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제국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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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bring (토론 | 기여)님의 2019년 1월 23일 (수) 23:24 판 (③제국주의와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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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폴.A코헨 교수

학문의 제국주의는 웰즐리 칼리지의 역사학 교수이자 하버드 대학교 페어뱅크 센터 연구위원인 폴,A코헨이 지은 책이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중국역사학계가 중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문제점을 느끼고 있었고 이에『학문의 제국주의(Discovering History In China)』라는 책을 저술한다. 전후 미국의 학계가 중국사를 바라보던 주류 접근법은 (그가 지적하기로) 총 3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충격-반응 접근법. 두 번째는 근대화(전통-근대)접근법, 세 번째는 제국주의(제국주의와 혁명) 접근법이다. 그는 이러한 접근법들이 서구중심적인 편견에 근거하고 있음을 깨달았고, '서구중심적'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중국 자신에 입각한(China-centered) 접근법'이라고 이름 붙인 새로운 시각을 제안하였다. '중국 자신에 입각한 접근법'은 서구 역사로부터 비롯된 일련의 기대(즉, 근대화나 자유주의, 민주주의 등)보다는 중국의 역사적 궤적과 자신들의 문제에 대한 중국인들의 인식에 더 긴밀한 관심을 기울이는 접근법으로, 중국사 자체의 맥락에서 중국사를 이해하기 위해 진지한 노력을 하는 접근법이다. [1]

애초에 코헨이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저술한 도서이기 때문에 읽기가 쉽지는 않다. 중국 역사에 대한 어느 정도의 배경(특히 19,20세기)이 있다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사 연구의 쟁점과 과제[2]

2차대전 이전 시기 미국의 중국사 연구는 서양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건들만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아편전쟁, 태평천국운동, 의화단운동, 조계지의 생활이나 제도 등이 그러하였다. 이들은 근대적인것이 곧 서양적인 것이라 보았고, 서양적인 것은 중요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들은 중국어 사료를 읽을 능력이 없었다. 2차 대전이 끝난 이후, 중국 현지에서 연구를 하던 전문 연구자들에 의해 기초가 마련되고 중국 연구가 비로소 학문으로서의 특을 갖추게 되었다. 중국어 교육이 개선되었으며 중문으로된 1차 자료를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는 중국 근현대사의 틀을 결정하는데 있어 서양이 침입이 수행한 역할을 압도적으로 강조하였다. 특히 이 시기 주요 쟁점은 1. 서양의 중격과 중국의 반응 과 2. 중국의 전통적인 문화와 사회에 가해진 근대화의 충격이었다.
60년대에 이르러 위에 충격-반응 접근법과 근대화 접근법은 비판을 받게 되는데, 그 이유는 서양의 역할을 과장한다는 것이 아닌 서양에 대한 중국인의 저항을 부정적으로만 파악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서양의 제국주의가 중국의 발전에 끼친 부정적이고 방해적인 효과를 분명히 하려고 하였다. 이들은 아편전쟁, 의화단운동 등에 대해 재검토를 실시하였으며 중국의 역사가 본래 걸었어야 할 역사를 어떻게 제국주의가 방해하고 왜곡하였는가를 보려고 하였다.

오해하면 안되는 것이 결코 코헨은 여러 접근법들을 사용하는 것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만, 이러한 개념들을 '범위를 한정짓지 않고' 모든 것을 설명하는 틀로 사용하는데 반대하는 것이다. 또한 서양의 의의가 사소하다거나 실제 중국에서 수행한 역할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지적하는 점은 서양의 중요성을 미리 결정한 뒤 이후 그 중요성을 말하는 연구태도와 서양의 역할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부분이다.

코헨은 위 세 가지 접근법은 서로 다르지만 중국 근현대사 인식 속에 서양중심적인 왜국을 심어주었다는 점에서 공통된다고 본다.

