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장
이홍장(李鴻章) | |
---|---|
| |
출생 |
1823년 |
사망 |
1901년11월7일 |
생존시기 | 청나라 |
목차
개요
이홍장은 1823년에 태어나 1901년 11월 7일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는 정치가, 군사가, 외교가로서 태평천국의 난 진압, 양무운동 전개 등을 하였으며 각국과의 조약 체결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활동과 관련해서는 그의 능력을 인정하고 긍정적 평가가 있는 부분도 있으나 그렇지 않고 그의 책임을 묻는 부분도 존재한다.
생애
이홍장은 1823년 청나라 도광제 때 안휘성 합비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관료집안이었으며, 이홍장의 부친(이문안)은 어릴 때부터 이홍장을 교육시켰다. 1847년, 그는 진사에 합격하여 한림원[1]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우공으로 선발된 후 베이징으로 옮겨와 거주하였는데, 이때 증국번에게 재능을 인정받으며 그의 제자가 되어 유교와 학문을 배웠다.[2] 또한, 이후 그는 여러 주요 관직을 역임하였다.
태평천국의 난과 염군의 난 진압
홍수전에 의해 태평천국의 난이 발생하여 중국의 형세가 불안정한 상황에서 이 난의 진압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먼저 안후이성 순무 ‘푸지’를 지원하였고 1855년, 직접 푸지의 부대를 지휘하여 한산현과 차오현을 빼앗아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그는 증국번이 지휘했던 상군의 휘하에서 막료로 활동하며 군사전략에 대한 지식을 쌓았고, 1862년 증국번의 추천으로 장쑤성에 파견되었으며 장쑤성 순무로 발탁이 되어 회군[3]을 조직해 태평천국군이 쇄도하였던 상하이를 체계적인 지휘통솔과 전략으로 방어하는데 성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1863년에는 소주성을, 1864년에는 태평천국군의 근거지인 난징을 공격하여 12년간의 태평천국의 난을 완전히 진압하는 공을 세웠다.
태평천국과 비슷한 시기 화북지역에서 시작된 염군의 난에서도 이홍장의 활약이 있었다. 조정에서는 이 난을 진압하고자 여러 장수들을 파견했음에도 성과가 없었다. 이홍장이 임무를 맡았을 때, 그는 여러 부대와 함께 염군을 겹겹이 포위하는 방법 등을 통해 1868년 모든 염군을 완전히 소탕하였다. 반란의 진압에서 지휘관으로 힘쓰며 중국 내의 대부분의 반란을 진압하였고 그의 군사적 업적을 조정에서 인정받게 되었다.[4]
자강운동(양무운동)전개와 갑오전쟁(청일전쟁)
19세기 후반, 청나라 말기에 관료들의 주도로 이루어졌던 군사 중심의 근대화 운동인 자강운동(양무운동)의 대표적인 인물로 이홍장이 있다. 그는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하면서 휘하에 두었던 회군을 바탕으로 영국과 러시아 등의 지지를 받으면서 군사공업을 비롯한 각종 근대공업의 건설을 추진하였다. 1860년대에는 강력한 군대를 만드는데 힘을 써 군사무기를 개발하고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중국의 근대화를 앞당기고자 상해에 서구식 무기 제조공장을 설립하는 등 군수업체들을 세웠다. 또한, 1870년대에는 군사력은 경제력을 기초로 한다는 전제에서 부유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 윤선초상국과 같은 근대적 민영기업을 설립하였으나 이 기업들은 관료와 정부와 연결이 되어 공업의 자립적 성장의 어려움 등 한계가 존재하였다. 이홍장은 이뿐만 아니라 열강의 위협이 해상으로부터 온다고 인식하여 근대화된 해군의 건설을 위해 노력하였고 북양해군을 창설하였다. 창설 당시 북양해군은 최강의 해군력을 자랑하였지만, 청나라 조정이 서태후의 여름 궁전 건설의 경비조달을 이유로 대포구입, 전함 구입 등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고 이는 북양해군의 군사력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러한 타격은 갑오전쟁(청일전쟁)에서 드러나게 되었다. 1894년 갑오전쟁이 발발하자, 황해해전과 평양전투에서 패배하며 북양해군과 회군을 모두 잃게 되었고 일본과 배상금과 랴오둥 반도 할양 등의 내용을 담은 강화조약인‘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로써 그가 노력했던 북양함대 건설 등의 활동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으며, 이홍장은 큰 비판을 받으며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의 직무에서 해임되게 된다.[5]
말년과 신축조약 체결
갑오전쟁 후 관직에서 물러난 이홍장은 수도를 떠나 생활하고 있었으나, 일본이 랴오둥 반도를 차지하자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는 공동으로 삼국간섭을 전개하여 일본이 랴오둥 반도를 청에게 되돌려주게 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때 반환과 관련해 일본과 합의할 때 청 정부는 이홍장을 다시 불러 합의하게 하였고 랴오둥반도를 되찾게 되었다. 그리고 반환에 도움을 준 러시아는 간섭의 보상으로 1896년 청러밀약을 체결하여 만주철도 부설권을 내주는 등 여러 이권을 러시아에 내주게 되었다. 1898년에는 양광총독에 임명이 되며 황허치수 등의 일을 하였다.
