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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 왕실의 쇠퇴를 몇 가지 측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서주와 비교했을 때 동주의 영토는 매우 감소하였다. 동천 이후 이전 영토의 일부는 진(秦) 양공에게 사여되었고, 옛 도읍 호경을 비롯한 일부의 영토는 견융족(犬戎族)에게 점거당했다. 또 일부 지방은 제후들에게 침탈 당해 춘추 중기 이후 실질적 주나라의 영토는 당시 중소 제후국의 영토와 비슷한 정도였다. <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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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 조빙(朝聘)제도가 그 의미를 상실하게되었다. 천자의 권위가 높던 서주 때, 제후가 천자에 정기적으로 조빙하던 제도가 있었는데, 춘추시대에 이르러서는 조빙제도가 유명무실 해졌다. 영토와 백성이 감소하고 제후들의 조빙마저 끊기자 주나라 왕실의 재원은 바닥나게 된다. 주 평왕(平王)이 죽었을 때 장례비용이 없어 노나라에 사신을 보내 장례비용을 구걸했을 정도라고 한다. <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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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런 상황 속에서 군대의 규모 역시 축소되었다. 서주시대의 주 천자는 최소 14사의 군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동주시대에 이르러 그 수가 감소하여 주의 군사력은 제후국보다 못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주 천자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제후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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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춘추오패]] == | ||
+ | 중국 춘추시대 5인의 패자(覇者)를 일컫는 말로 오백(五伯)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 제국간 혹은 제후간에 맺어지는 회합이나 맹약을 회맹(會盟)이라 하며, 회맹의 맹주가 된 자를 패자라고 한다. 이들 패자는 모두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내세웠는데, 이는 춘추시대가 패자들이 당대 최고의 실력자이긴 했지만 주 왕실을 쓰러뜨려 천하를 잡으려고 하기보다는 ‘존왕(尊王)’의 기치를 내걸고 주나라 왕을 정신적인 지주로 인정하던 시대였다는 것을 보여준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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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춘추시대는 평왕이 도읍을 옮긴 기원전 770년부터 시작된다. ‘춘추(春秋)’시대는 [[공자]]가 지은 『춘추』가 기원전 722년부터 기원전 481년 사이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춘추시대는 주나라 왕실의 세력이 약해져 천자의 위력이 없어지고 제후들이 강성해져 서로 패권을 다투게 되는 시기이다. 차례로 다섯 제후국이 패권을 차지하게 되는데 이를 [[춘추오패]]라 한다. 춘추오패는 제(齊)나라 [[제환공|환공]], 진(晉)나라 [[진문공|문공]], 진(秦)나라 목공, 초(楚)나라 [[초장왕|장왕]], 오(吳)나라 [[부차]], 월(越)나라 [[구천]] 5명의 군주를 지칭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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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춘추시대의 사회|춘추시대의 사회와 문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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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춘추시대는 사회 경제적 토대의 변화와 함께 옛 사회질서가 붕괴되는 사회 변동기였다. 춘추시대에 이르러 천자를 정점으로 하는 ‘제후―대부―사―서인’이라고 하는 사회의 위계질서가 재편되었다. 춘추 시대는 귀족이 사회적 지배권을 장악하며 세습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려 하는, 세습을 통해 관직을 이어나가는 세경제(世卿制)였다. 또한 이 시기의 제후국들은 성읍 국가였으므로 나머지 야(野)에는 주인이 없었으며 제후국 사이에서도 아직 영토 소유의 개념이 없었다. 성 밖의 백성들에 대한 지배권 역시 없었다. <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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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나 [[전국시대]] 영토국가로 접어들며 이들을 자신들의 백성으로 편입시킨다. 군사적으로는, 무기도 열악했고 인구도 비교적 적었기 때문에 길어야 3~4일인 소규모 전쟁이나 장수들의 전차전이 주된 전투 형태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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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춘추시대 생산력 발전의 원동력은 철기의 발명과 보급이었다. 춘추 중엽에는 풀무의 발명과 더불어 ‘주철’을 제련하는 선진 기술이 출현하였는데, 이는 유럽보다 천년 가량이나 앞선 것이었다. 또한, ‘숙이종’의 기록에 춘추 중기의 제나라에는 이미 철광과 제련에 종사하는 관도(수공업 노예)가 존재하였다고 나온다. 그리고 <국어>의 <제어>에서는 제(齊)에서 일찍이 철로 된 농기구를 생산하였다고 한다. <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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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뿐만 아니라, 산동성 임치에서 발견된 동주시대의 야철 유적지의 묘에서는 춘추 중, 후기의 철제 농기구가 발견되어 춘추시대에 들어서 철기가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뒷받침 해준다.춘추시대의 농업은 우경의 확대와 철제농기구를 통해 발전하였다. 