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제국주의"의 두 판 사이의 차이
(→②지역이나 지방의 중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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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론 접근법<br> | *제국주의론 접근법<br> | ||
1960년대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고 많은 미국의 지식인들은 죄책감과 함께 새로운 눈으로 제국주의를 바라보게 된다. 그들은 제국주의야 말로 과거 몇 세기 거쳐 중국과 기타 아시아국가들이 맛본 고난의 근원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또한 미국이 정치적, 도덕적, 문화적으로도 세계에서 가장 우월하다는 명제가 신화였음을 깨닫게 된다. | 1960년대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고 많은 미국의 지식인들은 죄책감과 함께 새로운 눈으로 제국주의를 바라보게 된다. 그들은 제국주의야 말로 과거 몇 세기 거쳐 중국과 기타 아시아국가들이 맛본 고난의 근원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또한 미국이 정치적, 도덕적, 문화적으로도 세계에서 가장 우월하다는 명제가 신화였음을 깨닫게 된다. | ||
− | 이 접근법은 중국의 역사가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발전경로를 걷고 있는데 서양 제국주의가 중국이 걷게 될 발전 경로를 방해했다는 함정에 빠진다. 이러한 접근법은 중국이 19-20세기 당했던 일들의 원흉으로 서양을 지목하고 서양을 유해한 존재로 본다. | + | 이 접근법은 중국의 역사가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발전경로를 걷고 있는데 서양 제국주의가 중국이 걷게 될 발전 경로를 방해했다는 함정에 빠진다. 이러한 접근법은 중국이 19-20세기 당했던 일들의 원흉으로 서양을 지목하고 서양을 유해한 존재로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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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서양의 충격-중국의 반응<ref>폴.A 코헨, 『학문의 제국주의』, pp. 102~171</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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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60년대 미국인들은 '서양의 충격'과 '중국의 반응'이라는 개념에 입각하여 중국의 역사를 해석하는 경향이 강했다. 즉, 19, 20세기 능동적인 역할을 한 것은 서양이며, 중국은 단지 반응적이거나(reactive) 수동적인 역할만 했다는 관점이다. 특히 이러한 접근법을 대변하는 학자가 존 킹 페어뱅크(John K. Fairbank)로 그는 1954년 『서양에 대한 중국의 반응 China's Response to the West』라는 책을 쓰기도 하였다. 중국의 변화는 어느 부분 서양의 충격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중국 자신의 여러 가지 내부 요인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다. 하지만 페어뱅크는 전자만을 강조한다. 또한 19세기 중국에서 서양과 아무런 관련을 가지고 있지 않은 여러 측면들을 단순히 '두르러질 정도의 관성'이라는 말로 일소시켜 버리고 한다. 이러한 접근법은 여전히 교과서 등에 잔존해있다. 다시 말하지만, 코헨은 충경-반응 접근법 자체가 '잘못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당성의 범위가 정해지지 않았다는 점을 비판한다. 그는 뉴턴의 예를 드는데, 과학이 발전하고 그의 법칙 자체는 부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법칙이 한정된 범위에만 적용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해졌다. 청나라 말기 역사의 모든 것은 충격-반응 접근법으로 설명될 수 없다. | 1950, 60년대 미국인들은 '서양의 충격'과 '중국의 반응'이라는 개념에 입각하여 중국의 역사를 해석하는 경향이 강했다. 즉, 19, 20세기 능동적인 역할을 한 것은 서양이며, 중국은 단지 반응적이거나(reactive) 수동적인 역할만 했다는 관점이다. 특히 이러한 접근법을 대변하는 학자가 존 킹 페어뱅크(John K. Fairbank)로 그는 1954년 『서양에 대한 중국의 반응 China's Response to the West』라는 책을 쓰기도 하였다. 중국의 변화는 어느 부분 서양의 충격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중국 자신의 여러 가지 내부 요인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다. 하지만 페어뱅크는 전자만을 강조한다. 또한 19세기 중국에서 서양과 아무런 관련을 가지고 있지 않은 여러 측면들을 단순히 '두르러질 정도의 관성'이라는 말로 일소시켜 버리고 한다. 이러한 접근법은 여전히 교과서 등에 잔존해있다. 다시 말하지만, 코헨은 충경-반응 접근법 자체가 '잘못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당성의 범위가 정해지지 않았다는 점을 비판한다. 그는 뉴턴의 예를 드는데, 과학이 발전하고 그의 법칙 자체는 부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법칙이 한정된 범위에만 적용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해졌다. 청나라 말기 역사의 모든 것은 충격-반응 접근법으로 설명될 수 없다. | ||
− | === | + | ===충격-반응 접근법의 이론적 문제<ref>폴.A 코헨, 『학문의 제국주의』, pp. 106~112</ref>=== |
충격-반응 접근법에는 여러 이론적인 문제들이 존재한다. | 충격-반응 접근법에는 여러 이론적인 문제들이 존재한다. | ||
#서양의 다면성과 모순을 무시하기 쉽다 | #서양의 다면성과 모순을 무시하기 쉽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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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인이 서양의 이질성에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중국의 이질성에 대해 서양인이 반응하는 방식에 의해 자유가 된다. 충격-반응 접근법은 중국의 충격에 대한 서양의 반응을 무시한다. | #* 중국인이 서양의 이질성에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중국의 이질성에 대해 서양인이 반응하는 방식에 의해 자유가 된다. 충격-반응 접근법은 중국의 충격에 대한 서양의 반응을 무시한다. | ||
# 착종된 사태를 어떻게 분석할 것인가 | # 착종된 사태를 어떻게 분석할 것인가 | ||
− | #* 모든 사상에는 이종교배 현상이 나타난다. 서양의 관념이 전달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국인들에게 이해될 수 있는 형태로 바뀌어 전달되어야 하며 이는 중국인의 언어와 사고 패턴에 의해 여과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원래의 관념의 왜곡은 필연적이다. [[홍수전]]과 [[태평천국]]의 기독교나 [[무술변법]]이 도입하고자 하는 서양식의 제도는 본래의 모습에서 멀어져있다. 하지만 충격-반응 접근법은 이러한 착종 현상을 분석하는데 유용하지 못하다. '''중국의 반응'''은 매우 뒤섞인 역사를 설명하는데 편리할 뿐이다. | + | #* 모든 사상에는 이종교배 현상이 나타난다. 서양의 관념이 전달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국인들에게 이해될 수 있는 형태로 바뀌어 전달되어야 하며 이는 중국인의 언어와 사고 패턴에 의해 여과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원래의 관념의 왜곡은 필연적이다. [[홍수전]]과 [[태평천국]]의 기독교나 [[무술변법]]이 도입하고자 하는 서양식의 제도는 본래의 모습에서 멀어져있다. 하지만 충격-반응 접근법은 이러한 착종 현상을 분석하는데 유용하지 못하다. '''중국의 반응'''은 매우 뒤섞인 역사를 설명하는데 편리할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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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접근① 19세기의 반란 <ref>폴.A 코헨, 『학문의 제국주의』, pp. 112~119</ref> === | ||
19세기는 청나라의 근간을 뒤흔들 정도로 대규모의 반란이 많았던 시기다. 윈난성의 이슬람교도들의 반란(1855 ~1873), 서북부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이슬람 교도들의 반란(1862 ~ 1873), 염군捻军의 반란(1853~1868), [[태평천국운동]](1850~1864)등이 동시에 일어났다. 물론 그 중에서도 단연 [[태평천국운동]]이 가장 파괴력이 강했다. 그리고 유일하게 이 운동만이 서양의 영향을 받은 운동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문제가 발생하는데, 과연 이 태평천국운동이 '서양에 대한 중국의 반응'이라는 틀로 설명하는 것이 유익한가하는 부분이다. <br> | 19세기는 청나라의 근간을 뒤흔들 정도로 대규모의 반란이 많았던 시기다. 윈난성의 이슬람교도들의 반란(1855 ~1873), 서북부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이슬람 교도들의 반란(1862 ~ 1873), 염군捻军의 반란(1853~1868), [[태평천국운동]](1850~1864)등이 동시에 일어났다. 물론 그 중에서도 단연 [[태평천국운동]]이 가장 파괴력이 강했다. 그리고 유일하게 이 운동만이 서양의 영향을 받은 운동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문제가 발생하는데, 과연 이 태평천국운동이 '서양에 대한 중국의 반응'이라는 틀로 설명하는 것이 유익한가하는 부분이다. <br> | ||
태평천국운동의 성격을 알기 위해서는 운동이 일어난 지역을 살펴보면, 태평천국 운동이 일어난 화남华南지방(광동, 복건 등)은 청 왕조의 지배에 가장 늦게 편입되었으며 떄문에 청왕조의 권력 구조에서 가장 불안정한 부분이었다. 또한 외국무역과 아편전쟁의 파괴적 영향이 가장 심했던 곳이다. 실제로 화남지방의 '''서양의 충격은 현실적이었으며 강력했고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br> | 태평천국운동의 성격을 알기 위해서는 운동이 일어난 지역을 살펴보면, 태평천국 운동이 일어난 화남华南지방(광동, 복건 등)은 청 왕조의 지배에 가장 늦게 편입되었으며 떄문에 청왕조의 권력 구조에서 가장 불안정한 부분이었다. 또한 외국무역과 아편전쟁의 파괴적 영향이 가장 심했던 곳이다. 실제로 화남지방의 '''서양의 충격은 현실적이었으며 강력했고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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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진압과정에서 [[증국번]]과 [[이홍장]]을 위시한 지역권력이나 향신층이 대두하여 지방권력이 커졌고 이러한 권력은 이후 중앙정부의 권력을 약화시켜 서양의 충격에 대해 창조적으로 대응하려는 중앙정부의 발목을 잡았다. 또한 (청나라를 망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지녔던 이 반란들로 인해) 위정자들은 반란의 진압과 방지라는 국내문제는 가장 중요한 사항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는 일본이 서양의 충격에 굉장히 주의를 기울이고 민감하게 반응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중국이 19세기 겪은 역사적 상황에서 볼 때, 국내적 문제야말로 최고로 시급한 일이었다. 메리 라이트Mary C. Wright의 말을 빌리자면, "연안의 5개 항구에 한정되어 있던 외국의 진출은 국부적인 통증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를 두고 중국의 반응이 미지근했던 것을 단지 멍청하다거나 정체성停滞性 등의 본질 탓으로 돌려서는 안된다. | 우선 진압과정에서 [[증국번]]과 [[이홍장]]을 위시한 지역권력이나 향신층이 대두하여 지방권력이 커졌고 이러한 권력은 이후 중앙정부의 권력을 약화시켜 서양의 충격에 대해 창조적으로 대응하려는 중앙정부의 발목을 잡았다. 또한 (청나라를 망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지녔던 이 반란들로 인해) 위정자들은 반란의 진압과 방지라는 국내문제는 가장 중요한 사항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는 일본이 서양의 충격에 굉장히 주의를 기울이고 민감하게 반응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중국이 19세기 겪은 역사적 상황에서 볼 때, 국내적 문제야말로 최고로 시급한 일이었다. 메리 라이트Mary C. Wright의 말을 빌리자면, "연안의 5개 항구에 한정되어 있던 외국의 진출은 국부적인 통증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를 두고 중국의 반응이 미지근했던 것을 단지 멍청하다거나 정체성停滞性 등의 본질 탓으로 돌려서는 안된다. | ||
− | + | ===접근② 개혁<ref>폴.A 코헨, 『학문의 제국주의』, pp. 119~145</ref>=== | |
일반적으로 19세기에 행해진 청나라의 개혁들을 두고 '서양의 충격이 없었다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나 '서양의 충격과 관련하여서만 의미를 갖는다'라는 관점들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은 옳지 않다. 청나라 말기 일력의 개혁들은 물론 서구의 양향을 받긴했지만 개혁가들의 사상과 행동은 '''오랜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기도 했다. <br> | 일반적으로 19세기에 행해진 청나라의 개혁들을 두고 '서양의 충격이 없었다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나 '서양의 충격과 관련하여서만 의미를 갖는다'라는 관점들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은 옳지 않다. 청나라 말기 일력의 개혁들은 물론 서구의 양향을 받긴했지만 개혁가들의 사상과 행동은 '''오랜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기도 했다. <br> | ||
이미 아편전쟁 무렵부터 많은이들은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중국이 서양에 대해 중대성을 인식한 것은 1870여년이며 이를 인식한 사람들도 아주 적었다. 위정자들에게는 여전히 국내적인 반란이 가장 큰 관심사였다. 그들은 반란이 없으면 외부의 일들도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해다. 흔히들 19세기의 개혁하면 [[양무운동]](다르게 표현하면 [[동치중흥]])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 개혁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이 60년대에 일어난 개혁은 대체적으로 <u>혁신적이라기 보다는 복고적</u>이었다. 한 예로 과거제도를 들 수 있는데, 과거제도는 서양의 학문을 받아들이거나 과거제도의 내용을 시대에 맞게 전환하려는 시도등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경제활동에 있어서도 상업과 같은 비농업 부분의 경제활동에 대한 과중한 과세에 반대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특히, 동치중흥의 경제사상은 철도나 전신의 도입에 극심한 반대를 하였다. 서양과의 무역에 있어서도 무역을 통한 경제성장은 서양인들의 관념이었을 뿐, 애초에 중국의 위정자들에게 '경제성장'이라는 생각은 그들의 이해를 넘어서는 일이었다. | 이미 아편전쟁 무렵부터 많은이들은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중국이 서양에 대해 중대성을 인식한 것은 1870여년이며 이를 인식한 사람들도 아주 적었다. 위정자들에게는 여전히 국내적인 반란이 가장 큰 관심사였다. 그들은 반란이 없으면 외부의 일들도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해다. 흔히들 19세기의 개혁하면 [[양무운동]](다르게 표현하면 [[동치중흥]])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 개혁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이 60년대에 일어난 개혁은 대체적으로 <u>혁신적이라기 보다는 복고적</u>이었다. 한 예로 과거제도를 들 수 있는데, 과거제도는 서양의 학문을 받아들이거나 과거제도의 내용을 시대에 맞게 전환하려는 시도등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경제활동에 있어서도 상업과 같은 비농업 부분의 경제활동에 대한 과중한 과세에 반대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특히, 동치중흥의 경제사상은 철도나 전신의 도입에 극심한 반대를 하였다. 서양과의 무역에 있어서도 무역을 통한 경제성장은 서양인들의 관념이었을 뿐, 애초에 중국의 위정자들에게 '경제성장'이라는 생각은 그들의 이해를 넘어서는 일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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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양무운동 당시의 금릉 기기국과 같은 것을 떠올리며 서양의 것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냐는 물음이 있다. 맞다. 당시의 중국 위정자들이 서양을 모델로 개혁을 필요하다고 인식한 것은 딱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군대의 재편성이다. 여러차례의 전쟁을 겪은 중국 입장에서 서양의 군대 질서과 군사기술의 우월성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동치중흥의 지도자들은 근대적인 무기공장과 조선소를 만들어 힘을 기르고자 하였다. 개혁을 필요로하는 다른 영역은 외교영역이었다. 기존 중국의 외교는 전통적으로 조공체제에 기반해 있었다. 하지만 중국은 총리각국사무아문(총리아문)을 만들어 특히 서양국가와의 외교 관계를 다루었다. 하지만 이 두가지 모두를 '혁신'과 묶기에는 몇몇 한계점이 존재한다. 우선, 중국이 전쟁을 치루는 방식을 배워온 것은 오랜 역사에서 오랑캐의 그것을 배운것과 일맥상통한다. 또한 총리아문은 어디까지나 임시적인 기구였다. [[공친왕]]은 '여러 국가들간의 교섭이 번거롭지 않게되면 총리아문은 즉시 폐지되고.....'라고 명시하였다. 이는 혁신을 싫어하는 그 시대의 풍조를 보여준다. | 물론 양무운동 당시의 금릉 기기국과 같은 것을 떠올리며 서양의 것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냐는 물음이 있다. 맞다. 당시의 중국 위정자들이 서양을 모델로 개혁을 필요하다고 인식한 것은 딱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군대의 재편성이다. 여러차례의 전쟁을 겪은 중국 입장에서 서양의 군대 질서과 군사기술의 우월성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동치중흥의 지도자들은 근대적인 무기공장과 조선소를 만들어 힘을 기르고자 하였다. 개혁을 필요로하는 다른 영역은 외교영역이었다. 기존 중국의 외교는 전통적으로 조공체제에 기반해 있었다. 하지만 중국은 총리각국사무아문(총리아문)을 만들어 특히 서양국가와의 외교 관계를 다루었다. 하지만 이 두가지 모두를 '혁신'과 묶기에는 몇몇 한계점이 존재한다. 우선, 중국이 전쟁을 치루는 방식을 배워온 것은 오랜 역사에서 오랑캐의 그것을 배운것과 일맥상통한다. 또한 총리아문은 어디까지나 임시적인 기구였다. [[공친왕]]은 '여러 국가들간의 교섭이 번거롭지 않게되면 총리아문은 즉시 폐지되고.....'라고 명시하였다. 이는 혁신을 싫어하는 그 시대의 풍조를 보여준다. | ||
