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려
범려(范蠡)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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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기원전 536년 초(楚) 완지(宛地) 삼호읍(三户邑) |
사망 |
기원전 448년 |
목차
개요
춘추시대(기원전 536년) 말기 초(楚)나라 완지(宛地) 삼호읍(三户邑) (현재의 하남성 남양시 석천현) 출신의 정치가, 군사가, 경제학자이다. 성은 범(范)이고 이름은 여(蠡), 자는 소백(少伯)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치이자피(鴟夷子皮), 도주공(陶朱公)이 있다. 춘추시대 말기 월(越)나라에서 월왕 구천(句踐)의 책사가 되어 구천을 보필하며 오(吳)나라를 멸망시킨다. 이후, 은퇴하여 제나라로 떠나 상인으로 활동한다.
생애
초(楚)나라에서
월(越)나라에서
오월쟁패(吳越爭霸) 시기, 월왕 구천의 책사로 활약하다
- 월왕 윤상과 오왕 합려(闔閭)는 서로 싸우고 공격하는 원수지간이었다. 그러던 와중, 윤상이 죽자 월왕 윤상의 아들 구천이 왕위에 올랐다. 오왕 합려는 월왕 윤상의 사망 소식을 듣고 월나라를 공격했다. 월왕 구천은 세 열을 이룬 장정들을 오나라 진영에 보내 크게 외치게 한 후 목을 베어 자살하게 했다. 오나라 군사들이 그 장면을 넋 놓고 바라보는 사이에 월나라 군대가 오나라 군대를 공격하였고 그 과정에서 오왕 합려가 부상을 입었다. 오왕 합려는 죽기 전에 아들 부차에게 구천이 아비를 죽인 것을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 구천은 오왕 부차(夫差)가 군대를 동원해 복수하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먼저 공격하려고 했다. 이때 범려가 전쟁은 덕을 거스르고 다툼은 일 중에서도 가장 말단의 것이고 행해도 아무 이득이 없다며 먼저 공격하는 것을 만류했다. 하지만 월왕 구천은 군대를 일으켰고 기원전 494년에 오왕은 월나라를 공격했고 월왕 구천은 회계산에서 병사 5천명과 함께 포위당했다. 월왕 구천이 범려에게 말을 듣지 않아 이렇게 되었으니 어찌하며 좋겠냐고 조언을 구했다. 범려는 그에게 화해를 청하고 오왕이 청을 받아주지 않으면 스스로 볼모가 되는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월왕 구천이 범려의 조언에 동의하여 월나라의 대부 문종이 화해를 요청하고자 오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오왕 부차는 이를 받아들이려 했으나 오자서가 말렸다. 문종이 다시 돌아와 이를 월왕 구천에게 고하였고 오나라의 태재 백비에게 보물과 미녀를 뇌물로 주었다. 백비(伯嚭)는 뇌물을 받고 오왕 부차를 설득하며 월나라를 멸망시키지 말 것을 요청하였다. 오왕 부차는 이를 받아들였다. 월왕 구천과 범려는 오나라에서 볼모가 되어 부차의 마음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오왕 부차는 월왕 구천과 범려가 자신에게 충성을 다한다고 생각해 다시 월나라로 돌려보냈다. 이후 세력을 키워 다시 부차에게 복수하려고 했다.
- 오왕 부차가 신하 오자서를 죽이고 백비에 정치를 맡긴 지 3년이 지나자 구천은 범려에게 오나라를 공격해도 되는지 물어봤으나 범려는 대기하라고 했다. 오왕 부차가 회맹하고 태자와 노병사들이 지키는 사이 월왕 구천은 범려의 동의를 구하고 오나라를 공격했다. 이번엔 오왕 부차가 월왕 구천에게 강화를 요청하지만 범려가 월왕 구천에게 하늘의 기회를 거스르지 말라며 조언했다. 월왕 구천은 오왕 부차에게 용동의 임금 노릇할 것을 권유하지만 오왕 부차는 거부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월왕 구천은 책사인 문왕과 범려의 도움으로 오나라를 평정하고 패자가 되었다.
토사구팽을 피해 월나라를 떠나다
- 범려는 월왕 구천을 20년간 보필하며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이후 월나라에서 명성을 누리게 된 범려는 월나라를 떠나기로 작정한다. 구천이 만류하지만 범려는 배를 타고 떠나고 구천은 회계산(會稽山)을 범려의 봉읍으로 삼겠다며 공표한다. 범려는 월나라를 떠날 때 문종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냈다.
“ "나는 새가 다 잡히면 좋은 활은 감추어지고, 교활한 토끼가 모두 잡히면 사냥개는 삶아지는 범이요. 월나라 왕 구천이라는 사람은 목이 길고 입은 새처럼 뾰족하니, 정녕 어려움은 함께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같이 할 수 없소. 그대는 어찌하여 월나라를 떠나지 않는 것이요?"
