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우
항우 | |
---|---|
| |
출생 |
B.C 232 임회군 하상현(臨淮郡 下相縣, 현재는 江蘇省) 출생 |
사망 |
B.C 202 |
생존시기 | 전국시대 |
경력 | 진나라를 멸망시킴 |
관련 활동 | 군사, 정치 |
개요
애초 항우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이름은 적(籍)이고 자가 우(羽)이다. 임회군 하상현 출신으로 춘추전국시대 멸망한 초나라 사람이다. 진나라에 대항해 무장봉기를 일으켜 회왕을 옹립하고 초나라를 다시 세워 전투에서 대대적인 승리를 거뒀다. 관중으로 들어가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스스로를 서초 패왕이라 칭한 뒤 18명의 제후를 임명했으나 공정성의 문제로 각 제후들의 불만이 고조됐다. 결국 한왕 유방이 주변 세력들과 연합하면서 항우에게 대항하고 항우는 해하전투에서 사상 첫 패배를 기록하며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역발산기개세로 불릴 만큼 어마어마한 무력을 지니고 있었고 우미인과의 사랑 이야기는 현재까지 패왕별희로 전해지는 만큼 중국의 수많은 인물 중 가장 많이 회자되는 인물이라 볼 수 있다.
초기 생애
임회군 하상연 출신으로 초나라 대장군이었던 항연의 후손이다. 태어난 시기는 각 제후국이 서로 옹립하던 춘추전국시대였으나 자라나면서 본국인 초나라는 멸망하고 진나라가 전국을 통일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삼촌인 항량 밑에서 자랐으며 항량이 글공부와 검술을 시켰으나 문자는 자기 성과 이름을 쓸 정도면 충분하고 검술 역시 1인을 상대할 뿐인 하찮은 것이라며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병법에만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당시 항우는 이미 무기를 다루는데 익숙했으며 키가 8척에 이를 만큼 기골도 장대했다. 초나라가 멸망한 후 진나라에 사로잡힌 항량이 살인을 저지르자 항우와 함께 회계로 달아나 그곳에 정착하여 생활했으며 진시황이 회계로 행차했을 때 항우가 진시황을 보고 진시황의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말한 일화는 유명하다.
진을 멸망시키다
항우가 세력을 키웠을 당시, 진나라는 진시황 사후 혼란한 시대였다. 정치는 가혹하고 부패했으며 백성의 삶은 피폐해졌다. 전국 각지에서 난과 봉기가 일어났고, 진나라에 의해 멸망한 6국이 부활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결국 진 말기 폭정을 참지 못하고 진승]과 오광에 의한 농민 반란이 일어났고 진나라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 때를 틈타 항우는 계부 항량과 함께 오중에서 세력을 잡고 대군을 이루어 봉기한다. 오중의 호걸들이 몰려들었고 패공 유방 역시 참가하였다. 하지만 연달은 전장에서의 승리로 항량은 교만해진 상태였으며 결국 진의 장수 장함에게 대패하고 전사한다. 진승과 오광의 죽음으로 또 한 번 항우와 제후군은 위기에 처하는 듯 했으나, 항우의 결단으로 거록에서 용맹히 싸운 끝에 진을 대대적으로 격파했다. 거록의 전투에서 대승리를 거두며 항우는 뛰어난 군사적 전략가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유력한 인물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윽고 제후군의 상장군이 되어 진의 군대를 잇달아 격파, 진나라의 중심부로 쳐들어갔고, 시황제의 무덤을 파괴하고 황궁을 차지하며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서초 패왕의 자리에 오르다
진의 군대에 의해 제후군이 열세에 몰릴 때, 회왕은 항우와 유방에게 두 가지의 다른 전략을 내렸다. 진이 조나라를 치고 있을 당시, 조나라가 무너지면 다음은 초나라의 차례이기 때문에 항우로 하여금 조나라를 도우러 가게끔 했다. 본디 항우는 항량이 진나라 군대에 살해된 것에 분노하여 유방과 함께 진나라의 중심부로 들어가는 것을 원했다. 하지만 항우가 전장에서 무고한 양민학살을 일삼는 탓에 공을 세움에도 진심으로 제후들과 백성들의 존경이나 신임을 얻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제후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초 회왕은 호전적인 항우보다는 온화한 유방을 관중으로 보내는 회유책을 선택했던 것이다. 때문에 진나라의 심장부 관중으로 향하는 것은 항우가 아닌 유방이 되었다. 이는 진을 격파한 뒤, 관중에 도착한 항우를 대노하게 만들었는데 초회왕이 "먼저 관중(關中)에 입성하는 사람이 그 곳의 왕이 될 것이다"라고 엄포했기 때문이다. 이에 항우는 유방의 함곡관을 함락시키기 위해 진을 치고 있던 와중이었다. 이 때 유방의 좌사마(左司馬) 조무상(曹無傷)이 항우에게 “패공이 관중의 왕이 되고 자영을 재상으로 삼아 진귀한 보물을 모두 다 가지려 합니다”라고 말했다. 항우의 책사인 범증 역시 항우에게 “패공이 산동에 있을 때만 해도 재물과 여색을 탐냈는데 지금 관중에 들어가서는 재물에는 손도 대지 않고 여자도 가까이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그 뜻이 작지 않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을 시켜 그 기운을 보게 했더니 모두 용과 호랑이에 오색인 것이 천자의 기운이었습니다. 때를 놓치지 말고 서둘러 공격하셔야 합니다”라고 권했다.
