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신"의 두 판 사이의 차이

Chines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노신 문학의 특징)
 
(사용자 2명의 중간 판 8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60번째 줄: 60번째 줄:
 
한가지 예로 노신의 순수창작소설 <[[광인일기]]>을 살펴보자면, 소설의 줄거리는 결국 광인의 피해망상증이 회복되어 조그마한 관직에 오르는 것으로 결론이 나지만, 노신은 소설의 플롯을 재배열함으로써 광인의 일기 마지막 구절이자 소설의 마지막 문구인 “사람을 먹어본 적 없는 아이가 있을까? 아이를 구해야 한다'의 여운을 극대화 시킨다. 또한, 소설의 서장 부분을 문언문으로, 광인의 일기 부분을 백화문으로 작성하여 문장의 서술양식만으로 범인(凡人)과 광인의 뚜렷한 경계를 형성하였다는 점에서 문학가 노신만의 치밀하며 독창적인 문장구성 방식을 가늠할 수 있다.
 
한가지 예로 노신의 순수창작소설 <[[광인일기]]>을 살펴보자면, 소설의 줄거리는 결국 광인의 피해망상증이 회복되어 조그마한 관직에 오르는 것으로 결론이 나지만, 노신은 소설의 플롯을 재배열함으로써 광인의 일기 마지막 구절이자 소설의 마지막 문구인 “사람을 먹어본 적 없는 아이가 있을까? 아이를 구해야 한다'의 여운을 극대화 시킨다. 또한, 소설의 서장 부분을 문언문으로, 광인의 일기 부분을 백화문으로 작성하여 문장의 서술양식만으로 범인(凡人)과 광인의 뚜렷한 경계를 형성하였다는 점에서 문학가 노신만의 치밀하며 독창적인 문장구성 방식을 가늠할 수 있다.
  
 +
또 다른 예로는 <아Q정전>이 있다. 아Q가 혁명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받지 못하고 결국에는 스스로 영문도 모른채 싱겁게 죽는 결말은 독자에게 여운을 남긴다. 아Q가 처형장으로 끌려갈 때 아Q의 죽음을 그저 구경거리로 소비하러 온 사람들의 시선을 ‘둔하면서도 예리한, 그의 말을 씹어 먹고도 또 육신 이외의 무언가를 씹어 먹으려는 듯 영원히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그를 따라오는 눈길들’이라고 묘사함으로써 아Q의 정신적 외상을 강조하고 비극성을 강화한다. 힘없는 인물은 혁명에 참여할 수 없는 것과 더불어 이러한 인물에 대해 큰 관심이 없는 세태는 신해혁명이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되지 못하고 위로부터의 혁명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비판하는 장치로 볼 수 있다.
  
주목할 만한 잡문은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이다. 창작 배경과 내용을 살펴보면 루쉰의 삶과 매우 밀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북경여자사범대학 사건, 3.18 사태, 국민당 정부의 상하이 쿠데타와 같은 강압적이고 잔인한 일들이 벌어지는 가운데 이에 대해 분노하여 쓴 작품이다. 위에서 언급한 그의 말년에 이 시기를 기점으로 순수 문학창작보다는 산문과 잡문을 통해 더욱 더 직접적이며 날이 서 있는 글들로 자신의 사상을 표출한 것 중 하나가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이다.  
+
 
 +
그 외에 주목할 만한 잡문은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이다. 창작 배경과 내용을 살펴보면 루쉰의 삶과 매우 밀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북경여자사범대학 사건, 3.18 사태, 국민당 정부의 상하이 쿠데타와 같은 강압적이고 잔인한 일들이 벌어지는 가운데 이에 대해 분노하여 쓴 작품이다. 위에서 언급한 그의 말년에 이 시기를 기점으로 순수 문학창작보다는 산문과 잡문을 통해 더욱 더 직접적이며 날이 서 있는 글들로 자신의 사상을 표출한 것 중 하나가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이다.  
 
루쉰은 정신 계승의 힘에 의지하였고, 정신적 차원에서 순종적인 도구를 비판하였다.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는 이러한 의식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루쉰에 의하면 ‘진심으로 공정한 도리를 논하는 사람’은 복수하지 말고 용서를 해야 한다고 하였지만, 그는 이러한 ‘절대선’을 정신적 차원의 순종적 도구이자 규범, 즉 타파해야 할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절대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오로지 자기 기준에 따라 다른 사람을 규제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루쉰은 정신 계승의 힘에 의지하였고, 정신적 차원에서 순종적인 도구를 비판하였다.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는 이러한 의식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루쉰에 의하면 ‘진심으로 공정한 도리를 논하는 사람’은 복수하지 말고 용서를 해야 한다고 하였지만, 그는 이러한 ‘절대선’을 정신적 차원의 순종적 도구이자 규범, 즉 타파해야 할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절대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오로지 자기 기준에 따라 다른 사람을 규제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이 글을 통해 평등의 가치에 대한 믿음을 드러낸다. 당시 중국은 여러 이중 도덕이 존재하여 주인과 노예, 남자와 여자 등 서로 다든 도덕을 가지고 있어 여러 가지의 불평등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의를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만 유독 평등하게 보고 대한다면 그것은 실로 섣부른 판단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무조건적인 평등은 아직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글을 통해 평등의 가치에 대한 믿음을 드러낸다. 당시 중국은 여러 이중 도덕이 존재하여 주인과 노예, 남자와 여자 등 서로 다든 도덕을 가지고 있어 여러 가지의 불평등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의를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만 유독 평등하게 보고 대한다면 그것은 실로 섣부른 판단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무조건적인 평등은 아직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100번째 줄: 102번째 줄:
  
