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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은 통일 이후 민간에서 가지고 있는 모든 무기를 몰수했다. 그리고는 이를 녹여 청동의 거대한 동상을 만들어 함양궁의 안에 두었다. 이는 사람들이 마음대로 무기를 가지고 다니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로 곳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반란을 사전에 방지하고자 하였다. | [[진시황]]은 통일 이후 민간에서 가지고 있는 모든 무기를 몰수했다. 그리고는 이를 녹여 청동의 거대한 동상을 만들어 함양궁의 안에 두었다. 이는 사람들이 마음대로 무기를 가지고 다니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로 곳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반란을 사전에 방지하고자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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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시황은 통일 바로 다음 해인 기원전 220년, 진의 옛 땅에 해당하는 서북쪽 일대의 순행에 나서, 사망에 이를 때까지 20년 동안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전국을 순행했다. 진시황은 재위 기간의 삼분의 일을 모두 순행에 소비했다. 순행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무력으로 진압한 동쪽지역이 여전히 저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순행 도중 몇차례 습격을 받았다는 기록이나, 항우가 순행 행렬을 보고 절치부심했다는 기록들은 순행이 순탄치만은 않았음을 말해준다.<br> | ||
+ | 그렇다면 진시황의 순행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일반적으로 순행의 목적은 지역의 민심을 살피고, 황제의 권위를 널리 알리는 것이다. 진시황의 순행도 이러한 목적을 가졌을 것이다. 『사기』에는 진시황이 순행을 하며 각지에 새겼던 각석 명문이 남아 있는데, 자신이 치른 통일 전쟁의 정당성, 자신의 업적에 대한 찬양, 국가 제도를 통일할 필요성과 그 완비의 선포, 백성들의 충성 요구 그리고 풍속 개량과 천하 교화와 같은 내용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겉으로 드러난 목적은 각석에 나타난 것과 일치하겠지만 이것 외에도 다른 목적이 있다. 진시황은 자신이 이룩한 제국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또한 순행 중 태산에 봉선을 드리는 등 각종 제의를 잇달아 거행하였는데, 이것은 자신의 통일 업적을 하늘과 조상에 고하는 의식임과 동시에 동방의 산천과 여러 신들을 달램으로써 자연 재해를 막고 제국의 안정을 바라는 기원이기도 하였다. 진시황이 영생을 추구했다는 것은 이미 많이 퍼져있는 사실이다.<br> | ||
+ | 여기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진시황이 죽은 뒤 한 세기가 지나, [[한 무제]]가 똑같이 전국 순행에 나섰다는 것이다. 무려 30차례나 순행을 나섰던 한 무제는 진시황처럼 서쪽 일대를 돌아보고, 동쪽으로는 태산에 올라 봉선을 행하고 또 동쪽 바다에 가서 별궁을 만들고 머물렀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순행에 나섰을 때가 지방 제후국의 힘을 RJR고 본격적인 황제 중신의 군현제를 완성하는 시점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 역시 스스로 지상 최고의 군주임을 천하에 공포하고, 지방 민심을 살펴야 할 필요 때문에 순행이라는 방식을 선택했던 것이다.<br> | ||
+ | 이처럼 중국 고대의 가장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던 두 황제 모두 천하를 통일한 뒤 순행을 하는 똑같은 패턴을 보였으며, 제국 질서를 수립하려는 강한 의지를 나타냈다. 이러한 면에서 국가 제도의 대대적 개혁을 추진한 점이나 법 질서의 안정을 꾀하려는 노력은 양자 모두 동일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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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진나라]] |
2016년 6월 21일 (화) 13:56 기준 최신판
진나라의 정치 제도
중앙 집권 제도의 확립
진나라는 연,조,제,위,한,초 6개의 국가를 통일한 이후, 어떻게 통일된 전국을 통치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하였다. 당시 승상이었던 왕관 등은 넓은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하나의 정부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이유로 주나라의 모습을 따라 봉건제를 주장하며 제나라와 초나라 땅에 왕을 두기를 청했다. 하지만 이사는 봉건제도로 전국을 통치하면 주나라 때와 같은 모습이 나타나니 모든 지방을 군과 현으로 편재하여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하는 군현제를 주장했다. 이에 진시황은 전국을 36개의 군으로 나눴다. 나눠진 군은 몇 개의 현을 관할하였다. 군의 장관은 군수(郡守), 현의 장관은 현령(縣令)이었으며 이들은 황제가 임명하였다. 이러한 관료제의 확립으로 인해 중앙집권체제를 이루어 내었다. 하지만 당시 군수나 현령으로 임명받은 사람들은 전쟁 때 공을 세운 군인출신이 많았다. 이들은 민정에 익숙하지 못했고 법치에 따라 강압적으로 민중들을 통제했는데, 이는 이후 진나라가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다.[1]
무기의 몰수
진시황은 통일 이후 민간에서 가지고 있는 모든 무기를 몰수했다. 그리고는 이를 녹여 청동의 거대한 동상을 만들어 함양궁의 안에 두었다. 이는 사람들이 마음대로 무기를 가지고 다니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로 곳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반란을 사전에 방지하고자 하였다.
