管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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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중은 본래 제나라 환공이 즉위하기 전에 일어났던 권력 투쟁에서 환공의 형인 의 편에 섰으나 패하여 나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친우였던 포숙아가 환공에게 제안하여 목숨을 부지하고 기용되어, 국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여기서 유명한 고사성어 ‘관포지교(管鮑之交)’가 유래하게 된다. 관중은 “나를 낳아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것은 포숙아”라고 말하며 자신들의 우정에 대해 소회한다.

사마천은 이러한 사건을 관중의 현명함보다는 포숙아의 사람 보는 능력이 더 탁월하다고 평가한다. 같이 규 공자의 편에 섰던 소흘은 자결하였으나 환공의 편에 서게 된 것을 사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당화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규 공자가 패하자, 소홀은 죽고 나는 붙잡혀 굴욕을 당할 때에도 포숙아가 나를 치욕을 모르는 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내가 사소한 일에는 치욕을 느끼지 않으나 천하에 공명을 날리지 못하는 것을 치욕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무작정 주군에게 충성하기 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수완을 믿고 자신이 따르는 주군을 스스로 춘추전국시대패자로 만들겠다는 자신감과 야망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자신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오판을 포숙아의 도움으로 넘긴 관중은 환공을 도와 군사력을 늘리고 상업과 수공업의 육성이라는 현실적인 정책으로 부국강병을 꾀하였다. 이러한 현실적인 정책은 사기에 기술되어 있는 관중이 겪었던 좌절에서 비롯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상인으로서도, 관료로서도, 군인으로서도 실패했던 관중은 오히려 자신에게 기회가 다가왔을 때 현실적인 감각으로 자신의 성공을 다지는 기반이 되었던 셈이다.

외교적으로는 ‘규구의 회맹’을 시작으로 다른 국가의 제후와 아홉 번 회맹하여 환공에 대한 제후의 신뢰를 얻게 하였으며 결정적으로 환공을 패자로 올려놓은 사건이 되었다. 특히 앞에서 언급했던 현실주의적인 면모는 “주는 것이 취하는 것임을 아는 것이 정치의 보배”라고 말하며 강자란 무릇 베풀어야 한다는 논리를 전개한다. 특히 사마천은 관중이 가지고 있었던 ‘민중’의 개념에 집중하며 그의 정치철학에 대해 잘 나타내고 있다. 관중은 정책을 입안할 때 “민중이 원하는 것은 원하는 대로 베풀어 주고 민중이 반대하는 것은 그들의 뜻대로 제거해주었다”.

이렇듯 관중은 현실적인 감각으로 자신만의 정치를 펴나가 자신이 따르는 위정자 제 환공을 춘추오패로 올려놓았다. 민중의 실질적인 삶을 꿰뚫어 보며 그들을 위하고 ‘주는 것이 정치’라는 신념을 바탕으로 외교정책과 정치를 이끌어 나간 그는 학자적인 면모를 갖춘 동시에 성공한 사상가라고 할 수 있겠다. 이전까지 백성이란 그저 위정자들이 책임져야 할 것이었다면, 관중 대에 와서야 비로소 백성들의 필요성을 깨닫고 그들을 위하는 정치를 펴야만 부국강병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등장했다.

춘추전국시대의 주류적인 생각을 깨고, 지식인으로서 맹목적인 주종관계를 따르기 보다는 자신의 야망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고 자신만의 정치철학을 올곧게 실현해 나간 관중. 그야 말로 제자백가의 도래라는 포문을 연 중국 최초의 사상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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