 
또한 왕후이가 본 루쉰은 진정한 혁명과 영원한 혁명을 추구하며, 스스로 정신계의 전사가 된인물이다. 루쉰은 민중의 내면에 경종을 울릴 정신계의 전사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나는 천재가 태어나기를 바라기 전에 먼저 천재를 낳고 자라게 할 만한 민중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라고 주장한다. 민중이 약소민족의 문학을 읽고 그들의 상황을 이해하고 투쟁정신을 본받아 계몽되면, 정신계의 전사를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왕후이는 이러한 계몽 과정을 이끌 전사가 필요한 상황에서 그는 스스로가 ‘정신계의 전사’가 되었다고 평했다. 다만 그는 문단이라는 새로운 공간에서 정신계의 전사가 되었다. 왕후이는 “집단적 정치투쟁에서도 그는 고도의 민첩성과 자주성을 유지했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새로운 비판 공간을 새로이 만들어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왕후이에 의하면 그가 의지한 것은 정신 계승의 힘뿐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왕후이가 본 루쉰은 진정한 혁명과 영원한 혁명을 추구하며, 스스로 정신계의 전사가 된인물이다. 루쉰은 민중의 내면에 경종을 울릴 정신계의 전사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나는 천재가 태어나기를 바라기 전에 먼저 천재를 낳고 자라게 할 만한 민중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라고 주장한다. 민중이 약소민족의 문학을 읽고 그들의 상황을 이해하고 투쟁정신을 본받아 계몽되면, 정신계의 전사를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왕후이는 이러한 계몽 과정을 이끌 전사가 필요한 상황에서 그는 스스로가 ‘정신계의 전사’가 되었다고 평했다. 다만 그는 문단이라는 새로운 공간에서 정신계의 전사가 되었다. 왕후이는 “집단적 정치투쟁에서도 그는 고도의 민첩성과 자주성을 유지했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새로운 비판 공간을 새로이 만들어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왕후이에 의하면 그가 의지한 것은 정신 계승의 힘뿐이었기 때문이다.
 +
 +
===[[첸리췬]]===
 +
첸리췬은 전임 북경 대학 중문과 교수로 주로 노신에 대한 강의를 담당했고 2002년 퇴임했다. 중국 노신 연구계의 가장 대표적인 학자로 불린다. 대표 저서로는 『영혼의 탐색』, 『주씨 형제 이야기-북경대학 강연록의 하나』, 『당대 노신에 접근하며』,『내 정신의 자서전』, 『망각을 거부하라』 등이 있다. <br>첸리췬의 노신 연구의 특징으로는 '노신과의 정신적인 만남', '역사적 중간물 개념의 제기', '입인(立人)사상의 강조' 등이 있다. 1980년대에는 '역사적 중간물'로서의 노신의 개념을 제기하여, 노신이 역사적 전환기에 '창끝을 되돌려 자기편을 공격하지만 동시에 뒤얽혀 벗어날 수 없는' 노신과 중국 전통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강조했다.”<ref>연광석 , 『전리군과의 대화』, 한울아카데미, 2014.04.15, 83p.g.</ref> 그리고 이것을 모택동 시절에 받았던 핍박과 모택동주의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자신과 연결한다.  1990년대에는 당시 중국에서 진행되던 지식인의 분화 속에서 노신을 '입인사상의 강조'로 사용하였다. 즉, 노신의 태도와 정신을 이어받아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당대의 문제점을 비판하겠다는 지식인의 자세를 강조한 것이다. 앞서 말한대로 그는 노신을 봉건전통에 맞서 싸웠지만 자신도 이를 벗어날 수 없었던, 그리하여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비판을 하고 영구 혁명을 꿈꾼 사람이라고 평가하며 이를 자신의 삶과 연결짓는다. 이러한 그의 연구 방법은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비판도 받을 수 있지만, 현실 의의를 중시하고 실천성을 추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
 +
===[[다케우치 요시미]]===
  
 
==작품 목록==
 
==작품 목록==
138번째 줄: 145번째 줄:
 
4) <인물 세계사: 현대 중국문학을 대표하는 ‘아Q정전’의 작가 루쉰> 박중서 저<br>
 
4) <인물 세계사: 현대 중국문학을 대표하는 ‘아Q정전’의 작가 루쉰> 박중서 저<br>
 
5) <정신계의 전사, 노신> 엄영욱 저<br>
 
5) <정신계의 전사, 노신> 엄영욱 저<br>
6) <절망에 반항하라> 왕후이 저
+
6) <절망에 반항하라> 왕후이 저<br>
 +
7) 연광석·이홍규 , 『전리군과의 대화』, 한울아카데미, 2014.04.15  ISBN : 9788946056787

2018년 12월 5일 (수) 16:47 기준 최신판

노신(鲁迅,lǔ xùn)

출생 1881.09.25
절강성 소흥부(浙江省 绍兴)
사망 1936.10.19
강소성 상하이(江蘇省 上海)
가족 동생 저우쭤런, 첫번째 아내 주안, 두번째 아내 쉬광핑
주요 작품 광인일기, 아Q정전, 야초 등등
관련 활동 문학가, 사상가


근현대 중국 국민문화의 어머니

 
— 타케우치 요시미(문학 평론가), <근대의 초극>

개요

노신(鲁迅), 절강성 소흥에서 태어났으며 어린시절 본명은 주장수(周樟寿) 후에 주수인(周树人)으로 개명하였다.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노신이란 이름은 1918년 5월 <신청년(新靑年)>에 발표한 소설 <광인일기>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필명이다. 중국 근현대사를 배우는 데 있어 빠질 수 없는 인물 중 한 명이며, 대내외적으로 중국을 대표하는 문학가이자 사상가로 평가받는다. 마오쩌둥은 노신에 대하여 "노신의 방향이야말로, 중화 민족의 신문화의 방향"이라 평하기도 하였다(하지만 노신에 대한 마오의 고평가는 정치적인 이유를 배제하기 어렵다.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항목에서 다시 서술).

