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가황조(宋家皇朝)
-중국 역사 속으로 뛰어 든 여성들
영화 <송가황조(宋家皇朝)>의 주인공은 송가(宋家)의 세 자매, 아이링, 칭링, 메이링이다. 영화에는 중국의 현대사를 이끌었던 쑨원, 장제스과 같은 인물도 등장하는데, 쑹아이링은 당시의 재벌인 쿵샹시, 쑹칭링은 쑨원, 쑹메이링은 장제스의 아내였다. 어지러운 사회 속에서 중국의 재력. 정치적 권력을 모두 가졌던 세 자매는 중국의 신여성으로서의 역할을 다한다. 그녀들의 이러한 행보는 그 자체로 역사가 되기에 이른다. 혼란스러웠던 격변의 시기에 한 집안 내에서 자본과 권력이 만나고, 그 사이에서 진정한 중국의 혁명을 위한 과정이 중국을 현대라는 시기로 나오게 만든다. 새로운 중국을 만들기 위한 청나라의 멸망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까지 대륙을 지배했던 한 집안의 행보. 이를 보여주는 영화 <송가황조>는 이렇게 시작한다. “과거 중국에 세 자매가 있었다. 한 사람은 돈을 사랑했고, 한 사람은 나라를 사랑했고, 한 사람은 권력을 사랑했다.(一個愛錢、一個愛權、一個愛國)”
쑨원은 중국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큼 대륙과 대만 모두에서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그는 중국의 대표적인 민족주의자, 혁명주의자로 구제도와 관습을 타파하고, 서양 열강으로부터 벗어난 사회를 이루기 위해 평생을 바친다. 위의 <사진 1>는 송씨 자매의 아버지인 쑹루야오가 변발을 해주는 장면이다. 변발은 쑨원이 타파하고자 했던 구제도를 상징하는 것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쑨원은 중국 혁명당 시절부터 동지이며 비서였던 부인 쑹칭링의 내조에 힘입어 국민당을 창설한다. 그는 이와 함께 중화민국을 이끌어가기 위한 군사적 토대의 필요성을 느끼고 장제스를 군관학교의 교장으로 임명하여 군사력을 기르기 시작한다. 쑨원은 장제스를 신뢰했고 장제스 역시 자신이 그의 혁명사상을 잇는 진정한 후계자라고 믿는다. 쑨원은 이후 장제스를 국민당의 다음 총통으로 내정하고 죽게 된다.
쑹메이링과 장제스의 결혼으로 송씨 집안은 재력과 권력, 무력을 모두 갖춘 집안이 된다. 장제스는 국민당의 총통으로서 권력을 장악했지만 권력에 대한 욕심이 대단했던 것 같다. 그는 일본이 나라를 침입해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음에도 국민당 내 공산당을 탄압하는데 주력한다. 이 때 쑨원의 아내로서 많은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던 쑹칭링은 국민당을 탈퇴한다. 그녀는 보다 나은 중국을 만들기 위해 장제스와 대립한다. 지식인들은 장제스의 이러한 행보에 반대하며 연일 시위를 하지만 장제스의 뜻은 확고했다. 일본의 침입보다 공산주의자 색출에 집중하는 그의 행보에 반대하는 장쉐량에 의해 장제스는 시안에 붙잡히게 된다. 송씨 자매의 도움이 더해져 장제스는 풀려나게 된다. 그는 시안사변을 통해 항일 전쟁을 결심하게 되고, 2차 국공 합작이 이뤄진다. 이후 일본은 패망하지만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은 계속된다. 결국 장제스는 패하고 대만으로 정부를 옮긴다. "중국인이 중국인과 싸우지 말라"는 지식인과 민중의 생각을 중요시 하지 않았던 것이 내전에서 실패한 큰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이 세 자매인 만큼 그들의 심리나 감정에 대해서는 공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대적 배경이 극변하던 중국이기에 역사적 기본 지식이 요구되는 면도 있다. 영화가 공산당을 미화했다는 비판을 조금 받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역사적 사실에 충실했기 때문에 중국의 현대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영화는 송씨 가문의 여인들이 그 주인공이지만 그들의 생애와 그 당시 사회를 사실에 가깝게 재현한다. 이 영화는 이 세 자매의 인생을 실화를 바탕으로 보여주고 있다. 국공합작, 쑨원과 장제스의 정치적 일대기를 보여주고 있어 그 당시 사회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장완정 감독은 영화 <송가황조>를 쑹자매 3명의 드라마로 봐 달라고 언급했다. 