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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6월 21일 (화) 23:36 (차이 | 역사) . . (+9) . . 점전제 (최신)
- 2016년 6월 21일 (화) 23:34 (차이 | 역사) . . (+90) . . 점전제
- 2016년 6월 21일 (화) 23:31 (차이 | 역사) . . (+1,120) . . 새글 점전제 (새 문서: 진의 무제 사마염이 오왕조를 멸망시켜 전국을 통일하자마자 화북을 중심으로 한 지배질서의 회복과 농업생산의 부흥에 착수했는데, 가...)
- 2016년 6월 21일 (화) 23:24 (차이 | 역사) . . (-1) . . 위진남북조 (→경제)
- 2016년 6월 21일 (화) 23:18 (차이 | 역사) . . (0) . . 위진남북조
- 2016년 6월 21일 (화) 22:47 (차이 | 역사) . . (+8) . . 한화정책 (최신)
- 2016년 6월 21일 (화) 22:46 (차이 | 역사) . . (+792) . . 새글 한화정책 (새 문서: 북위의 효문제는 수도를 낙양으로 옮긴 후 한화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다. 그는 본래 북위 민족인 선비족의 풍속 및 의복을 폐지하고...)
- 2016년 6월 21일 (화) 22:39 (차이 | 역사) . . (+804) . . 새글 후경의 난 (새 문서: 지배층의 사치 속에서 남조 귀족문화의 취약성을 드러낸 것이 바로 후경의 난이다. 후경은 동위의 창업공신으로 10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 2016년 6월 21일 (화) 22:16 (차이 | 역사) . . (+438) . . 새글 원가의 치 (새 문서: 원가의 치는 송 문제의 치세 30년 간을 일컫는 말로, 남조를 통틀어 가장 국력이 강성했고 영토도 최대로 확대된 시기였다. 문제는 무제가...) (최신)
- 2016년 6월 21일 (화) 22:09 (차이 | 역사) . . (+2) . . 위진남북조 (→사회)
- 2016년 6월 20일 (월) 01:43 (차이 | 역사) . . (+256) . . 토론:위진남북조 (최신)
- 2016년 5월 29일 (일) 16:30 (차이 | 역사) . . (+259) . . 토론:위진남북조
- 2016년 5월 15일 (일) 21:48 (차이 | 역사) . . (+42) . . 남조
- 2016년 5월 14일 (토) 19:57 (차이 | 역사) . . (+101) . . 토론:위진남북조
- 2016년 5월 14일 (토) 19:57 (차이 | 역사) . . (+118) . . 토론:위진남북조
- 2016년 5월 14일 (토) 19:53 (차이 | 역사) . . (+986) . . 위진남북조 (→도교)
- 2016년 5월 11일 (수) 21:43 (차이 | 역사) . . (+1,311) . . 남조
- 2016년 5월 11일 (수) 17:51 (차이 | 역사) . . (+1) . . 남조 (→참고문헌)
- 2016년 5월 11일 (수) 17:50 (차이 | 역사) . . (+193) . . 남조
- 2016년 5월 11일 (수) 17:15 (차이 | 역사) . . (+3,072) . . 남조
- 2016년 5월 11일 (수) 10:52 (차이 | 역사) . . (+1,972) . . 남조
- 2016년 5월 11일 (수) 02:24 (차이 | 역사) . . (+3,208) . . 남조
- 2016년 5월 10일 (화) 23:39 (차이 | 역사) . . (+70) . . 남조
- 2016년 5월 10일 (화) 22:54 (차이 | 역사) . . (+1) . . 남조
- 2016년 5월 10일 (화) 22:53 (차이 | 역사) . . (-1) . . 남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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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5월 10일 (화) 22:47 (차이 | 역사) . . (+5) . . 남조
- 2016년 5월 10일 (화) 22:46 (차이 | 역사) . . (+4,263) . . 새글 남조 (새 문서: == 남조의 시작, 송 == '''(1) 송 무제''' 동진사회가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혼란으로 인해 막을 내리자 군인 출신이었던 유유는 무력을 기...)
- 2016년 5월 10일 (화) 01:04 (차이 | 역사) . . (+283) . . 토론:위진남북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