생애

어린시절

1881년 9월 25일 절강성 소흥에서 태어난 노신은 그 당시 지역에서 나름대로 위세 있는 사대부 집안의 장남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신화, 전설 및 소설 등을 즐겨 읽었으며 그림 모사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대갓집 출신답게 어려서부터 고서를 포함한 전통 교육을 받았지만, 그의 조부와 아버지는 '소설을 통해 문장의 법칙을 깨우치면 경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노신의 소설 읽기를 오히려 더 권장하였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 노서(鲁瑞) 또한 소설과 탄사를 즐겨 읽었으며 청말 전족폐지 운동이 일어났던 시기에 가장 앞장서서 전족을 풀어버렸던 (당시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보면) 진보적인 여성이었다. 노서는 농촌 출신으로 어린 노신에게 농촌 민중들의 생활과 삶을 깊이 있게 보여주었는데, 이러한 유년기의 성장배경은 노신의 민중관 형성과 전통적인 봉건제 사회의 모순점을 파악하는 데 큰 영향을 준 요소라 추측할 수 있으며, 문학가로서 본인의 잠재력에 눈을 뜨게 한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유학 시절과 초기작품활동 시기

이렇듯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노신이었으나 그가 13세가 되던 시기 조부가 뇌물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고 아버지가 중병에 걸리면서 집안이 급속도로 몰락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노신의 집안은 아버지의 병간호를 위해 가산을 털어 명망 있는 한의사와 약방을 전전하였으나 별다른 진전 없이 세상을 뜨고 만다. 비슷한 시기에 노신은 본가를 떠나 남경의 수사학당(해군학교)에 진학하고 곧이어 광무철로학당으로 옮겨 신학문을 접하기 시작한다. 가끔 일부 사람들은 이 시기를 '소년 노신이 봉건제도 아래 탄압받던 민중을 구하기 위해 진리를 찾아 떠난 첫 여정'쯤으로 과대해석하는데, 노신 스스로가 자신의 저서 <외침>에서 '내가 남경에 진출한 이유는 새로운 지방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사귀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가장 컸다'라고 밝힌바 있다. 1902년 남경에서 졸업한 노신은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고, 센다이 의학전문학교에서 입학하여 서양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노신은 비과학적인 중의학이 아버지를 병사하게 만든 이유 중 하나라 보았으며, 더욱 더 근대적이고 과학적인 서양의학을 배워 아버지처럼 신체적으로 고통받는 중국 민중을 치료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였다. 하지만 의학 공부에 매진하던 시기, 학교의 '환등기'를 통해 목격한 중일전쟁의 참상(중국인 한 명이 일본군에게 처형당하는 모습을 무기력한 중국 민중이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은 노신에게 각성의 계기가 된다. 노신은 이 '환등기 사건'을 통해 '민중들의 신체가 아무리 건강하다 한들 정신이 썩어있다면 그들에게 미래란 없다'라고 판단하고 민중의 신체를 치료하는 의학에서 그들의 정신을 계몽시킬 수 있는 문학으로 방향을 급격히 선회한다.

센다이 의학전문학교에서 자퇴한 노신은 한동안 일본 도쿄에 머물면서 현지의 지식인들과 교류를 하였고, 앞서 언급한 문학을 통한 민중의 계몽을 위해 외국작품의 번역과 문장 투고에 전념한다. 이 시기에 노신 최초의 문장인 <스파르타의 혼(테르모필레 전투에 관한 번역소설)>이 유학생 잡지에 투고되었으며, 그의 동생 조우주런(周作人)과 함께 문학 활동을 이어갔으나 본국의 가정형편이 어려워 지면서 노신은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귀국 후 사범학교와 북경 임시정부의 교육부를 전전하면서 계몽 정신을 이어갔지만, 당시 중국 현실의 높은 벽에 가로막혀 좌절을 맛보고 허무감 사로잡혀 집에 첩거 후 고전정리에만 몰두하였다. 이러한 생활을 반복하던 노신은 1920년대 초부터 갑작스럽게 문학창작활동에 나서는데. 이러한 노신의 심경변화에 대한 설명은 그의 첫 번째 소설집인 <외침> 서문에서 잘 설명돼있다.

"노신과 일본유학 시절부터 교류했던 친구이자 학자인 전현동(錢玄同)은 어느 날 방에서 고문 필사에 몰두하던 노신을 찾아가 <신청년> 에
글을 투고해줄 것을 부탁한다. 이에 대해 노신은 “가령 창문이 하나도 없고 무너트리기 어려운 무쇠로 지은 방이 있다고 하세. 만일 그 방에서
많은 사람이 깊이 잠이 들었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막혀 죽을 게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죽는다면 죽음의 슬픔을
느끼지는 않을 걸세. 지금 자네가 큰소리를 쳐서 잠이 깊이 들지 않은 몇몇 사람을 깨워, 그 불행한 사람들에게 임종의 괴로움을 맛보게 한다면
오히려 더 미안하지 않은가?"라고 대답하자 전현동은 이렇게 반문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이 일어난 이상, 이 무쇠 방을 무너트릴 희망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잖은가.”

