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 공자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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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 공자를 중심으로



국어국문학과 2015620025 정윤준



최근 중국은 소프트파워로 공자를 내세운다. 하지만 본인을 비롯한 본인 주변의 대학생들에게 있어서 공자란 그저 ‘고리타분한 인물’, ‘여성 차별의 시초’, ‘봉건제·신분 차별의 시초’ 정도의 타이틀이 붙는,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과 같은 서구 철학자들과 비교해서 비교적 저평가 되는 인물이다.

그리고 중국에서 일어난 신문화운동문화대혁명에서도 공자가 저평가되는 양상을 볼 수 있다. 우선 신문화운동에서의 ‘공자 거부’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중국이 아편전쟁 이후 서구 열강들에 의해 굴욕적인 조약을 맺고, 미개하다고 여겼던 일본에게 무너졌기에, 중국은 큰 혼란에 휩싸였다. 천하를 호령하던 중국이 이런 상황이 되자, 중국에서는 서구 열강 및 일본에게 중국이 패한 이유가 서구의 과학기술과 중국의 과학 기술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이라는 생각으로 지식인이 주가 되어 양무운동, 변법자강 운동 같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시도가 계속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운동들은 당대의 보수파에 의해 저지되는데, 이에 신지식인들은 중국의 보수적인 기류가 공자 및 유교에서 기인한 것이라 간주하고 공자에 대한 비판운동을 전개하고 ‘공자 거부’ 사상을 전파했다.[1]

또한, 문화대혁명에서의 ‘공자 거부’는 주로 ‘사구 타파’ 운동에서 그 양상을 보인다. 사구 타파는 홍위병들의 주장에 의해 시작되었다. 홍위병들의 주장을 정리하면 ‘반동적 계급’들은 ‘사구’를 통해 사회를 장악하려고 하고, 때문에 ‘사구’는 평화로운 중국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 ‘타파’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홍위병들의 실천 규범이라 할 수 있는 「낡은 것을 부수고 새로운 것을 일으켜 세우는 백 가지 사례」라는 문건에 따르면, 공자는 ‘부르주아 봉건 세력의 잔재를 타도하고 프롤레탈리아 계급을 일으켜 세울 것(23에서 81항)’이라는 소제목에 반하는 것이고, ‘봉건적 예법이 철폐되고 교사와 학생 사이의 평등한 관계가 수립되어야 한다.(제93항)’, 편지를 쓰면서 ‘대인’ 등과 같은 봉건적 용어를 여전히 사용하는 습관(제62항), ‘가정에서의 아동 학대나 구타와 같은 가부장제에 반대하며, 자녀들도 부모에게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한다.’와 같은 여러 항목에도 반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자와 유교는 문화대혁명 시기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2]

하지만 신문화운동에서의 ‘보수적인 공자’나 문화 대혁명에서의 ‘봉건적인 공자'는 춘추 전국 시대의 공자와 다른, ’오염된‘ 공자이다.(이는 일본의 오리엔탈리즘을 ’오염된‘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표현하는 데서 인용했다.) 춘추 전국 시대는 제후들이 천자를 모욕하고, 때로는 가신들의 제후들의 자리를 넘보면서 일어난 부정부패·전쟁으로 많은 백성들이 궁핍한 삶을 살던 시기였다. 따라서 공자는 ’정치를 담당하는 사람은 가문이 아닌 덕과 능력으로 선출되어야 한다.‘와 ’정부의 진정한 목적은 백성들의 행복과 복리를 도모하는 것이다.‘라는 주장으로 제자들을 가르치고, 세상에 자신의 주장을 전파했다.[3] 그리고 군주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는커녕 ’군주의 권력을 빼앗아 공적을 기준으로 선발된 대신들에게 나누어 주라.‘라는 주장과 제자 자로에게 ‘군주의 과오를 질책하는 것은 대신의 의무다.’라는 주장을 통해 군주를 견제하는 정치 시스템까지 일부 고안하고 있던 것이다.