1900년 의화단 사태가 발발하여 청 조정이 어찌할 수 없게 되자 다시 이홍장을 조정 최고의 직위인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으로 임명하여 서구 연합군들이 북경을 약탈하였다. 이미 피신해있던 서태후는 이홍장에게 명을 내려 북경으로 가 강화조약을 맺도록 하였고 이홍장은 북경으로 갔다. 1901년 9월, 경친왕 혁광과 이홍장은 11개 열강과 신축조약을 체결하였고 이는 징벌의 의미가 강하였고 불평등 조약이었다. 몸이 좋지 않았던 이홍장은 조약 체결 후 1901년 11월 7일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6]
평가[7]
이홍장의 활동에 대한 평가는 아래와 같다.
(량치차오(양계초)의 이홍장 평전에서 나온 내용을 중심으로 작성하였다)
군사가로서 이홍장
태평천국의 난과 염군의 난의 진압에 참여하여 성과를 거두면서 군사가로서의 공을 인정받고 지휘 통솔 능력을 인정받았다. 또한, 치밀하게 계획을 세운 뒤 행동으로 옮겼기에 적에 대한 이해와 판단이 정확하였다. 증국번의 군대에 있으면서 보고 배운 것이 있어 맡은 일을 성실히 하였고 부하들을 대할 때도 항상 그들을 아꼈고 강한 정신과 사심없는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여 부하들을 단결시켰다.
하지만, 갑오전쟁에서 패배하면서 그의 군사가로서 명예와 명성에 큰 흠집이 났고,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물론 갑오전쟁의 패배를 그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 없으나 그에게 확실한 책임이 있는 부분이 있다. 그의 책임으로는 군대의 군기를 제대로 다잡지 못하고 관리를 잘 못한 점, 평양전투에서는 부대를 책임질 지휘관이 없었다는 점, 적군을 두려워하여 적군의 공격만 기다릴 뿐 먼저 적군을 제압하러 나서지 않았다는 점 등이 있다.
이홍장이 군사가로서 보여준 능력이 분명있으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부분 역시 존재한다.
외교가로서 이홍장
이홍장은 외교가로서의 직무도 맡아 처리하며 외국의 인사들에게는 중국을 대표하는 인물이자 명망이 높았다. 그는 시모노세키조약, 중러밀약, 신축조약과 같은 강화조약을 맺었다. 시모노세키조약에 대해서는 굴욕적인 조약이며 이홍장의 잘못이라고 하는 의견도 있으나 신속히 조약이 체결이 되며 이홍장이 그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중러밀약에 대해서는 이홍장의 실수라고 한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를 포함하여 다른 서구 세력에 여러 이권을 내주게 되어고 중국 땅의 일부를 다른 나라에 내어주게 되었기 때문이다. 신축조약체결 때는 나라를 팔아넘겼다는 비판이 있기도 하나 청국의 힘이 없어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기도 한다.[8]
정리하면, 리홍장의 외교술을 주로 다른 국가와 연합해 또 다른 국가와 균형을 이루는 것이었는데 이로 인해 중국이 잃는 것이 더 많았고 중국에 곤란한 문제들이 발생하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청 정부가 내정을 제대로 하지 않아 외교를 제대로 처리할 수 없었다고 보기도 한다.