이러한 전현동의 반론에 노신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1918년 5월 <신청년>에 자신의 첫 번째 단편소설인 <광인일기>를 기고한다. <광인일기>를 기점으로 노신은 창작활동을 활발히 하여 당시의 중국사회와 중국 민중들의 현실을 생동감 있게 묘사한 <아Q정전>의 첫 회를 1921년에 기고하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사회적 투쟁과 말년

1920년대부터 노신은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하였고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던 북경 여자사범대학의 학생운동에도 동참하였다. 사범대학의 학교 이사진들이 개혁성향의 학생들을 대거 퇴학시키자 학생들은 이에 반발하여 교내에서 투쟁을 감행하였고, 교육부는 이를 막기 위해 학교의 폐교를 결정한다. 학생들의 투쟁을 통해 학교는 어렵게 다시 운영되고 학생들도 복귀할 수 있었지만, 당시 학생들의 운동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던 노신은 비난을 받고 13년간 몸담았던 교육부에서 파면당하였다. 1920년대는 노신을 포함한 지식인 계층에게 암울했던 시기였다. 1926년 3월 18일, 학생과 시민들의 평화시위를 군벌 정부가 무력진압하면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혁명에 뛰어들었던 노신의 젊은 제자들 역시 희생당하였다. 3·18 사태가 벌어진 지 1주일 뒤 노신을 포함한 지식인들을 반정부 인사로 규정하고 수배령을 발포하였으며, 이로 인해 노신은 자신의 여제자인 쉬광핑(許廣平)과 함께 도피생활에 들어간다. 1927년 4월 12일 국민당 정부는 상하이 쿠데타를 통해 백색테러를 일으켜 지식인들과 공산당원들을 대거 숙청한다. 이렇듯 1920년대에 일어난 일렬의 사건들은 노신에게 크나큰 충격과 비극 그리고 분노를 안겨주었으며, 이 시기를 기점으로 노신은 순수 문학창작보다는 산문과 잡문을 통해 더욱 더 직접적이며 날이 서 있는 글들로 자신의 사상을 표출하였다. 말년에 가까운 1930년에 좌익작가연맹에 참가하였으며, 1932년에는 중국민권보장동맹의 발기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몇 해 지나지 않아 평소 지병이던 천식과 폐결핵이 악화하여 중일전쟁 발발 1년 전인 1936년 10월 19일 향년 5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장례식은 사흘 뒤인 10월 22일에 진행되었으며, 민족혼’(民族魂)이라 쓰인 천과 함께 묘지에 묻혔다.

혁명가와 사상가의 경계

노신이 일찍이 의학도의 길을 접고 문학창작의 길에 투신한 이유는 중국 인민들의 정신세계를 계몽시켜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는데 뜻이 있어서이다. 이러한 초창기 노신의 의도와 맞물려 중국 공산당과 모택동은 노신을 ‘위대한 사상가이자 혁명가’로 포장하여 정치적 도구로 사용하였는데 이러한 대외적 이미지에 영향을 받아 노신이란 인물을 혁명가로 해석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노신에 대한 당시의 중국 공산당 평가 역시 노신의 혁명적 성향을 과대평가하게 하지만, 문학가로서의 성취를 과소평가하게 만드는 면이 어느 정도 존재하며, 이러한 정치적 해석 때문인지 대만에서는 노신을 좌익작가로 분류하여 80년대까지 그의 작품을 금서로 지정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국내에서도 중국의(정확히는 대만) 영향을 받아 노신의 계몽주의적 사상과 혁명성에 중점을 두어 편향적인 해석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2000년대 이후로 중국과 한국을 막론하고 노신 그리고 그의 사상과 문학을 좀 더 입체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늘어나고 있다.

사실 노신을 혁명가로 명확하게 규정하기는 어렵다고 볼 수 있다. 혁명가들이란 구체제를 뜯어고치고 불확실한 미래를 설계하는 사람들을 말하는데, 혁명을 달성하기 위해 본인의 사상에 확고한 신념이 있는 자들이 대다수다. 어떻게 보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신념과 희망을 중시하는 게 혁명가라 볼 수 있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노신은 정반대의 인간이었다. 노신은 철저하게 현실주의자였으며 생애 전반에 걸쳐 한 가지 사상에 몰두하지 않았으며 끊임없이 현실을 냉철하게 판단하고 비판을 가하길 멈추지 않았다. 말년에 좌련에 가담하여 공산당의 정책에 대해 일정한 지지를 표명하기도 했지만, 반면에 중국 공산당의 노선에 동화되지 않고 끊임없이 비판을 가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노신의 성향은 그가 1925년에 쉬광핑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노신은 ‘자신의 사상이 너무 어두워 다른 이들을 전염시키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자신의 사상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확신은 없지만 그런데도 저항을 계속하겠다는 다짐은 진심이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따라서 노신은 혁명가보다는 사상가이자 문학가에 더 근접한다고 볼 수 있으며, 인물해석에서도 더 접근하기 쉬울 것이다


노신 문학의 특징

사실 노신이 생전에 창작한 문학 작품의 수는 중편 1편과 단편 32편으로 중국의 대문호라는 칭호에 비해 그 수가 비교적 적은 편이다. 문서 상단에서 언급한 일본의 문학평론가 ‘다케우치 요시미’역시 중국의 근현대 문학 속에서 노신의 영향력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문장이 난해하다는 점을 들어 ‘노신의 소설은 재미가없다’라고까지 평가하였다. 노신 본인 또한 자신의 순수 창작능력에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면서 잡문과 번역 작업에 몰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노신의 문학적 기교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문장을 통해 독자들에게 메세지를 전달하는 방식은 매우 강렬하고 ,깊은 인상과 여운을 심어주는 매력이 있음은 분명하다.