− | + | 동치중흥이라는 중국의 개혁에 대해 우리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결론은 그 개혁이 실패했다는 것이다. 메리 라이트는 이를 '근대화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유교 질서의 안정을 위해 필요한 것과 서로 저촉되었기 때문이다'라고 매듭지었다. 하지만 코헨은 이에 두 가지의 의문을 제기한다. 첫째는 '''동치중흥은 실제로 실패했는가?''' 두 번째는 '''설령 동치중흥이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과연 메리 라이트가 말하고 있는 근대화에 요청되는 요소와 모순된다는 것이 실패의 원인이었는가?'''이다. 상기하였듯, 동치중흥에 있어서 서양과 관련이 깊은 것은 군사, 외교, 상업의 영역이었고, 메리라이트에게는 이러한 개혁들이 바로 동치중흥이었다. 재미있는 점은, 동치중흥에서 가장 쓰라린 좌절감을 맛본 부분은 군사, 외교 부분이 아닌 강력한 정부, 지방 지배의 회복 부분이었다. 이런 부분에서는 서양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 부분에서의 개혁의 좌절은 근대화하는 것과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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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는 것은 중국사회를 근대화 하는 것과 같으며 그러한 근본적 변혁은 서양으로부터 이념이나 제도 모델을 차용하지 않고서는 유교의 지적 세계 자체 내에서는 생겨날 수 없다? | ||
+ | 이는 대부분의 미국 역사학자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1860년대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사상가인 풍계분의 사례는 이를 반박한다. 그는 청의 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개혁안을 내놓았는데 (예컨대, 서리를 폐지하고 생원을 등용할 것, 향촌의 우두머리를 투표로 선출할 것. 등) 이러한 개혁안에는 서양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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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평천국운동의 이데올로기가 반反유교적 성격을 띠고 있지 않았더라면 반만 봉기를 지지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서 한인 지식인들과 관료들이 청 왕조에 가담하게 되었다)? | ||
+ | 코헨이 보기에 이 주장은 검증이 되지 않은 애매한 가설들위에 확립되어 있다 | ||
+ | #한인 엘리트들이 만주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원심력이 청 왕조 수립으로부터 200년이 지난 당시에도 여전히 강했다 | ||
+ | #태평천국의 이데올로기가 유교의 교의와 대립되지 않았더라면 많은 한인 관료들을 태평천국의 기치 아래로 달려갔을 것이다 | ||
+ | #한인 엘리트들이 태평천국의 이데올로기를 부정한 이유는 그것이 서양의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 ||
+ | #동시대 중국인들에게 태평천국의 이데올로기적 위협은 물리적 파괴력보다 더 위험한 것이었다. | ||
+ | 하지만 코헨은 이러한 가설들이 입증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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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간이 흘러 19세기 말이되면 서양의 선례를 모델로 한 변혁이 필요하다는 강한 자각이 생겨나게 된다. 기존의 내세웠던 중체서용中体西用이 가진 '체'와 '용'은 어느덧 제로섬게임과 같이 변해버린다. 용用을 받아들여 공업화를 실행하게 되면 연이어 근대적 교육을 실시해야하는데, 근대 교육의 확대는 필연적으로 체体를 동요시켰던 것이다. 이후 옌푸나 왕도, 캉유웨를 비롯한 학자들의 다양한 '개혁정당화론'이 대두하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보니 결국은 아무것도 이룬게 없었다. 애초에 개혁이라는 황제의 명령이 실행된 것은 극히 제한적인 소수의 성省에 지나지 않았으며, 변법을 지지하는 후난성만이 눈에 띠었다. 이렇듯 당시의 관료들은 개혁에 크게 저항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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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접근③ 반동<ref>폴.A 코헨, 『학문의 제국주의』, pp. 145~162</ref>=== | ||
+ | *반동1 청의(파) | ||
+ | 청말의 개혁은 엘리트 내부의 현상이었다. 하지만 반동은 그렇지 않았다. 이 시기의 반동을 볼 때는 같은 시기 반反서양의 입장을 명확히 한 '청의파'라는 정치 세력을 보아야 한다. 청의는 '사악한 마음이 없는 논의'아는 의미를 가진다. 이들은 배외감정을 강령하게 드러내었는데 곽숭도라는 관료의 사례를 보면 이들의 반서양 행위가 어떠하였는지를 확인해볼 수 있다. 곽숭도는 서양 이적은 중국이 이전에 만났던 이적과는 다르다는 것을 파악하였다. 하지만 청의파는 그런 그를 배반자라고 비난하였다. 이후, 그는 영국 주재 공사로 영국에 머물게 되는데, 그가 보고서를 본국에 보넀을 때(그 보고서에는 서양이 가진 몇몇 장점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 보고서의 발매를 금지해야 한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청의파로부터 나왔다. 공사 임기를 마치고 귀국한 그는 청의파로부터 비난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칩거하였다. <br> | ||
+ | 청의파는 서양의 사소한 것이라도 받아들이는것을 격렬하게 거부하였다. 그들은 중국에게 필요한 것은 서양의 교활한 기계와 기술이 아니라 '중국 인민의 각성'이라고 주장하였다. 실제 청의파 인물은 "기계에 대한 의존이 아니라 바로 인민의 확고부동한 정신에 중국이 다른 외국들보다 우월한 근거가 있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필자는 이 부분에서 마오쩌둥이 갑자기 생각났는데, 위 말은 실제 마오쩌둥의 시기 내세웠던 기치이기도 하였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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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러한 청의파의 사상은 '서양에 대한 반응'이라는 측면을 명백하게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있지는 않다. 표면적으로는 서양을 문제삼고 있어도 청의파는 다른 중국인의 행동과 정책에 대한 반응 또한 읽어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청의는 국내의 문제이기도 했다. 청의파는 특히 유교를 강조하였는데, 로이드 이스트먼Lloid Eastman에 의하면 "유교원리에 따른 엄격한 태도로 사람들의 주목을 모음 관료들을 높은 지위로 승진했다'. 특히, 청의의 행위는 권력을 가지지 못한 중견, 하급 관료들에게서 두드러졌는데 자심들의 이익을 확대하기 위해 청의를 이용할 유혹이 존재했던 것이다. 또한 황제에게 있어서도 거물로 성장한 이홍장 등을 견제하는데 청의를 이용할 수 있기도 하였다. 코헨은 '''서양이 없었더라도 청의와 태평천국은 어떤 형태로든 발생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서양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두 사건에서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청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행해지는 경향이 짙었으며, 청의라는 현상 자체는 정치적 성격을 농후하게 띠었다. (한국의 반공이 생각나기도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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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동2 기독교와 중국인 신자들에 대한 적대행동 | ||
+ | 이 행위는 청의보다도 더 서양의 도전에 대한 반응으로 보인다. 하지만 시각을 조금 더 넓혀본다면 이 또한 다양한 동기들이 교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교사들이 조약으로 인해 보호를 받으며 거주와 포교를 행할 수 있었던 것은 1860년대 부터이다. 기독교에 대한 반감은 그 이유가 다양했다. 첫번째 이유는 중국인들의 뿌리깊은 중화의식를 든다. (코헨은 더 나아가 중국인들이 중화의식에 근거하려 불교에 대해서도 반감을 품었다고 서술하였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두 번째 이유는 선교사들의 포교를 하면서 취한 태도였다. 그들은 다양한 이유로 중국문화에 대한 다양한 비난을 하였다. 이는 특히나 향신계층의 문화적 권위를 위협하는 행위였다. 예를들면 선교자들은 지방관헌들과 대등하게 교제하는 것이 허용되었는데, 원래는 향신들만 가능했던 일이었다. 어째건 선교사들의 행위는 향신들의 기득권을 침해하였다. 선교사들이 일반 대중들에게 행한 교육은 중국의 여러 지식들을 부정하는 행위였는데, 향신들의 기득권의 원천인 중국의 기존 지식 카르텔이 붕괴되면 향신들의 권위도 당연히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선교사들은 여러 특권적 지위를 이용하여 지방관의 체면과 권위에 도전했다는 부분이다. 선교사들은 함대를 파견하는 등의 실력행사를 서슴치 않았고 배상으로는 중국인들에게 상징적으로 중요한 서원, 묘 등을 요구하였다. 또한 선교사들은 지방관들의 재판에 간섭하기도 하였다. 선교사들의 배상 요구는 그 지방의 가난한 서민들의 부담을 가중 시키기도 했고, 개종한 이웃들의 젠체를 보며 위협을 느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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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접근법의 수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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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통과 근대성== | ||
+ | 정체되어 있고, 잠들어 있으며, 변화가 없는 중국. 그리고 활력에 가득차 있으며, 끊임없이 변화하고 역사를 가지고 있는 서양. 우리는 기존의 역사를 이러한 관점에 의거하여 바라보았다. 하지만 중국이 정말로 정체되어 있었던 것이었을까. 1950,60년대 미국의 중국사 연구자들은 '전통적traditional'과 '근대적moder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중국의 역사를 단계적으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여기서의 근대란 물론 중국이 서양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 시대부터를 가리킨다. 근대화론의 발생은 지극히 이데올로기의 성격을 띠고 있었는데, 전후 제3세계나 후진국들의 문제에 해석하는데 있어서 마르크스-레닌주의 관점에 대한 대응으로서 생겨났다. 하지만 근대화론의 비서양문화에 대한 인식은 철저히 19세기 서양 지식인들의 생각에 크게 의거하고 있었다. 19세기 서양 지식인들에게 중국은 '잠에 빠져있는 사회' '영원한 정체eternal standstill' '변화가 없는 사회'로 받아들여졌다. 참 미묘한 점은 한 세기 전인 18세기에는 위와 같은 중국은 '안정된 중국'으로 긍정적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한 세기 간의 간극은 아마 산업혁명으로 인한 물질수준의 향상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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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헨은 근대화론을 이야기 하기 위해 조지프 레벤슨이라는 학자를 가져온다. 그는 중국 문명, 특히 그 문명 변화 양상에 아주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근대화를 절대 필요로 생각했었다. 물론 19세기의 서양 지식인들과는 큰 차이를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 세계전쟁과 베트남전쟁을 거치면서 '기술, 물질이 문명의 필요 특징인가?'하는 등의 의문이 생겨났던 때였고 이에 중국 문명을 19세기 지식인들처럼 '야만'으로 바라보지는 않았다. 오히려 레벤슨은 19세기의 관점을 서양중심적이라고 비판하였다. 단, 상대적으로 변화가 결핍된 것을 인정할 셈이다. (다만 코헨은 여기서 '변화'라는 단어에 주목한다. 역사학자는 자신이 찾고자 하는 부분만 보는 경향이 있다. 변화 또한 마찬가지이다. 국민소득이 3만불이 되어도 우리 보통 서민의 삶 속 볂화는 그리 크지 않다.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많고 변화의 속도는 모두가 같지 않다.) 레벤슨이 서양 접촉 이전의 중국 문명을 바라보는 인식은, 변화가 있더라도 '틀 내부에서만 일어나는 변혁(Change within tradition)'이며 서양으로의 바깥 충경이 없었더라면 기본적인 구조를 버릴 수 없는 사회였다. 그는 '17,18세기 중국도 서양처럼 과학이 지배하는 사회로 발전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어떤것이 있는가?'하는 의문을 품고 있었는데 이 질문은 매우 자기중심적일 뿐이며 답이 예/아니오 밖에 나오지 않는다. (물론 레벤슨은 아니오 라고 답할 것이다.) 레벤슨의 물음이 편협성을 띠는 이유는 그의 물음이 하나의 암묵적인 전제 위에 성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전제란 '''"서양이 경험한 근대성을 실현하는 방향으로의 '발전'이야말로 유일하고도 중요한 발전"'''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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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벤슨은 서양 충격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하였다. 그가 서양에 부여한 역할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변화의 촉진자로서의 역할이다. 그에게 중국 전통사회의 붕괴는 서양 충격의 결과였다. 서양문화가 중국인의 사상세계를 하룻밤만에 바꾸어 버렸다는 해석이다. 그는 49년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의 모습이 이전의 중국사와 연속성을 갖지 않는 것을 하나의 증거로 보았다. 하지만 정말로 서양'만이' 그런 붕괴의 원인을 만들었을까? 많은 증거들은 서양 침입 이전에 18세기 중국에 이미 커다란 사회적 경제적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레벤슨이 서양에 부여한 두 번째 역할은 중국의 새로운 질서 형성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레벤슨은 근대화의 목적을 '공업화, 서양화' 하나라고만 생각하였다. 청의 멸망 이후 중국 혁명의 양태는 원인부터 목적까지 근대 서양이 중국에게 안긴 문제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즉, '서양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 서양에 대항하여 이루어진 혁명'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충격-반응 접근법'에서도 언급하였지지만, 중국 혁명의 중요한 측면들은 서양 접촉 이전부터 존재하던 중국 토착의 여러 문제들에 대한 반응일 수도 있다. 이 문제들이 서양에 의해 증폭되었을 수는 있으나 오로지 서양이 문제는 아니었다. 오히려, 중국의 옛 문화가 근대 변혁을 추진, 일조하는 측면을 볼 수도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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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통과 근대성은 서로 대극적인가=== | ||
