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태후 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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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dog (토론 | 기여)님의 2016년 6월 18일 (토) 01:40 판 (『사기』에 나타난 여태후의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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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의에 앞서, 여태후에 대한 대중적인 인식은 앞서 살펴봤듯이 ‘잔인한 악녀’라는 부정적인 관점이 주를 이룬다. 여태후라는 인물이 한 업적이 무시 못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편협한 시각이라 판단, 그녀에 대한 변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위 항목을 만들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무리 여태후를 변호하는 입장이라도 분명히 해야 할 점은 그녀의 잔혹한 행동은 인간의 도덕성에 극히 위배된 것이기 때문에, 그녀의 행동은 정당화 될 수 없으며, 본인이 변호하는 것은 사마천사기를 근거로 하여 그녀가 그런 잔혹한 행동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제시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반고와 사마천의 차이

사마천의 『사기』가 위 텍스트의 논리에 주된 논리가 되는 이유는 사마천이 살았던 한나라 (무제)라는 나라의 이데올로기가 남성 위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한나라(비록 시기는 다르지만)의 학자 반고와 여후를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가 존재하고,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사마천이 여후를 긍정하는 모습도 보인다.
우선, 사마천의 대표적인『사기』와 반고의『한서』의 저술 순서에서 사마천이 반고에 비해 여후를 긍정한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사마천의『사기』의 저술 순서가 유방- 여후 - 혜제 순인 반면, 반고의 『한서』의 저술 순서가 유방 - 혜제 - 여후라는 점을 고려해 보자. 이는 사마천이 생각하는 여후가 반고가 바라보는 여후보다 지위가 높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사마천이 여태후라는 명칭을 여후에게 부여한 반면 반고는 그녀를 <고후>라는 명칭을 부여한 점을 보자. 이는 사마천이 여후의 지위를 태후까지 격상시켰지만, 반고는 그저 여후에게 <고조의 부인>이라는 타이틀을 부여함으로써 그녀의 지위를 상대적으로 낮췄다. 반고의 『한서』가 『사기』보다 후대에 쓰였다는 점과 반고의『한서』저술 방식이 사마천의 『사기』저술 방식과 유사하다는 점을 보면, 반고는 사마천의 사기를 어느 정도 참고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반고에 비해 사마천은 여후를 긍정한 것이다.

『사기』에 나타난 여태후의 상황과 이를 통한 변호

그리고 앞서 제시했듯이 사마천은 보는 관점에 따라서 여후를 긍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여태후 본기』는 “여태후는 고조가 미천한 신분이었을 때 취한 아내다.”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여기서 ‘미천한’이라는 용어에 집중할 필요가 있는데, 당시 유방은 진(秦)의 사수(泗水) 정장(亭長)이라는 신분이었다. 여기서 정장이란 그리 높은 신분이 아니며, 이는 여후의 아버지인 여공이 유명한 관상가이고 부유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애초부터 엄청난 계층 차이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였다. 하지만 그녀는 유방이 귀한 관상이라는 아버지의 말을 믿고 그에게 최선을 다해 내조한다. 우선 그가 패 지역에서 반진 대열에 합류하기 전 그녀는 2명의 자식이 있는 당시의 일반적인 여성에 불과했다. 그러나 유방이 반진 대열에 합류하자, 그녀는 집 안의 여성이 아닌 집 ‘밖’의 여성이 되었다. 유방이 패(沛)지역, 망산(芒山)과 탕산(碭山) 지역에서 자신의 기회를 노리고 있을 때 유방을 찾아가 보필하였고, 『史記』卷8,「高祖本紀」) 유방(劉邦)이 수배자였던 시절에는 그녀가 감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史記』卷96,「張丞相列傳」) 초한(楚漢)전쟁 중에는 유방(劉邦)이 팽성(彭城)에서 항우(項羽) 군대에게 대패하였을 때 그녀는 초(楚)나라 군대에게 체포되어 그 후 초한(楚漢)전쟁이 끝나기 직전까지 2년 5개월 동안 초(楚)의 포로생활을 하다 석방되기도 하였다.(『史記』 卷8,「高祖本{紀」) 이렇게 유방을 집 밖에서 내조한 것은 당대 여성들처럼 집안일만 하는 것과는 다른, 당대의 신여성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내조는 유방이 한을 건국할 때 그 역할이 더 커진다. (여후의 큰오빠 주여후는 한 건국을 위해 장렬히 전사했다.)한(漢) 제국이 건립되어 유방(劉邦)이 황제가 되면서 그녀는 황후가 되었는데, 한나라의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손에 피를 묻힌다. 제왕(齊王) 한신(韓信)과 양왕(梁王) 팽월(彭越)을 주살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이 그 예이다. (『史記』卷92 ,「淮陰侯列傳」, 『史記』卷90,「魏豹彭越列傳」)

하지만 통일 왕국을 세운 기쁨은 잠시, 여후에게는 큰 위기가 닥친다. 척부인이 여후 자신과 아들인 혜제의 지위까지 위협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 미색이 쇠한 유방의 옆자리를 척부인이 꿰차고, 어느 순간부터는 혜제가 아닌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책봉하라고 유방에게 말하는 것이다. 이를 안 여후는 극도의 두려움과 배신감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혜제가 태자의 자리를 뺏기고 척부인이 세력을 등에 업게 된다면 여씨 일가는 모두 숙청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이라는 유방과 대제국을 건설하며 미천한 유방을 최선을 다해 내조하고 정치 싸움판에 같이 필사적으로 몸을 바친, 정치적 파트너라고 볼 수 있는 여후를 유방은 버린 것이다.(또한 사기에 따르면 고조는 수레에서 도망을 치던 중 여후의 아이들을 여러 차례 버린 바 있다.) 따라서 여후는 더 이상 유방에게 기댈 수 없었으며, 신하들과 계책을 세워 자신과 혜제의 정치적 안정성을 찾는다.