공자가 처음 ‘오염된’ 시기는 한나라의 제 6대 황제 무제인 것으로 추정된다. 무제는 전체주의적인 야심을 가졌고, 자신의 야심이 유가들과 충돌하자 직접 ‘유교의 애호가’를 자처하면서 유교를 매수하였다. 그는 많은 유가들을 정부관직에 등용하고, 최초의 관료선발시험을 자신이 직접 조작함으로써 유교교의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때부터 전제정치의 정당화에 유교가 오염된 것이다.[4] 또한 전체주의를 표방하는 법가주의 사상가들도, 공자가 전체주의적 발언을 한 것으로 꾸미면서 공자를 무한한 황제 권력의 지지자로 묘사하였다.[5] 따라서 “대부분의 학생들이 오해하고 있는 공자에 대한 이미지, 그리고 신문화 운동과 문화 대혁명에서 많은 대중들이 알고 있던 공자에 대한 이미지는 모두 ‘오염된’ 것이다.”라는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다. 다행히도, 공자가 ‘오염됐다’는 점을 알았던 17,18세기의 예수회 선교사들을 비롯한 지식인들은 만연한 공자의 오염된 해석을 버리고 공자 본연의 사상을 연구하며, 비교적 ‘깨끗한’ 공자의 사상을 편지를 통해 서구로 전파했다. 따라서 공자는 라이프니츠, 볼프, 볼테르와 같은 학자들에 의해 인용된 경우도 많으며, 프랑스혁명의 배경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6]

최근 중국이 제시한 소프트파워를 보면, 중국 당국도 공자에 대한 오해를 일부 풀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중국의 ‘공자 내세우기’가 앞서 살펴본 한 무제와 법가 사상가들처럼 공자를 ‘수단화’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 걱정이 된다.
중국은 아편 전쟁 이후 서구 세력과 일제에 의해 짓밟히면서 자신이 세계의 ‘中’이라는 자존감을 상실했고, 세력을 키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이는 뎡샤오핑의 선부론, 마오쩌둥의 혁명에서 그 양상이 다소 보였던 것 같다.) 그리고 최근 중국이 제시하는 방향은 공격적이다. 구체적으로 후진타오 체제 때에는 평화롭게 세계 대국으로 성장한다는 화평굴기론을 제기한데 반해, 최근 시진핑은 ‘중국의 꿈’이라는 국가 비전을 제시한다.

전면적인 샤오캉 사회를 실현하고 부유하고 민주적이며 문명적 조화로운 사회적 현대화 국가를 건설하고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꿈을 실현하는 것은 부강한 국가, 민족 진흥, 인민 행복을 실현하는 것이자 현대 중국인의 이상인 동시에 선대인이 끊임없이 추구한 영광스러운 전통이다.[7]

이는 당시 발간된 신문을 통해 그 개념을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몽을 실현하는 것은 중국 정신을 발휘하여야 한다. 이것은 애국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민족정신이자 개혁과 창신을 핵심으로 하는 시대정신이다. 이러한 정신은 힘과 마음을 결집하는 애국의 혼, 강대국의 혼이다. 애국주의는 중화민족을 강하게 하나로 묶는 정신력이고 개혁과 창신은 개혁과정 중 시대와 맞게 발전된 정신 역량이다. 전국 간 민족 인민은 위대한 민족정신과 시대정신을 발휘하여야하며 단결된 하나의 마음으로 정신적인 유대를 지속적으로 강화해야 하는 끊임없는 정신적 원동력이자 미래를 향해 매진하는 정신이다.
-중국공산당신문망 2013 06 19-



앞서 제시한 시진핑의 말과 신문 내용을 종합해 보면, 시진핑은 후진타오의 和와는 달리 중국 중심의, 민족주의적인 양상을 보이겠다고 선포한 것과 다름없다. 또한 중국의 꿈 개념에는 주변국과 동반성장하겠다는 말이 빠져있다. 이는 일대일로소프트파워와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는 것이, 중국이 일대일로를 통해 서구의 주류 세력을 제외하고 중국과 주변국이 동반 성장을 한다는 주장과 소프트 파워- 공자를 통해 제시하는 ‘和’ 개념이 거짓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일대일로가 성공하면 가장 많은 수혜를 얻는 국가는 중국이며, 중국이 최근 세계에 보여준 티베트 문제를 비롯한 소수민족 강제적 통일, 동북공정, 일본과의 센카쿠 문제 등은 공자를 통해 제시한 和 개념에 의문을 갖게 한다.