+ | 문제는 전통과 근대성 문제로 넘어간다. 레벤슨은 유교(전통)와 근대성은 근본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고, 새로운 근대 질서가 수립되기에 앞서 전통 질서가 파괴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레벤슨에 동조하는 메리 라이트라는 학자는 중국이 근대세계에 적응하는데 방해가 된 가장 큰 것을 유교 시스템 자체로 생각했다. 중국의 전통적 가치와 제도는 모두 극복되어야 할 장애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벤저민 슈워츠는 현재에 있어서도 일정한 영역에서는 과거의 경험이 존재하고 있으며 전통과 근대성이 침투 불가능한 두 개의 전체로서 대립하고 있다는 시각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특히 1960년대들어 전통과 근대성의 관계를 둘러싼 새로운 해석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토머스 케네디는 청나라 말기의 문자해독률 수준을 들어 경제 발전의 활력이 될 수도 있음을 주장하기도 하였고, 다른 연구가 들도 비슷한 이론을 펼친다. 이러한 연구들은 중국인들이 근대화 혹은 혁명에 의해서 해결할 것으로 기대되는 중국 내부의 문제들에 주목한다. 스튜어트 슈람은 중국의 전통에 포함되어 있는 두 개의 요소(역사감각과 인간생활의 주요한 영역의 하나인 정치에 대한 관심)이 중국인들로 하여금 근대 세계에서 살아남을 준비를 뛰어나게 수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전통은 한편으로는 혁명의 대한 장애이기도 하나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을 촉진하고 활력을 부여하며 혁명을 정통화 하기 위한 재료의 저장고로 가능하는, 전통과 혁명 사이의 양의적 관계에 주목하기도 하는데, 특히 마오쩌둥의 연구에 있어서 마오쩌둥은 중국 전통에 뿌리 내리고 중국 사회가 진정으로 무엇을 필요로 하고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를 알아차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며 그를 높게 평가한다. 위에 '충격-반응 접근법'에서도 언급된 풍계분이 제기한 개혁 수단도 양립 가능하다는 한 예가 될 수 있는데, 그가 제기한 개혁 수단들은 근대적으로 보이더라도 그 자신이 이어받은 사상적 전통에서 생겨난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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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4에 대한 미국 학계의 여러 연구들은 전통적 요소와 근대적 요소의 복잡한 연계성을 재인식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신유학은 무제한 적으로 현상 유지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질서에 대한 비판자로서도 기능하였다. 드 배리는 중국 인민의 새로운 경험들을 두고 단순히 외부로부터 고취된 혁명이 아닌 전통 내부에서 싹튼 성장으로 그 본질이 설명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매츠거의 경우는 많은 유학자들 또한 변화를 찾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유학자들은 변혁의 방법을 찾고 있지 못했다. 서양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는 서양을 접하기 전의 중국을 고뇌와 함정이라는 단어로 표현하였다. 그에게 서양은 고뇌중인 중국에게 답을 알려준 존재였던 것이다. 서양은 변혁을 원하는 중국의 구제자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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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대화 패러다임의 폐기를 향해=== | ||
+ | 1950, 60년대의 중국연구는 이전 2차대전 이전의 사학 보다는(즉 중국을 경멸하는 시각) 한 걸음 나아간 것이었다. 이들은 중국 내부의 일에 주의를 기울이고, 공문서 자료나 중국어로 된 1차 자료를 통해 중국을 이해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일에는 일정한 틀이 부여되어 있었다. 바로 "중국 사회에는 스스로 자체 내부에서 변화를 일으키기 위한 잠재적인 능력이 거의 결여되어 있었으며 근대 중국의 변혁을 일으킨 원인은 오직 서양이다"라는 가정 말이다. 근대화 접근법은 이러한 연구를 수정하려고 한 연구 방법으로 중국의 토착 사회를 하나의 '변화하고 있는 사회'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들의 연구 또한 한계가 있었는데, 이들은 전통과 근대성을 대조적으로 파악한 19세기의 사상에 기원을 둔 사고 방식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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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대화 패러다임에는 여러 문제점이 있다. 첫번째로 전통-근대화라는 배타적 발상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볼 때도 전통과 근대성을 나누어서 생각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이는 옳지 않다. 두 번째로 역사 에너지 불멸의 법칙(The conservation of historical energy)인데, 이는 어떤 주어진 사회에서 한 짝의 양극적인 요소로 향하여 소비되는 에너지의 총합은 일정하며 어느 한쪽으로 향한 에너지가 늘어나는 만큼 다른 한쪽의 극으로 향한 에너지는 줄어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그렇지 않다. 선택적 근대화는 전통적 제도나 가치를 강화하는데 그칠수도 있는 것이다. (특히, 근대화된 군대가 반동적 체제에 봉사한다면?) 중국이 근대화 된다면 시소 처럼 자동적으로 전통적인 중국으로부터 멀어진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세 번째 문제점은 기본적으로 비대칭적인 현실을 기술하고 설명하기 위해서 밀접하게 대칭적인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근대성에 관해서 우리는 여러 문화가 획일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통이라는 개념에는 근대성에 걸맞는 획일성이 없다. 예를 들어, 10세기 중국과 14세기 프랑스는 모두 근대가 아니다. 하지만 이 두 개의 시간대는 유사한 '전통'시기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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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대성이라는 개념에서 또한 문제가 있다. 첫번째 문제는 근대성이라는 개념이 본질적으로 목표수렴형 개념(Closed concept)이라는 점이다. 근대성이라는 개념에는 역사란 목적을 향해 직선적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는 목표 개방형Open model이 있다. 목표 수렴형 개념과 달리 목표 개방형 모델은 다양한 답이 있을 수 있는 물음을 던지는 일이 가능하다. 역사학자가 목표 개방형 모델을 사용할 때 비로소 중국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실에 충실한 근현대 중국사의 이미지를 그려낼 수 있다. 근대성의 두 번째 문제점은 근대화가 갖는 자민족 우월의식이다. 이는 서양인에게만 관련이 되어 있다. 자신이 선두에 위치해 있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경험을 보편화 하기 쉽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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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자의 눈으로 본 자기의 이미지를 갖기 않은 것은 서양 뿐이다. 어떻게 보면 다른 어떤 국민보다도 근대 세계를 만드는데 공헌한 서양인이 어떤 의미에서는 근대 세계를 이해하는 능력이 최소한 밖에 되지 못한다고 볼 수도 있다. 때문에 근대화 방법을 폐기하여 서양 중심주의의 정도가 보다 낮은 방법을 탐구하는 것이 더 이점이 있을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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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국주의와 혁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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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헨이 '제국주의 접근법'이라고 명명한 입장은 제국주의를 주축으로 삼아 중국 근현대사를 해석한 입장을 말한다. 한 예로, 마오쩌둥은 중국 근대 역사를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의 역사이자 중국의 독립과 자본주의적 발전을 방해해온 역사로 보았다. 1960년대 베트남 전쟁이 불러온 혼란은 중국 근현대사에 대한 기존의 접근법, '근대화 접근법'을 전혀 다른 근거에 기초한 비판을 일으키는데, 이 비판의 중심에는 제임스 펙이라는 학자가 있었다. | ||
+ | ===펙과 페어뱅크의 논쟁=== | ||
+ | 펙은 크게 몇 가지 부분에서 기존의 근대화 접근법을 비판한다. 그는 근대화론을 단순한 학문적 성격의 이론이 아닌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띤 이론으로 보았다. 즉, 근대화론을 "미국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개입을 정당화 하기 위해 지도적인 중국 전문가들에 의해 사용된 이론에 다름아니다"라는 것인데. 특히 중국 전문가들은 이를 통해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동을 은폐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사에서 제국주의가 한 역할을 중대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미국의 중국의 전문가들은 제국주의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중국인들의 관념 속에나 존재하는 것이며 이는 상처입은 고통을 심리적으로 무마시키는 진통제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펙은 중국전문가들이 동아시아의 형태를 만든 두 가지 요인 1. 서양의 근대화의 힘 2. 토착적 전통을 비교하며 근대화의 힘은 같으나 일본과 중국은 토착적 전통이 달랐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나 나타났다는 식의 해석에 반대하였다. 그가 보기에 중국은 서양으로부터 전면적인 충격을 받았기에 반응할 수 없었던 것이고 일본은 토착적 요인이 아닌 국제환경적 요인과 시기 덕분에 유리했을 뿐이다. 펙의 눈에 제국주의는 정확히 국제 경제 시스템은 비서양 국가들의 근대화를 촉진하기는 커녕 근대화를 거의 불가능하게 만드는 적대적 환경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월러스틴의 주변화이론과 포머란츠와 황쫑즈 사이의 논쟁을 참고해 볼 만 하다.) 특히 그는 존.K 페어뱅크를 주로 공격하였는데 페어뱅크는 다시 그의 주장에 대한 견해를 발표한다. | ||
+ | :{| class="wikitable" border="1"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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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펙의 주장 | ||
+ | | 페어뱅크의 비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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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근대화론은 학문적 성격의 이론이 아닌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띤 이론이다. | ||
+ | | 펙은 근대화론과 '혁명적 마르크시즘'을 구별 못하고 있다. 근대화론은 순수 학술용 이론으로서 중국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설명하는 도구일 뿐이다. 혁명적 마르크시즘은 아시아 국가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혁명적 목적을 위해 채택하는 교의일 뿐이다. | ||
+ | |- | ||
+ | | 미국의 중국 전문가들이 아시아의 현실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확산시키고 미국 제국주의의 행위를 은폐해왔다. | ||
+ | | 펙이 말하는 중국 전문가들은 미국의 지배자 그룹이 아닐뿐더러 20년간의 미국 정부 정책에 지지자라기 보다는 오히려 비판자였다. | ||
+ | |- | ||
+ | | 제국주의 | ||
+ | | 역사학자들이 중국을 다루는 방식은 안(内)과 밖(外) 중 어느 것을 중시하는 가를 두고 변화를 보인다. 30년대의 중국 연구는 중국의 내부(반응)의 연구였다. 요즘은 그것이 밖으로 향한다. 요즘들어 제국주의는 다시금 표적이 되었다. 하지만 제국주의를 어떻게 볼 지는 다른 문제(근대화, 마르크시즘, 단순 국제관계)보다 2차적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 ||
+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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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지만 이러한 반박에 대해 펙은 다시 반박을 한다. 우선, 페어뱅크의 첫번째 발론은 오히려 펙 자신의 주장이 맞다는 것을 더 보여주는 주장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 문제에 대해서 또한 반박을 하였는데, 자유주의자들과 우익이 서로 반목은 했을지언정, 미국과 세계에 대한 생각의 전제는 기본적인 부분에서 같았다는 점이다. 즉, 둘은 모두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으며, 단지 그 세계관의 실행에 있어서 의견이 불일치한 것일 뿐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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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트남 전쟁과 중국 연구=== | ||
+ | 펙의 공격은 미국의 중국 연구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을 가져다 주었다. 특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던지며 중국 연구 전체를 되돌아보는 게계가 되었다. 특히나 이러한 자아비판의 움직임은 젊은 대학원생들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특히나 페어뱅크는 펙의 질문에 대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죄의식을 언급하며 역사는 도덕심에 의거해서만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점을 시사하였다. 그가 보기에 펙은 "1차적 관심이 중국의 현실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미 제국주의와 싸우는 것일뿐"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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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 재미있는 점은 펙의 중국사관은 그가 공격하는 충격-반응 접근법이나 근대화접근법과 많은 부분 기본 전제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첫 번째는 19세기 이전의 중국은 변화과정에 있지 않았으며, 스스로의 힘으로는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전제이다. 펙이 자신의 글엥서 제시하고 있는 중국사의 이미지는 여러 격동이 있더라도 본질적으로는 주기적인 반복의 역사이다. 때문의 그는 19세기 서양의 침략 속에서만 근본적 변혁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중국에 가해진 서양의 충격을 천재지변과 같이 본다는 데에 있어서 펙은 레벤슨이나 페어뱅크와 견해가 같다. 하지만 레벤슨처럼 중국 사회가 안고 있던 문제들이 서양에서 유래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의 주장에는 모순점이 존재한다. 그는 중국을 해방에 이끈 것을 혁명운동으로 보는데, 혁명 그 자체는 서양의 침략으로 얻어진 산물로 보기 때문이다. 이는 '바깥으로부터의 혁명' 테제를 반복하는 것이며, 서양은 근현대 중국의 근본적 변혁에 대해서 원인으로서도 장애로서도 작용하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펙은 서양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중국이 좋았을 것이다라고 말할 수도 없으며, 반대로 서양 덕분에 중국이 좋아졌다고도 말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진다. 펙은 세계 자본주의 시스템을 중국 사회를 저개발 상태로 이끈 원인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19세기 이전에 중국은 세계 경제 시스템으로부터 격리된 상태였으며 이 시기 중국은 저개발 상태가 아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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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제로 아편정쟁 시점의 중국에서는 여러 변화가 진행 중이었다. 도시화의 진행, 화폐경제의 확대, 문자 해독률의 향상, 향신계급 세력의 확대 등인데, 펙은 이러한 중국 자체의 내재적 요인을 중시하지 않았다. 펙이 그렇지 않은 이유를 코헨은 2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한다. 첫 번째는 그가 매우 목적론적으로 중국사를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레벤슨이나 페어뱅크의 입장에서 중화제국 말기 중국의 중요 문제는 근대성 실현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펙이 중요시한 것은 중국 혁명에 이르는 변화였다. 펙이 중국의 내재적 요인을 경시한 두 번째 이유는 그의 윤리적, 심리적 판단구조이다. 그는 미국이 아시아에 취한 행동에 유감을 느꼈으며 기존의 중국 연구자들에게 분노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 자체의 내제적 요인을 강조하여 (중국의 문제는 중국 자신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면) 서양에게 면죄부를 발급하는 일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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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결국 그의 주장은 역사적 사실이 뒷받침되지 않은 무의미한 주장이며 중국의 변화는 '정체 - 서양의 충격 - 변혁'의 순서라는 역사 해석을 받아들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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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러스틴]]의 이론과 중국=== | ||