홍문연 사건
당시 항우의 군대는 40만, 유방의 군대는 10만이었다. 항우는 조무상과 범증의 이야기를 듣고 당장 내일 유방의 군대를 격파하고자 하였다. 항우의 작은아버지 항백은 평소 사이가 좋았던 장량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장량은 당시 유방을 따르고 있었다. 이러한 계책을 알게 된 유방은 "낮밤으로 장군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어찌 감히 반란을 꾀하겠소? 바라건대 항백께서 신이 감히 배은망덕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말해주시오."라고 하며 항왕에게 사죄하겠다는 의사를 전하고 직접 항우를 마주하는 연회를 열게 된다. 이것이 바로 홍문연이다. 이 때 범증은 항장으로 하여금 검무를 추게 하여 유방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항우 또한 유방의 술책에 넘어가 그를 죽이려는 계획을 거두게 되었고, 항백 또한 검무를 추며 유방을 보호하였다. 이에 유방을 죽이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틈을 타 유방은 도망치게 된다. 훗날 사드 문제가 터졌을 때, 왕이 외교부장은 한국을 두고 '항장검무 의재패공' 즉, '항장의 검무는 패공을 해치려는 데 있다' 라는 말을 하며 비판하기도 하였으며, 그 배경이 되는 것이 홍문연 사건이다.
이어 함양을 점령한 항우는 진의 왕을 죽이고 궁궐을 불태워버린다. 사기에 따르면 석달동안 불이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찬란했던 통일 왕조의 멸망의 순간이었다. 관중을 차지한 항우는 초회왕을 황제에 준하는 의제로 올리고, 제후들을 각지에 분봉하였다. 이는 허수아비 왕을 세운 뒤 자신이 권력을 휘두르기 위함이었다. 천하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관중을 차지해야한다는 충고도 만류하고, 항우는 고향 초나라로 돌아가 서초(西楚)의 땅을 차지하며 스스로를 서초패왕이라 칭하였다.
패왕의 몰락
유방에게는 변방의 땅을 주는 등 항우의 불공평한 분봉은 결국 제후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제나라에서 크게 반발이 일어났다. 항우가 대대적으로 제나라를 격파, 양민학살을 이어가고 있는 도중 유방 또한 56만의 대군을 모아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하지만 항왕은 수적 열세에도 수수에서 한군을 대파하는 등, 승전을 이어갔지만 유방의 반간계로 항우 진영은 무너지게 된다. 이는 매우 간단한 술책이었는데 항우와 그의 충신 범증의 관계를 서로 의심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항우가 정신없는 틈을 타, 유방은 주변 세력을 점점 연합하며 초를 고립시켰다. 초의 진영은 오랜 전쟁으로 식량은 바닥나고 많은 군사들을 잃은 상태였다. 이 때를 틈타 유방은 한신과 팽월과 힘을 합쳐 초를 공격하였고, 단 한번도 적과의 전쟁에서 패한 적이 없었던 항우는 마지막 전투 해하전투에서 패한다. 한군에게 포위된 채 사방에서 초의 노래가 들려오자 항우는 끝을 직감하게 된다. 이로부터 탄생한 사자성어가 사면초가이다. 항우는 마지막 오강에서 28명의 군사를 이끌고 끝까지 유방에게 투항하였지만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고 하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며 오강에서 자결한다.
"지금 내가 이런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된 이유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고 했기 때문이지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너희들로 하여금 알게 해주겠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고 하는데, 강을 건너서 무엇하겠는가?, "내가 들으니 한왕이 내 목을 천금과 만호(萬戶)의 봉지로 사려 한다고 했다. 내 그대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겠노라."
참고문헌
사마천, 사기 [항우본기] 서울시립대 중국어문화학과 위키 네이버 두산백과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