農民起義)로 인해 어지럽혀진 통치사상을 바로잡기 위함이고, 두 번째는 경학을 창도함으로써 정권의 신수화(神授化)를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경학이라는 통일적 이념체를 공유함으로써 지주 지식층과 계속적인 유대를 확보하여 통치권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기 위함이었다.

제2차 금고문 논쟁은 기원전 25년, 건무(建武) 초년에 일어나게 되는데 서한 애제때 유흠이 불러일으킨 금고문 논쟁이 『좌전』이라는 저술의 박사관 설정 문제로 귀결되는데, 건무 초년에 제2차 금고문 논쟁도 그 성격이 유사하다. 당시 상서령(尙書令)인 고문경학가 한흠(韓歆)이 발동한 이 논쟁의 목적은 비씨역(費氏易)과 좌씨춘추(左氏春秋)에 박사를 세우기 위함이었다. 광무제는 조서를 내려 금문경, 고문경 학자들을 영대(靈臺)에서 연 회의에 참가하게 하고 자기도 친히 참가하여 결재하였다. 금문학자 범승은 좌씨는 공자한테서 나오지 않고 좌구명(左丘明)한테서 나왔으며, 사도의 전수 관계가 불확실하고 이전의 제왕들이 학관에 세운 바가 아니라는 이유로 학관에 세워서는 부당하다고 말하였다. 이에 한흠과 허숙이 반발하고 나와 그들의 논쟁이 매우 격렬해졌다. 범승은 만약 『좌씨춘추』에 박사를 둔다면 고씨역(高氏易), 추씨춘추(騶氏春秋), 협씨춘추(夾氏春秋)도 서로 다르므로 박사관을 설정하려 할 것이고, 각자가 자기의 관점을 고집하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 논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범승은 『춘추좌전(春秋左傳)』은 본사(本師)가 없고 서로 어긋나는 것이 많은 말학(末學)이므로 끊어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광무제가 재결(裁決)을 보류하고 박사와 학자들에게 범승의 의견에 관하여 토론하게 하자 진원이 반박하였다. 진원은 세 가지의 변론을 하였는데 첫째는 『좌전』의 성격에 대한 것이었다. 즉, 『좌전』은 좌구명이 공자에게서 친견(親見)한 것이며 전문한 것이 아니었다는 유흠의 논리를 가지고 그 우월성을 주장하였다. 둘째는 이전의 제왕들이 학관에 세우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는 인습과 아울러 창조가 필요한 것이 제왕의 도리라는 논리를 폄으로써 전환점을 찾아보려 하였으며 또한 『좌전』의 과실이라고 제기한 문제에 대해서는 한낱 몇몇 글자상의 오류일 뿐 대도(大道)에 손상을 주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하였다.

이들의 논변은 10여 차례 계속되었으며 결국 『좌전』은 학관에 세워지게 되었다. 그러나 유신들의 논의가 끊이지 않고 담당 박사 이봉(李封)이 병으로 죽게 되면서 이내 다시 폐립되고 만다.

제3차 논쟁 : 백호관(白虎觀) 회의, 가규(賈逵)와 이육(李育)의 논쟁

금문경 학파와 고문경 학파는 광무제 이후 평형을 유지하여 오다 장제(章帝)때에 이르러 다시 큰 논쟁을 벌이게 된다.
건초(建初) 4년에 경사(京師) 낙양(洛陽)의 백호관에서 장제가 직접 학자들을 불러 새로운 통치 이념의 정립을 도모하게 된다. 이미 경학이 130년간 발전해왔기 때문에 한 달여에 걸친 토론은 하나의 통일된 결론을 도출해 낼 수가 있었는데 그 집결체가 곧 백호통(白虎通)이다.

백호관 회의 소집의 직접적인 배경은 장제가 등극하여 얼마 되지 않은 건초 원년에 발생한 가규와 이육간의 제3차 금고문 논쟁이었다. 광무 때의 제2차 금고문 논쟁에서 진원은 범승의 반대에 대해 『좌전』이 ‘공자의 정도(正道)’를 밝히는 것임을 들어 반박하지는 못하였다. 그에 반해 가규는 『좌전』과 공양전을 비교해 본 후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좌전』을 격상시켰다.