하단의 내용은 특정 작품의 줄거리, 결말 또는 중점요소에 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용 누설을 원하지 않으신다면 문단을 건너 뛰어주시기 바랍니다.


한가지 예로 노신의 순수창작소설 <광인일기>을 살펴보자면, 소설의 줄거리는 결국 광인의 피해망상증이 회복되어 조그마한 관직에 오르는 것으로 결론이 나지만, 노신은 소설의 플롯을 재배열함으로써 광인의 일기 마지막 구절이자 소설의 마지막 문구인 “사람을 먹어본 적 없는 아이가 있을까? 아이를 구해야 한다'의 여운을 극대화 시킨다. 또한, 소설의 서장 부분을 문언문으로, 광인의 일기 부분을 백화문으로 작성하여 문장의 서술양식만으로 범인(凡人)과 광인의 뚜렷한 경계를 형성하였다는 점에서 문학가 노신만의 치밀하며 독창적인 문장구성 방식을 가늠할 수 있다.

또 다른 예로는 <아Q정전>이 있다. 아Q가 혁명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받지 못하고 결국에는 스스로 영문도 모른채 싱겁게 죽는 결말은 독자에게 여운을 남긴다. 아Q가 처형장으로 끌려갈 때 아Q의 죽음을 그저 구경거리로 소비하러 온 사람들의 시선을 ‘둔하면서도 예리한, 그의 말을 씹어 먹고도 또 육신 이외의 무언가를 씹어 먹으려는 듯 영원히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그를 따라오는 눈길들’이라고 묘사함으로써 아Q의 정신적 외상을 강조하고 비극성을 강화한다. 힘없는 인물은 혁명에 참여할 수 없는 것과 더불어 이러한 인물에 대해 큰 관심이 없는 세태는 신해혁명이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되지 못하고 위로부터의 혁명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비판하는 장치로 볼 수 있다.


그 외에 주목할 만한 잡문은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이다. 창작 배경과 내용을 살펴보면 루쉰의 삶과 매우 밀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북경여자사범대학 사건, 3.18 사태, 국민당 정부의 상하이 쿠데타와 같은 강압적이고 잔인한 일들이 벌어지는 가운데 이에 대해 분노하여 쓴 작품이다. 위에서 언급한 그의 말년에 이 시기를 기점으로 순수 문학창작보다는 산문과 잡문을 통해 더욱 더 직접적이며 날이 서 있는 글들로 자신의 사상을 표출한 것 중 하나가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이다. 루쉰은 정신 계승의 힘에 의지하였고, 정신적 차원에서 순종적인 도구를 비판하였다.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는 이러한 의식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루쉰에 의하면 ‘진심으로 공정한 도리를 논하는 사람’은 복수하지 말고 용서를 해야 한다고 하였지만, 그는 이러한 ‘절대선’을 정신적 차원의 순종적 도구이자 규범, 즉 타파해야 할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절대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오로지 자기 기준에 따라 다른 사람을 규제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이 글을 통해 평등의 가치에 대한 믿음을 드러낸다. 당시 중국은 여러 이중 도덕이 존재하여 주인과 노예, 남자와 여자 등 서로 다든 도덕을 가지고 있어 여러 가지의 불평등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의를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만 유독 평등하게 보고 대한다면 그것은 실로 섣부른 판단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무조건적인 평등은 아직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리얼리즘

노신은 고전문학을 가리켜 '기만의 문학이자 아름다운 수의에 덮인 주검'이라 묘사하였는데, 항상 완벽하고 행복한 결말을 맺는 전통 희극이 사람들의 의식을 마비시켜 자신들의 암울한 현실을 아무런 사고와 비판 없이 받아들이게 하는 원흉이라 평가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기만 문학을 비판하면서 "가면을 벗어 던지고 참답고 심각하게 인생을 들여다보고 그것의 피와 살을 그려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는데, 노신 문학의 사실주의는 이러한 사고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노신의 사실주의는 인물이나 사물의 표면적인 모습을 있는 그대로 투영하거나 묘사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사실주의를 추구하는 문학이나 예술이 반드시 그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작품을 창작하는데 있어서도 노신은 현실의 특정한 사건이나 인물을 있는 그대로 모델로서 사용하지 않고 여러 인물군상들과 함께 생활하고 깊이 있게 관여하여 그들의 본질적인 특징과 보편성을 잡아내어 표현하였는데, 이러한 방법으로 탄생한 대표적인 캐릭터가 바로 '아Q'라 할 수 있다. 아Q는 현실에 존재하는 특정한 개인을 모티브 삼은 게 아니며, 노신이 고향 사람들과 주변 인물들에 대한 전형화를 통해 만들어진 그 당시 중국 민중의 표상이다. 노신적 사실주의와 전형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캐릭터의 영향력은 단순히 중국 민중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실로 그 생명력이 대단하다고 볼 수 있는데, 국적을 막론하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아Q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며, 실례로 <아Q정전>이 연재되던 시기에 노신의 주변인들을 포함한 중국 민중은 소설 속 아Q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고한다. 프랑스 작가 로맹 롤랑은 아Q의 이야기는 중국인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며, 현대인들과 많은 사람의 이야기'라고 언급한 바가 있다.

