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의 두 판 사이의 차이
(사용자 4명의 중간 판 26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 |||
1번째 줄: | 1번째 줄: | ||
− | [[파일:Tang Dynasty circa 700 CE-1-.png|오른쪽]] | + | [[파일:Tang Dynasty circa 700 CE-1-.png|300픽셀|섬네일|오른쪽|'''당(唐,618~907)''']] |
− | [[수]]나라를 멸망시킨 당(唐)은 현무문의 정변으로 권력을 장악한 2대 황제 [[당 태종]]([[당 태종|이세민]]) 때의 '[[정관의 치]]'와 [[측천무후]] | + | ==개요== |
+ | [[수]]나라를 멸망시킨 당(唐)은 현무문의 정변으로 권력을 장악한 2대 황제 [[당 태종]]([[당 태종|이세민]]) 때의 '[[정관의 치]]'와 [[측천무후]] 시대, 또 위씨 황후 치세를 극복해 낸 [[당 현종]] 때의 '[[개원의 치]]'로써 중국 역사상 매우 뚜렷한 정치사회적 제도의 틀을 완성한다. 그러나 [[양귀비]]의 득세로 말미암은 [[안사의 난]]으로부터 비롯한 갖가지 내전에 시달리다 결국 [[황소의 난]]으로 말미암아 약 300년 만에 나라의 문을 닫게 된다. | ||
+ | == 역사 == | ||
− | == | + | ===건립과 통일과정=== |
− | 수말의 농민 | + | 수말의 농민 대기의는 [[수]] 왕조를 전복시켰지만 승리의 결과는 태원 유수 [[당 고조|이연]]에게 돌아갔다. 이연은 수의 붕괴가 반전될 수 없음을 깨닫고, 그의 아들인 [[이세민]]과 함께 병력을 모아 반수 거병을 모의하였다. |
− | 617년 5월 이연은 드디어 [[돌궐]]과 유무주의 태원 침공을 방어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징집하여 부유수 왕위와 고군아를 살해하고 진양에서 반수의 가치를 들었다. 이후 이연은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장안을 함락시키고 양제의 손자인 대왕 유를 황제로 추대한 후, 양제는 태상황에 추존하였고 스스로는 대승상,당왕의 직위를 갖고서 군정 대권을 장악한 후 618년에 [[양제]]를 시해한 뒤에 이연은 양유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당조를 건립하고 무덕이라 개원하니 그를 | + | 617년 5월 이연은 드디어 [[돌궐]]과 유무주의 태원 침공을 방어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징집하여 부유수 왕위와 고군아를 살해하고 진양에서 반수의 가치를 들었다. 이후 이연은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장안을 함락시키고 양제의 손자인 대왕 유를 황제로 추대한 후, 양제는 태상황에 추존하였고 스스로는 대승상,당왕의 직위를 갖고서 군정 대권을 장악한 후 618년에 [[수 양제]]를 시해한 뒤에 이연은 양유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당조를 건립하고 무덕이라 개원하니 그를 당 고조(이연)라 칭한다. |
− | + | 그 후 [[법령]]을 간소화 하는 등 민심을 수습하는 데 노력하였다. 군사상으로는 각지의 할거 세력에 대하여 원교근공의 책략에 입각하여 전국 통일의 사업을 주도해 나갔다. 623년에 하북으로 진군하여 두건덕의 잔존 부대인 유흑달을 소멸시키고 하북 지역을 확보한 뒤 624년 강회로 진군한다. 628년 돌궐에 의지하던 양사도가 부하에게 살해되어 당은 전국통일을 하게된다. | |
− | 그 후 | ||
− | |||
− | |||
===당나라 초반기=== | ===당나라 초반기=== | ||
− | + | 당을 건국하고 현종에 이르러 당나라의 북방에 위치한 돌궐을 복속시켜 영토를 크게 넓히면서 대제국으로서의 도약을 시작한다. 또한 조세제도와 토지제도, 군사제도를 정비하였다. [[태종]]이 있었던 시기의 치세를 두고 [[정관의 치]]라고 부른다. 이후 고종이 즉위했고 당 고종은 신라의 요청을 받고 출정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 시키고 신라와 나당전쟁을 벌이게 된다. | |
− | + | ===당나라 중반기=== | |
− | + | [[측천무후]]가 나라의 정권을 잡고 나라를 번성하게 하는데 이때를 [[무주의 치]]라고 한다. 이후 내란으로 잠시 쇠퇴하였다가 [[현종]] 때에 다시 부흥하는데 이 시기를 [[개원의 치]]라고 한다. 이 시기는 국제적이고 개방적인 모습을 띠었다. 북방 이민족의 침공을 막고 수년간의 태평성대를 이룩한다. 그러나 [[안사의 난]] 이후 국세가 어려워진다. | |
− | |||