우리는 앞서 공자가 한 무제, 그리고 법가 사상가들에 의해 얼마나 수단화 혹은 악용됐는지 살펴보았다. 따라서 공자를 필두로 한 ‘和’ 개념이 중국의 ‘민족주의적 중국몽’을 가리는 가면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실제로 2016년 6월 21일에 한국의 호남대학교에서는 공자학원 나주분원이 개원했다.[8] 소프트파워의 주된 의도는 ‘자국의 매력이나 정치적 의제를 주도함을 통해서, 다른 국가의 선호에 영향을 미쳐 자발적 순응을 끌어내는 것’인데 이에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지 않으면 한국 전체가 문화 사대주의에 빠질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은 이전과 비교해 공격적·민족적으로 태세를 변환한 중국에게서 ‘비판적이며, 중국에 동화된 것이 아닌, 제 3자의 입장에서’ 최대한의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대표적인 방법으로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줄다리기’가 있지만, 이 뿐만 아니라 한국이 경쟁이 과열된 세계무대에서 더 이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연구해야 한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프로크루스테스는 그의 길을 지나가는 여행자들을 집으로 초대해 놓고, 쇠로 만든 침대에 눕히고는 여행자의 키가 침대보다 작으면 다리를 잡아 늘리고, 여행자의 키가 침대보다 크면 다리를 잘라 버린다. 앞서 살펴본 한 무제나 법가 사상가들이 공자를 오염시킨 사례는 공자의 다리를 제멋대로 ‘자르거나’, ‘늘린 것’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는 공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의 기원이 시장의 정부 개입을 오히려 옹호하는 것임을 아는가? 많은 사람들이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정부의 시장 개입을 반대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다. 결국 여기서 애덤 스미스의 ‘다리는 변화된’ 것이다. 공자와 애덤 스미스같이 대표적인 학자들이 이리 변용된 것을 보면, SNS나 대중 매체에 제시된 많은 말들 중에서 ‘다리가 변화된’ 사례가 없다고는 아무도 장담치 못할 것이다. 따라서 앞서 제시했듯이 국민들은 매사에 비판적인 사고를 견지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 이찬우, 「중화사상의 전개와 중국의 꿈에 대한 고찰」, 『人文論叢(THE JOURNAL OF HUMAN STUDIES)』, 경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2014
  • H.G.크릴, 이성규 역, 『공자 인간과 신화』, 지식산업사
  • 성근제, 「사구타파는 반전통주의인가?」, 『중국현대문학』, 한국중국현대문학학회, 2011.12
  • 全明鎔,「中國의 新文化 五 ·四運動硏究,中國硏究」,『韓國外國語大學校 外國學綜合硏究센터 中國硏究所』,1997

각주

  1. 全明鎔,「中國의 新文化 五 ·四運動硏究,中國硏究」, 『韓國外國語大學校 外國學綜合硏究센터 中國硏究所』,1997,pp158~159
  2. 성근제, 「사구타파는 반전통주의인가?」, 『중국현대문학』, 한국중국현대문학학회, 2011.12, pp302~306
  3. H.G.크릴, 이성규 역, 『공자 인간과 신화』, 지식산업사, p23
  4. Ibid., p25
  5. Ibid., p25
  6. Ibid., p26
  7. 2013년 제 12차 전인대(전국인민대표회의) 1차 회의
  8. 전원 기자, 「호남대, 공자학원 나주분원 열어…中 전문인재 양성 기대 」, 『NEWS1』, 2016-06-21<http://news1.kr/articles/?26975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