  • 충격-반응 접근법

19세기 20세기에 중국에서 일어난 사건들 중에 서양에 대한 반응이라고 볼 수 없는 사건들이 있다. 하지만 충격-반응 접근법은 그러한 사건들 조차 마치 서양의 반응이었던 것처럼 해석을 조장한다. 혹은 중요하지 않은 사건으로 판단을 내려버린다. 이러한 접근법에서는 서양에 대한 중국의 반응 양식을 부각시키는 경우에 있어서만 중요한 사건인 것이다.

  • 근대화 접근법

이 접근법은 19세기의 시각을 계승한 접근법으로 서양의 제한된 경험에 근거하여 중국사에 그대로 적용시키는 접근법이다. 중국 역사 자체에서 유래하는 물음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서양의 근대 과학이나 산업혁명을 중국이 이룰 수 없었던 이유에 관한 물음이다. 이러한 물음은 '서양 근대의 역사야 말로 당연하고 필연적인 역사'라는 점이 전제되어 있다.

  • 제국주의론 접근법

1960년대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고 많은 미국의 지식인들은 죄책감과 함께 새로운 눈으로 제국주의를 바라보게 된다. 그들은 제국주의야 말로 과거 몇 세기 거쳐 중국과 기타 아시아국가들이 맛본 고난의 근원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또한 미국이 정치적, 도덕적, 문화적으로도 세계에서 가장 우월하다는 명제가 신화였음을 깨닫게 된다. 이 접근법은 중국의 역사가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발전경로를 걷고 있는데 서양 제국주의가 중국이 걷게 될 발전 경로를 방해했다는 함정에 빠진다. 이러한 접근법은 중국이 19-20세기 당했던 일들의 원흉으로 서양을 지목하고 서양을 유해한 존재로 본다.

시기 접근법(쟁점) 비판
2차 대전 이후 충격-반응 접근법
2차 대전 이후 근대화 접근법
1960년대 제국주의와 관련된 접근법

미국학계의 접근법

1. 서양의 충격-중국의 반응[3]

1950, 60년대 미국인들은 '서양의 충격'과 '중국의 반응'이라는 개념에 입각하여 중국의 역사를 해석하는 경향이 강했다. 즉, 19, 20세기 능동적인 역할을 한 것은 서양이며, 중국은 단지 반응적이거나(reactive) 수동적인 역할만 했다는 관점이다. 특히 이러한 접근법을 대변하는 학자가 존 킹 페어뱅크(John K. Fairbank)로 그는 1954년 『서양에 대한 중국의 반응 China's Response to the West』라는 책을 쓰기도 하였다. 중국의 변화는 어느 부분 서양의 충격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중국 자신의 여러 가지 내부 요인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다. 하지만 페어뱅크는 전자만을 강조한다. 또한 19세기 중국에서 서양과 아무런 관련을 가지고 있지 않은 여러 측면들을 단순히 '두르러질 정도의 관성'이라는 말로 일소시켜 버리고 한다. 이러한 접근법은 여전히 교과서 등에 잔존해있다. 다시 말하지만, 코헨은 충경-반응 접근법 자체가 '잘못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당성의 범위가 정해지지 않았다는 점을 비판한다. 그는 뉴턴의 예를 드는데, 과학이 발전하고 그의 법칙 자체는 부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법칙이 한정된 범위에만 적용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해졌다. 청나라 말기 역사의 모든 것은 충격-반응 접근법으로 설명될 수 없다.

충격-반응 접근법의 이론적 문제[4]

충격-반응 접근법에는 여러 이론적인 문제들이 존재한다.