평가와 비판

마오쩌뚱

앞서 언급하였다시피, 마오는 노신을 상당히 높게 평가하며, 중국 혁명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인물이라고까지 표현하였는데, 이러한 평가를 당시의 정치적인 맥락 아래서 판단하여야 할 필요성이 있다. 모택동과 그의 공산당원들이 중화인민공화국을 건설하는 데 있어 실질적인 혁명운동과 투쟁을 벌인 주체(하드웨어)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으나,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신적 기틀과 사상(이른바 소프트웨어)을 확립한 인물이라고 보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혁명의 당위성으로 내건 공산주의와 이를 기반으로 한 혁명적 사상은 당시 중국 인민들에게도 생소하였을 뿐만 아니라 모택동 본인조차 그 방향성을 확립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모택동은 혁명을 달성하는 데 있어서 본인과 당에 부족한 소프트웨어, 즉 사상적인 측면을 중국 최초의 근현대 작가이자 대문호인 노신을 통해 보충하고자 하였다. 모택동은 때로 노신의 작품에 새로운 해석을 더 하거나 왜곡하였으며, 공산 혁명의 당위성을 확보하고자 노신을 공산 혁명의 ‘성인’으로 추대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표면적인 작업과는 별개로 모택동 개인이 노신이라는 인물과 그의 작품에 대해서 심도 있는 이해를 바탕으로 높이 평가하였는지는 다소 회의적이다. 모택동은 오로지 노신이 중국 인민들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심이 있다는 점에만 초점을 맞췄으며 1938년 한 강연에서 “농공 간부들이 글을 배웠다면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문장을 짓는 데 있어서 결코 노신보다 뒤처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는데, 이러한 발언은 문학가로서 노신의 성취를 깎아내렸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1950년대 반우파 운동이 한창인 시기, ‘만약 노신이 지금 살아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지인의 질문에 ‘감옥에 갇혀 계속 글을 쓰거나 돌아가는 사태를 보며 침묵하였을 것’이라 응대하였다. 이러한 답변 역시 모택동 노신을 정치적 도구로 이용했을 뿐 그의 문학 작품에서 표출되는 사상에 대해서는 반대하고 있다는 점을 뒷밭침해 주는 근거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만약 노신이 중공성립 때까지 살아있었다고 가정해보자면, 노신 역시 마오를 강도 높게 비판하였을 것이다. 노신은 생전에 문학이 혁명의 도구나 정치선전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부정하는 인물이었으며, 또한 예술가가 본연의 예술성을 잃어가면서까지 작품 속에서 본인의 혁명이론을 실천하려 한다면 그것은 표면적으로만 그럴싸해 보이는 문학이라 비판하였던 적이 있다. 이러한 노신의 성향을 고려한다면 분명 마오의 연안문예강화에도 반대했을 것이라 예상한다.

쑤쉐린(蘇雪林)

노신과 동시대를 살아갔던 여류작가 쑤쉐린은(蘇雪林:북경여자사범대학 출신으로 1949년 대만으로 넘어가 중국 문학 교수로 활동하였다.) 노신을 적대한 이들 중에서 가장 통렬하게 노신을 비판한 인물일 것이다. 그녀는 노신이 죽고 난 뒤 그에 대한 비판에 더 열을 가하였으며, 노신을 ‘심리적으로 완전히 병들어 있으며 비루한 인격의 소유자’라고 매도하였으며, 그가 좌파 패거리와 문인들로 인해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청년들이 이러한 ‘우상 만들기’를 진정으로 믿고 그의 문장을 읽으면서 정신적으로 오염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노신에 대한 쑤쉐린의 감정적 비난은 크게 2가지의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다. 먼저 전통적인 유교 문학의 계승자인 쑤쉐린의 입장에서 유교적 전통을 ‘식인행위’에 비유하며 가차없는 비판을 가하는 노신은 명백한 이단이자 위협적인 존재였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노신의 문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독한 염세주의의 냄새에 대한 본능적인 반감을 또 다른 비난의 이유로 추측할 수 있다. 그녀는 노신의 문장에 대해 “한 개인의 사상의 암울과 허무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 또한 감탄해 마지않을 수 없는 일이다”고 평가한 바가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노신을 비판한 문학가나 평론가는 비단 쑤쉐린 한 명뿐만이 아니며, 노신이 활동하던 시점부터 지금까지 그의 문학작품과 사상에 대한 비판 담론의 주요 소재로 사용되어왔다. 하지만 노신을 진정 중화전통의 혐오자이자 염세주의로 무장한 비관론자라고 보기는 힘들며, 이러한 비판에 대한 반론을 아래 서술하고자 한다.

반론1: 반전통주의자인가?