하지만 오히려 이 영화는 1900년의 50년을 아우르는 역사물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 고증에 충실하여 역사를 재연한 다큐멘터리와 비슷해 드라마적 요소는 조금 부족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를 시청하며 조금 지루했던 기억이 있다. 이 영화를 소모임에서 택한 이유는 청 왕조가 망하고 1940년까지의 역사적 사건을 시간 순으로 잘 보여주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사진 2>와 <사진 3>는 역사적 사건은 물론 그 시대의 모습을 재현하려 했던 감독의 노력을 보여주는데 그 시절 혼란스럽던 중국의 사건과 상황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영화가 그 시대상을 잘 나타내는 반면, 실제 쑹자매가 그 시대 중국 여성을 대변한다고는 볼 수 없다. 대다수의 여성들이 기초교육조차 못 받던 시절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 대학교육까지 마친 지식인 여성들로 서양문물에 더 익숙하고 중국의 전통적 사고방식을 고수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8살 때 미국으로 떠난 메이링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 유일하게 동양적인 것이 있다면 오직 외모뿐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중국 전통문화보다 서구적 가치관을 가진 인물이었다. 하지만 세 자매 나름대로 중국인으로서의 자존심과 역사의식은 지니고 있었음과 더불어 영화 ‘송가황조’가 단지 소설에 기반한 영화가 아닌 실재하는 세 자매의 이야기를 담았기 때문에 세 자매가 중국 사회와 역사적 사건에의 개입과 끼친 영향력은 충분히 의미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쑹아이링, 쑹칭링, 쑹메이링 자매, 이 인물들을 중심으로 중국 근현대사를 파악할 필요성을 느꼈다.
영화 구석구석에는 세 자매를 통해 변화해가던 여성의 모습을 담고 싶어 했던 장완정 감독의 메시지가 있다. <사진 4>와 <사진 5>는 칭링이 아버지의 친구이자 26살 연상인 쑨원과의 결혼을 허락받지 못하고 집에 갇히자, 야반도주를 하는 장면이다. 맨발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위해 뛰어가는 칭링의 모습과 달리 그녀를 쫓아가는 할머니들은 전족을 신고 뒤뚱뒤뚱 쫓아간다. 구시대의 여성을 대표하는 할머니들의 전족과 신여성인 칭링의 발을 클로즈업하며 억압받던 여성과 자유를 누리는 여성을 나타내 앞으로 나아갈 중국 사회를 그린 것은 아닐까.
‘송가황조’를 통해서 여성들의 정치 참여도 엿볼 수 있다. 쑹자매가 여성 참정의 발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지만 쑹자매의 활발한 정치 활동은 여성의 가능성과 중국의 기회, 그리고 나아가 중국 정치의 민주화까지 내다 볼 수 있었다.[1]특히 쑹칭링과 쑹메이링은 남성들 못지않게 중국 역사에 뛰어들었는데 유명한 일화로 쑹메이링이 미국 의회에서 연설을 하기도 했다. ‘송가황조’의 시대적 배경과 같이 사회적전환기에 여성의 참정이 발전하게 되는데,[2] 이에 쑹자매 정치참여도 하나의 기여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동일한 환경 속에서 자랐지만 세 자매는 영화의 도입부와 같이 다른 인생관을 갖고 서로 다른 인생 행로를 걸었다. 그 모습을 잘 보여주는 장면은 자매의 어린 시절이다. 청의 시절, 서양 제국주의 세력이 중국으로 침략을 할 때, 중국 내에서도 서양 문물을 배척해야 한다는 의화단운동이 일었다. 영화 속에서도 그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세 자매의 아버지 쑹루야오는 문물 배척을 주도하며 서양 문물을 불태우려한다. 이때, 막내인 메이링은 자신의 인형을 꼭 안으며 버리지 않으려 한다. 이때, 둘째 칭링이 동생의 인형까지 빼앗아 불속에 던져버리고 큰언니 아이링은 큰 인형은 버리지만 작은 인형은 아버지 몰래 소매 속으로 숨긴다. 이 장면 하나로 세 자매의 다른 성향을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다른 성향을 가진 세 자매는 대학 졸업 후 중국으로 돌아와 각자 중국 근현대사에 이름을 남긴 이들과 결혼을 하고, 여성의 지위가 오늘날보다 훨씬 낮은 시절이었음에도 자신의 능력과 의지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걸들이 되었다.