  1. 서양의 다면성과 모순을 무시하기 쉽다
    • 아편전쟁(1840) 당시의 서양과 1920, 30년대의 서양은 같은 근대의 서양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두 개의 서양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존재한다. 서양도 시간이 흐르면 변화한다. 하지만 충격-반응 접근법은 서양의 다면적인 모습과 여러 모순들을 무시하기 쉽다.
  2. 서양이라는 개념의 상대성
    • 우리는 서양과 동양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있다. 하지만 서양이라는 개념 자체가 굉장히 상대적인 개념으로 완벽하게 나뉠 수 없다. 예컨대, 미국과 프랑스 간의 차이는 중국과 서양의 차이만큼이나 클 수도 있다.
  3. 서양의 범위 설정
    • 뉴욕이 모든 서양 문화를 대표하지 않듯, 중국이 받아들인 서양도 중국이 '선택한' 서양의 이미지일 뿐이다. 한 예로, 후스의 '과학과 민주주의'는 서양에서 비주류였던 존 듀이의 이론이었다. 중국이 접촉한 서양은 서양에서도 일부의 그것이다.
  4. 중국의 충격에 대한 서양의 반응이라는 측면
    • 중국인이 서양의 이질성에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중국의 이질성에 대해 서양인이 반응하는 방식에 의해 자유가 된다. 충격-반응 접근법은 중국의 충격에 대한 서양의 반응을 무시한다.
  5. 착종된 사태를 어떻게 분석할 것인가
    • 모든 사상에는 이종교배 현상이 나타난다. 서양의 관념이 전달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국인들에게 이해될 수 있는 형태로 바뀌어 전달되어야 하며 이는 중국인의 언어와 사고 패턴에 의해 여과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원래의 관념의 왜곡은 필연적이다. 홍수전태평천국의 기독교나 무술변법이 도입하고자 하는 서양식의 제도는 본래의 모습에서 멀어져있다. 하지만 충격-반응 접근법은 이러한 착종 현상을 분석하는데 유용하지 못하다. 중국의 반응은 매우 뒤섞인 역사를 설명하는데 편리할 뿐이다.

접근① 19세기의 반란 [5]

19세기는 청나라의 근간을 뒤흔들 정도로 대규모의 반란이 많았던 시기다. 윈난성의 이슬람교도들의 반란(1855 ~1873), 서북부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이슬람 교도들의 반란(1862 ~ 1873), 염군捻军의 반란(1853~1868), 태평천국운동(1850~1864)등이 동시에 일어났다. 물론 그 중에서도 단연 태평천국운동이 가장 파괴력이 강했다. 그리고 유일하게 이 운동만이 서양의 영향을 받은 운동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문제가 발생하는데, 과연 이 태평천국운동이 '서양에 대한 중국의 반응'이라는 틀로 설명하는 것이 유익한가하는 부분이다.
태평천국운동의 성격을 알기 위해서는 운동이 일어난 지역을 살펴보면, 태평천국 운동이 일어난 화남华南지방(광동, 복건 등)은 청 왕조의 지배에 가장 늦게 편입되었으며 떄문에 청왕조의 권력 구조에서 가장 불안정한 부분이었다. 또한 외국무역과 아편전쟁의 파괴적 영향이 가장 심했던 곳이다. 실제로 화남지방의 서양의 충격은 현실적이었으며 강력했고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미국 연구자들이 보기애, 태평천국운동의 가장 혁명적인 (이전의 중국과는 다른)측면은 이데올로기와 조직구조이다. 태평천국의 이데올로기는 복음과 원시 공산주의, 유교적 유토피아, 사회적약자에 대한 배려, 남녀평등(특히 여권신장) 등이 뒤섞인 모습이었으며 이전에는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또한 조직적인 측면에서도 이전과 달랐다. 태평천구그이 조직은 국가가 사람들의 생활을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전면적으로 통제하는 전체주의적 시스템으로 이전의 역사에서는 그 예가 없었다.
서양의 진출이 없었떠라면 태평천국운동의 반란은 다른 성격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패했고, 외국 무역이 중국 남부에 파괴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는 어떤 부분에서는 혼란을 낳은 하나의 요인이다. 또한 태평천국의 지도자중 한명이자 홍수전의 동생인 홍인간은 홍콩에서 서양문화를 체험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위에의 요소를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태평천국의 본질은 어떠한 형태에 있어서건 서양에 대한 반응으로 간주할 수 없다