” — 사마천, 월왕구천세가
- 문종은 이 편지를 받고도 떠나지 않았다. 결국, 구천은 문종에게 칼을 주며 자결하라 하였고 문종은 자결하였다.
제(齊)나라에서
제나라의 재상이 되다
- 범려는 제나라에 도착해 성과 이름을 바꾸어 스스로 치이자피(鴟夷子皮)라고 불렀다. 거기서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며 산 지 얼마 되지 않아 재산이 수십만 금에 이르렀다. 제나라 사람들은 그를 재상으로 삼았다. 하지만 범려는 존귀한 이름을 오래 가지고 있는 것이 상서롭지 못하다며 재상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자신의 재산을 모두 나누어주었다. 이후 그는 제나라에서 도(陶)땅으로 건너갔다.
도(陶)땅에서
상업을 통해 큰 부자가 되다
- 범려는 도 땅이 천하의 중심이기 때문에 여기서 교역하고 장사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스스로 도주공이라고 하였다.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고 물건을 오랫동안 비축하여 다시 팔아 이윤을 남겼고 또다시 엄청난 재산을 모았다. 범려는 19년 동안 세 차례나 천금을 벌었고 두 번은 가난한 친구들과 먼 친척에게 나눠주었다.
초나라에서 둘째 아들이 죽다
- 범려는 도(陶) 땅에서 살 때 막내아들을 낳았고 막내아들이 장성하였을 무렵에 범려의 둘째 아들이 사람을 죽여 초나라에 갇히게 되었다. 범려는 이를 살펴보려고 황금 일천 일(鎰)과 함께 막내아들을 보내려 하였으나 큰아들과 어머니가 반대해 큰아들을 보냈다. 범려는 자신의 친구 장생(莊生)에게 쓴 편지와 황금을 큰아들에게 주며 장생이 하라는 대로 하라고 당부했다. 큰아들이 초나라에 도착해 황금을 들고 장생의 집에 갔는데 장생은 굉장히 가난했다. 장생은 큰아들에게 동생이 나오거든 이유를 묻지 말라고 하였다. 큰아들은 장생은 가난했으나 청렴하고 강직하여 초나라의 모든 이들이 그를 스승으로 삼았다. 장생은 주공의 황금을 받고 다시 돌려주어 믿음을 보여주려 했다. 하지만 범려의 큰아들은 장생이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자신이 따로 챙긴 황금을 초나라 귀인에게 주고 일을 꾸미려 했다.
- 장생은 평소 그를 신임하는 초나라 왕에게 가서 어떤 별이 어떤 장소로 옮겼는데 이는 초나라에 해로움이 될 거라고 하였다. 초나라 왕이 어찌하면 좋겠냐고 묻자 장생은 덕으로만 해를 없앨 수 있다고 하였다. 초나라 왕은 자신이 어진 정치를 하겠다며 사신을 시켜 세 창고를 봉쇄했다. 평소에 초왕이 사면을 내릴 때는 항상 세 창고를 봉쇄시켰다. 초왕이 세 창고를 봉쇄한다는 사실을 듣고 초나라 귀인이 놀라 범려의 큰아들에게 둘째 아들이 사면될 것 같다고 하였다. 범려의 큰아들은 장생에게 황금을 준 것이 의미가 없다고 느껴져 장생을 찾아가 일이 해결될 것 같다며 초나라를 떠나겠다고 하였다. 장생은 황금을 다시 돌려받고 싶어 그러는 것이라 생각하여 황금을 돌려주었다. 장생은 자신이 매수되었다는 것을 치욕스럽게 여겨 초나라왕에게 가서 다음과 같이 고했다. 주공의 아들이 초나라에 갇혔는데 초나라 왕의 측근에게 뇌물을 주었고 왕이 초나라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사면한 것이 아니고 도주공의 아들 때문에 사면했다는 소문이 들린다고 말한 것이다. 초나라 왕은 크게 노하여 주공의 아들을 죽이고 천하에 사면령을 내렸다 주공의 큰아들은 동생의 시신을 안고 다시 돌아왔다. 어머니와 다른 사람들은 모두 슬퍼하였으나 주공은 평소 큰아들의 됨됨이를 보고 막내아들을 보내려 했던 것이라며 그렇게 될 줄 알았다고 웃으며 말했다.
인물 평가
“ "범려는 세 번 자리를 옮기고도, 모두 영광스러운 이름이 있었고 명성이 후세까지 드리우고 있다. 임금과 신하가 이러하다면 드러나지 않으려 해도 가능할 수 있겠는가?"
” — 사마천, 월왕구천세가
참고자료
1. 공원국, 『춘추전국이야기 5-오월쟁패, 춘추전국질서의 해체』, 위즈덤하우스, 2012.
2. 사마천, 김원중 역, 『사기 세가』, 민음사, 2010.
3. 사마천, 김원중 역, 『사기 열전 2』, 민음사, 2007.
4. “范蠡”,「自由的百科全书」, 维基百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