특히 중국 최초의 퍼스트레이디인 쑹칭링과 대만 총통 부인, 쑹메이링의 정치 활동과 둘의 갈등은 이 영화 후반부의 중심이자,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립을 면밀히 보여주기도 한다. 둘째인 칭링은 침착하고 사려 깊은 성격으로 쑨원의 비서이자 혁명적 동지로서 <사진 6>과 같이 항상 그의 곁을 지켰다. 시간이 지나며 칭링은 쑨원의 삼민주의 사상에 깊이 공감하면서 자신도 한 명의 사상가로, 중국의 미래를 짊어질 혁명가로 성장하였다. 1925년 쑨원이 북경에서 타계할 때까지 결혼 생활은 불과 10여 년 남짓이었지만, 그 10년은 한 명의 총명한 여성을 조국과 민족을 생각하는 지도자로 변모시켰다. 이후 쑹칭링은 중국의 정치적 상황에 적극 개입하며 남편의 유지를 따라 중국 민중에게 가장 올바른 길이 무엇인가를 항상 고민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그녀는 국민정부의 수장인 장제스가 남편 쑨원의 이념과 이상을 왜곡하고 중국의 당면 과제를 해결하기보다는 권력 야욕에 젖어 있다고 판단하고 그와 대립하였다. <사진 7>은 쑨원의 혁명 사상과 달리 국민당 내 공산당원들을 무참히 살해하는 장제스의 모습에 국민당 탈당을 선언하는 칭링의 모습이다. 1949년 중국 본토에 중화인민공화국 성립한 이후 쑹칭링은 두 번이나 국가 부주석을 역임하였다.
이에 반해 막내 메이링은 장제스와의 결혼 후 10년 동안 그와 함께 전쟁터를 누비며 그의 외교 고문이자 개인 비서로 활약했다. 일본의 중국 침략이 시작된 뒤에는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국제 사회에 중국의 입장을 알렸고 미국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장제스가 남부의 군벌 장쉐량에 의해 감금되는 이른바 시안사변이 일어나자 메이링은 직접 시안으로 날아가 장제스를 설득해 남편을 구출해내는 배짱을 과시하기도 했다. “일본은 내 첫 번째 적이지만 공산당도 두 번째 적이오.”, “그럼 우선 두 번째 적과 협조해 첫 번째 적을 없애세요.” <사진 8> 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을 설득하는 메이링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렇게 행로가 다른 세 자매의 우애에도 금이 가기 시작한다. 이는 영화 후반부의 가장 중요한 장면이기도 한데, 쑨원의 타계 후 장제스가 본래 쑨원의 유지대로 혁명을 이어나가지 않음에서부터다. 통일에 방해가 되는 공산당원을 죽이는 장제스와 그런 장제스를 증오하는 칭링은 대립구도에 들어서게 되고 칭링은 자연스레 메이링과도 소원해진다. 이런 관계는 이념 갈등까지 번져 <사진 9>과 같이 언성을 높이는 장면도 영화에서 볼 수 있다. 감정의 골이 점점 더 깊어져갔지만, 일본군의 침략으로 장제스가 공산당과 손을 맞잡으면서 그 관계는 잠시 멈추게 된다. 그 후 8년간 진행된 항일전쟁 후 장제스는 또다시 동족에게 총과 칼을 겨누고 결국 세 자매는 죽을 때까지 서로를 보지 않은 채 씁쓸한 임종을 맞는다.
영화 ‘송가황조’는 격동하는 중국 속에서 역사 속에 뛰어든 쑹자매를 비교적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하지만 영화가 1997년 7월 홍콩이 중국에 귀속되기 전에 제작되었고 영화 자체도 홍콩 내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대만, 중국과의 합작으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역사를 조명하는데 조금은 조심스러워 보인다는 영화의 한계가 있다.
당시 중국 사람들은 그 시절을 ‘송가황조 일문천하(宋家皇朝 一門天下)’란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경제력, 군사력, 정치력을 다 가진 송씨 가문이 결국 ‘송가황조(宋家皇朝)’를 세운다. 하지만 그 시대에 빛나던 인생은 시간이 지나며 중국의 신화로 남게 되었으며 지금도 추앙받고 회자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