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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禾]]가 의미부이며 舀가 소리부인 형성자다. 여기서의 벼는 벼 중에서도 특히 일년생 초본식물인 벼를 의미하는데, 절구에 찧어 껍질을 벗겨서 얻어지는 벼를 표현한 것이다. 손으로 벼[[파일:벼갑골.jpg]]를 잡아서 절구 안에 넣은 후에[[파일:절구안에넣은후.jpg]], 벼를 빻아 쌀알을 분리해내는 모습을 나타낸 글자다. 중국인에게 쌀은 없어서는 안 될 주식이기 때문에, ‘필수품’이라는 뜻도 파생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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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稻는 벼과의 농작물이다. 통상적으로 쌀의 논벼에서 껍데기를 벗긴 것을 가리킨다. [[갑골문]]에서 稻는 쌀이 항아리 안에 들어 있는 모습과 닮았는데, 이는 그 당시 쌀 비축 방식이었다. [[금문]]에서는 촌락 안에서 타작마당을 하는 풍경을 보여준다. 윗부분은 마당 위에 꽂힌 부족 깃발을 가리키고, 아랫부분은 절구에 쌀이 들어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금문과 [[소전]]의 글자는 상당히 흡사한데, 이 둘의 왼쪽은 禾를 가리키고, 오른쪽은 절구를 다루고 있는 손을 가리킨다. [[예서]]에서 쓰인 글자가 금문으로 발전했다.<ref>웅국영 (熊國英), 《图释古汉字》, 46쪽</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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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를 절구에 넣어 찧는 모습은 금문에서부터 찾아 볼 수 있다. 따라서 상주시기 이전부터도 절구통에 벼를 넣고 찧어 쌀알을 분리하는 문화가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벼농사 유적지는 신석기 시대의 유적이 있는 절강성의 “河姆渡 유적”이며, 이 곳에 많은 양의 낟알과 짚이 퇴적되어 있었다고 한다. | 벼를 절구에 넣어 찧는 모습은 금문에서부터 찾아 볼 수 있다. 따라서 상주시기 이전부터도 절구통에 벼를 넣고 찧어 쌀알을 분리하는 문화가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벼농사 유적지는 신석기 시대의 유적이 있는 절강성의 “河姆渡 유적”이며, 이 곳에 많은 양의 낟알과 짚이 퇴적되어 있었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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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稻에 대해 설문해자에서는 “稻는 찰벼이다. 禾를 따르고, 舀는 성부이다”라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쌀은 남방의 산물로, 화북지방에서는 수입한 벼 알갱이만 볼 수 있을 뿐 포기와 줄기의 형태까지는 보기 힘들다.<ref>허진웅 (許進雄), 《중국 문자학 강의》, 175쪽</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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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벼를 뜻하는 稻자의 금문 중에 ([[파일:稻 금문.png|20픽셀]])가 있는데, 이 자형에는 많은 의미 정보를 담고 있다. 자형의 윗부분부터 분석하면, 벼를 뜻하는 禾와 손을 나타내는 爫, 그리고 곡물을 나타내는 [[米]], 그 아래에 곡물을 찧는 절구를 나타내는 臼로 구성되어 있다. 벼의 낟알을 穀(곡식 곡)이라고 하며, 그 표면의 딱딱한 껍질을 벗겨낸 것을 米라고 하고, 이것을 익혀서 밥을 만든다. 이 稻자의 금문 자형은 도정搗精 과정을 형상적으로 나타내고 있다.<ref>왕닝,《『설문해자』와 중국고대문화》,pp.235-236</ref> | ||
<ref>하영삼, 『한자어원사전』, 도서출판3, 2014, p150</ref><ref>廖文豪, 『汉字树 3』, 吉西平, 2015, p106</ref><ref>阿辻哲次, 『漢字의 수수께끼』, 이기형, 학민사, 1994, p41-42</ref> | <ref>하영삼, 『한자어원사전』, 도서출판3, 2014, p150</ref><ref>廖文豪, 『汉字树 3』, 吉西平, 2015, p106</ref><ref>阿辻哲次, 『漢字의 수수께끼』, 이기형, 학민사, 1994, p41-42</ref> |
2020년 12월 15일 (화) 20:22 기준 최신판
語源
禾가 의미부이며 舀가 소리부인 형성자다. 여기서의 벼는 벼 중에서도 특히 일년생 초본식물인 벼를 의미하는데, 절구에 찧어 껍질을 벗겨서 얻어지는 벼를 표현한 것이다. 손으로 벼를 잡아서 절구 안에 넣은 후에
, 벼를 빻아 쌀알을 분리해내는 모습을 나타낸 글자다. 중국인에게 쌀은 없어서는 안 될 주식이기 때문에, ‘필수품’이라는 뜻도 파생되었다.
稻는 벼과의 농작물이다. 통상적으로 쌀의 논벼에서 껍데기를 벗긴 것을 가리킨다. 갑골문에서 稻는 쌀이 항아리 안에 들어 있는 모습과 닮았는데, 이는 그 당시 쌀 비축 방식이었다. 금문에서는 촌락 안에서 타작마당을 하는 풍경을 보여준다. 윗부분은 마당 위에 꽂힌 부족 깃발을 가리키고, 아랫부분은 절구에 쌀이 들어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금문과 소전의 글자는 상당히 흡사한데, 이 둘의 왼쪽은 禾를 가리키고, 오른쪽은 절구를 다루고 있는 손을 가리킨다. 예서에서 쓰인 글자가 금문으로 발전했다.[1]
文化
벼를 절구에 넣어 찧는 모습은 금문에서부터 찾아 볼 수 있다. 따라서 상주시기 이전부터도 절구통에 벼를 넣고 찧어 쌀알을 분리하는 문화가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벼농사 유적지는 신석기 시대의 유적이 있는 절강성의 “河姆渡 유적”이며, 이 곳에 많은 양의 낟알과 짚이 퇴적되어 있었다고 한다.
稻에 대해 설문해자에서는 “稻는 찰벼이다. 禾를 따르고, 舀는 성부이다”라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쌀은 남방의 산물로, 화북지방에서는 수입한 벼 알갱이만 볼 수 있을 뿐 포기와 줄기의 형태까지는 보기 힘들다.[2]
벼를 뜻하는 稻자의 금문 중에 ()가 있는데, 이 자형에는 많은 의미 정보를 담고 있다. 자형의 윗부분부터 분석하면, 벼를 뜻하는 禾와 손을 나타내는 爫, 그리고 곡물을 나타내는 米, 그 아래에 곡물을 찧는 절구를 나타내는 臼로 구성되어 있다. 벼의 낟알을 穀(곡식 곡)이라고 하며, 그 표면의 딱딱한 껍질을 벗겨낸 것을 米라고 하고, 이것을 익혀서 밥을 만든다. 이 稻자의 금문 자형은 도정搗精 과정을 형상적으로 나타내고 있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