가규가 분석한 결과, 『좌전』과 『공양전』은 대체적인 내용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지만, 군신간의 의리와 부자간의 기강은 『좌전』만의 특징이었다.『공양전』이 군신관계에서 상황에 따른 권도(灌道)를 인정하지만, 『좌전』은 군신간의 철저한 의리를 중시한다. 이와 같이 가규는 군신간의 명확한 위계질서를 『좌전』의 가장 큰 특징으로 일관되게 주장하면서 『좌전』이 국가 기강의 확립이라는 지배 권력의 요구에 가장 적합한 이론임을 재차 강조하며 『좌전』의 학관 설립의 정당성을 피력하였다. 또한 가규는 『좌전』이 당시 유행하는 도참설(圖讖說)과 합치된다고 하였다. 오경박사들 가운데에는 도참설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없었는데 『좌전』에는 분명한 구절이 있어 이를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토론회가 기획된 목적이 새로운 통치 이념 정립을 통한 군주 권력의 강화라는 점에서 가규의 이러한 주장은 논쟁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가규의 주장 가운데 특히 『좌전』을 도참설과 부회시킨 점은 통치자에게 큰 감흥을 주었다. 따라서 장제는 가규에게 학생 가운데 뛰어난 자 20명을 선발하여 『좌전』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제4차 논쟁 : 하휴(何休)와 정현(鄭玄)

3번의 논쟁을 거치면서 금문경학은 참위(讖緯)를 수용하여 변화를 시도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공허한 관념으로 추락한 반면, 고문경학은 역사적이고 실증적인 학문 방법론을 바탕으로 꾸준히 성장하면서 새로운 고문경학의 시대를 열었다.

이전의 세 번의 경학논쟁은 경세학적 경학의 역할이 강조되는 상황에서 현실 정치의 장에서 벌어진 정치적 이념 논쟁의 성격이 강했으며, 금문경학과 고문경학 특히 공양학(公羊學)과 좌씨학(左氏學)의 학관 설립이라는 학파의 주도권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논쟁의 배후에는 항상 국가 권력이 자리하여 논쟁을 주도함으로써 경학이라는 권력의 기반을 장악하여 국가의 지배 이념을 정당화하려는 강한 정치적 색채를 띠었다.
이와는 달리 영제(靈帝) 건녕(建寧) 원년에 하휴와 정현 사이에 벌어진 제4차 금고문논쟁은 이전의 논쟁과는 그 성격을 완전히 달리하였다. 이 논쟁은 현실 정치와는 이미 단절된 학술계 내부의 논쟁이었으며, 경학의 내실화를 꾀하는 과정에서 촉발된 순수 이론 논쟁이라는 점에서 이전의 논쟁과는 크게 구별되었다.

후한 말기는 거의 20여 년간 지속된 당고(黨錮)에 의해 수많은 학자들이 박해를 받으면서 학문 자체의 성격과 방향이 급격히 변화되었다. 현실 정치와 완전히 분리된 채 오로지 학문의 내적 이론의 발전과 성숙에 주력함으로써 경학은 한 단계 발전하는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하휴와 정현은 이러한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며, 그들의 논쟁은 경학 발전의 새로운 추세를 반영하였다. 즉 현실 정치와의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정치 이념의 생산자 내지 담지자의 역할을 수행했던 경학이 정치와는 완전한 단절을 선언하고, 실증적이고 고증학적인 경학으로 방향을 전환한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당시의 학계에서는 금고문 경학의 장단점을 서로 보완해서 이론의 종합을 시도하는 새로운 학문 풍토가 조성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연구를 위해서는 기초 자료의 수집이나 정리, 교감 등의 절차가 요구되었기 때문에 경서에 대한 훈고학적이고 실증적인 연구 방법론을 고수했던 고문 경학을 중심으로 종합이 시도될 수밖에 없었다. 금문 경학은 단지 학관을 중심으로 그 명맥을 유지할 뿐 실질적인 학문 활동은 거의 전무했기 때문에 학문적 성과에 있어서는 고문 경학에 비교될 수 없었다.