+ | 1970년대 제국주의 접근법에 기초한 체계적인 한 권의 책이 정리된다. 프랜시스 몰더의 『일본, 중국, 근대 세계 경제Japan, China, and the Modern World Economy』라는 책으로 책의 주장은 그의 스승인 이메뉴얼 월러스틴의 이론을 동아시아에 적용한 것이었다. 기존의 어떤 국가가 발전에 성공(혹은 실패)한 것을 설명하는데 그 나라의 고유한 요인을 강조하는 시각을 '전통사회 접근법'이라고 한다면, 몰더는 어떤 나라가 저개발 상태에 있는 것에 대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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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끼리 등위의 벼룩=== | ||
+ | ===제국주의 이론의 재검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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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연구의 새로운 흐름== | ||
+ | 하나밖에 없는 케이크를 두 사람이 나눌 때에는 케이크를 자르는 사람과 먼저 선택하는 사람이 같은 사람이어서는 안된다. 그런 경우에는 불평등이나 불공정함이 필연적으로 나타난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서양에 의해' 이루어진 중동의 역사나 문화의 빝바닥에 깔려있는 시각을 비판하며 "모든 표현은 그것이 바로 표현이라는 것 때문에 우선 표현하는 사람의 언어에 구속되며, 이어 표현하는 사람의 문화나 제도 혹은 정치적 환경에 구속된다."라고 말했다. 무릇, '''모든 학문적 탐구는, 바꾸어 말하면 무릇 안다는 것은 일종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띤다.''' 특히 탐구하는 자가 탐구되는 측의 역사 형성에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 때에는 표현의 오류를 내포할 위험이 최대가 된다. 이런 관계 속에서는 케이크를 자르는 사람이 먼저 선택하는 역할까지 겸하게 된다. | ||
+ | ===앏知의 제국주의=== | ||
+ | 그리고 그 두 가지를 모두 겸하는 이중성은 미국인들이 19,20세기 중국사에 관여한 방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미국은 실제로 중국 역사 형성에 큰 역할을 해왔으며 더 나아가 중국사를 해석하기 위한 학문적 패러다임을 만들어내는 데도 지도적인 역할을 했다. 상기한 세 가지 접근법들은 모두 서양중심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데, 서양 중심이란 중국 역사의 자율성을 부정하고 중국의 역사를 서양의 지적 소유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충격-반응 패러다임의 경우 주로 서양의 도전에 대한 중국의 긍정 혹은 부정적 반응이라는 관점에서 중국의 현실을 그려냈다. 이전의 연구에 비해 충격-반응 패러다임은 보다 중국의 역사 안으로 들어간 관찰을 제공하였지만, 너무 서양쪽으로 쏠려있었다. 때문에 서양에 대한 반응이라고 볼 수 없는 반응들도 서양에 대한 반응으로 치부하기도 하거나, 관계의 없는 반응들은 간과해버리는 일이 생겼다. 즉, 이 접근법은 어떤 측면은 왜곡, 다른 측면은 무시.경시하게 된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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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대화 또는 전통-근대성 접근법은 본질적으로 충격-반응 접근법과 궤를 같이 한다. 보다 세련된 이론적 기초가 추가되었지만 중국을 보는 시각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접근법은 중국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움직이지 않으며, 근대적인 서양에 의해서만 잠에서 깨어날 수 있는 전통적인 사회로 묘사했다. 하지만 이 접근법에서의 중요한 변화는 오로지 서양 자신이 근대성 실현을 향해 나아가던 도중에 경험한 프로세스일 뿐이었다. 오로지 서양의 경험에 근거하여 정의되었던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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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국주의 패러다임으로 중국 근현대사를 설명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충격-반응 접근법이나, 근대화 접근법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대립하는 것으로 생각했따.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그들은 자신들과 대립된다고 생각한 상대방과 중요한 견해를 공유하고 있었다. 즉, 제국주의 접근법 또한 충격-반응 접근법과 근대화 접근법과 마찬가지로 근대화의 한 형태인 산업화를 적극적으로 좋은 것으로 파악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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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 패러다임들은 중국이 19,20세기에 경험할 수 있었던 유일하고도 중요한 변화란 서양의 충격이 불러일으킨 변화 혹은 서양의 충격에 반응하는 변화뿐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점에서는 서로 공통적이다. 분명한 형태로 대놓고 말하는가(충격-반응, 근대화) 아니면 암묵적으로 인정하는가(제국주의 패더라임)에서 차이가 날 뿐이다. 여기서는 '''진정코 중국 안으로 들어가 중국 자신에 입각하여 중국 근현대사를 파악하려는 시각이 나올 리가 없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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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역사학자들은 편견이나 선입견이 조금도 담겨있지 않은 역사를 쓸 수 없다. 하지만 너무나도 거칠고 결함이 보이는 것을 극복하여 보다 중국 내부로 들어간 시각을 채워넣을 수 있다. | ||
+ | ===중국 자신에 입각한 접근법의 탄생과 그 특색=== | ||
+ | 중국 자신에 입각한 접극번은 무엇이 다르고 우리의 중국사 이해에 무엇을 가져다 주는가? 사실 이는 명확하게 정의 된 단일한 접근법이라기 보다는 다양한 경향의 집합이라는 것이 실제 모습에 가깝다. | ||
+ | ====①내발적인 변화의 중시==== | ||
+ | 무엇보다 이 접극법은 중국의 문제를 무엇보다도 중국 자신의 문맥에서 파악하려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서양에 의해 영향을 받기도 하고 서양과 관계가 없을 수도 있으나 어쨌든 중국인이 중국에서 경험한 문제이며 그 역사적 중요성을 재는 것은 서양의 척도가 아닌 중국의 척도여야만 한다. 이러한 근대 중국사의 이미지 재구성의 한 예로는 19세기의 개혁운동을 들 수 있다. 최근 많은 학자들은 이를 중국 고유의 개혁운동 전통으로 보고 있다. 물론 이들 중 누구도 서양이 중요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개혁운동이 서양의 의해 촉발된 서구 지향의 운동으로 간주하는 통설적 견해는 반대된다. 개혁운동의 모든 것을 중국 측 시각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19세기 전반을 보면 많은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대응하고 있던 개혁지향 중국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 ||
+ | 특히 슈레커는 1870년대의 청의 운동과 1898의 무술변법을 "정부와 엘리트 내부에서 일어난, 연속된 하나의 반대운동이었다"라고 보았다. 작금의 상황에서 기인하는 불만이나 좌절감이 정치적 현상을 비판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생각했으며, 새로운 출세의 기회를 추구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이 속한 성에서 개혁운동의 지도자가 되는 사태를 불러왔던 것이다. 이렇게 안쪽으로부터 19세기 중국의 개혁운동을 접근하면 종래와는 다른 개혁운동의 이미지가 떠오르게 된다. | ||
+ | |||
+ | 신해혁명 또한 마찬가지이다. 기존의 미국의 연구는 쑨원과 중국 동맹회 쪽에 관심이 기울어지고 있다. 특히 쑨원은 미국에서 공부를 하였다. 미국 학계는 쑨원을 신해혁명의 중심에 두고 혁명 운동의 전개에 많은 부분을 쑨원 개인의 행동의 전개와 결부시켰다. 하지만 메리 라이트가 쓴 글은 "강력하고 유효란 지도력의 결여"를 신해혁명의 특징을 보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혁명 지도력의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혁명이 일어나게 된 사회, 정치, 경제, 사상적 맥락을 중시하게 되며 내재적이고 중국 자신에 입각한 신해혁명 이미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 ||
+ | 이러한 이미지가 낳은 흥미로운 부분은 "[[향신]]계급과 신해혁명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여러 의견이 있지만, 조지프 에셰릭은 향신계급을 진보적 향신층과 보수적 향신층으로 구별한 뒤, 도시의 향신층은 신해혁명을 지지했다고 본다. 하지만 이들이 지지한 것은 자신들의 정치 권력을 획득할 수 있는 경우에 한정되었다. 신해혁명은 "정치적으로는 진보일지언정 사회적으로는 퇴보적이었던" 것이다. | ||
+ | |||
+ | 향신계층은 이 시기 중국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요인 중 하나이다. 명청시기 이들은 지주의 성격을 띠었다. 점차 중국에서도 상품경제화가 진행됨에 따라 주지가 토지 수입에서 다른 수입으로 옮겨갔다. 이들은 정식 관료는 아니었지만 소송의 중재, 지방 서원의 관리, 도로와 관개시설 복구에의 공공사업 감독 등의 일을 하였다. 태평천국운동이 일어날 부렴, 이들의 영향력을 더 커지게 되어 군사, 민사상의 기능 또한 담당하게 된다. 이는 향신들의 지방통치를 좀 더 확고하게 만들어 주었다. 청나라 말기, 이들은 지방에서 기업활동에 투신하는 등 복잡해지고 행정-관리적 성격과 기업가적 역할에 걸치게 된다. 청나라 정부가 1900년대 들어 개혁을 계획하고(신정) 중앙정부가 직접 행정활동이나 경제활동의 범위를 급속하게 확대하려고 했을 때,(예컨대 철도의 국유화) 자신들의 생명선이 위협받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막았던 것이다. 이것이 신해혁명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이런 각도에서의 신해혁명은 "'''개혁을 추진하는'''만주족 왕조와 '어떤 의미에서는' '''보수적이었던'''지방 엘리트 사이의 대립의 산물"로 볼 수 있다. 진짜 쟁점은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것으로 생각한 특권들에 대해 청나라가 간섭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신해혁명은 전통을 유지 보호 하려는 세력들에 대한 근대성을 실현하려는 세력들의 승리가 아니다. 이는 중앙과 지방의 권력을 둘러싼 투쟁이 터진 것이다. | ||
+ | |||
+ | ====②지역이나 지방의 중시==== | ||
+ | 중국 자신에 입각한 접근법의 두 번째 특색은 중국을 다루기 쉬운 작은 규모의 간위로 나누어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접근법은 중국 자신이라기 보다는 '지역'이나 '성省'. 지방성에 입각한 접근법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중국은 아주 넓다. 다양하기도 하다. 때문에 여러 지역의 공통된 것을 모아놓은 평면적인 전체상이 아니라 여러지역의 편차를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전체상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편차의 내용과 다양성의 폭을 분명히 해야한다. 예를 들어, 청나라 말기의 개혁파를 연구한다면, 코헨은 연해 문화권과 내륙 문화권으로 나누었다. 두 문화간의 차이는 이전부터 존재하였으나, 아편전쟁 이후 많은 도시들이 조약항으로 개항되었을 때, 차이는 더욱 커졌다. 하지만 이 구별이 내륙권이나 연해권의 문화가 일률적이며 편차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스키너는 '지역구분 시스템'을 착안하여 각 지역 시스템이 하천 유역을 기준으로 구분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는 19세기 중국은 9개의 메크로 지역으로 나누었다. 그는 지리적 변수와 기술적 변수(운송 등)로 이 지역들을 구분하였다. 각 지역 시스템마다 중핵 도시가 있으며 중핵 도시에서 멀어질수록 물자와 인구는 희박헀다. 그의 연구는 지역관계를 동태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 ||
− | ==== | + | ====③기층사회의 중시==== |
− | === | + | ====사회과학의 영향==== |
− | === | + | ===1840년을 넘어서=== |
==비판과 한계== | ==비판과 한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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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스 그래플린(Dennis Grafflin) | *대니스 그래플린(Dennis Grafflin) | ||
"일단 중국을 시간, 공간, 문화, 사회 등에 따라 해체해버린다면, 코헨이 요구하는 중국 자신에 입각한 역사 서술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중국을 다시 묶어야 하지 않을까?" | "일단 중국을 시간, 공간, 문화, 사회 등에 따라 해체해버린다면, 코헨이 요구하는 중국 자신에 입각한 역사 서술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중국을 다시 묶어야 하지 않을까?" | ||
− | *필자의 생각 | + | *프라센지트 두아라(Prasenjit Duara) |
− | "기존의 주류 관점에서 탈피하여 접근한다는 점에는 의의가 있지만, '중국 자신에 입각한 접근법'이 에서의 '중국'은 어떤 것을 이야기 하는가. 광대한 영토의 중국은 지역마다 기억하는 역사가 다를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은 누구를 대표하게 되는가. 지역이나 민족을 고려하여 볼 때, '중국'은 베이징을 의미하는가? 한족을 의미하는가? " | + | " 중국 중심의 접근법(China-Centered'이 이전의 접근법에 비해 보다 정확한 중국사를 구축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코헨의 주장 역시 무언가 '회복되어야 할 예정된 서사'를 전제하고 있다는 면에서 여전히 본질주의적 역사 해석의 문제점을 공유하고 있다" |
+ | *<s>필자의 생각 | ||
+ | "기존의 주류 관점에서 탈피하여 접근한다는 점에는 의의가 있지만, '중국 자신에 입각한 접근법'이 에서의 '중국'은 어떤 것을 이야기 하는가. 광대한 영토의 중국은 지역마다 기억하는 역사가 다를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은 누구를 대표하게 되는가. 지역이나 민족을 고려하여 볼 때, '중국'은 베이징을 의미하는가? 한족을 의미하는가? "</s> | ||
===코헨의 반론=== | ===코헨의 반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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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전쟁]] | *[[아편전쟁]] | ||
*[[태평천국]] | *[[태평천국]] | ||
− | *[[태평천국운동 | + | *[[태평천국운동]] |
*[[홍수전]] | *[[홍수전]] | ||
*[[대분기]] | *[[대분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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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국번]] | *[[증국번]] | ||
*[[이홍장]] | *[[이홍장]] | ||
+ | *[[청의파]] | ||
+ | *[[5·4 운동]] | ||
+ | *[[양계초]] | ||
+ | *[[신해혁명]] | ||
+ | *[[청]] | ||
+ | *[[명]] |
2019년 2월 24일 (일) 17:47 기준 최신판
개요
학문의 제국주의는 웰즐리 칼리지의 역사학 교수이자 하버드 대학교 페어뱅크 센터 연구위원인 폴,A코헨이 지은 책이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중국역사학계가 중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문제점을 느끼고 있었고 이에『학문의 제국주의(Discovering History In China)』라는 책을 저술한다. 전후 미국의 학계가 중국사를 바라보던 주류 접근법은 (그가 지적하기로) 총 3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충격-반응 접근법. 두 번째는 근대화(전통-근대)접근법, 세 번째는 제국주의(제국주의와 혁명) 접근법이다. 그는 이러한 접근법들이 서구중심적인 편견에 근거하고 있음을 깨달았고, '서구중심적'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중국 자신에 입각한(China-centered) 접근법'이라고 이름 붙인 새로운 시각을 제안하였다. '중국 자신에 입각한 접근법'은 서구 역사로부터 비롯된 일련의 기대(즉, 근대화나 자유주의, 민주주의 등)보다는 중국의 역사적 궤적과 자신들의 문제에 대한 중국인들의 인식에 더 긴밀한 관심을 기울이는 접근법으로, 중국사 자체의 맥락에서 중국사를 이해하기 위해 진지한 노력을 하는 접근법이다. [1]
애초에 코헨이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저술한 도서이기 때문에 읽기가 쉽지는 않다. 중국 역사에 대한 어느 정도의 배경(특히 19,20세기)이 있다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사 연구의 쟁점과 과제[2]
2차대전 이전 시기 미국의 중국사 연구는 서양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건들만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아편전쟁, 태평천국운동, 의화단운동, 조계지의 생활이나 제도 등이 그러하였다. 이들은 근대적인것이 곧 서양적인 것이라 보았고, 서양적인 것은 중요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들은 중국어 사료를 읽을 능력이 없었다. 2차 대전이 끝난 이후, 중국 현지에서 연구를 하던 전문 연구자들에 의해 기초가 마련되고 중국 연구가 비로소 학문으로서의 특을 갖추게 되었다. 중국어 교육이 개선되었으며 중문으로된 1차 자료를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는 중국 근현대사의 틀을 결정하는데 있어 서양이 침입이 수행한 역할을 압도적으로 강조하였다. 특히 이 시기 주요 쟁점은 1. 서양의 중격과 중국의 반응 과 2. 중국의 전통적인 문화와 사회에 가해진 근대화의 충격이었다.
