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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邊(가 변) | + | [[邊]](가 변)자와 마찬가지로 글자 深에 대한 해석 또한 다양하다. <br> |
+ | 深을 '깊이를 재려고 물(氵)이 있는 동굴([[穴]]) 안으로 나무 막대기(木)를 넣는 모습'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 때 금문과 소전에 [[术]](차조 출)이 있는데 이것이 손을 뜻하는 것으로 본다. 또한 또 다른 소전에서 术이 [[木]](나무 목)으로 바뀌면서 손이 막대기로 바뀐 것이라고 주장한다.<ref>廖文豪,『汉字树 5-汉字中的建築與器皿』,中国商业出版社, pp.59-60</ref><br> | ||
− | + | 또다른 주장으로는, 深의 금문 자형을 근거로 '물(점 두 개)이 있는 동굴(穴)로 사람([[兄]])이 들어가는 모습'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 경우 소전에서 물([[水]])과 사람(兄)이 求(구할 구)와 [[火]](불 화)로 바뀐 것이 되며, 소전에서 '穴, 求, 水'이 세 한자를 조합해 深을 '동굴 속 물의 깊이를 재는 것'으로 만든 것이 된다.<ref>熊国英 ,『图释古汉字』, 齐鲁书社, 2005, p.191</ref><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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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편 [[허신]]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深을 "본래 계양군(桂陽郡) 남평(南平)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영도현(營道縣)으로 가는 강 이름인데 이후 '깊다, 정도가 심하다, 진하다'는 뜻이 나온 것(水。出桂陽南平,西入營道。)"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 + | 한편 [[허신]]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深을 "본래 계양군(桂陽郡) 남평(南平)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영도현(營道縣)으로 가는 강 이름인데 이후 '깊다, 정도가 심하다, 진하다'는 뜻이 나온 것(水。出桂陽南平,西入營道。)"이라고 해석하고 있다.<ref>출처 : [http://www.zdic.net/z/1d/sw/6DF1.htm 漢典]</ref> <br> |
− | 이 외에도 深을 | + | 이 외에도 深을 穼(깊을 삼, 의미부)와 水(물 수, 소리부)로 이루어진 형성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ref> 『한자어원사전』, 하영삼</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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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深을 '광산 구덩이의 깊은 곳에서 한 사람이 땀으로 등이 젖은 채 입을 크게 벌리고 호흡 곤란에 빠진 모습'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ref>허진웅, 『중국고대사회-문자학과 고고학적 해석에 입각하여』, 1993, 지식산업사, p.156</ref> <ref> 허진웅, 『중국문자학강의』, 고려대학교출판부, 2013, pp.290-291</ref><br> | ||
+ | [[상]](商)나라 때나 그 이전의 시대에 채광은 주로 죄인, 전쟁포로, 노예에 의해 수행되었던 것 같다. [[전국시대]]에도 채광이 진행되었던 호북 대야(大冶)의 동록산(銅綠山)의 광산 유적지에는 세 종류의 갱도가 있고, 갱도는 산속으로 50미터 이상 뻗혀 있다. 《한서(漢書)》<공우전(貢禹傳)>에 의하면, 수백 장(丈) 깊이의 갱도에서 구리를 캐고 있다는 사실을 서술하고 있다.<ref>[[한]](漢)나라 때 1장(丈)은 2.3m이므로, 이들 갱도는 최소 230m가 넘는 것이다. 출처, 위의 책, p.139</ref><br> | ||
+ |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깊은 갱도를 요구하게 되고, 갱도를 더 깊게 팔수록 산소의 결핍과 유독가스의 위협과 같은 위험이 더욱 많이 생긴다. 즉, 深의 [[금문]]은 호흡곤란을 상징하는데, 나무버팀대가 있는 갱도에서 곁에서 한 사람이 입을 벌린 채로 숨을 헐떡이며 땀에 흠뻑 젖어 있는 모습을 나타낸다.<ref>허진웅, 『중국고대사회-문자학과 고고학적 해석에 입각하여』, 1993, 지식산업사, pp.138-139</ref> | ||
==주석== | ==주석== |
2018년 12월 25일 (화) 22:54 기준 최신판
語源
邊(가 변)자와 마찬가지로 글자 深에 대한 해석 또한 다양하다.
深을 '깊이를 재려고 물(氵)이 있는 동굴(穴) 안으로 나무 막대기(木)를 넣는 모습'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 때 금문과 소전에 术(차조 출)이 있는데 이것이 손을 뜻하는 것으로 본다. 또한 또 다른 소전에서 术이 木(나무 목)으로 바뀌면서 손이 막대기로 바뀐 것이라고 주장한다.[1]
또다른 주장으로는, 深의 금문 자형을 근거로 '물(점 두 개)이 있는 동굴(穴)로 사람(兄)이 들어가는 모습'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 경우 소전에서 물(水)과 사람(兄)이 求(구할 구)와 火(불 화)로 바뀐 것이 되며, 소전에서 '穴, 求, 水'이 세 한자를 조합해 深을 '동굴 속 물의 깊이를 재는 것'으로 만든 것이 된다.[2]
한편 허신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深을 "본래 계양군(桂陽郡) 남평(南平)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영도현(營道縣)으로 가는 강 이름인데 이후 '깊다, 정도가 심하다, 진하다'는 뜻이 나온 것(水。出桂陽南平,西入營道。)"이라고 해석하고 있다.[3]
이 외에도 深을 穼(깊을 삼, 의미부)와 水(물 수, 소리부)로 이루어진 형성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4]
文化
深을 '광산 구덩이의 깊은 곳에서 한 사람이 땀으로 등이 젖은 채 입을 크게 벌리고 호흡 곤란에 빠진 모습'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5] [6]
상(商)나라 때나 그 이전의 시대에 채광은 주로 죄인, 전쟁포로, 노예에 의해 수행되었던 것 같다. 전국시대에도 채광이 진행되었던 호북 대야(大冶)의 동록산(銅綠山)의 광산 유적지에는 세 종류의 갱도가 있고, 갱도는 산속으로 50미터 이상 뻗혀 있다. 《한서(漢書)》<공우전(貢禹傳)>에 의하면, 수백 장(丈) 깊이의 갱도에서 구리를 캐고 있다는 사실을 서술하고 있다.[7]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깊은 갱도를 요구하게 되고, 갱도를 더 깊게 팔수록 산소의 결핍과 유독가스의 위협과 같은 위험이 더욱 많이 생긴다. 즉, 深의 금문은 호흡곤란을 상징하는데, 나무버팀대가 있는 갱도에서 곁에서 한 사람이 입을 벌린 채로 숨을 헐떡이며 땀에 흠뻑 젖어 있는 모습을 나타낸다.[8]
주석
- ↑ 廖文豪,『汉字树 5-汉字中的建築與器皿』,中国商业出版社, pp.59-60
- ↑ 熊国英 ,『图释古汉字』, 齐鲁书社, 2005, p.191
- ↑ 출처 : 漢典
- ↑ 『한자어원사전』, 하영삼
- ↑ 허진웅, 『중국고대사회-문자학과 고고학적 해석에 입각하여』, 1993, 지식산업사, p.156
- ↑ 허진웅, 『중국문자학강의』, 고려대학교출판부, 2013, pp.290-291
- ↑ 한(漢)나라 때 1장(丈)은 2.3m이므로, 이들 갱도는 최소 230m가 넘는 것이다. 출처, 위의 책, p.139
- ↑ 허진웅, 『중국고대사회-문자학과 고고학적 해석에 입각하여』, 1993, 지식산업사, pp.138-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