태평천국 운동은 서양과 대결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중국을 근대화로 이끄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때문에 태평천국의 성격을 '서양 그 자체'나 서양이 낳은 문제에 대처하려는 시도로 파악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비본질적인 측면에 대해서만 예외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1800년대 중기의 반란들은 서양의 충격이 있기 이전부터 존재하던 여러 조건에 대한 반응이었다. 태평천국도 그 중 하나였으며 단지 서양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 달랐다.

오히려 태평천국은 '서양에 대한 중국에 반응'에 영향을 미쳤다. 우선 진압과정에서 증국번이홍장을 위시한 지역권력이나 향신층이 대두하여 지방권력이 커졌고 이러한 권력은 이후 중앙정부의 권력을 약화시켜 서양의 충격에 대해 창조적으로 대응하려는 중앙정부의 발목을 잡았다. 또한 (청나라를 망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지녔던 이 반란들로 인해) 위정자들은 반란의 진압과 방지라는 국내문제는 가장 중요한 사항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는 일본이 서양의 충격에 굉장히 주의를 기울이고 민감하게 반응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중국이 19세기 겪은 역사적 상황에서 볼 때, 국내적 문제야말로 최고로 시급한 일이었다. 메리 라이트Mary C. Wright의 말을 빌리자면, "연안의 5개 항구에 한정되어 있던 외국의 진출은 국부적인 통증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를 두고 중국의 반응이 미지근했던 것을 단지 멍청하다거나 정체성停滞性 등의 본질 탓으로 돌려서는 안된다.

접근② 개혁[6]

일반적으로 19세기에 행해진 청나라의 개혁들을 두고 '서양의 충격이 없었다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나 '서양의 충격과 관련하여서만 의미를 갖는다'라는 관점들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은 옳지 않다. 청나라 말기 일력의 개혁들은 물론 서구의 양향을 받긴했지만 개혁가들의 사상과 행동은 오랜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기도 했다.
이미 아편전쟁 무렵부터 많은이들은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중국이 서양에 대해 중대성을 인식한 것은 1870여년이며 이를 인식한 사람들도 아주 적었다. 위정자들에게는 여전히 국내적인 반란이 가장 큰 관심사였다. 그들은 반란이 없으면 외부의 일들도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해다. 흔히들 19세기의 개혁하면 양무운동(다르게 표현하면 동치중흥)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 개혁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이 60년대에 일어난 개혁은 대체적으로 혁신적이라기 보다는 복고적이었다. 한 예로 과거제도를 들 수 있는데, 과거제도는 서양의 학문을 받아들이거나 과거제도의 내용을 시대에 맞게 전환하려는 시도등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경제활동에 있어서도 상업과 같은 비농업 부분의 경제활동에 대한 과중한 과세에 반대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특히, 동치중흥의 경제사상은 철도나 전신의 도입에 극심한 반대를 하였다. 서양과의 무역에 있어서도 무역을 통한 경제성장은 서양인들의 관념이었을 뿐, 애초에 중국의 위정자들에게 '경제성장'이라는 생각은 그들의 이해를 넘어서는 일이었다.

