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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벌・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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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시 세력을 떨치고 있던 동호(東胡)는 묵돌이 선우가 되자 그를 견제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였다. 동호는 사자를 보내며 묵돌에게 흉노의 보배로 여겨지는 천리마를 요구했다.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묵돌은 천리마를 내어준다. 그러자 동호는 묵돌의 연지를 내어달라 잇따라 요구하였다. 묵돌은 이번에도 여자 하나 때문에 이웃나라의 미움을 살 수는 없다며 연지를 그들에게 보내주었다. 이에 교만해진 동호는 동호와 흉노 사이의 천리에 걸친 황무지를 요구했고 묵돌의 신하들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내어주라 답하였다. 하지만 묵돌은 “땅은 나라의 근본이거늘 어찌 나라의 근본을 함부로 내어줄 수 있단 말이냐?”라고 크게 화를 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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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호를 정벌하고 그 기세를 몰아 묵돌은 서쪽의 월지를 점령했다. 남쪽으로는 누번과 백양을 정벌하였고 북쪽으로는 혼유・굴사・정령・격곤・신려 등을 복속시켰다. | ||
+ | ==='''[[한]]나라'''=== | ||
+ | '''유방과 묵돌''' | ||
+ | 기원전 202년, 혼란스러웠던 중국을 통일한 [[한 고조]] [[유방]]은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한신(韓信)에게 흉노 토벌을 명했다. 하지만 막강한 묵돌의 군사력에 한신은 투항하게 된다. 이에 유방은 직접 흉노 정벌에 나서지만 오히려 백등산에서 포위되었다. 결국 유방은 흉노와 화친(和親)조약을 맺게 된다. | ||
+ | '''여태후와 묵돌''' | ||
+ | 한 고조 유방이 죽고 [[여태후]]가 권력을 장악하자 묵돌은 그녀에게 서신을 보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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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는 여태후가 여자로서 수치심을 느낄 만한 성희롱적인 발언이었다. 하지만 여태후는 “저는 이제 늙어서 기력이 쇠하고 머리카락과 이도 다 빠져버렸습니다.”라며 거절의 의사를 표했다. 여태후의 엄청난 인내와 결단으로 두 나라 간의 화친은 유지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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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효문제]]가 즉위하고 묵돌은 화친의 약속을 다시 확인하였다. 하지만 효문제 3년, 흉노의 우현왕이 화친을 깨고 한나라를 공격했다. 효문제는 반격하였지만 그 피해가 아주 막심했다. 이듬해 묵돌이 효문제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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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 편지를 받은 효문제는 답장을 통해 우현왕을 책망하지 말 것을 부탁했으며, 선우에게 옷 수십 필을 선물로 주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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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후 기원전 174년, 묵돌은 사망하고 그의 아들 노상선우가 묵돌의 뒤를 잇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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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 | ||
+ | 거대한 초원 제국을 건설한 묵돌은 수많은 부족들을 통치하기 위해 ‘삼권 분립’체제를 고안해냈다. 제국을 세 부분으로 나눈 뒤 자신이 중앙을 통치하고 동쪽은 좌현왕, 서쪽은 우현왕이 각각 다스리게 하였다. 흉노는 오른쪽보다 왼쪽을 더 귀하게 여겼기 때문에 좌현왕의 권력은 선우 다음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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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자료'''== | ||
+ | 장진퀘이 지음, 남은숙 옮김, 흉노 제국 이야기, 아이필드, 2004 |
2019년 6월 26일 (수) 01:27 기준 최신판
개요
묵돌선우는 기원전 3세기 말 흉노의 선우이다. 선우는 흉노의 군주를 일컫는 말이다. 묵돌은 주변의 민족들을 정벌하여 아시아 사상 최고의 유목국가를 건설하였다.
생애
선우 즉위 전
묵돌은 당시 흉노의 선우이자 아버지였던 두만선우(頭曼單于)의 장자였다. 두만은 자신이 총애하던 부인에게서 얻은 작은 아들을 후계자로 삼기 위해 묵돌을 월지에 인질로 보냈다. 당시 기세가 강해지고 있던 월지를 견제하기 위해 두만은 월지를 공격했고 혼란한 틈을 타 묵돌은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 후 두만은 묵돌의 기개를 인정하여 일만 군사의 장군으로 삼았다.
