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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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계의 명칭과 별칭

서계(書契)란, 나무 같은 것에 선을 긋거나 홈을 파서 어떤 물건의 수량이나 개념, 사건, 약속 등을 표시하던 각획문자(刻劃文字)이다.
서계의 탄생은 결승과 마찬가지로 기억의 보조 수단으로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 방법에서 차이가 있다.
서계라는 단어의 의미는 우선, ‘’의 의미를 살펴보면, 설문해자에 ‘書, 著也’ 라 하고, 설문서에 ‘著於竹帛謂之書’라 하여, ‘書’란 곧 죽백에 어떠한 부호를 써 넣은 것을 말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부호인 ‘書’에 대하여는 또 설문해자 서문에 “倉詰之初作書, 蓋依類象形, 故謂之文, 其後形聲相益, 卽謂之字”라 하여, 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문자를 지칭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공영달의 상서정의에서는 ‘書’란 언어를 형체화시킨 것이라 하여 그것이 문자임을 더욱 강조하였다.

그런데 서계에서의 서는 이미 문자로 정착된 명사로서의 ‘書’가 아니라 행위인 동사로서의 ‘書’를 더 중시하며, 그 행위의 결과로 나타난 부호가 반드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문자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고 단순히 어떤 의미를 지닌, 그러나 음이 없는 문자 이전의 부호를 말하는 것이다. ‘’는 설문십편하에 “契, 大約也”라 하였는데, 사실 이 ‘契’는 ‘栔’의 가차자다. ‘栔’는 그 의미가 ‘칼로 새기다’이다. 그리고 설문사편하에 또 ‘栔’는 계약이라 말하고 있다. 이 서계의 별칭으로는 約劑, 質劑, 혹은 傳別, 齒가 있는데 이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1)周禮周官秋官司宠: 凡大約劑, 書于宗葬, 小約劑, 書于丹圖.
2)春秋宗伯下: 凡邦都鄙及萬民之有約劑廠焉 (太史職文)
3)周禮周官天官冢宰小宰: 四曰聽稱責以傅別, … 六曰聽取予以書契, 七日聽賣買以質劑.
鄭注: 傅別, 謂券書也. … 書契, 傅書也. … 質劑, 謂市中平賈, 今時月平是也.
4)周禮地官司從下質人: 凡賣價者, 質劑焉. 大市以質, 小市以霽, 掌稽市之契.
5)墨子公孟篇: 是數人之齒, 而以爲富.
俞樾諸子平議: 歯者, 契之齒也, 古者刻竹木以記數, 其刻處如齒, 故謂之齒.

이상의 기록으로 볼 때, 서계란 일종의 계약에 사용한 것으로서, 그 계약서를 작성할 때 어떤 부호를 쓰거나 칼로 새겨 만든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라는 명칭에서 그것이 칼로 새겨서 만든 것도 많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창작방법과 의미 판단

서계는 원칙적으로 쓰거나 칼로 새겨서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통하여 알 수가 있다.

1) 鄭玄周禮周官天官家宰小宰下注: 稱責, 謂貸與, 傅別, 謂卷書也. 聽訟責者以卷書決之傅, 傅著約束於文書別, 別謂兩, 兩家各得一也. …… 書契, 符書也。 質劑, 謂市中平貿, 今時月平是也. ...... 傅別謂爲大手書於一札, 中字別之. 書契, 謂出子受入之凡要. 凡薄書之最目. 獄訟之要辭, 皆日契, 春秋傳日: 「王叔氏不能擧其契」, 質劑謂兩書一札, 同而別之. 長日質, 短日劑. 傅別質劑, 皆今之卷書也. 事異, 異其名耳.
2) 孔穎達尚書正義引鄭玄說: 書之於木, 各其側爲契, 各持其一, 後以相考合
3)俞樾諸子平議: 齒者, 契之齒也. 古者刻竹木以記數, 其刻處如齒, 故謂之齒. 易林所謂: 「符左契右, 相與合齒」, 是也. 列子說符篇: 「宋人遊於道, 得人遺契者, 蹄而藏之, 密數其齒, 曰, 吾富可待矣」 此正數之齒以爲富者.