춘추시대, 우(牛)자와 경(耕)자가 결합되어 사람의 이름으로 쓰였으며 <국어>의 <진언>에서는 농민들이 제사와 종묘에 사용할 희생을 길렀으며, 이때에 소를 경작에 사용하였다고 나온다. 이를 통해 우경이 확대되었다고 짐작할 수 있는데 우경으로 인하여 황무지가 개간되고 토지 생산력이 높아지며 농업이 발달하였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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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와 같이, 철제보급과 우경 확대를 통한 생산력의 대폭 성장으로 인하여 집단노동 생산방식이 분산적, 단독적인 ‘1가1호’의 소농경제로 변화하였다. 이 후, 제후와 경대부들의 사전이 대량 출현하였고 공전을 그들의 사전으로 만들려는 침탈이 빈번히 일어났다. 이것이 정전제가 파괴되고 와해된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또한, 정전제의 기초 위에서 건립된 노예제 농업 생산도 평민과 노예의 반항 투쟁이 일어나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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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전국시대로의 이행]] == | ||
+ | 춘추시대에는 패자가 주 왕실을 섬기고 이민족의 침입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회맹을 주최해 어느 정도의 질서가 유지되었다. 하지만 초가 진을 공격하고 패자가 된 당시에는 성격이 변화했고 주 왕실을 무시했다. 초는 명분을 중시하지 않아 회맹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초장왕|초 장왕]]이 주나라 천자의 자리를 위협한다는 뜻으로 한 말인 ‘큰 솥의 무게를 묻는다’라는 말에서도 이런 점이 드러난다. <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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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춘추시대 말에는 진과 초가 권세를 잃고 오와 월이 두각을 보인다. 하지만 오와 월의 계속된 전쟁 끝에 오가 멸망하고 머지않아 월도 멸망하게 된다. <br> | ||
+ | 당시 진은 북쪽 제후의 중심이었지만 내부에서는 분열되고 있었다. 범, 증행, 지, 조, 위, 한의 6대 귀족이 공족 출신 귀족보다 더 강한 세력을 갖고 정권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 후 6대 중 살아남은 한, 위, 조는 진을 3등분하여 분리한다. 이들은 주왕에 의해 제후로 인정받기도 했다. 이로써 강력한 제후국이었던 진이 멸망한 시기까지를 춘추시대라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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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참고 문헌 == | ||
+ | * 김희영, 『이야기 중국사1』, 2006년 | ||
+ | * 박한제 외, 『아틀라스 중국사』, 2007년 | ||
+ | * 안정애,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2012년 | ||
+ | * 백양, 『백양 중국사1』,2014년 | ||
+ | * 박인수, 『춘추 전국의 패자와 책사들』,2001년 | ||
+ | * 신성곤, 윤혜영,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2004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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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중국의 역사]] |
2021년 3월 20일 (토) 00:34 기준 최신판
주 왕실의 쇠퇴
서주(西周) 중기부터 주나라 왕실의 세력은 쇠약해졌고 동천 이후, 제후들의 보호 없이는 생존할 수 없게 된다.
주 왕실의 쇠퇴를 몇 가지 측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서주와 비교했을 때 동주의 영토는 매우 감소하였다. 동천 이후 이전 영토의 일부는 진(秦) 양공에게 사여되었고, 옛 도읍 호경을 비롯한 일부의 영토는 견융족(犬戎族)에게 점거당했다. 또 일부 지방은 제후들에게 침탈 당해 춘추 중기 이후 실질적 주나라의 영토는 당시 중소 제후국의 영토와 비슷한 정도였다.
또 조빙(朝聘)제도가 그 의미를 상실하게되었다. 천자의 권위가 높던 서주 때, 제후가 천자에 정기적으로 조빙하던 제도가 있었는데, 춘추시대에 이르러서는 조빙제도가 유명무실 해졌다. 영토와 백성이 감소하고 제후들의 조빙마저 끊기자 주나라 왕실의 재원은 바닥나게 된다. 주 평왕(平王)이 죽었을 때 장례비용이 없어 노나라에 사신을 보내 장례비용을 구걸했을 정도라고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군대의 규모 역시 축소되었다. 서주시대의 주 천자는 최소 14사의 군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동주시대에 이르러 그 수가 감소하여 주의 군사력은 제후국보다 못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주 천자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제후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춘추오패
중국 춘추시대 5인의 패자(覇者)를 일컫는 말로 오백(五伯)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 제국간 혹은 제후간에 맺어지는 회합이나 맹약을 회맹(會盟)이라 하며, 회맹의 맹주가 된 자를 패자라고 한다. 이들 패자는 모두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내세웠는데, 이는 춘추시대가 패자들이 당대 최고의 실력자이긴 했지만 주 왕실을 쓰러뜨려 천하를 잡으려고 하기보다는 ‘존왕(尊王)’의 기치를 내걸고 주나라 왕을 정신적인 지주로 인정하던 시대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춘추시대는 평왕이 도읍을 옮긴 기원전 770년부터 시작된다. ‘춘추(春秋)’시대는 공자가 지은 『춘추』가 기원전 722년부터 기원전 481년 사이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춘추시대는 주나라 왕실의 세력이 약해져 천자의 위력이 없어지고 제후들이 강성해져 서로 패권을 다투게 되는 시기이다. 차례로 다섯 제후국이 패권을 차지하게 되는데 이를 춘추오패라 한다. 춘추오패는 제(齊)나라 환공, 진(晉)나라 문공, 진(秦)나라 목공, 초(楚)나라 장왕, 오(吳)나라 부차, 월(越)나라 구천 5명의 군주를 지칭한다.