노신은 분명 자신의 초기 소설을 통해 유교적 전통을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게끔 하는 식인의 메커니즘에 비유하였으며, 중국인들을 아무런 저항 없이 식인의 메커니즘에 안주하고 있는 식인종들이자 비굴하며 정신승리를 아편 삼는 아Q적 인간으로 묘사한 바 있다. 문장을 통한 노신의 비판은 언제나 날이 서 있으며, 때로는 지독하리만큼 무자비한 면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부모가 아이를 야단친다고 해서 이를 혐오라 볼 수 없듯이, 노신의 칼날과도 같은 비판을 근거하여 그가 중국문화와 중국인들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며 혐오하고 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노신의 문학작품에서 비판과 회의적 색채에 숨겨진 또 하나의 코드는 ‘노스텔지어’라 볼 수 있는데, 이는 노신의 초기 소설뿐만 아니라 후기의 산문집에서도 종종 드러나는 특징 중 하나이다. 후기 산문집인 <아침 꽃 저녁에 줍다>를 노스텔지어적 특징이 잘 드러나는 예로 꼽을 수 있는데, 문장에서 등장하는 어린 노신의 보모인 ‘키다리 어멈’은 민간 신앙을 믿으며 품위 없이 남의 일을 구경하기 좋아하는 인물로 노신이 자신의 문장을 통해 거침없이 비판하던 전형적인 중국인의 표상이다. 하지만 동시에 선량한 마음씨로 어린 노신을 열성적으로 보살피고 아낌없이 사랑을 준 인물이기도 하며, 문장 속 묘사를 통해 '키다리 할멈'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이렇듯 문장 속에서 드러나는 날카로운 비판만큼이나 고향과 민중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 역시 노신 문학의 핵심이라 볼 수 있으며, 중국인들에 대한 노신의 통렬한 비판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들이 아무런 자각 없이 인습의 바다에 빠져 죽는 상황에서 이들을 살리기 위한 처절한 외침이라 보는 것이 더 알맞은 해석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쑤쉐린의 비판과는 달리 노신은 맹목적으로 전통을 비판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노신은 후기 잡문집 <무덤>을 통해서 5.4 시기의 젊은 지식인들이 조건 없이 중국의 전통문화를 열등한 것으로 치부하는 행위에 대해 비난하였으며, 역사적으로 전혀 다른 토양에서 성장한 서구식 모델을 함부로 적용하는 사대주의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 때로는 노신의 애국심과 자국민에 대한 애정이 그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일도 있었는데, 그가 미국의 소설가 펄 벅(Pearl Sydenstricker Buck)과 그녀의 대표작품인 <대지>를 비난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대지>는 펄 벅 개인이 실제로 중국에서 체류하면서 얻은 경험들을 바탕으로 실질적인 고증에 맞게 중국 농민들의 삶을 애잔하게 묘사한 작품이며, 작가 역시 기존의 서구 중심적 오리엔탈리즘에서 벗어난 진정으로 중국을 이해하고자 노력했던 인물이다. 이러한 작품에 비판을 가한 것은 어쩌면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문학창작 활동에 전념했던 노신 스스로에 대한 모순이자, 잠재돼있던 노신의 민족주의적 가치관이 표출되었던 몇 안 되는 사례 중 하나일 것이다.

반론2: 비관론자 또는 허무주의자인가?

노신에게 낙인찍힌 비관론자라는 타이틀과는 달리 노신은 '희망'이란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헛된 희망을 경계하고 스스로가 희망에 잠식당하지 않도록 노력한 인물이었다. 노신은 <야초>에서 페퇴피의 정의를 인용하여 희망을 "달콤한 말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근거 없는 약속을 늘어놓지만, 결국엔 부질없고 허망한 것"임을 지적하였다. 하지만 반대로 현실의 벽 앞에서 절망하는 것 역시 공허하기는 마찬가지이며 희망의 본질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점도 같이 언급하면서, 결과적으로 현실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에 끊임없이 저항하는 것이 삶에 대한 인간의 올바른 자세라는 것을 문장을 통해 주장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노신이란 인간을 평가하자면 그는 희망을 아편 삼는 낙관주의자도 아니며 더더욱이 절망 앞에서 무릎을 꿇는 비관주의자도 아니다. 오히려 철인(鐵人)과도 같은 정신력으로 현실의 고통에 맞서 투쟁하는 현실주의자에 가깝다. 따라서 그의 지독한 비판과 염세주의적 문체는 대중들로서는 지극히 어둡고 비관적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이는 어쩌면 대중들이 자각하지 못하는 그들의 현실적인 고통과 외로움을 여과 없이 들어내어 직면하게끔 하고자 하는 것이 현실주의자 노신의 진정한 목적이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왕후이

왕후이汪暉(1959~)는 중국을 대표하는 사상가이며 현재 칭화대학 인문학부 교수이자 인문사회고등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왕후이에게 루쉰은 오랫동안 지적 담금질의 도구이자 사상적 자원이었다. 그는 루쉰이 중국혁명과도 긴밀하게 연관되어있다고 밝히며, 그의 저서 <절망에 반항하라>를 통해 루쉰을 평가하였다. 그 내용 중, 루쉰을 근대성에 맞서는 근대적 인물로 정의하며 루쉰은 결국 역설적인 면모를 가진 인물이라고 정의하였다. 루쉰이 던진 질문과 그에 대한 왕후이의 분석을 보면 알 수 있다.

“계몽이란 무엇인가? 민족의 각성인가 세계주의인가? 민주공화인가 개인 자치인가? 미신타파인가 종교 반대인가 아니면 세속화인가? 권리의 자각인가 내재성의 드러냄인가? 그 밖에 누가 계몽주체인가? 계몽은 대중에 대한 엘리트의 소환인가 인간과 인간의 상호 불러일으킴인가? 소환이나 일으킴의 매개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으로 왕후이는 루쉰은 계몽주의에 반대한 계몽주의자이자 민족주의에 반대한 민족문화 보호론자이며 반근대적 근대인이라고 정리하였다. 이를 통해 루쉰의 사유에 존재하는 다양한 모순과 갈등의 양상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끊임없는 회의와 투쟁의 과정을 통해 최종으로 추구하는 것은 평등의 가치이다.