유방이 죽고 난 후, 여후가 일족의 숨통을 보존하기 위하여, 대의적으로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후는 자신의 안위를 위협할 수 있는 척부인과 척부인의 아들을 숙청한다. 이 과정이 인체 사건이다. 이는 분명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만약 여후가 척부인과 그녀의 아들을 숙청치 않았더라면, 여후가 죽고 난 후 여씨 일가가 역으로 몰살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또한 척부인을 잔인한 방식으로 숙청함으로써 다른 제후들에게 암암리에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이런 메시지가 가장 잘 전달된 사례가 바로 제왕과 있었던 일이다. 『사기』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혜제와 제왕이 여태후 앞에서 술을 마셨는데, 제왕이 형이기 때문에 일반 평민 집안의 예절에 따라서 그에게 윗자리에 앉기를 청했다. 여후는 매우 화가 나서 독주 두 잔을 따라 제왕 앞에 놓게 하고 제왕으로 하여금 자기에게 축수를 올리도록 하였다. (중략) 물어보고서 제왕은 그것이 독주인 줄 알았다. 제왕은 두려워하며, 성양군을 태후에게 바치고 공주를 높여서 왕태후로 칭하니 여후는 기뻐하며 이를 받아들였다.

척부인의 사례와 제왕의 사례는 여후가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혹은 흘릴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것이 실제 역사에 기록된 것인데, 기록되지 않은 역사에는 얼마나 더 많은 피가 있을지는 의문이다. 여후가 한 행위는 물론 반인도적인 것이지만, 그녀가 이런 일을 일으킨 것은 그 이유가 있다. 바로 ‘혜제의 유약함 때문이다.’ 혜제가 유약하다는 것은 고조가 혜제가 어릴 때부터 알고 있음이 분명하다. 유방은 “유약하며 나를 닮지 않았다.”라고 혜제의 유약함을 말한 바 있다. 또한 그가 한을 세우기 이전 수레에 몸을 맡겨 도망갔을 때, 수번의 시도로 자신의 자식들을 땅에 떨어트리는데 그가 바로 혜제이다. 당시 혜제의 나이를 짐작할 순 없으나, 이는 혜제가 하는 행동이 유방의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의 “유약하다.”라는 말을 비추어 봤을 때, 왕의 재목으로 보이지 않은 인물임에 분명하다. 이는 척부인의 인체 사건 이후 명확해진다. 사마천에 따르면, 척부인의 인체 모습을 본 혜제는 정사에 뜻을 잃고 주색에 빠져 지내다가 7년 뒤에 죽는다. 물론 인체의 모습을 본 누구든지 정상적인 생활은 못할 상황이 크지만, 그가 이를 보았을 때, 정말 인도적인 차원에서 충격을 느꼈다면 자결을 하거나 어머니인 여후의 잘못을 빌러 다니거나 혹은 종교, 철학에 심취해야지 그냥 주색에 빠졌다는 것은 혜제가 유약하다는 점을 크게 알 수 있다.

혜제가 죽고 난 이후, 그녀는 자신의 후계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 한다. 이것이 바로 조왕과 양왕의 사례이다.

태후는 조왕 유우를 소환했다. 유우는 여씨 일족의 여자를 왕후로 삼았으나 총애하지 않고, 다른 희첩을 사랑했으므로 여씨 여자는 질투하여 화를 내고 태후에게 간 것이었다. 그리고는 태후에게 유우가 “태후가 죽은 뒤에 반드시 여씨를 주벌할 것이오.”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모함했다. 태후는 이 말을 듣고 그를 포위하도록 하고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 그는 평민의 예식으로 백성들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양왕 유희는 조왕이 되었으나 즐겁지 않았다, 태후는 여산의 딸을 조왕의 왕후로 삼았다. 왕후를 수행한 관원은 모두 여씨 일족이었는데, 전권을 휘두르며 조왕의 거동을 은밀히 감시햇으므로 조왕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었다. 또한 왕후는 사람을 시켜 양왕이 총애하는 희첩을 독살하였다. 왕은 비통해하며 자결했다.

그녀가 이토록 후계를 찾기 위해 노력한 것은 “왕은 유씨에서 찾으라.”라는 고조의 말이 당대에 뿌리 깊게 박혀 있었고, 이를 어기게 되면 그 정통성에서 논란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씨 일가의 생존(한과 흉노 간의 화친정책에서 알 수 있듯이 장공주를 흉노로 출가시키려는 유방에게 극도로 반대의 의사를 표하는데, 이 또한 자신 일족의 후사를 위해서이다.)을 위해서는 유씨들에 대한 검열(그들이 여씨 일가를 유지시킬 수 있는지)이 필요했고, 수단이 다소 잔혹하지만 여후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