하휴는 장제 시기의 경학토론회의인 백호관 회의 이후 50여 년이 지난 순제(順帝)시기 이후로 활동하면서 공양학을 종합한 인물이다. 고문 경학이 성행하던 당시 학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공양학을 고수하면서 그 이론의 정리와 종합을 시도하였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한 대 공양학 이론의 결정체인 『춘추공양해고(春秋公羊解詁)』이다. 하휴는 『춘추공양해고』의 서문에서 기존 공양학자들의 잘못된 경전 해석에 의해서 좌씨학의 도전을 받음으로써 공양학의 존립 자체가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단지 현존하는 공양학의 이론만을 고수하여 경전에 대해 왜곡과 견강부회를 일삼는 현재의 학문 풍토를 타파하고, 보다 세밀한 공양학 이론의 구축에 전력해야 함을 강하게 피력하였다. 그는 우선 『공양전』을 표준 내지 법칙으로 삼아서 『춘추』경전 자체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선행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하휴는 당시 공양학의 위기 상황을 직시함과 동시에 기존 고문 경학 중심의 학계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공양학의 이론 보완과 종합을 통해서 공양학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려고 하였다.

정현은 금고문 경학의 대립을 종식시키고 경학의 통합을 이룬 후한 경학계의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데 그는 거의 모든 금고문 경전에 대한 연구와 주석 작업에 전력함으로써 경학의 종합화를 시도하였다. 정현은 경전에 대한 연구과 금문 경학과 고문 경학으로 분리된 경학의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관직의 진출을 포기할 정도로 뚜렷한 목표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정현은 당시의 학술을 총망라하여 번잡한 것을 손질하고 빠진 부분을 바로잡아 교정했기 때문에 학자들이 그것을 경전 해석의 표준으로 삼아서 일정한 방향으로 경학 연구를 진행할 수 있게 하였다. 즉, 정현은 금고문 경학의 장점을 흡수하여 두 학문을 통합하고 집대성함으로써 마침내 금고문 경학의 대립을 종결짓고 통일된 경학 연구의 노선을 확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정현의 작업은 금고문 경학이 지닌 고유의 성격이나 특징을 없애버렸으며, 특히 금문 경학이 도태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였다. 왜냐하면 정현의 연구는 주로 고문 경전을 주요 텍스트로 삼아서 금문 경전의 장점만을 흡수하는 편중된 방법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하휴와 정현은 무엇보다도 『춘추』에 대한 기본적인 시각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하휴는 『춘추』속에 미언대의(微言大義)의 형식으로 인간이 본받아야 할 도덕적 규범이나 정치적 포폄(褒貶) 함께 발란반정(撥亂反正)의 정치적 도리가 내재되어 있다고 여겼다. 이에 비해 정현은 고문 경학의 입장에서 『춘추』를 단지 군주의 행위를 기록한 역사서라고 인식하였다. 하휴의 글에는 공양학을 끝까지 고수하겠다는 의미의 공양묵수(公羊墨守), 『좌씨전』의 뿌리 깊은 병폐를 지적한 좌씨고황(左氏膏肓), 『곡량전』의 나쁜 고질병을 지적한 곡량폐질(穀梁廢疾)이 있다. 하휴는 이육(李育)의 뜻을 이어받아서 자신의 스승인 박사 양필(羊弼)과 함께 이 글을 지었다. 하휴의 이 글에 대해 정현은 발묵수(發墨守)를 지어 『공양묵수』의 잘못된 점을 드러내 밝히고, 침고황(箴膏肓)을 지어 『좌씨고황』의 잘못된 점에 일침을 가하였다. 또한 기폐질(起廢疾)을 지어 『곡량폐질』의 잘못된 점을 부각시켜 하휴의 주장에 대해서 비판을 가하였다. 하휴는 정현의 글을 읽고서 “정현이 나의 방으로 들어와서, 나의 창으로 나를 찌르는구나!” 하고 감탄하였다.