위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서계’란 하나의 나무 토막 위에 두 사람간의 약속 사항을, 자기들이 서로 알 수 있는 어떤 부호나 표시로 쓰거나 칼로 새긴 후에, 이를 둘로 잘라 서로 하나씩 나누어 갖고 있다가 나중에 그 약속사항을 이행할 때, 나무조각을 서로 맞추어 봄으로써 그 전에 자기들이 약속한 사항을 기억하거나 확인하는 방법을 말한다.

예컨대 갑이라는 사람이 을이라는 사람에게 식량으로서 쌀을 다섯 가마 빌려주었다고 할 때, 그들은 그 계약으로서 나무 토막위에 쌀 다섯 가마를 표시하는 선을 다섯 줄을 그린다든가, 혹은 칼로 다섯 개의 긴 홈을 판 후에, 이 막대기의 가운데를 잘라 서로 하나씩 갖고 있다가 후에 을이 쌀을 상환하려 할 때, 막대기를 서로 맞추어보고 맞는 막대기면 쓰여진 숫자에 따라 쌀을 반납하는 것을 발한다. 그리고 막대기를 자르는 방법에 있어서는 잘라지는 부분은 위에 새겨진 부호들이 모두 관통되도록 하여 서로 속임수를 쓰지 못하게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러한 방법은 문자가 없는 지역에서는 매우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 것이어서, 후대 중국 변방의 문자가 없던 지역에서도 이것이 사용된 흔적이 있다. 문자가 없는 지역에서 그들의 원활한 사회생활을 위해 이러한 방법을 즐겨 사용했는데, 이는 편리성이 문자만큼은 못하다 하더라도 나름대로 기억력을 돕는 데는 매우 유용했다.
이런 방법은 문자가 있는 지역에서도 통용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예를 들면 문자를 해독치 못하는 사람들이 이 방법을 쓰는 경우이다.

사용 시기

서계가 언제부터 생겨나고 사용된 것인지에 대한 연도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기록을 통하여 추측할 수 있다.

1)易繫辭下 :上古結繩而治, 後世聖人易之書契.
2)孔安國尙書序 :古者伏犧氏之王天下也, 始畫八卦, 造書契, 以代結繩之政
3)史記補三皇本紀 :太昊伏犧氏造書契, 以代結繩之政。

서계가 만들어진 시기는 복희씨 때가 되는데, 복희씨의 존재 여부와, 실존했을 경우에 그의 정확한 생존 연대에 대한 확실한 고증이 아직까지 불명확하므로, 이 서계가 만들어진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이는 결승의 창조 이후라는 것만 알 수가 있다. 이 서계는 사용방법에 있어서 결승보다 훨씬 편리하고 다양한 표현이 가능한 것으로 보아 결승보다 후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말이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서계 창조의 시기가 복희씨 때라는 주장에도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당시 사회는 도구의 생성과 통용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고, 더욱이 서계는 일반적인 생산도구가 아닌 의사 표현 수단이기 때문에 그 기간은 더욱 길었으리라 예측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서계의 창조는 복희씨보다 훨씬 전이며,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 복희씨 시기라고 보는 것이 맞다.

문자적 가치

서계는 결승과는 달리 어떤 부호로서 표기한다는 점에서는 훨씬 더 문자에 접근해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의사의 전달 능력면에서 볼 때도 전달의 용이함으로 인해 사회에서의 전파력 역시 강하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 역시 그 부호의 고유한 음이 없기 때문에 이를 문자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아직은 보다 발전된 의사 전달 체계인 문자의 출현을 기다리는 전단계라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중국 문자의 커다란 흐름 중의 하나인 부호문자의 뿌리가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왜냐하면 서계가 일종의 부호로 표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 기록물에 등장하는 '서계'

보물, 불조역대통재(佛祖歷代通載).jpg

"보물, 불조역대통재(佛祖歷代通載)"

'......문자가 마침내 생겨난 것은 바로 상고의 복희씨가 천하를 다스리면서부터이다 王天下 . 그가 처음으로 팔괘를 그리고 서계(書契)를 만들어 결승(結繩)의 정사를 대체하였으니 이로부터 문장과 서적이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청구(青丘)와 자부(紫府)의 문장 삼황이 돌에 새긴 문장과 녹검(綠檢)ㆍ황승(黃繩)ㆍ육갑(六甲)ㆍ 영비(靈蜚) 의 글자가 있게 된 것이다. ......'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