60년대에 이르러 위에 충격-반응 접근법과 근대화 접근법은 비판을 받게 되는데, 그 이유는 서양의 역할을 과장한다는 것이 아닌 서양에 대한 중국인의 저항을 부정적으로만 파악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서양의 제국주의가 중국의 발전에 끼친 부정적이고 방해적인 효과를 분명히 하려고 하였다. 이들은 아편전쟁, 의화단운동 등에 대해 재검토를 실시하였으며 중국의 역사가 본래 걸었어야 할 역사를 어떻게 제국주의가 방해하고 왜곡하였는가를 보려고 하였다.
오해하면 안되는 것이 결코 코헨은 여러 접근법들을 사용하는 것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만, 이러한 개념들을 '범위를 한정짓지 않고' 모든 것을 설명하는 틀로 사용하는데 반대하는 것이다. 또한 서양의 의의가 사소하다거나 실제 중국에서 수행한 역할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지적하는 점은 서양의 중요성을 미리 결정한 뒤 이후 그 중요성을 말하는 연구태도와 서양의 역할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부분이다.
코헨은 위 세 가지 접근법은 서로 다르지만 중국 근현대사 인식 속에 서양중심적인 왜국을 심어주었다는 점에서 공통된다고 본다.
- 충격-반응 접근법
19세기 20세기에 중국에서 일어난 사건들 중에 서양에 대한 반응이라고 볼 수 없는 사건들이 있다. 하지만 충격-반응 접근법은 그러한 사건들 조차 마치 서양의 반응이었던 것처럼 해석을 조장한다. 혹은 중요하지 않은 사건으로 판단을 내려버린다. 이러한 접근법에서는 서양에 대한 중국의 반응 양식을 부각시키는 경우에 있어서만 중요한 사건인 것이다.
- 근대화 접근법
이 접근법은 19세기의 시각을 계승한 접근법으로 서양의 제한된 경험에 근거하여 중국사에 그대로 적용시키는 접근법이다. 중국 역사 자체에서 유래하는 물음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서양의 근대 과학이나 산업혁명을 중국이 이룰 수 없었던 이유에 관한 물음이다. 이러한 물음은 '서양 근대의 역사야 말로 당연하고 필연적인 역사'라는 점이 전제되어 있다.
- 제국주의론 접근법
1960년대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고 많은 미국의 지식인들은 죄책감과 함께 새로운 눈으로 제국주의를 바라보게 된다. 그들은 제국주의야 말로 과거 몇 세기 거쳐 중국과 기타 아시아국가들이 맛본 고난의 근원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또한 미국이 정치적, 도덕적, 문화적으로도 세계에서 가장 우월하다는 명제가 신화였음을 깨닫게 된다. 이 접근법은 중국의 역사가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발전경로를 걷고 있는데 서양 제국주의가 중국이 걷게 될 발전 경로를 방해했다는 함정에 빠진다. 이러한 접근법은 중국이 19-20세기 당했던 일들의 원흉으로 서양을 지목하고 서양을 유해한 존재로 본다.
서양의 충격-중국의 반응[3]
1950, 60년대 미국인들은 '서양의 충격'과 '중국의 반응'이라는 개념에 입각하여 중국의 역사를 해석하는 경향이 강했다. 즉, 19, 20세기 능동적인 역할을 한 것은 서양이며, 중국은 단지 반응적이거나(reactive) 수동적인 역할만 했다는 관점이다. 특히 이러한 접근법을 대변하는 학자가 존 킹 페어뱅크(John K. Fairbank)로 그는 1954년 『서양에 대한 중국의 반응 China's Response to the West』라는 책을 쓰기도 하였다. 중국의 변화는 어느 부분 서양의 충격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중국 자신의 여러 가지 내부 요인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다. 하지만 페어뱅크는 전자만을 강조한다. 또한 19세기 중국에서 서양과 아무런 관련을 가지고 있지 않은 여러 측면들을 단순히 '두르러질 정도의 관성'이라는 말로 일소시켜 버리고 한다. 이러한 접근법은 여전히 교과서 등에 잔존해있다. 다시 말하지만, 코헨은 충경-반응 접근법 자체가 '잘못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당성의 범위가 정해지지 않았다는 점을 비판한다. 그는 뉴턴의 예를 드는데, 과학이 발전하고 그의 법칙 자체는 부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법칙이 한정된 범위에만 적용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해졌다. 청나라 말기 역사의 모든 것은 충격-반응 접근법으로 설명될 수 없다.
충격-반응 접근법의 이론적 문제[4]
충격-반응 접근법에는 여러 이론적인 문제들이 존재한다.
- 서양의 다면성과 모순을 무시하기 쉽다
- 아편전쟁(1840) 당시의 서양과 1920, 30년대의 서양은 같은 근대의 서양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두 개의 서양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존재한다. 서양도 시간이 흐르면 변화한다. 하지만 충격-반응 접근법은 서양의 다면적인 모습과 여러 모순들을 무시하기 쉽다.
- 서양이라는 개념의 상대성
- 우리는 서양과 동양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있다. 하지만 서양이라는 개념 자체가 굉장히 상대적인 개념으로 완벽하게 나뉠 수 없다. 예컨대, 미국과 프랑스 간의 차이는 중국과 서양의 차이만큼이나 클 수도 있다.
- 서양의 범위 설정
- 뉴욕이 모든 서양 문화를 대표하지 않듯, 중국이 받아들인 서양도 중국이 '선택한' 서양의 이미지일 뿐이다. 한 예로, 후스의 '과학과 민주주의'는 서양에서 비주류였던 존 듀이의 이론이었다. 중국이 접촉한 서양은 서양에서도 일부의 그것이다.
- 중국의 충격에 대한 서양의 반응이라는 측면
- 중국인이 서양의 이질성에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중국의 이질성에 대해 서양인이 반응하는 방식에 의해 자유가 된다. 충격-반응 접근법은 중국의 충격에 대한 서양의 반응을 무시한다.
- 착종된 사태를 어떻게 분석할 것인가
접근① 19세기의 반란 [5]
19세기는 청나라의 근간을 뒤흔들 정도로 대규모의 반란이 많았던 시기다. 윈난성의 이슬람교도들의 반란(1855 ~1873), 서북부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이슬람 교도들의 반란(1862 ~ 1873), 염군捻军의 반란(1853~1868), 태평천국운동(1850~1864)등이 동시에 일어났다. 물론 그 중에서도 단연 태평천국운동이 가장 파괴력이 강했다. 그리고 유일하게 이 운동만이 서양의 영향을 받은 운동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문제가 발생하는데, 과연 이 태평천국운동이 '서양에 대한 중국의 반응'이라는 틀로 설명하는 것이 유익한가하는 부분이다.
태평천국운동의 성격을 알기 위해서는 운동이 일어난 지역을 살펴보면, 태평천국 운동이 일어난 화남华南지방(광동, 복건 등)은 청 왕조의 지배에 가장 늦게 편입되었으며 떄문에 청왕조의 권력 구조에서 가장 불안정한 부분이었다. 또한 외국무역과 아편전쟁의 파괴적 영향이 가장 심했던 곳이다. 실제로 화남지방의 서양의 충격은 현실적이었으며 강력했고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미국 연구자들이 보기애, 태평천국운동의 가장 혁명적인 (이전의 중국과는 다른)측면은 이데올로기와 조직구조이다. 태평천국의 이데올로기는 복음과 원시 공산주의, 유교적 유토피아, 사회적약자에 대한 배려, 남녀평등(특히 여권신장) 등이 뒤섞인 모습이었으며 이전에는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또한 조직적인 측면에서도 이전과 달랐다. 태평천구그이 조직은 국가가 사람들의 생활을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전면적으로 통제하는 전체주의적 시스템으로 이전의 역사에서는 그 예가 없었다.
서양의 진출이 없었떠라면 태평천국운동의 반란은 다른 성격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패했고, 외국 무역이 중국 남부에 파괴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는 어떤 부분에서는 혼란을 낳은 하나의 요인이다. 또한 태평천국의 지도자중 한명이자 홍수전의 동생인 홍인간은 홍콩에서 서양문화를 체험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위에의 요소를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태평천국의 본질은 어떠한 형태에 있어서건 서양에 대한 반응으로 간주할 수 없다
태평천국 운동은 서양과 대결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중국을 근대화로 이끄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때문에 태평천국의 성격을 '서양 그 자체'나 서양이 낳은 문제에 대처하려는 시도로 파악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비본질적인 측면에 대해서만 예외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1800년대 중기의 반란들은 서양의 충격이 있기 이전부터 존재하던 여러 조건에 대한 반응이었다. 태평천국도 그 중 하나였으며 단지 서양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 달랐다.
오히려 태평천국은 '서양에 대한 중국에 반응'에 영향을 미쳤다. 우선 진압과정에서 증국번과 이홍장을 위시한 지역권력이나 향신층이 대두하여 지방권력이 커졌고 이러한 권력은 이후 중앙정부의 권력을 약화시켜 서양의 충격에 대해 창조적으로 대응하려는 중앙정부의 발목을 잡았다. 또한 (청나라를 망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지녔던 이 반란들로 인해) 위정자들은 반란의 진압과 방지라는 국내문제는 가장 중요한 사항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는 일본이 서양의 충격에 굉장히 주의를 기울이고 민감하게 반응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중국이 19세기 겪은 역사적 상황에서 볼 때, 국내적 문제야말로 최고로 시급한 일이었다. 메리 라이트Mary C. Wright의 말을 빌리자면, "연안의 5개 항구에 한정되어 있던 외국의 진출은 국부적인 통증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를 두고 중국의 반응이 미지근했던 것을 단지 멍청하다거나 정체성停滞性 등의 본질 탓으로 돌려서는 안된다.
접근② 개혁[6]
일반적으로 19세기에 행해진 청나라의 개혁들을 두고 '서양의 충격이 없었다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나 '서양의 충격과 관련하여서만 의미를 갖는다'라는 관점들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은 옳지 않다. 청나라 말기 일력의 개혁들은 물론 서구의 양향을 받긴했지만 개혁가들의 사상과 행동은 오랜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기도 했다.