− | + | 이 시기에는 사회와 경제상으로도 수많은 변화를 낳았다. 새로운 품종과 농기구의 도입, 새로운 농법의 발전, 적극적인 개간과 간척으로 농업생간력이 대대적으로 발전했다. 특히 강남지방의 방전은 눈부실 정도여서 경제의 중심지가 화북에서 강남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상공업에 대한 국가의 규제와 간섭이 완화되어 상업이 발달하고, 운하망을 중심으로 교통의 요지에 대도시가 발전했으며 농촌에서도 시장이 등장했다. | |
− | |||
− | 안사의 | + | 또한 [[번진체제]]가 성립되었다. [[번진체제]]란, [[안사의 난]] 과정에서 반란군의 세력 확대 방지차원에서 설립된 체제이다. 각지에 절도사를 두고 다수의 병력을 지휘토록 했다. 번진을 관장하는 [[절도사]]는 군정권만을 장악했던 것과 달리 보통 관찰사와 주의 자사를 겸임했으므로 민정권과 재정권까지 장악한 거대한 지방세력이 되었다. 실질적으로 최고의 지방행정 단위가 되었다. |
+ | ===당의 후반기=== | ||
+ | 나라가 망조에 들어 후대에 가면 갈수록 환관들의 세력이 강해져 환관들에 의해 정책이 좌지우지되고, 많은 황제들이 환관들에 의해 살해당한다. 또한 농민반란이 대규모로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중앙 정부의 통제력을 잃어 [[절도사]]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고, 이를 틈타 북방 민족들의 침략이 본격화된다. | ||
− | + | [[안사의 난]]을 계기로 당조의 율령제는 확연히 변모한다. 토지제도인 [[균전제]]와 수취제도인 [[조용조]]는 [[양세법]]으로 통합된다. [[양세법]]은 토지 소유에 대한 국가의 제한을 없앤 제도로서 이후 국가 재정의 제도적 기반이 된다. | |
− | + | 결국 당나라는 [[황소의 난]]을 거쳐 절도사인 주전충에게 멸망당한다. | |
== 정치 == | == 정치 == | ||
36번째 줄: | 35번째 줄: | ||
== 문화 == | == 문화 == | ||
− | + | [[과거제]]에서는 유교에 관련된 서적에 대한 지식을 시험했다. 그래서 유학과 문학이 크게 발달하였는데 당나라 때에는 [[훈고학]]이라는 것이 크게 발달하였다. 이로 인해 사상의 획일화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한편 남북으로 갈라져 있던 문화를 융합하고, 귀족 사회를 배경으로 성숙한 당문화는 외형의 아름다움과 귀족 취미로 넘쳤고 다양한 외래 문물의 수용으로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문학의 경우 귀족 중심의 시가 발달하였는데 [[이백]]과 [[두보]]가 대표적인 시인이다. | |
56번째 줄: | 55번째 줄: | ||
| align="center" | 이세민 | | align="center" | 이세민 | ||
| align="center" | 626~649년 | | align="center" | 626~649년 | ||
− | | 626년~649년<br>이 시기를 역사상 '[[정관의 치|정관지치]]'라고 함<br>627년~645년<br>현장이 인도로 감 | + | | 626년~649년<br>이 시기를 역사상 '[[정관의 치|정관지치]]'라고 함<br>627년~645년<br>현장이 인도로 감<br>630년<br>당나라 군대가 동돌궐 군대를 격파함<br> |
|- | |- | ||
| align="center" | 고종 | | align="center" | 고종 | ||
163번째 줄: | 162번째 줄: | ||
| | | | ||
|} | |} | ||
− | |||
− | |||
==참고문헌== | ==참고문헌== | ||
− | + | * <<아틀라스 중국사>>, 박한제 외 3인, 사계절 출판사 | |
+ | * <<중국통사>>, 범문란, 꿈엔들 | ||
+ | *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신성곤, 윤혜영, 서해문집 | ||
+ | *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케임브리지 중국사>>, 패트리샤 버클리 에브리, 시공사 | ||
+ | * <<유목민 이야기>>, 김종래, 꿈엔들 | ||
[[분류:당나라| ]] | [[분류:당나라| ]] |
2016년 6월 27일 (월) 16:17 기준 최신판
개요
수나라를 멸망시킨 당(唐)은 현무문의 정변으로 권력을 장악한 2대 황제 당 태종(이세민) 때의 '정관의 치'와 측천무후 시대, 또 위씨 황후 치세를 극복해 낸 당 현종 때의 '개원의 치'로써 중국 역사상 매우 뚜렷한 정치사회적 제도의 틀을 완성한다. 그러나 양귀비의 득세로 말미암은 안사의 난으로부터 비롯한 갖가지 내전에 시달리다 결국 황소의 난으로 말미암아 약 300년 만에 나라의 문을 닫게 된다.
