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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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 양무제 천감 13년(514), 화양진일(華陽眞逸)이 기르던 학의 죽음을 애도하는 <예학명瘗鶴銘>을 짓고 상황산초가 글을 썼는데 이것이 남조에서 가장 유명한 비각의 하나다. 새겨진 시기와 작가의 설명에 대하여 역대로 정설은 없지만 일반적으로 '화양은거(華陽隱居)' 도홍경(陶弘景)의 작품으로 보고있다.
<예학명>은 마애 각석으로 원래 초산(지금의 강소 진강) 서쪽 기슭의 석벽에 있었는데 후에 번개를 맞고 갈라져 양자강으로 떨어졌다 청대 강희 때 비로소 발굴되어 초산의 정혜사로 옮겨졌다. <예학명>의 필체는 웅장하고 힘을 간직하고 있으면서 날아올라 사라질 듯 하고 자체(字體)는 중후하고 고상하며 예스럽다. 비록 해서지만 행서예서의 필법의 맛과 정취를 지닌 참으로 뛰어난 석각 예술 작품이다.
이 비각은 아름다움과 질박함을 모두 갖춘 뛰어난 작품으로 역대 서예가들의 추앙을 받았다. 황정견은 "대자(大字) 중 <예학명>을 넘어서는 것이 없구나"라고 찬탄하였다. 미불, 육유 등의 명사도 비석 옆에 제목을 달고 기록을 남겼는데, 모두 <예학명>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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