진시황의 순행
진시황은 통일 바로 다음 해인 기원전 220년, 진의 옛 땅에 해당하는 서북쪽 일대의 순행에 나서, 사망에 이를 때까지 20년 동안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전국을 순행했다. 진시황은 재위 기간의 삼분의 일을 모두 순행에 소비했다. 순행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무력으로 진압한 동쪽지역이 여전히 저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순행 도중 몇차례 습격을 받았다는 기록이나, 항우가 순행 행렬을 보고 절치부심했다는 기록들은 순행이 순탄치만은 않았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진시황의 순행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일반적으로 순행의 목적은 지역의 민심을 살피고, 황제의 권위를 널리 알리는 것이다. 진시황의 순행도 이러한 목적을 가졌을 것이다. 『사기』에는 진시황이 순행을 하며 각지에 새겼던 각석 명문이 남아 있는데, 자신이 치른 통일 전쟁의 정당성, 자신의 업적에 대한 찬양, 국가 제도를 통일할 필요성과 그 완비의 선포, 백성들의 충성 요구 그리고 풍속 개량과 천하 교화와 같은 내용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겉으로 드러난 목적은 각석에 나타난 것과 일치하겠지만 이것 외에도 다른 목적이 있다. 진시황은 자신이 이룩한 제국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또한 순행 중 태산에 봉선을 드리는 등 각종 제의를 잇달아 거행하였는데, 이것은 자신의 통일 업적을 하늘과 조상에 고하는 의식임과 동시에 동방의 산천과 여러 신들을 달램으로써 자연 재해를 막고 제국의 안정을 바라는 기원이기도 하였다. 진시황이 영생을 추구했다는 것은 이미 많이 퍼져있는 사실이다.
여기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진시황이 죽은 뒤 한 세기가 지나, 한 무제가 똑같이 전국 순행에 나섰다는 것이다. 무려 30차례나 순행을 나섰던 한 무제는 진시황처럼 서쪽 일대를 돌아보고, 동쪽으로는 태산에 올라 봉선을 행하고 또 동쪽 바다에 가서 별궁을 만들고 머물렀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순행에 나섰을 때가 지방 제후국의 힘을 RJR고 본격적인 황제 중신의 군현제를 완성하는 시점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 역시 스스로 지상 최고의 군주임을 천하에 공포하고, 지방 민심을 살펴야 할 필요 때문에 순행이라는 방식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처럼 중국 고대의 가장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던 두 황제 모두 천하를 통일한 뒤 순행을 하는 똑같은 패턴을 보였으며, 제국 질서를 수립하려는 강한 의지를 나타냈다. 이러한 면에서 국가 제도의 대대적 개혁을 추진한 점이나 법 질서의 안정을 꾀하려는 노력은 양자 모두 동일했다.
- ↑ 중국사연구실, 中國歷史, 新書苑, 1993, p.1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