역사
건립과 통일과정
수말의 농민 대기의는 수 왕조를 전복시켰지만 승리의 결과는 태원 유수 이연에게 돌아갔다. 이연은 수의 붕괴가 반전될 수 없음을 깨닫고, 그의 아들인 이세민과 함께 병력을 모아 반수 거병을 모의하였다. 617년 5월 이연은 드디어 돌궐과 유무주의 태원 침공을 방어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징집하여 부유수 왕위와 고군아를 살해하고 진양에서 반수의 가치를 들었다. 이후 이연은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장안을 함락시키고 양제의 손자인 대왕 유를 황제로 추대한 후, 양제는 태상황에 추존하였고 스스로는 대승상,당왕의 직위를 갖고서 군정 대권을 장악한 후 618년에 수 양제를 시해한 뒤에 이연은 양유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당조를 건립하고 무덕이라 개원하니 그를 당 고조(이연)라 칭한다. 그 후 법령을 간소화 하는 등 민심을 수습하는 데 노력하였다. 군사상으로는 각지의 할거 세력에 대하여 원교근공의 책략에 입각하여 전국 통일의 사업을 주도해 나갔다. 623년에 하북으로 진군하여 두건덕의 잔존 부대인 유흑달을 소멸시키고 하북 지역을 확보한 뒤 624년 강회로 진군한다. 628년 돌궐에 의지하던 양사도가 부하에게 살해되어 당은 전국통일을 하게된다.
당나라 초반기
당을 건국하고 현종에 이르러 당나라의 북방에 위치한 돌궐을 복속시켜 영토를 크게 넓히면서 대제국으로서의 도약을 시작한다. 또한 조세제도와 토지제도, 군사제도를 정비하였다. 태종이 있었던 시기의 치세를 두고 정관의 치라고 부른다. 이후 고종이 즉위했고 당 고종은 신라의 요청을 받고 출정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 시키고 신라와 나당전쟁을 벌이게 된다.
당나라 중반기
측천무후가 나라의 정권을 잡고 나라를 번성하게 하는데 이때를 무주의 치라고 한다. 이후 내란으로 잠시 쇠퇴하였다가 현종 때에 다시 부흥하는데 이 시기를 개원의 치라고 한다. 이 시기는 국제적이고 개방적인 모습을 띠었다. 북방 이민족의 침공을 막고 수년간의 태평성대를 이룩한다. 그러나 안사의 난 이후 국세가 어려워진다.
이 시기에는 사회와 경제상으로도 수많은 변화를 낳았다. 새로운 품종과 농기구의 도입, 새로운 농법의 발전, 적극적인 개간과 간척으로 농업생간력이 대대적으로 발전했다. 특히 강남지방의 방전은 눈부실 정도여서 경제의 중심지가 화북에서 강남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상공업에 대한 국가의 규제와 간섭이 완화되어 상업이 발달하고, 운하망을 중심으로 교통의 요지에 대도시가 발전했으며 농촌에서도 시장이 등장했다.
또한 번진체제가 성립되었다. 번진체제란, 안사의 난 과정에서 반란군의 세력 확대 방지차원에서 설립된 체제이다. 각지에 절도사를 두고 다수의 병력을 지휘토록 했다. 번진을 관장하는 절도사는 군정권만을 장악했던 것과 달리 보통 관찰사와 주의 자사를 겸임했으므로 민정권과 재정권까지 장악한 거대한 지방세력이 되었다. 실질적으로 최고의 지방행정 단위가 되었다.