이미 아편전쟁 무렵부터 많은이들은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중국이 서양에 대해 중대성을 인식한 것은 1870여년이며 이를 인식한 사람들도 아주 적었다. 위정자들에게는 여전히 국내적인 반란이 가장 큰 관심사였다. 그들은 반란이 없으면 외부의 일들도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해다. 흔히들 19세기의 개혁하면 양무운동(다르게 표현하면 동치중흥)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 개혁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이 60년대에 일어난 개혁은 대체적으로 혁신적이라기 보다는 복고적이었다. 한 예로 과거제도를 들 수 있는데, 과거제도는 서양의 학문을 받아들이거나 과거제도의 내용을 시대에 맞게 전환하려는 시도등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경제활동에 있어서도 상업과 같은 비농업 부분의 경제활동에 대한 과중한 과세에 반대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특히, 동치중흥의 경제사상은 철도나 전신의 도입에 극심한 반대를 하였다. 서양과의 무역에 있어서도 무역을 통한 경제성장은 서양인들의 관념이었을 뿐, 애초에 중국의 위정자들에게 '경제성장'이라는 생각은 그들의 이해를 넘어서는 일이었다.
물론 양무운동 당시의 금릉 기기국과 같은 것을 떠올리며 서양의 것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냐는 물음이 있다. 맞다. 당시의 중국 위정자들이 서양을 모델로 개혁을 필요하다고 인식한 것은 딱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군대의 재편성이다. 여러차례의 전쟁을 겪은 중국 입장에서 서양의 군대 질서과 군사기술의 우월성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동치중흥의 지도자들은 근대적인 무기공장과 조선소를 만들어 힘을 기르고자 하였다. 개혁을 필요로하는 다른 영역은 외교영역이었다. 기존 중국의 외교는 전통적으로 조공체제에 기반해 있었다. 하지만 중국은 총리각국사무아문(총리아문)을 만들어 특히 서양국가와의 외교 관계를 다루었다. 하지만 이 두가지 모두를 '혁신'과 묶기에는 몇몇 한계점이 존재한다. 우선, 중국이 전쟁을 치루는 방식을 배워온 것은 오랜 역사에서 오랑캐의 그것을 배운것과 일맥상통한다. 또한 총리아문은 어디까지나 임시적인 기구였다. 공친왕은 '여러 국가들간의 교섭이 번거롭지 않게되면 총리아문은 즉시 폐지되고.....'라고 명시하였다. 이는 혁신을 싫어하는 그 시대의 풍조를 보여준다.
동치중흥이라는 중국의 개혁에 대해 우리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결론은 그 개혁이 실패했다는 것이다. 메리 라이트는 이를 '근대화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유교 질서의 안정을 위해 필요한 것과 서로 저촉되었기 때문이다'라고 매듭지었다. 하지만 코헨은 이에 두 가지의 의문을 제기한다. 첫째는 동치중흥은 실제로 실패했는가? 두 번째는 설령 동치중흥이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과연 메리 라이트가 말하고 있는 근대화에 요청되는 요소와 모순된다는 것이 실패의 원인이었는가?이다. 상기하였듯, 동치중흥에 있어서 서양과 관련이 깊은 것은 군사, 외교, 상업의 영역이었고, 메리라이트에게는 이러한 개혁들이 바로 동치중흥이었다. 재미있는 점은, 동치중흥에서 가장 쓰라린 좌절감을 맛본 부분은 군사, 외교 부분이 아닌 강력한 정부, 지방 지배의 회복 부분이었다. 이런 부분에서는 서양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 부분에서의 개혁의 좌절은 근대화하는 것과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 중국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는 것은 중국사회를 근대화 하는 것과 같으며 그러한 근본적 변혁은 서양으로부터 이념이나 제도 모델을 차용하지 않고서는 유교의 지적 세계 자체 내에서는 생겨날 수 없다?
이는 대부분의 미국 역사학자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1860년대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사상가인 풍계분의 사례는 이를 반박한다. 그는 청의 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개혁안을 내놓았는데 (예컨대, 서리를 폐지하고 생원을 등용할 것, 향촌의 우두머리를 투표로 선출할 것. 등) 이러한 개혁안에는 서양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 태평천국운동의 이데올로기가 반反유교적 성격을 띠고 있지 않았더라면 반만 봉기를 지지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서 한인 지식인들과 관료들이 청 왕조에 가담하게 되었다)?
코헨이 보기에 이 주장은 검증이 되지 않은 애매한 가설들위에 확립되어 있다
- 한인 엘리트들이 만주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원심력이 청 왕조 수립으로부터 200년이 지난 당시에도 여전히 강했다
- 태평천국의 이데올로기가 유교의 교의와 대립되지 않았더라면 많은 한인 관료들을 태평천국의 기치 아래로 달려갔을 것이다
- 한인 엘리트들이 태평천국의 이데올로기를 부정한 이유는 그것이 서양의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 동시대 중국인들에게 태평천국의 이데올로기적 위협은 물리적 파괴력보다 더 위험한 것이었다.
하지만 코헨은 이러한 가설들이 입증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시간이 흘러 19세기 말이되면 서양의 선례를 모델로 한 변혁이 필요하다는 강한 자각이 생겨나게 된다. 기존의 내세웠던 중체서용中体西用이 가진 '체'와 '용'은 어느덧 제로섬게임과 같이 변해버린다. 용用을 받아들여 공업화를 실행하게 되면 연이어 근대적 교육을 실시해야하는데, 근대 교육의 확대는 필연적으로 체体를 동요시켰던 것이다. 이후 옌푸나 왕도, 캉유웨를 비롯한 학자들의 다양한 '개혁정당화론'이 대두하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보니 결국은 아무것도 이룬게 없었다. 애초에 개혁이라는 황제의 명령이 실행된 것은 극히 제한적인 소수의 성省에 지나지 않았으며, 변법을 지지하는 후난성만이 눈에 띠었다. 이렇듯 당시의 관료들은 개혁에 크게 저항하였다.
접근③ 반동[7]
- 반동1 청의(파)
청말의 개혁은 엘리트 내부의 현상이었다. 하지만 반동은 그렇지 않았다. 이 시기의 반동을 볼 때는 같은 시기 반反서양의 입장을 명확히 한 '청의파'라는 정치 세력을 보아야 한다. 청의는 '사악한 마음이 없는 논의'아는 의미를 가진다. 이들은 배외감정을 강령하게 드러내었는데 곽숭도라는 관료의 사례를 보면 이들의 반서양 행위가 어떠하였는지를 확인해볼 수 있다. 곽숭도는 서양 이적은 중국이 이전에 만났던 이적과는 다르다는 것을 파악하였다. 하지만 청의파는 그런 그를 배반자라고 비난하였다. 이후, 그는 영국 주재 공사로 영국에 머물게 되는데, 그가 보고서를 본국에 보넀을 때(그 보고서에는 서양이 가진 몇몇 장점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 보고서의 발매를 금지해야 한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청의파로부터 나왔다. 공사 임기를 마치고 귀국한 그는 청의파로부터 비난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칩거하였다.
청의파는 서양의 사소한 것이라도 받아들이는것을 격렬하게 거부하였다. 그들은 중국에게 필요한 것은 서양의 교활한 기계와 기술이 아니라 '중국 인민의 각성'이라고 주장하였다. 실제 청의파 인물은 "기계에 대한 의존이 아니라 바로 인민의 확고부동한 정신에 중국이 다른 외국들보다 우월한 근거가 있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필자는 이 부분에서 마오쩌둥이 갑자기 생각났는데, 위 말은 실제 마오쩌둥의 시기 내세웠던 기치이기도 하였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인가..)
이러한 청의파의 사상은 '서양에 대한 반응'이라는 측면을 명백하게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있지는 않다. 표면적으로는 서양을 문제삼고 있어도 청의파는 다른 중국인의 행동과 정책에 대한 반응 또한 읽어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청의는 국내의 문제이기도 했다. 청의파는 특히 유교를 강조하였는데, 로이드 이스트먼Lloid Eastman에 의하면 "유교원리에 따른 엄격한 태도로 사람들의 주목을 모음 관료들을 높은 지위로 승진했다'. 특히, 청의의 행위는 권력을 가지지 못한 중견, 하급 관료들에게서 두드러졌는데 자심들의 이익을 확대하기 위해 청의를 이용할 유혹이 존재했던 것이다. 또한 황제에게 있어서도 거물로 성장한 이홍장 등을 견제하는데 청의를 이용할 수 있기도 하였다. 코헨은 서양이 없었더라도 청의와 태평천국은 어떤 형태로든 발생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서양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두 사건에서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청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행해지는 경향이 짙었으며, 청의라는 현상 자체는 정치적 성격을 농후하게 띠었다. (한국의 반공이 생각나기도 한다.)
- 반동2 기독교와 중국인 신자들에 대한 적대행동
이 행위는 청의보다도 더 서양의 도전에 대한 반응으로 보인다. 하지만 시각을 조금 더 넓혀본다면 이 또한 다양한 동기들이 교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교사들이 조약으로 인해 보호를 받으며 거주와 포교를 행할 수 있었던 것은 1860년대 부터이다. 기독교에 대한 반감은 그 이유가 다양했다. 첫번째 이유는 중국인들의 뿌리깊은 중화의식를 든다. (코헨은 더 나아가 중국인들이 중화의식에 근거하려 불교에 대해서도 반감을 품었다고 서술하였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두 번째 이유는 선교사들의 포교를 하면서 취한 태도였다. 그들은 다양한 이유로 중국문화에 대한 다양한 비난을 하였다. 이는 특히나 향신계층의 문화적 권위를 위협하는 행위였다. 예를들면 선교자들은 지방관헌들과 대등하게 교제하는 것이 허용되었는데, 원래는 향신들만 가능했던 일이었다. 어째건 선교사들의 행위는 향신들의 기득권을 침해하였다. 선교사들이 일반 대중들에게 행한 교육은 중국의 여러 지식들을 부정하는 행위였는데, 향신들의 기득권의 원천인 중국의 기존 지식 카르텔이 붕괴되면 향신들의 권위도 당연히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선교사들은 여러 특권적 지위를 이용하여 지방관의 체면과 권위에 도전했다는 부분이다. 선교사들은 함대를 파견하는 등의 실력행사를 서슴치 않았고 배상으로는 중국인들에게 상징적으로 중요한 서원, 묘 등을 요구하였다. 또한 선교사들은 지방관들의 재판에 간섭하기도 하였다. 선교사들의 배상 요구는 그 지방의 가난한 서민들의 부담을 가중 시키기도 했고, 개종한 이웃들의 젠체를 보며 위협을 느꼈다.
접근법의 수정
전통과 근대성
정체되어 있고, 잠들어 있으며, 변화가 없는 중국. 그리고 활력에 가득차 있으며, 끊임없이 변화하고 역사를 가지고 있는 서양. 우리는 기존의 역사를 이러한 관점에 의거하여 바라보았다. 하지만 중국이 정말로 정체되어 있었던 것이었을까. 1950,60년대 미국의 중국사 연구자들은 '전통적traditional'과 '근대적moder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중국의 역사를 단계적으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여기서의 근대란 물론 중국이 서양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 시대부터를 가리킨다. 근대화론의 발생은 지극히 이데올로기의 성격을 띠고 있었는데, 전후 제3세계나 후진국들의 문제에 해석하는데 있어서 마르크스-레닌주의 관점에 대한 대응으로서 생겨났다. 하지만 근대화론의 비서양문화에 대한 인식은 철저히 19세기 서양 지식인들의 생각에 크게 의거하고 있었다. 19세기 서양 지식인들에게 중국은 '잠에 빠져있는 사회' '영원한 정체eternal standstill' '변화가 없는 사회'로 받아들여졌다. 참 미묘한 점은 한 세기 전인 18세기에는 위와 같은 중국은 '안정된 중국'으로 긍정적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한 세기 간의 간극은 아마 산업혁명으로 인한 물질수준의 향상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코헨은 근대화론을 이야기 하기 위해 조지프 레벤슨이라는 학자를 가져온다. 그는 중국 문명, 특히 그 문명 변화 양상에 아주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근대화를 절대 필요로 생각했었다. 물론 19세기의 서양 지식인들과는 큰 차이를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 세계전쟁과 베트남전쟁을 거치면서 '기술, 물질이 문명의 필요 특징인가?'하는 등의 의문이 생겨났던 때였고 이에 중국 문명을 19세기 지식인들처럼 '야만'으로 바라보지는 않았다. 오히려 레벤슨은 19세기의 관점을 서양중심적이라고 비판하였다. 단, 상대적으로 변화가 결핍된 것을 인정할 셈이다. (다만 코헨은 여기서 '변화'라는 단어에 주목한다. 역사학자는 자신이 찾고자 하는 부분만 보는 경향이 있다. 변화 또한 마찬가지이다. 국민소득이 3만불이 되어도 우리 보통 서민의 삶 속 볂화는 그리 크지 않다.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많고 변화의 속도는 모두가 같지 않다.) 레벤슨이 서양 접촉 이전의 중국 문명을 바라보는 인식은, 변화가 있더라도 '틀 내부에서만 일어나는 변혁(Change within tradition)'이며 서양으로의 바깥 충경이 없었더라면 기본적인 구조를 버릴 수 없는 사회였다. 그는 '17,18세기 중국도 서양처럼 과학이 지배하는 사회로 발전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어떤것이 있는가?'하는 의문을 품고 있었는데 이 질문은 매우 자기중심적일 뿐이며 답이 예/아니오 밖에 나오지 않는다. (물론 레벤슨은 아니오 라고 답할 것이다.) 레벤슨의 물음이 편협성을 띠는 이유는 그의 물음이 하나의 암묵적인 전제 위에 성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전제란 "서양이 경험한 근대성을 실현하는 방향으로의 '발전'이야말로 유일하고도 중요한 발전"이다.