또한 왕후이가 본 루쉰은 진정한 혁명과 영원한 혁명을 추구하며, 스스로 정신계의 전사가 된인물이다. 루쉰은 민중의 내면에 경종을 울릴 정신계의 전사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나는 천재가 태어나기를 바라기 전에 먼저 천재를 낳고 자라게 할 만한 민중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라고 주장한다. 민중이 약소민족의 문학을 읽고 그들의 상황을 이해하고 투쟁정신을 본받아 계몽되면, 정신계의 전사를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왕후이는 이러한 계몽 과정을 이끌 전사가 필요한 상황에서 그는 스스로가 ‘정신계의 전사’가 되었다고 평했다. 다만 그는 문단이라는 새로운 공간에서 정신계의 전사가 되었다. 왕후이는 “집단적 정치투쟁에서도 그는 고도의 민첩성과 자주성을 유지했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새로운 비판 공간을 새로이 만들어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왕후이에 의하면 그가 의지한 것은 정신 계승의 힘뿐이었기 때문이다.

첸리췬

첸리췬은 전임 북경 대학 중문과 교수로 주로 노신에 대한 강의를 담당했고 2002년 퇴임했다. 중국 노신 연구계의 가장 대표적인 학자로 불린다. 대표 저서로는 『영혼의 탐색』, 『주씨 형제 이야기-북경대학 강연록의 하나』, 『당대 노신에 접근하며』,『내 정신의 자서전』, 『망각을 거부하라』 등이 있다.
첸리췬의 노신 연구의 특징으로는 '노신과의 정신적인 만남', '역사적 중간물 개념의 제기', '입인(立人)사상의 강조' 등이 있다. 1980년대에는 '역사적 중간물'로서의 노신의 개념을 제기하여, 노신이 역사적 전환기에 '창끝을 되돌려 자기편을 공격하지만 동시에 뒤얽혀 벗어날 수 없는' 노신과 중국 전통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강조했다.”[1] 그리고 이것을 모택동 시절에 받았던 핍박과 모택동주의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자신과 연결한다. 1990년대에는 당시 중국에서 진행되던 지식인의 분화 속에서 노신을 '입인사상의 강조'로 사용하였다. 즉, 노신의 태도와 정신을 이어받아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당대의 문제점을 비판하겠다는 지식인의 자세를 강조한 것이다. 앞서 말한대로 그는 노신을 봉건전통에 맞서 싸웠지만 자신도 이를 벗어날 수 없었던, 그리하여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비판을 하고 영구 혁명을 꿈꾼 사람이라고 평가하며 이를 자신의 삶과 연결짓는다. 이러한 그의 연구 방법은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비판도 받을 수 있지만, 현실 의의를 중시하고 실천성을 추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다케우치 요시미

작품 목록

  • 아래 표는 노신의 작품들 중 중문과 수업에서 다루었던 작품들만 따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인 노신 작품목록은 추가예정
제목 특징 수업과의 연계
외침(呐喊) 1923년 출판, 노신의 첫번째 단편소설집. 수록된 단편으로
<광인일기>, <고향>, <아Q정전> 등이 있다.
중국문화사2, 인물로보는근현대중국사회, 중국문학산책
무덤(坟) 1927년 출판, 잡문집 인물로보는근현대중국사회
야초(野草) 1927년 출판, 산문시집 인물로보는근현대중국사회
아침 꽃 저녁에 줍다(朝花夕拾) 1928년 출판, 산문집 인물로보는근현대중국사회

중국어문화학과와 노신

중국 고전의 아이콘이 공자라면, 근대문학의 아이콘은 노신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중국의 근현대사와 관련된 수업이라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고 볼 수 있다. 2~3학년 수업에 고루고루 등장하니, 적어도 한 학기에 노신 작품 한편 정도는 접할 기회가 생긴다. 특히 2학년 2학기 수업으로 중국문학산책인물로보는근현대중국사회를 같이 수강한다면, 학기 말에 가까워지면서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2 수업에서 동시에 노신에 관한 주제를 배울 수 있다. 중국문학산책에서는 주로 노신의 초기 소설작품에 대해서 다루며, 인물로보는근현대중국사회에서는 주로 노신 후기의 산문과 잡문을 다룬다. 배우는 내용 자체는 겹치진 않지만, 노신의 작품을 전반적으로 동시기에 배울 수 있는 절묘한 타이밍이기도 하며, 또한 한쪽 수업에서 배운 내용이 다른 수업에 도움이 되는 등 예상치 못한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참고자료

1) <毛澤東과 魯迅의 관계 재검토> 안영선 저
2) <근대의 초극> 다케우치 요시미 저
3) <루쉰과 저우쭈어런> 쑨위 저
4) <인물 세계사: 현대 중국문학을 대표하는 ‘아Q정전’의 작가 루쉰> 박중서 저
5) <정신계의 전사, 노신> 엄영욱 저
6) <절망에 반항하라> 왕후이 저

7) 연광석·이홍규 , 『전리군과의 대화』, 한울아카데미, 2014.04.15 ISBN : 9788946056787

  1. 연광석 , 『전리군과의 대화』, 한울아카데미, 2014.04.15, 83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