물론 양무운동 당시의 금릉 기기국과 같은 것을 떠올리며 서양의 것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냐는 물음이 있다. 맞다. 당시의 중국 위정자들이 서양을 모델로 개혁을 필요하다고 인식한 것은 딱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군대의 재편성이다. 여러차례의 전쟁을 겪은 중국 입장에서 서양의 군대 질서과 군사기술의 우월성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동치중흥의 지도자들은 근대적인 무기공장과 조선소를 만들어 힘을 기르고자 하였다. 개혁을 필요로하는 다른 영역은 외교영역이었다. 기존 중국의 외교는 전통적으로 조공체제에 기반해 있었다. 하지만 중국은 총리각국사무아문(총리아문)을 만들어 특히 서양국가와의 외교 관계를 다루었다. 하지만 이 두가지 모두를 '혁신'과 묶기에는 몇몇 한계점이 존재한다. 우선, 중국이 전쟁을 치루는 방식을 배워온 것은 오랜 역사에서 오랑캐의 그것을 배운것과 일맥상통한다. 또한 총리아문은 어디까지나 임시적인 기구였다. 공친왕은 '여러 국가들간의 교섭이 번거롭지 않게되면 총리아문은 즉시 폐지되고.....'라고 명시하였다. 이는 혁신을 싫어하는 그 시대의 풍조를 보여준다.

동치중흥이라는 중국의 개혁에 대해 우리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결론은 그 개혁이 실패했다는 것이다. 메리 라이트는 이를 '근대화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유교 질서의 안정을 위해 필요한 것과 서로 저촉되었기 때문이다'라고 매듭지었다. 하지만 코헨은 이에 두 가지의 의문을 제기한다. 첫째는 동치중흥은 실제로 실패했는가? 두 번째는 설령 동치중흥이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과연 메리 라이트가 말하고 있는 근대화에 요청되는 요소와 모순된다는 것이 실패의 원인이었는가?이다. 상기하였듯, 동치중흥에 있어서 서양과 관련이 깊은 것은 군사, 외교, 상업의 영역이었고, 메리라이트에게는 이러한 개혁들이 바로 동치중흥이었다. 재미있는 점은, 동치중흥에서 가장 쓰라린 좌절감을 맛본 부분은 군사, 외교 부분이 아닌 강력한 정부, 지방 지배의 회복 부분이었다. 이런 부분에서는 서양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 부분에서의 개혁의 좌절은 근대화하는 것과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 중국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는 것은 중국사회를 근대화 하는 것과 같으며 그러한 근본적 변혁은 서양으로부터 이념이나 제도 모델을 차용하지 않고서는 유교의 지적 세계 자체 내에서는 생겨날 수 없다?

이는 대부분의 미국 역사학자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1860년대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사상가인 풍계분의 사례는 이를 반박한다. 그는 청의 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개혁안을 내놓았는데 (예컨대, 서리를 폐지하고 생원을 등용할 것, 향촌의 우두머리를 투표로 선출할 것. 등) 이러한 개혁안에는 서양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 태평천국운동의 이데올로기가 반反유교적 성격을 띠고 있지 않았더라면 반만 봉기를 지지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서 한인 지식인들과 관료들이 청 왕조에 가담하게 되었다)?

코헨이 보기에 이 주장은 검증이 되지 않은 애매한 가설들위에 확립되어 있다

  1. 한인 엘리트들이 만주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원심력이 청 왕조 수립으로부터 200년이 지난 당시에도 여전히 강했다
  2. 태평천국의 이데올로기가 유교의 교의와 대립되지 않았더라면 많은 한인 관료들을 태평천국의 기치 아래로 달려갔을 것이다
  3. 한인 엘리트들이 태평천국의 이데올로기를 부정한 이유는 그것이 서양의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4. 동시대 중국인들에게 태평천국의 이데올로기적 위협은 물리적 파괴력보다 더 위험한 것이었다.

하지만 코헨은 이러한 가설들이 입증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시간이 흘러 19세기 말이되면 서양의 선례를 모델로 한 변혁이 필요하다는 강한 자각이 생겨나게 된다. 기존의 내세웠던 중체서용中体西用이 가진 '체'와 '용'은 어느덧 제로섬게임과 같이 변해버린다. 용用을 받아들여 공업화를 실행하게 되면 연이어 근대적 교육을 실시해야하는데, 근대 교육의 확대는 필연적으로 체体를 동요시켰던 것이다. 이후 옌푸나 왕도, 캉유웨를 비롯한 학자들의 다양한 '개혁정당화론'이 대두하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보니 결국은 아무것도 이룬게 없었다. 애초에 개혁이라는 황제의 명령이 실행된 것은 극히 제한적인 소수의 성省에 지나지 않았으며, 변법을 지지하는 후난성만이 눈에 띠었다. 이렇듯 당시의 관료들은 개혁에 크게 저항하였다.