레벤슨은 서양 충격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하였다. 그가 서양에 부여한 역할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변화의 촉진자로서의 역할이다. 그에게 중국 전통사회의 붕괴는 서양 충격의 결과였다. 서양문화가 중국인의 사상세계를 하룻밤만에 바꾸어 버렸다는 해석이다. 그는 49년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의 모습이 이전의 중국사와 연속성을 갖지 않는 것을 하나의 증거로 보았다. 하지만 정말로 서양'만이' 그런 붕괴의 원인을 만들었을까? 많은 증거들은 서양 침입 이전에 18세기 중국에 이미 커다란 사회적 경제적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레벤슨이 서양에 부여한 두 번째 역할은 중국의 새로운 질서 형성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레벤슨은 근대화의 목적을 '공업화, 서양화' 하나라고만 생각하였다. 청의 멸망 이후 중국 혁명의 양태는 원인부터 목적까지 근대 서양이 중국에게 안긴 문제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즉, '서양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 서양에 대항하여 이루어진 혁명'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충격-반응 접근법'에서도 언급하였지지만, 중국 혁명의 중요한 측면들은 서양 접촉 이전부터 존재하던 중국 토착의 여러 문제들에 대한 반응일 수도 있다. 이 문제들이 서양에 의해 증폭되었을 수는 있으나 오로지 서양이 문제는 아니었다. 오히려, 중국의 옛 문화가 근대 변혁을 추진, 일조하는 측면을 볼 수도 있다.
전통과 근대성은 서로 대극적인가
문제는 전통과 근대성 문제로 넘어간다. 레벤슨은 유교(전통)와 근대성은 근본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고, 새로운 근대 질서가 수립되기에 앞서 전통 질서가 파괴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레벤슨에 동조하는 메리 라이트라는 학자는 중국이 근대세계에 적응하는데 방해가 된 가장 큰 것을 유교 시스템 자체로 생각했다. 중국의 전통적 가치와 제도는 모두 극복되어야 할 장애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벤저민 슈워츠는 현재에 있어서도 일정한 영역에서는 과거의 경험이 존재하고 있으며 전통과 근대성이 침투 불가능한 두 개의 전체로서 대립하고 있다는 시각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특히 1960년대들어 전통과 근대성의 관계를 둘러싼 새로운 해석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토머스 케네디는 청나라 말기의 문자해독률 수준을 들어 경제 발전의 활력이 될 수도 있음을 주장하기도 하였고, 다른 연구가 들도 비슷한 이론을 펼친다. 이러한 연구들은 중국인들이 근대화 혹은 혁명에 의해서 해결할 것으로 기대되는 중국 내부의 문제들에 주목한다. 스튜어트 슈람은 중국의 전통에 포함되어 있는 두 개의 요소(역사감각과 인간생활의 주요한 영역의 하나인 정치에 대한 관심)이 중국인들로 하여금 근대 세계에서 살아남을 준비를 뛰어나게 수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전통은 한편으로는 혁명의 대한 장애이기도 하나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을 촉진하고 활력을 부여하며 혁명을 정통화 하기 위한 재료의 저장고로 가능하는, 전통과 혁명 사이의 양의적 관계에 주목하기도 하는데, 특히 마오쩌둥의 연구에 있어서 마오쩌둥은 중국 전통에 뿌리 내리고 중국 사회가 진정으로 무엇을 필요로 하고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를 알아차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며 그를 높게 평가한다. 위에 '충격-반응 접근법'에서도 언급된 풍계분이 제기한 개혁 수단도 양립 가능하다는 한 예가 될 수 있는데, 그가 제기한 개혁 수단들은 근대적으로 보이더라도 그 자신이 이어받은 사상적 전통에서 생겨난 것이다.
5.4에 대한 미국 학계의 여러 연구들은 전통적 요소와 근대적 요소의 복잡한 연계성을 재인식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신유학은 무제한 적으로 현상 유지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질서에 대한 비판자로서도 기능하였다. 드 배리는 중국 인민의 새로운 경험들을 두고 단순히 외부로부터 고취된 혁명이 아닌 전통 내부에서 싹튼 성장으로 그 본질이 설명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매츠거의 경우는 많은 유학자들 또한 변화를 찾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유학자들은 변혁의 방법을 찾고 있지 못했다. 서양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는 서양을 접하기 전의 중국을 고뇌와 함정이라는 단어로 표현하였다. 그에게 서양은 고뇌중인 중국에게 답을 알려준 존재였던 것이다. 서양은 변혁을 원하는 중국의 구제자였다.
근대화 패러다임의 폐기를 향해
1950, 60년대의 중국연구는 이전 2차대전 이전의 사학 보다는(즉 중국을 경멸하는 시각) 한 걸음 나아간 것이었다. 이들은 중국 내부의 일에 주의를 기울이고, 공문서 자료나 중국어로 된 1차 자료를 통해 중국을 이해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일에는 일정한 틀이 부여되어 있었다. 바로 "중국 사회에는 스스로 자체 내부에서 변화를 일으키기 위한 잠재적인 능력이 거의 결여되어 있었으며 근대 중국의 변혁을 일으킨 원인은 오직 서양이다"라는 가정 말이다. 근대화 접근법은 이러한 연구를 수정하려고 한 연구 방법으로 중국의 토착 사회를 하나의 '변화하고 있는 사회'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들의 연구 또한 한계가 있었는데, 이들은 전통과 근대성을 대조적으로 파악한 19세기의 사상에 기원을 둔 사고 방식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근대화 패러다임에는 여러 문제점이 있다. 첫번째로 전통-근대화라는 배타적 발상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볼 때도 전통과 근대성을 나누어서 생각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이는 옳지 않다. 두 번째로 역사 에너지 불멸의 법칙(The conservation of historical energy)인데, 이는 어떤 주어진 사회에서 한 짝의 양극적인 요소로 향하여 소비되는 에너지의 총합은 일정하며 어느 한쪽으로 향한 에너지가 늘어나는 만큼 다른 한쪽의 극으로 향한 에너지는 줄어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그렇지 않다. 선택적 근대화는 전통적 제도나 가치를 강화하는데 그칠수도 있는 것이다. (특히, 근대화된 군대가 반동적 체제에 봉사한다면?) 중국이 근대화 된다면 시소 처럼 자동적으로 전통적인 중국으로부터 멀어진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세 번째 문제점은 기본적으로 비대칭적인 현실을 기술하고 설명하기 위해서 밀접하게 대칭적인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근대성에 관해서 우리는 여러 문화가 획일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통이라는 개념에는 근대성에 걸맞는 획일성이 없다. 예를 들어, 10세기 중국과 14세기 프랑스는 모두 근대가 아니다. 하지만 이 두 개의 시간대는 유사한 '전통'시기인가?
근대성이라는 개념에서 또한 문제가 있다. 첫번째 문제는 근대성이라는 개념이 본질적으로 목표수렴형 개념(Closed concept)이라는 점이다. 근대성이라는 개념에는 역사란 목적을 향해 직선적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는 목표 개방형Open model이 있다. 목표 수렴형 개념과 달리 목표 개방형 모델은 다양한 답이 있을 수 있는 물음을 던지는 일이 가능하다. 역사학자가 목표 개방형 모델을 사용할 때 비로소 중국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실에 충실한 근현대 중국사의 이미지를 그려낼 수 있다. 근대성의 두 번째 문제점은 근대화가 갖는 자민족 우월의식이다. 이는 서양인에게만 관련이 되어 있다. 자신이 선두에 위치해 있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경험을 보편화 하기 쉽다.
타자의 눈으로 본 자기의 이미지를 갖기 않은 것은 서양 뿐이다. 어떻게 보면 다른 어떤 국민보다도 근대 세계를 만드는데 공헌한 서양인이 어떤 의미에서는 근대 세계를 이해하는 능력이 최소한 밖에 되지 못한다고 볼 수도 있다. 때문에 근대화 방법을 폐기하여 서양 중심주의의 정도가 보다 낮은 방법을 탐구하는 것이 더 이점이 있을 것이다.
제국주의와 혁명
코헨이 '제국주의 접근법'이라고 명명한 입장은 제국주의를 주축으로 삼아 중국 근현대사를 해석한 입장을 말한다. 한 예로, 마오쩌둥은 중국 근대 역사를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의 역사이자 중국의 독립과 자본주의적 발전을 방해해온 역사로 보았다. 1960년대 베트남 전쟁이 불러온 혼란은 중국 근현대사에 대한 기존의 접근법, '근대화 접근법'을 전혀 다른 근거에 기초한 비판을 일으키는데, 이 비판의 중심에는 제임스 펙이라는 학자가 있었다.
펙과 페어뱅크의 논쟁
펙은 크게 몇 가지 부분에서 기존의 근대화 접근법을 비판한다. 그는 근대화론을 단순한 학문적 성격의 이론이 아닌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띤 이론으로 보았다. 즉, 근대화론을 "미국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개입을 정당화 하기 위해 지도적인 중국 전문가들에 의해 사용된 이론에 다름아니다"라는 것인데. 특히 중국 전문가들은 이를 통해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동을 은폐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사에서 제국주의가 한 역할을 중대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미국의 중국의 전문가들은 제국주의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중국인들의 관념 속에나 존재하는 것이며 이는 상처입은 고통을 심리적으로 무마시키는 진통제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펙은 중국전문가들이 동아시아의 형태를 만든 두 가지 요인 1. 서양의 근대화의 힘 2. 토착적 전통을 비교하며 근대화의 힘은 같으나 일본과 중국은 토착적 전통이 달랐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나 나타났다는 식의 해석에 반대하였다. 그가 보기에 중국은 서양으로부터 전면적인 충격을 받았기에 반응할 수 없었던 것이고 일본은 토착적 요인이 아닌 국제환경적 요인과 시기 덕분에 유리했을 뿐이다. 펙의 눈에 제국주의는 정확히 국제 경제 시스템은 비서양 국가들의 근대화를 촉진하기는 커녕 근대화를 거의 불가능하게 만드는 적대적 환경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월러스틴의 주변화이론과 포머란츠와 황쫑즈 사이의 논쟁을 참고해 볼 만 하다.) 특히 그는 존.K 페어뱅크를 주로 공격하였는데 페어뱅크는 다시 그의 주장에 대한 견해를 발표한다.
펙의 주장 페어뱅크의 비판 근대화론은 학문적 성격의 이론이 아닌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띤 이론이다. 펙은 근대화론과 '혁명적 마르크시즘'을 구별 못하고 있다. 근대화론은 순수 학술용 이론으로서 중국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설명하는 도구일 뿐이다. 혁명적 마르크시즘은 아시아 국가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혁명적 목적을 위해 채택하는 교의일 뿐이다. 미국의 중국 전문가들이 아시아의 현실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확산시키고 미국 제국주의의 행위를 은폐해왔다. 펙이 말하는 중국 전문가들은 미국의 지배자 그룹이 아닐뿐더러 20년간의 미국 정부 정책에 지지자라기 보다는 오히려 비판자였다. 제국주의 역사학자들이 중국을 다루는 방식은 안(内)과 밖(外) 중 어느 것을 중시하는 가를 두고 변화를 보인다. 30년대의 중국 연구는 중국의 내부(반응)의 연구였다. 요즘은 그것이 밖으로 향한다. 요즘들어 제국주의는 다시금 표적이 되었다. 하지만 제국주의를 어떻게 볼 지는 다른 문제(근대화, 마르크시즘, 단순 국제관계)보다 2차적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반박에 대해 펙은 다시 반박을 한다. 우선, 페어뱅크의 첫번째 발론은 오히려 펙 자신의 주장이 맞다는 것을 더 보여주는 주장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 문제에 대해서 또한 반박을 하였는데, 자유주의자들과 우익이 서로 반목은 했을지언정, 미국과 세계에 대한 생각의 전제는 기본적인 부분에서 같았다는 점이다. 즉, 둘은 모두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으며, 단지 그 세계관의 실행에 있어서 의견이 불일치한 것일 뿐이다.
베트남 전쟁과 중국 연구
펙의 공격은 미국의 중국 연구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을 가져다 주었다. 특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던지며 중국 연구 전체를 되돌아보는 게계가 되었다. 특히나 이러한 자아비판의 움직임은 젊은 대학원생들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특히나 페어뱅크는 펙의 질문에 대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죄의식을 언급하며 역사는 도덕심에 의거해서만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점을 시사하였다. 그가 보기에 펙은 "1차적 관심이 중국의 현실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미 제국주의와 싸우는 것일뿐"이었다.
참 재미있는 점은 펙의 중국사관은 그가 공격하는 충격-반응 접근법이나 근대화접근법과 많은 부분 기본 전제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첫 번째는 19세기 이전의 중국은 변화과정에 있지 않았으며, 스스로의 힘으로는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전제이다. 펙이 자신의 글엥서 제시하고 있는 중국사의 이미지는 여러 격동이 있더라도 본질적으로는 주기적인 반복의 역사이다. 때문의 그는 19세기 서양의 침략 속에서만 근본적 변혁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중국에 가해진 서양의 충격을 천재지변과 같이 본다는 데에 있어서 펙은 레벤슨이나 페어뱅크와 견해가 같다. 하지만 레벤슨처럼 중국 사회가 안고 있던 문제들이 서양에서 유래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의 주장에는 모순점이 존재한다. 그는 중국을 해방에 이끈 것을 혁명운동으로 보는데, 혁명 그 자체는 서양의 침략으로 얻어진 산물로 보기 때문이다. 이는 '바깥으로부터의 혁명' 테제를 반복하는 것이며, 서양은 근현대 중국의 근본적 변혁에 대해서 원인으로서도 장애로서도 작용하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펙은 서양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중국이 좋았을 것이다라고 말할 수도 없으며, 반대로 서양 덕분에 중국이 좋아졌다고도 말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진다. 펙은 세계 자본주의 시스템을 중국 사회를 저개발 상태로 이끈 원인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19세기 이전에 중국은 세계 경제 시스템으로부터 격리된 상태였으며 이 시기 중국은 저개발 상태가 아니었다.
실제로 아편정쟁 시점의 중국에서는 여러 변화가 진행 중이었다. 도시화의 진행, 화폐경제의 확대, 문자 해독률의 향상, 향신계급 세력의 확대 등인데, 펙은 이러한 중국 자체의 내재적 요인을 중시하지 않았다. 펙이 그렇지 않은 이유를 코헨은 2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한다. 첫 번째는 그가 매우 목적론적으로 중국사를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레벤슨이나 페어뱅크의 입장에서 중화제국 말기 중국의 중요 문제는 근대성 실현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펙이 중요시한 것은 중국 혁명에 이르는 변화였다. 펙이 중국의 내재적 요인을 경시한 두 번째 이유는 그의 윤리적, 심리적 판단구조이다. 그는 미국이 아시아에 취한 행동에 유감을 느꼈으며 기존의 중국 연구자들에게 분노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 자체의 내제적 요인을 강조하여 (중국의 문제는 중국 자신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면) 서양에게 면죄부를 발급하는 일이었다.