춘추시대의 사회와 문화
춘추시대는 사회 경제적 토대의 변화와 함께 옛 사회질서가 붕괴되는 사회 변동기였다. 춘추시대에 이르러 천자를 정점으로 하는 ‘제후―대부―사―서인’이라고 하는 사회의 위계질서가 재편되었다. 춘추 시대는 귀족이 사회적 지배권을 장악하며 세습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려 하는, 세습을 통해 관직을 이어나가는 세경제(世卿制)였다. 또한 이 시기의 제후국들은 성읍 국가였으므로 나머지 야(野)에는 주인이 없었으며 제후국 사이에서도 아직 영토 소유의 개념이 없었다. 성 밖의 백성들에 대한 지배권 역시 없었다.
그러나 전국시대 영토국가로 접어들며 이들을 자신들의 백성으로 편입시킨다. 군사적으로는, 무기도 열악했고 인구도 비교적 적었기 때문에 길어야 3~4일인 소규모 전쟁이나 장수들의 전차전이 주된 전투 형태였다.
춘추시대 생산력 발전의 원동력은 철기의 발명과 보급이었다. 춘추 중엽에는 풀무의 발명과 더불어 ‘주철’을 제련하는 선진 기술이 출현하였는데, 이는 유럽보다 천년 가량이나 앞선 것이었다. 또한, ‘숙이종’의 기록에 춘추 중기의 제나라에는 이미 철광과 제련에 종사하는 관도(수공업 노예)가 존재하였다고 나온다. 그리고 <국어>의 <제어>에서는 제(齊)에서 일찍이 철로 된 농기구를 생산하였다고 한다.
이 뿐만 아니라, 산동성 임치에서 발견된 동주시대의 야철 유적지의 묘에서는 춘추 중, 후기의 철제 농기구가 발견되어 춘추시대에 들어서 철기가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뒷받침 해준다.춘추시대의 농업은 우경의 확대와 철제농기구를 통해 발전하였다. 춘추시대, 우(牛)자와 경(耕)자가 결합되어 사람의 이름으로 쓰였으며 <국어>의 <진언>에서는 농민들이 제사와 종묘에 사용할 희생을 길렀으며, 이때에 소를 경작에 사용하였다고 나온다. 이를 통해 우경이 확대되었다고 짐작할 수 있는데 우경으로 인하여 황무지가 개간되고 토지 생산력이 높아지며 농업이 발달하였다.
이와 같이, 철제보급과 우경 확대를 통한 생산력의 대폭 성장으로 인하여 집단노동 생산방식이 분산적, 단독적인 ‘1가1호’의 소농경제로 변화하였다. 이 후, 제후와 경대부들의 사전이 대량 출현하였고 공전을 그들의 사전으로 만들려는 침탈이 빈번히 일어났다. 이것이 정전제가 파괴되고 와해된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또한, 정전제의 기초 위에서 건립된 노예제 농업 생산도 평민과 노예의 반항 투쟁이 일어나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전국시대로의 이행
춘추시대에는 패자가 주 왕실을 섬기고 이민족의 침입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회맹을 주최해 어느 정도의 질서가 유지되었다. 하지만 초가 진을 공격하고 패자가 된 당시에는 성격이 변화했고 주 왕실을 무시했다. 초는 명분을 중시하지 않아 회맹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초 장왕이 주나라 천자의 자리를 위협한다는 뜻으로 한 말인 ‘큰 솥의 무게를 묻는다’라는 말에서도 이런 점이 드러난다.
춘추시대 말에는 진과 초가 권세를 잃고 오와 월이 두각을 보인다. 하지만 오와 월의 계속된 전쟁 끝에 오가 멸망하고 머지않아 월도 멸망하게 된다.
당시 진은 북쪽 제후의 중심이었지만 내부에서는 분열되고 있었다. 범, 증행, 지, 조, 위, 한의 6대 귀족이 공족 출신 귀족보다 더 강한 세력을 갖고 정권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 후 6대 중 살아남은 한, 위, 조는 진을 3등분하여 분리한다. 이들은 주왕에 의해 제후로 인정받기도 했다. 이로써 강력한 제후국이었던 진이 멸망한 시기까지를 춘추시대라 한다.
참고 문헌
- 김희영, 『이야기 중국사1』, 2006년
- 박한제 외, 『아틀라스 중국사』, 2007년
- 안정애,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2012년
- 백양, 『백양 중국사1』,2014년
- 박인수, 『춘추 전국의 패자와 책사들』,2001년
- 신성곤, 윤혜영,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200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