접근③ 반동[7]

청말의 개혁은 엘리트 내부의 현상이었다. 하지만 반동은 그렇지 않았다.

접근법의 수정

2. 전통과 근대성

3. 제국주의와 혁명

비판과 한계

비판

물론, 폴 코헨의 관점에 대해 많은 역사학자들이 비판을 가해왔다. 주요 비판은 다음과 같다.

  • 마이클 개스터(Michael Gaster)

"단일적이고 통합된 중국이라는 옛 그림 대신 다양한 중국이라는 새 그림을 수용하기 위해서 어떤 분석적 도구를 개발하고 있는가"

  • 대니스 그래플린(Dennis Grafflin)

"일단 중국을 시간, 공간, 문화, 사회 등에 따라 해체해버린다면, 코헨이 요구하는 중국 자신에 입각한 역사 서술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중국을 다시 묶어야 하지 않을까?"

  • 필자의 생각

"기존의 주류 관점에서 탈피하여 접근한다는 점에는 의의가 있지만, '중국 자신에 입각한 접근법'이 에서의 '중국'은 어떤 것을 이야기 하는가. 광대한 영토의 중국은 지역마다 기억하는 역사가 다를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은 누구를 대표하게 되는가. 지역이나 민족을 고려하여 볼 때, '중국'은 베이징을 의미하는가? 한족을 의미하는가? "

코헨의 반론

"2차 대전이후, 20년동안 인문학 전체에서는 중국을 일반화하는 작업에 지나치게 치중되어 있었다. 이는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시도이다."
"물론 중국에서의 이질적인 성격의 민족들에게는 중국 자신에 입각한 접근법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하지만 좀 더 동화된 경우에는 들어맞을 것이다. 또한 이 접근법의 핵심적인 특징은, 중국 세계를 보다 작고, 보다 손쉽게 처리할 수 있는 부분적인 단위들로 나누고, 또 그렇게 해서 종교, 인종, 그리고 사회적 차이를 포함한 지역적인 변형의 전체적인 범주를 더 긴밀하고 용이하게 탐구함으로써 중국의 방대한 다양성과 복합성에 적절하게 대처하려는 것이다.[8]" "모든 사례에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접근법은 중국에 관한 역사적인 연구의 상당히 실질적인 부분에 적용될 수 있으며, 때문에 여전히 유용하다고 생각한다.[9] "

한계

중국 자신에 입각한 접근법이 가지는 한계는 무엇보다 이러한 접근법으로 설명되지 않는 역사적 사실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선 중국사를 넘어서는 것들, 예컨대 주변 국가와의 관계사나 비교사 등은 단순히 중국 자신에 입각한 접근법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다. 또한 한족이 아닌 그룹인 소수민족에 관한 연구 또한 중국 자신에 입각한 분석으로 잘 설명되지 않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관련문서

  • 폴.A코헨, 『학문의 제국주의』, p. 55
  • 폴.A 코헨, 『학문의 제국주의』, pp. 88~98
  • 폴.A 코헨, 『학문의 제국주의』, pp. 102~171
  • 폴.A 코헨, 『학문의 제국주의』, pp. 106~112
  • 폴.A 코헨, 『학문의 제국주의』, pp. 112~119
  • 폴.A 코헨, 『학문의 제국주의』, pp. 119~145
  • 폴.A 코헨, 『학문의 제국주의』, pp. 145~162
  • 폴.A 코헨, 『학문의 제국주의』, p.64
  • 위에 책, p.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