결국 그의 주장은 역사적 사실이 뒷받침되지 않은 무의미한 주장이며 중국의 변화는 '정체 - 서양의 충격 - 변혁'의 순서라는 역사 해석을 받아들였다.
월러스틴의 이론과 중국
1970년대 제국주의 접근법에 기초한 체계적인 한 권의 책이 정리된다. 프랜시스 몰더의 『일본, 중국, 근대 세계 경제Japan, China, and the Modern World Economy』라는 책으로 책의 주장은 그의 스승인 이메뉴얼 월러스틴의 이론을 동아시아에 적용한 것이었다. 기존의 어떤 국가가 발전에 성공(혹은 실패)한 것을 설명하는데 그 나라의 고유한 요인을 강조하는 시각을 '전통사회 접근법'이라고 한다면, 몰더는 어떤 나라가 저개발 상태에 있는 것에 대해
코끼리 등위의 벼룩
제국주의 이론의 재검토
중국 연구의 새로운 흐름
하나밖에 없는 케이크를 두 사람이 나눌 때에는 케이크를 자르는 사람과 먼저 선택하는 사람이 같은 사람이어서는 안된다. 그런 경우에는 불평등이나 불공정함이 필연적으로 나타난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서양에 의해' 이루어진 중동의 역사나 문화의 빝바닥에 깔려있는 시각을 비판하며 "모든 표현은 그것이 바로 표현이라는 것 때문에 우선 표현하는 사람의 언어에 구속되며, 이어 표현하는 사람의 문화나 제도 혹은 정치적 환경에 구속된다."라고 말했다. 무릇, 모든 학문적 탐구는, 바꾸어 말하면 무릇 안다는 것은 일종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띤다. 특히 탐구하는 자가 탐구되는 측의 역사 형성에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 때에는 표현의 오류를 내포할 위험이 최대가 된다. 이런 관계 속에서는 케이크를 자르는 사람이 먼저 선택하는 역할까지 겸하게 된다.
앏知의 제국주의
그리고 그 두 가지를 모두 겸하는 이중성은 미국인들이 19,20세기 중국사에 관여한 방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미국은 실제로 중국 역사 형성에 큰 역할을 해왔으며 더 나아가 중국사를 해석하기 위한 학문적 패러다임을 만들어내는 데도 지도적인 역할을 했다. 상기한 세 가지 접근법들은 모두 서양중심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데, 서양 중심이란 중국 역사의 자율성을 부정하고 중국의 역사를 서양의 지적 소유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충격-반응 패러다임의 경우 주로 서양의 도전에 대한 중국의 긍정 혹은 부정적 반응이라는 관점에서 중국의 현실을 그려냈다. 이전의 연구에 비해 충격-반응 패러다임은 보다 중국의 역사 안으로 들어간 관찰을 제공하였지만, 너무 서양쪽으로 쏠려있었다. 때문에 서양에 대한 반응이라고 볼 수 없는 반응들도 서양에 대한 반응으로 치부하기도 하거나, 관계의 없는 반응들은 간과해버리는 일이 생겼다. 즉, 이 접근법은 어떤 측면은 왜곡, 다른 측면은 무시.경시하게 된 것이다.
근대화 또는 전통-근대성 접근법은 본질적으로 충격-반응 접근법과 궤를 같이 한다. 보다 세련된 이론적 기초가 추가되었지만 중국을 보는 시각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접근법은 중국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움직이지 않으며, 근대적인 서양에 의해서만 잠에서 깨어날 수 있는 전통적인 사회로 묘사했다. 하지만 이 접근법에서의 중요한 변화는 오로지 서양 자신이 근대성 실현을 향해 나아가던 도중에 경험한 프로세스일 뿐이었다. 오로지 서양의 경험에 근거하여 정의되었던 것이다.
제국주의 패러다임으로 중국 근현대사를 설명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충격-반응 접근법이나, 근대화 접근법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대립하는 것으로 생각했따.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그들은 자신들과 대립된다고 생각한 상대방과 중요한 견해를 공유하고 있었다. 즉, 제국주의 접근법 또한 충격-반응 접근법과 근대화 접근법과 마찬가지로 근대화의 한 형태인 산업화를 적극적으로 좋은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 세 패러다임들은 중국이 19,20세기에 경험할 수 있었던 유일하고도 중요한 변화란 서양의 충격이 불러일으킨 변화 혹은 서양의 충격에 반응하는 변화뿐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점에서는 서로 공통적이다. 분명한 형태로 대놓고 말하는가(충격-반응, 근대화) 아니면 암묵적으로 인정하는가(제국주의 패더라임)에서 차이가 날 뿐이다. 여기서는 진정코 중국 안으로 들어가 중국 자신에 입각하여 중국 근현대사를 파악하려는 시각이 나올 리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역사학자들은 편견이나 선입견이 조금도 담겨있지 않은 역사를 쓸 수 없다. 하지만 너무나도 거칠고 결함이 보이는 것을 극복하여 보다 중국 내부로 들어간 시각을 채워넣을 수 있다.
중국 자신에 입각한 접근법의 탄생과 그 특색
중국 자신에 입각한 접극번은 무엇이 다르고 우리의 중국사 이해에 무엇을 가져다 주는가? 사실 이는 명확하게 정의 된 단일한 접근법이라기 보다는 다양한 경향의 집합이라는 것이 실제 모습에 가깝다.
①내발적인 변화의 중시
무엇보다 이 접극법은 중국의 문제를 무엇보다도 중국 자신의 문맥에서 파악하려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서양에 의해 영향을 받기도 하고 서양과 관계가 없을 수도 있으나 어쨌든 중국인이 중국에서 경험한 문제이며 그 역사적 중요성을 재는 것은 서양의 척도가 아닌 중국의 척도여야만 한다. 이러한 근대 중국사의 이미지 재구성의 한 예로는 19세기의 개혁운동을 들 수 있다. 최근 많은 학자들은 이를 중국 고유의 개혁운동 전통으로 보고 있다. 물론 이들 중 누구도 서양이 중요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개혁운동이 서양의 의해 촉발된 서구 지향의 운동으로 간주하는 통설적 견해는 반대된다. 개혁운동의 모든 것을 중국 측 시각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19세기 전반을 보면 많은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대응하고 있던 개혁지향 중국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특히 슈레커는 1870년대의 청의 운동과 1898의 무술변법을 "정부와 엘리트 내부에서 일어난, 연속된 하나의 반대운동이었다"라고 보았다. 작금의 상황에서 기인하는 불만이나 좌절감이 정치적 현상을 비판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생각했으며, 새로운 출세의 기회를 추구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이 속한 성에서 개혁운동의 지도자가 되는 사태를 불러왔던 것이다. 이렇게 안쪽으로부터 19세기 중국의 개혁운동을 접근하면 종래와는 다른 개혁운동의 이미지가 떠오르게 된다.
신해혁명 또한 마찬가지이다. 기존의 미국의 연구는 쑨원과 중국 동맹회 쪽에 관심이 기울어지고 있다. 특히 쑨원은 미국에서 공부를 하였다. 미국 학계는 쑨원을 신해혁명의 중심에 두고 혁명 운동의 전개에 많은 부분을 쑨원 개인의 행동의 전개와 결부시켰다. 하지만 메리 라이트가 쓴 글은 "강력하고 유효란 지도력의 결여"를 신해혁명의 특징을 보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혁명 지도력의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혁명이 일어나게 된 사회, 정치, 경제, 사상적 맥락을 중시하게 되며 내재적이고 중국 자신에 입각한 신해혁명 이미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러한 이미지가 낳은 흥미로운 부분은 "향신계급과 신해혁명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여러 의견이 있지만, 조지프 에셰릭은 향신계급을 진보적 향신층과 보수적 향신층으로 구별한 뒤, 도시의 향신층은 신해혁명을 지지했다고 본다. 하지만 이들이 지지한 것은 자신들의 정치 권력을 획득할 수 있는 경우에 한정되었다. 신해혁명은 "정치적으로는 진보일지언정 사회적으로는 퇴보적이었던" 것이다.
향신계층은 이 시기 중국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요인 중 하나이다. 명청시기 이들은 지주의 성격을 띠었다. 점차 중국에서도 상품경제화가 진행됨에 따라 주지가 토지 수입에서 다른 수입으로 옮겨갔다. 이들은 정식 관료는 아니었지만 소송의 중재, 지방 서원의 관리, 도로와 관개시설 복구에의 공공사업 감독 등의 일을 하였다. 태평천국운동이 일어날 부렴, 이들의 영향력을 더 커지게 되어 군사, 민사상의 기능 또한 담당하게 된다. 이는 향신들의 지방통치를 좀 더 확고하게 만들어 주었다. 청나라 말기, 이들은 지방에서 기업활동에 투신하는 등 복잡해지고 행정-관리적 성격과 기업가적 역할에 걸치게 된다. 청나라 정부가 1900년대 들어 개혁을 계획하고(신정) 중앙정부가 직접 행정활동이나 경제활동의 범위를 급속하게 확대하려고 했을 때,(예컨대 철도의 국유화) 자신들의 생명선이 위협받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막았던 것이다. 이것이 신해혁명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이런 각도에서의 신해혁명은 "개혁을 추진하는만주족 왕조와 '어떤 의미에서는' 보수적이었던지방 엘리트 사이의 대립의 산물"로 볼 수 있다. 진짜 쟁점은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것으로 생각한 특권들에 대해 청나라가 간섭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신해혁명은 전통을 유지 보호 하려는 세력들에 대한 근대성을 실현하려는 세력들의 승리가 아니다. 이는 중앙과 지방의 권력을 둘러싼 투쟁이 터진 것이다.
②지역이나 지방의 중시
중국 자신에 입각한 접근법의 두 번째 특색은 중국을 다루기 쉬운 작은 규모의 간위로 나누어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접근법은 중국 자신이라기 보다는 '지역'이나 '성省'. 지방성에 입각한 접근법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중국은 아주 넓다. 다양하기도 하다. 때문에 여러 지역의 공통된 것을 모아놓은 평면적인 전체상이 아니라 여러지역의 편차를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전체상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편차의 내용과 다양성의 폭을 분명히 해야한다. 예를 들어, 청나라 말기의 개혁파를 연구한다면, 코헨은 연해 문화권과 내륙 문화권으로 나누었다. 두 문화간의 차이는 이전부터 존재하였으나, 아편전쟁 이후 많은 도시들이 조약항으로 개항되었을 때, 차이는 더욱 커졌다. 하지만 이 구별이 내륙권이나 연해권의 문화가 일률적이며 편차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스키너는 '지역구분 시스템'을 착안하여 각 지역 시스템이 하천 유역을 기준으로 구분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는 19세기 중국은 9개의 메크로 지역으로 나누었다. 그는 지리적 변수와 기술적 변수(운송 등)로 이 지역들을 구분하였다. 각 지역 시스템마다 중핵 도시가 있으며 중핵 도시에서 멀어질수록 물자와 인구는 희박헀다. 그의 연구는 지역관계를 동태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③기층사회의 중시
사회과학의 영향
1840년을 넘어서
비판과 한계
비판
물론, 폴 코헨의 관점에 대해 많은 역사학자들이 비판을 가해왔다. 주요 비판은 다음과 같다.
- 마이클 개스터(Michael Gaster)
"단일적이고 통합된 중국이라는 옛 그림 대신 다양한 중국이라는 새 그림을 수용하기 위해서 어떤 분석적 도구를 개발하고 있는가"
- 대니스 그래플린(Dennis Grafflin)
"일단 중국을 시간, 공간, 문화, 사회 등에 따라 해체해버린다면, 코헨이 요구하는 중국 자신에 입각한 역사 서술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중국을 다시 묶어야 하지 않을까?"
- 프라센지트 두아라(Prasenjit Duara)
" 중국 중심의 접근법(China-Centered'이 이전의 접근법에 비해 보다 정확한 중국사를 구축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코헨의 주장 역시 무언가 '회복되어야 할 예정된 서사'를 전제하고 있다는 면에서 여전히 본질주의적 역사 해석의 문제점을 공유하고 있다"
필자의 생각
"기존의 주류 관점에서 탈피하여 접근한다는 점에는 의의가 있지만, '중국 자신에 입각한 접근법'이 에서의 '중국'은 어떤 것을 이야기 하는가. 광대한 영토의 중국은 지역마다 기억하는 역사가 다를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은 누구를 대표하게 되는가. 지역이나 민족을 고려하여 볼 때, '중국'은 베이징을 의미하는가? 한족을 의미하는가? "
코헨의 반론
"2차 대전이후, 20년동안 인문학 전체에서는 중국을 일반화하는 작업에 지나치게 치중되어 있었다. 이는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시도이다."
"물론 중국에서의 이질적인 성격의 민족들에게는 중국 자신에 입각한 접근법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하지만 좀 더 동화된 경우에는 들어맞을 것이다. 또한 이 접근법의 핵심적인 특징은, 중국 세계를 보다 작고, 보다 손쉽게 처리할 수 있는 부분적인 단위들로 나누고, 또 그렇게 해서 종교, 인종, 그리고 사회적 차이를 포함한 지역적인 변형의 전체적인 범주를 더 긴밀하고 용이하게 탐구함으로써 중국의 방대한 다양성과 복합성에 적절하게 대처하려는 것이다.[8]"
"모든 사례에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접근법은 중국에 관한 역사적인 연구의 상당히 실질적인 부분에 적용될 수 있으며, 때문에 여전히 유용하다고 생각한다.[9] "
한계
중국 자신에 입각한 접근법이 가지는 한계는 무엇보다 이러한 접근법으로 설명되지 않는 역사적 사실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선 중국사를 넘어서는 것들, 예컨대 주변 국가와의 관계사나 비교사 등은 단순히 중국 자신에 입각한 접근법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다. 또한 한족이 아닌 그룹인 소수민족에 관한 연구 또한 중국 자신에 입각한 분석으로 잘 설명되지 않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