양무운동에서의 이홍장
양무운동에서 이홍장은 군사관련 업무와 상업관련 업무를 통해 근대화를 이루고자 하였다. 하지만, 갑오전쟁의 패배를 통해 자강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볼 수 있다. 실패원인에는 그를 방해했던 환경, 무리들도 있으나 이홍장의 책임도 있는데, 그의 책임은 사람들을 제대로 못 썼고 직책에 어울리는 사람인지를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채 임무를 맡겼다는 점이고 병사들을 훈련시킬 줄만 알고 어떻게 모이는지는 모르는 등 지식이 부족한 것도 있다. 또한 국가의 상법을 바꾸지 않은 채 그대로 관독상판의 방식으로 기업이 운영되어 상인의 권리 등이 보호되지 못하고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과 같은 문제가 발생하여 상업관련에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양무운동을 통해 이홍장을 통찰력이 있다고도 할 수 있으나 그는 국가 사무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였고 중국의 정치제도, 전통 등이 외국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하고 서양 국가가 부강한 이유를 기계 등 기술적인 면만으로 살펴보는 등 어떤 면에서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시국을 살피지 못한 부분이 있다. 이것이 양무운동에 대한 그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양무운동을 실패한 운동으로 보고 이에 대한 비판이 있기도 하지만, 강대국으로 성장한 중국은 양무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이홍장을 “태평천국의 난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중국을 강대국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한 애국자이자 민족주의 정치가, 이이제이로 열강을 견제하려 했던 외교가로 재평가”되고 있기도 하다.
이홍장에 대해 정리하면, 이홍장은 중국 근대사와 관계가 깊은 인물이자 풍운아이며 시대가 만든 영웅이다. 그는 한편으로는 정치를 함에 있어 부적절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고 세계의 대세를 통찰하지 못하였으며 정치의 근본을 이해하지 못하는 점도 있었다. 또한, 자강운동에서는 서양의 겉모습만 배우는데 만족하고 문제의 근원을 찾는 것 잊었다고 할 수 있다. 이홍장의 행위에는 이홍장의 책임이 분명히 있으나 청 정부 등의 상황을 보았을 때 이홍장의 책임으로만 돌리기 어려운 부분도 존재한다.
참고문헌
량치차오, 『리훙장 평전』, 박희성•문세나 옮김, 프리스마, 2013.
소준섭, 『중국사 인물 열전』, 현대지성, 2018.
찌아원홍, 『중국 인물 열전』, 성연진 옮김, 2010.
존 킹 페어뱅크, 『신중국사』, 김형종•신성곤 옮김, 수정증보판, 까치, 2005.
한림원
각주
- ↑ 한림원, 중국의 관청
- ↑ 량치차오, 『리훙장 평전』, 박희성•문세나 옮김, 프리스마, 2013, p.57, p.64./소준섭, 『중국사 인물 열전』, 현대지성, 2018, p.425.
- ↑ 청나라 말기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증국번의 지시로 그의 제자였던 이홍장이 조직한 부대(량치차오,『리훙장 평전』, 박희성•문세나 옮김, 프리스마, 2013, p.66.)
- ↑ 량치차오, 『리훙장 평전』, 박희성•문세나 옮김, 프리스마, 2013, pp.64-65, p.84. pp.119-131./소준섭, 『중국사 인물 열전』, 현대지성, 2018, pp.425-426./찌아원홍, 『중국 인물 열전』, 성연진 옮김, 2010, p.318.
- ↑ 량치차오, 『리훙장 평전』, 박희성•문세나 옮김, 프리스마, 2013, p.147./소준섭, 『중국사 인물 열전』, 현대지성, 2018, pp.426-429./찌아원홍, 『중국 인물 열전』, 성연진 옮김, 2010, pp.318-322./존 킹 페어뱅크, 『신중국사』, 김형종•신성곤 옮김, 수정증보판, 까치, 2005, pp.269-271.
- ↑ 찌아원홍, 『중국 인물 열전』, 성연진 옮김, 2010, pp.325-327./존 킹 페어뱅크, 『신중국사』, 김형종•신성곤 옮김, 수정증보판, 까치, 2005, p.284./소준섭, 『중국사 인물 열전』, 현대지성, 2018, p.429-430.
- ↑ 량치차오,『리훙장 평전』, 박희성•문세나 옮김, 프리스마, 2013. 아래의 내용은 이를 참고하여 작성하였다.
- ↑ 소준섭, 『중국사 인물 열전』, 현대지성, 2018, p.430./찌아원홍,중국 인물 열전』, 성연진 옮김, 2010, p.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