車
語源
車(거)자가 가리키는 것은 육지 위로 바퀴 있는 운송수단이다.
갑골문과 금문의 車(거)자는 수레, 바퀴, 굴대, 끌채, 기울대, 멍에가 완비된 마차의 모양이다.
소전의 車(거)자는 수레, 바퀴, 굴대가 있는 간략화 된 글자이다. 車(거)자가 부수인 글자들은 대부분 수레와 연관 있는데, 예를 들면 軌(바퀴자국 궤), 輪(바퀴 륜), 轉(구를 전), 載(실을 재), 軍(군사 군)등 이다.
[车水马龙]: 수레가 매우 많아서 왕래가 끊이지 않는다.
[车载斗量]: 수량이 매우 많다. 뜻밖이지 않는 것을 나타낸다.
文化
<차(車) - 오늘날과도 유사한 전차, 수레>
‘전차, 수레’라는 뜻의 ‘차(車)’자는 갑골문과 금문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글자이다. 사냥과 정벌은 국가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기에 사람들은 (점을 쳐서) 언제나 조상들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물었다.[1]
갑골문의 그림을 보면 말 두 마리가 수레의 끌채에 단단히 고정되도록 했다는 증거를 살펴볼 수 있다. 사람들은 긴 고삐로 말을 수레 굴레에 고정시켰다. 놀라운 것은, 시골에서 채소나 나무, 벽돌 등을 운송하는 나귀나 노새 수레가 오늘날에도 거의 유사한 원리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이다.[2]
청동기시대에 북쪽과 서쪽의 적들을 정벌하기 위한 전차부대의 높다란 수레바퀴가 쿵쿵거리며 지나가는 장면은, 평온한 삶을 살았던 시골사람들에게 분명 대단한 구경거리였을 것이다. 갑골문의 모습을 보면, 초기 이 글자를 만든 사람들의 관심이 ‘바퀴’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갑골문의 복사에 따르면 기원전 13세기 초, 상나라 무정왕 때에 군사가 5000여 명에 이르렀다. 한 번 (전쟁에서) 포로 3만여 명을 사로잡기도 했는데, 이들은 이후 조상의 제사와 통치자들의 순장 혹은 새 궁전의 개막식에 이용됐다. 600명이 이용된 적도 있고, 800명이 이용된 적도 있다.
주나라 후기에 이르러 쇠뇌가 가장 중요한 무기가 되면서 활과 화살의 중요성은 점점 퇴색됐다. 쇠뇌는 시위를 팽팽히 당길 때 고정된 자리가 필요했기 때문에, 전차 역시 군사적 의미를 상실하게 됐다.[3]
그래서 수레는 사람과 상품을 운송하는 평범한 기능만을 하게 됐다. 현대 지상전에서는 ‘전차’ 및 기계화보병 부대가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웬만한 개인 화기로는 끄떡하지 않는 철갑의 전차와 기계화보병 부대는 위력적인 대포 등 우수한 화력을 지니고 있고 전차 뒤로 보병들이 전술 행군을 할 수 있도록 전략적 역할을 하고 있다.
고대 육상운송의 일반적인 수단은 수레였다. 수레는 무거운 짐을 먼 거리까지 운반할 수 있었기 때문에,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과 교역을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바퀴 달린 수레는 비록 중요한 발명품이었지만, 이를 만드는 데에는 많은 돈이 필요했으므로, 일반인은 거의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수레는 신분의 상징이 되었다.
수레는 중국보다 천 년 일찍 즉 약 5천 년 전에 근동지역에서 먼저 발명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황제가 수레를 발명하였기 때문에, 헌원씨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황제가 북두거라고 불리는 수레를 타고 세상을 두루 살펴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회남자》<설산> 편에 황제는 떨어지는 낙엽이 빙빙 도는 것을 보고, 수레의 발명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고 언급되어 있다. 도자기를 만들 때 사용되는 녹로(轆轤)의 흔적이 앙소도기에서 발견되는데, 수레 바퀴는 이러한 회전판을 응용 발전시킨 것이다. 아마 황제시대에 이미 손으로 끄는 수레가 사용되었을 것이며, 얼마 후에 소로 대치되었으며 그 후 하나라 때에는 소 대신 말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비록 이것은 전설에 기초한 가설이지만, 처음엔 사람이, 다음엔 소가, 마지막으로 말이 수레를 끌었다는 것은 사실일 수도 있다. 이것은 처음으로 말을 길들였던 시기가 소보다 약간 늦다는 사실과 일치한다. 말을 길들인 최초의 목적은 수레를 끌기 위해서였지 고기를 먹기 위함은 아니었을 것이다. 때때로 수레가 상나라의 무덤에서 발견되는데, 이미 상당히 발전된 형태를 하고 있다.
서주 초기에 이르러, 이전에 두 마리의 말이 끌던 수레에서 네 마리가 끄는 수레로 발전되었다. 또한 말이 힘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말의 가슴에 마구를 매는 방법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서양보다 1, 2천 년 정도 빠른 것이다. 상당히 발전된 형태의 말이 끄는 수레가 상나라 때에 존재했다는 사실로부터 기원전 2천 년경에 말이 끄는 수레가 발명되었다는 것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4]
<말과 수레>
중국 고대에 말은 주로 수레를 끄는데 활용되었으며, 탈 것으로는 활용되지 않았다. 상주시대는 말을 주로 수레를 끄는데 사용했다. 따라서 수레는 대부분 말에 의해 견인되었다. 이렇게 말과 수레가 뗄 수 없는 인연이 있다는 것은 한자 속에서 매우 흥미로운 사실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한자에는 馬를 편방으로 하는 글자가 많이 있는데, 이들 한자는 만들어질 당시 수레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예를 들어 騈(나란히 할 변), 驂(곁마 참), 駟(사마 사) 같은 한자들은 한 대의 수레를 몇 마리의 말이 끄는가, 즉 두 필, 세 필 아니면 네 필인가로 구분하여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수레를 끌거나 모는 한자는 “驅(몰 구), 馳(달릴 치), 馭(말 부릴 어), 駕(멍에 가), 駛(달릴 사)” 등이 있는데, 이들 한자는 모두 설문해자에 馬 부수에 속해 있으며, 車 부수에 등장하지 않는다.
수레 모는 것을 나타내는 한자로는 그밖에 어(御)자가 있는데 이 한자는 馬 부수에 속하지 않는다. 한자의 중간 부분에 午가 있는데 곽말약은 이것을 말을 제어하는 고삐로 파악했다. 말을 몬다는 의미에서는 御와 馭는 통용된다. 그러나 御는 보통 말을 모는 사람을 가리켰는데 그 의미가 변하여 실질 의미는 사라지고, 다스리고 통치한다는 의미를 파생하게 되었으며, 나아가 황제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수레의 출현>
수레의 출현은 배보다 훨씬 늦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신석기 시대 고고학에서는 수레의 종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전설에 따르면 수레는 해중이 발명했다. 여러 자료들에서 이를 증명하고 있고, 하나라 당시 해중이 만든 수레는 공법이 매우 정교하고 단단했다고 한다. 가장 원시적인 수레는 하나라 이전에 출현했을 것이다. 대체로 신석기 말기의 일일 것이다. 현재 고고학을 통해 알 수 있는 최초의 수레는 하남 안양 은허에서 발견된 부패된 10대의 독원거(獨轅車)로, 수레바퀴살은 18개이고 수레의 위는 장방형이었으며, 2~3명이 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