논쟁의 형식을 보면 하휴가 『공양전』의 우수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 이론에 입각하여 나머지 두 전(傳)을 비판하면 정현은 이에 대해 반박하거나 또는 장점을 뽑아서 조화시키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하휴의 답변이나 재반박에 관한 역사 기록이 없기 때문에 논쟁의 결과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하휴는 사실적은 증거 제시보다는 해석을 통한 의리의 천명이라는 공양학의 연구 방법에 치중하기 때문에 그의 주장에는 사실에 대한 이해 부족이나 곡해가 많이 보인다.

이에 비해 정현은 역사적인 고증이나 객관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반박함으로써 재반론의 여지를 주지 않고 있다. 따라서 내용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정현이 논쟁에서 승리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하휴와 정현의 논쟁은 외형적으로는 금문 경학과 고문 경학의 대립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내용면에서는 경학 발전의 새로운 출로를 개척함으로써 경학사에서의 획기적인 사건으로 평가될 수 있다. 논쟁 이후 공양학은 하휴에 의해 일관된 체계를 갖춘 이론을 형성함으로써 하나의 체계적인 학문 형태로 정립되었으며, 실증적이고 고증학적인 정현의 학문 태도는 경학 연구 방법의 기초적 모델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경학의 내실화에도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금고문논쟁의 특징 및 결과

금고문 논쟁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갖는다.
첫째는 몇 차례에 걸친 논쟁의 결과로 고문 경전의 지위가 향상되었다. 동한 말년에 고문 경학이 금문 경학을 능가하면서 위진(魏晋) 시대는 금문을 숭상하는 분위기가 점차 줄고 고문경이 학관에 세워진 예가 더 많아졌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둘째, 음양오행과 참위설로 얼룩진 금문경학을 고문경학이 고증적 태도로 쇄신시켰다. 흔히 금고문학에서 공자를 ‘소왕(素王)’으로 보느냐(금문) 아니면 ‘선사(先師)’로 보느냐(고문) 하는 태도의 결정도 이런 입장에서 살필 수 있다.

셋째, 사학과 문자학에 끼친 영향이다. 고문학파의 요순시대를 황금 시기로 보는 경향은 복고적 역사관을 낳았고 금문학파의 탁고개제론(託古改制論)은 현실 개조를 긍정적으로 보는 진취적 역사관을 낳았다.
문자학상으로는 이아(爾雅)와 설문해자(說文解字)와 같은 문자학 경전이 고문경학이 발달한 동한 시대에 이루어진 점을 들 수 있다. 『이아』는 모시주례에 일치되는 것이 많고 『설문해자』는 고문경전을 근거한 것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한대 경학상의 금고문 논쟁을 보면 그 전재가 순수한 학문상의 논의라고 보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권을 잡고 있는 통치자에게 접근하기 위한 방편과 그에 대한 견제로 야기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특수한 성격은 오경 가운데서도 특히 『춘추』라는 책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결과를 낳는다. 공자가 『춘추』를 지어 한나라의 기틀을 마련해 놓았다는 주장이 한대에 매우 유행하였는데 『춘추』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기만 하면 현실에서 부딪치는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초에 『공양전』이 성행하였던 것도 현실의 문제 해결에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한 말엽에 이르러 왕망과 유흠은 『공양학』류의 금문 경전이 누리던 권위를 고문 경전의 발굴을 통해 위협하였던 것이다. 왕망은 왕위를 찬탈하였고 유흠은『좌전』의 학관 설립을 도모하였으나 온전한 결과를 낳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그 결과로 고문 경전은 서서히 경전의 지위를 얻어 나갔다. 금고문 논쟁은 결국 『공양전』과 『좌전』의 대결 구도로 치닫게 되었고 후한의 정현에 이르러 그 종합적 타결을 보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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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철학연구회. 논쟁으로보는 중국철학. 예문서원. 1994
  • 김동민. 경학(經學) 금고문논쟁(今古文論爭)과 가규(賈逵)의 좌씨학(左氏學). 東洋哲學硏究會. 2007
  • 김동민. 하휴(何休)와 정현(鄭玄) 금고문론쟁(今古文論爭)의 경학사적(經學史的) 의의(意義). 東洋哲學硏究會.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