당의 후반기
나라가 망조에 들어 후대에 가면 갈수록 환관들의 세력이 강해져 환관들에 의해 정책이 좌지우지되고, 많은 황제들이 환관들에 의해 살해당한다. 또한 농민반란이 대규모로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중앙 정부의 통제력을 잃어 절도사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고, 이를 틈타 북방 민족들의 침략이 본격화된다.
안사의 난을 계기로 당조의 율령제는 확연히 변모한다. 토지제도인 균전제와 수취제도인 조용조는 양세법으로 통합된다. 양세법은 토지 소유에 대한 국가의 제한을 없앤 제도로서 이후 국가 재정의 제도적 기반이 된다.
결국 당나라는 황소의 난을 거쳐 절도사인 주전충에게 멸망당한다.
정치
당조는 수왕조에서 많은 각종의 정치체제를 이어받았고, 대외정책에서는 적극적인 책봉정책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문화권을 수립했다.수왕조에서 실시된 여러 제도들이 당나라까지 이어져 통일제국의 근간을 이루는 제도적 기반의 역할을 했다.
당대 관제의 중심은 3성6부제이다. 3성은 중서성, 문하성, 상서성을 말하고 6부는 이부, 호부, 예부, 병부, 형부, 공부를 말한다. 중서성에서 조칙 및 법안을 기초하면 문하성에서 그것을 심의한 후에 상서성에서 실시했다. 그리고 상서성에는 6부가 소속되어 업무를 담당했다.
지방행정을 위해서는 구도와 변경 등 특수한 지역에 부가 설치되었고, 일반적으로는 주와 그 아래에 현을 두었다. 이 제도가 바로 주현제이다.
관리를 선발하기 위한 제도로서는 수대와 마찬가지로 당대에도 과거제가 시행되었다. 토지제도는 균전제, 조세제도는 조용조, 군사제도는 부병제가 실시되었다.
문화
과거제에서는 유교에 관련된 서적에 대한 지식을 시험했다. 그래서 유학과 문학이 크게 발달하였는데 당나라 때에는 훈고학이라는 것이 크게 발달하였다. 이로 인해 사상의 획일화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한편 남북으로 갈라져 있던 문화를 융합하고, 귀족 사회를 배경으로 성숙한 당문화는 외형의 아름다움과 귀족 취미로 넘쳤고 다양한 외래 문물의 수용으로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문학의 경우 귀족 중심의 시가 발달하였는데 이백과 두보가 대표적인 시인이다.
역대 황제별 주요 사건
제호(帝號) | 이름 | 재위기간 | 주요사건 |
---|---|---|---|
고조 | 이연 | 618~626년 | 626년 현무문에서의 정변 |
태종 | 이세민 | 626~649년 | 626년~649년 이 시기를 역사상 '정관지치'라고 함 627년~645년 현장이 인도로 감 630년 당나라 군대가 동돌궐 군대를 격파함 |
고종 | 이치 | 649~683년 | 653년 진석정 봉기 657년 당나라 군대가 서돌궐을 격파 683년 이치가 병으로 죽고 무측천이 정사를 처리하게 됨 |
중종 | 이현 | 683년 | |
예종 | 이단 | 684년 | |
무후 | 무측천 | 684~705년 | 690년 무측천이 황제로 자칭하고 국호를 주라 고침 |
중종 | 이현 | 705~710년 | |
예종 | 이단 | 710~712년 | |
현종 | 이융기 | 712~755년 | 713~741년 이 시기를 역사상 '개원지치'라고 함 743~753년 감진이 바다를 건너 일본에 감 |
숙종 | 이형 | 756~762년 | |
대종 | 이예 | 762~779년 | 안사의 난 |
덕종 | 이괄 | 779~805년 | |
순종 | 이송 | 805년 | |
현종 | 이순 | 805~820년 | |
목종 | 이항 | 820~824년 | |
경종 | 이담 | 824~826년 | |
문종 | 이양 | 826~840년 | |
무종 | 이염 | 840~846년 | |
선종 | 이침 | 846~859년 | 구보의 난 |
의종 | 이최 | 859~873년 | |
희종 | 이현 | 873~888년 | 황소의 난 |
소종 | 이엽 | 888~904년 | |
애제 | 이축 | 904~907년 |
참고문헌
- <<아틀라스 중국사>>, 박한제 외 3인, 사계절 출판사
- <<중국통사>>, 범문란, 꿈엔들
-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신성곤, 윤혜영, 서해문집
-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케임브리지 중국사>>, 패트리샤 버클리 에브리, 시공사
- <<유목민 이야기>>, 김종래, 꿈엔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