선우 즉위
두만의 계략을 눈치 챈 묵돌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명적(鳴鏑)을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명적을 쏜 곳에 모든 병사들이 화살을 쏘도록 했다. 한 번은 묵돌의 자신의 아내를 향해 명적을 날렸는데, 놀란 병사들이 화살을 쏘지 않자 그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얼마 뒤 사냥을 나간 묵돌이 아버지 두만의 말을 향해 명적을 쏘았다. 말을 향해 일제히 화살을 쏘는 병사들을 보며 묵돌은 아버지 두만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두만과 함께 사냥을 나간 묵돌은 두만에게 명적을 날렸고 병사들의 화살을 맞은 두만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 그렇게 묵돌은 선우의 자리에 즉위하게 된다.
정벌・전쟁
동호
당시 세력을 떨치고 있던 동호(東胡)는 묵돌이 선우가 되자 그를 견제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였다. 동호는 사자를 보내며 묵돌에게 흉노의 보배로 여겨지는 천리마를 요구했다.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묵돌은 천리마를 내어준다. 그러자 동호는 묵돌의 연지를 내어달라 잇따라 요구하였다. 묵돌은 이번에도 여자 하나 때문에 이웃나라의 미움을 살 수는 없다며 연지를 그들에게 보내주었다. 이에 교만해진 동호는 동호와 흉노 사이의 천리에 걸친 황무지를 요구했고 묵돌의 신하들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내어주라 답하였다. 하지만 묵돌은 “땅은 나라의 근본이거늘 어찌 나라의 근본을 함부로 내어줄 수 있단 말이냐?”라고 크게 화를 내었다.
묵돌은 즉시 군사를 몰아 동호를 공격하였고 무방비 상태였던 동호는 참패하고 말았다.
월지・그 외
동호를 정벌하고 그 기세를 몰아 묵돌은 서쪽의 월지를 점령했다. 남쪽으로는 누번과 백양을 정벌하였고 북쪽으로는 혼유・굴사・정령・격곤・신려 등을 복속시켰다.
한나라
유방과 묵돌 기원전 202년, 혼란스러웠던 중국을 통일한 한 고조 유방은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한신(韓信)에게 흉노 토벌을 명했다. 하지만 막강한 묵돌의 군사력에 한신은 투항하게 된다. 이에 유방은 직접 흉노 정벌에 나서지만 오히려 백등산에서 포위되었다. 결국 유방은 흉노와 화친(和親)조약을 맺게 된다. 여태후와 묵돌 한 고조 유방이 죽고 여태후가 권력을 장악하자 묵돌은 그녀에게 서신을 보냈다.
“ 그대도 혼자된 몸이고 나 역시 쓸쓸히 홀로 있어 즐겁지 않으니 두 군주가 스스로 즐길 것이 없는 듯하오. 그러니 각자에게 있는 것으로 서로의 없는 것을 채워봄이 어떻겠소.
” — 《한서 흉노전》
이는 여태후가 여자로서 수치심을 느낄 만한 성희롱적인 발언이었다. 하지만 여태후는 “저는 이제 늙어서 기력이 쇠하고 머리카락과 이도 다 빠져버렸습니다.”라며 거절의 의사를 표했다. 여태후의 엄청난 인내와 결단으로 두 나라 간의 화친은 유지되었다. '효문제와 묵돌’ 효문제가 즉위하고 묵돌은 화친의 약속을 다시 확인하였다. 하지만 효문제 3년, 흉노의 우현왕이 화친을 깨고 한나라를 공격했다. 효문제는 반격하였지만 그 피해가 아주 막심했다. 이듬해 묵돌이 효문제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고 한다.
“ … 그런데 한나라의 변경의 관리들이 우리 우현왕을 모멸해 침범하였고 …. … 이리하여 한나라도 우리와 화친을 꾀하지 않고 우리도 한나라와 친할 수 없게 되었던 거요. …
” — 사마천, 《사기》, 흉노열전
위 편지를 받은 효문제는 답장을 통해 우현왕을 책망하지 말 것을 부탁했으며, 선우에게 옷 수십 필을 선물로 주었다.
이후 기원전 174년, 묵돌은 사망하고 그의 아들 노상선우가 묵돌의 뒤를 잇게 되었다.
정치
거대한 초원 제국을 건설한 묵돌은 수많은 부족들을 통치하기 위해 ‘삼권 분립’체제를 고안해냈다. 제국을 세 부분으로 나눈 뒤 자신이 중앙을 통치하고 동쪽은 좌현왕, 서쪽은 우현왕이 각각 다스리게 하였다. 흉노는 오른쪽보다 왼쪽을 더 귀하게 여겼기 때문에 좌현왕의 권력은 선우 다음이었다.
참고자료
장진퀘이 지음, 남은숙 옮김, 흉노 제국 이야기, 아이필드,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