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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하]]·[[한신]]과 함께 한나라 건국의 3걸로 불린다. 흔히 모사가, 명참모를 일컫는 ‘장자방’이라는 말은 바로 장량을 가리키는 말이다. [[항우]]에게 세력이 밀리던 [[유방]]을 도와 그가 함양을 돌파하게 하고, [[홍문의 연]]에서 유방의 목숨을 구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 [[소하]]·[[한신]]과 함께 한나라 건국의 3걸로 불린다. 흔히 모사가, 명참모를 일컫는 ‘장자방’이라는 말은 바로 장량을 가리키는 말이다. [[항우]]에게 세력이 밀리던 [[유방]]을 도와 그가 함양을 돌파하게 하고, [[홍문의 연]]에서 유방의 목숨을 구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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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25일 (일) 22:47 판
{{인물정보
장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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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생 |
? |
사망 |
BC 189 |
국적 | 한(漢), 중국 |
개요
장량(張良, ? ~ 기원전 189년)은 중국 전한(前漢)기 한고제(漢高祖)시대의 정치가이자 재상이다. 소하·한신과 함께 한나라 건국의 3걸로 불린다. 흔히 모사가, 명참모를 일컫는 ‘장자방’이라는 말은 바로 장량을 가리키는 말이다. 항우에게 세력이 밀리던 유방을 도와 그가 함양을 돌파하게 하고, 홍문의 연에서 유방의 목숨을 구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출신
장량의 자는 자방(子房),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그는 한(韓)나라 명문가 출신으로, 한나라의 다섯 왕을 모신 재상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희개지는 소후, 선혜왕, 양애왕 시절에 재상을 지냈고 아버지 장평은 희왕, 도혜왕 시절에 재상을 역임했다.
그러나 기원전 230년, 진나라는 한(韓)나라를 멸망시켰고, 장량은 조국을 잃게 된다. 따라서 장량은 진나라에 복수하기 위해 시황제가 하남성 원양현 동남방의 박랑사를 지날 때 창해역사를 시켜 시황제를 제거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장량은 이름을 바꾸고 하비(下邳)로 숨어들었다. 이곳에서 그는 황석공이라는 노인에게 전국 시대에 편찬된 무장 선발 시험의 기본 교재 중 하나인 《태공병법》을 배웠다.
생애
유방을 만나다
기원전 210년과 기원전 209년 천하는 그야말로 혼란의 시기였다. 진시황제가 죽고 어린 나이의 호해 황자가 이세황제로 즉위하자 환관 조고가 전권을 휘둘러 진나라는 뿌리째 흔들렸고, 그다음 해에는 진승과 오광이 농민 900여 명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전국 각지에서 진나라를 타도하자는 군사 봉기가 일었다. 초나라 장군이던 항연의 아들 항량은 조카 항우를 데리고 회계에서 군대를 일으켰고, 유방 역시 군사를 일으켜 하비의 서쪽 교외에 주둔했다. 장량은 이 소식을 듣고 100여 명의 종을 데리고 유방을 찾아갔다. 장량은 유방의 얼굴에서 제왕의 기운을 느끼고 그를 돕기로 결심했다.
홍문의 연
기원전 207년 10월 유방은 항우보다 한발 앞서 무관을 돌파하여 함양을 평정하고 진나라 왕 자영의 항복을 받았다. 이에 격노한 항우는 단번에 함곡관을 돌파하여 12월에 홍문에 진을 쳤다. 항우는 유방이 스스로 황제가 되려 한다고 생각하고 유방을 죽이고자 했다. 장량은 항우의 당숙 항백을 매수하여 항우를 설득해 다음 날로 예정되어 있던 공격을 무마시켰다. 또한 유방이 항우를 찾아가 그간의 상황을 보고하고 항우와 천하를 다툴 의지가 없음을 알리게 했다. 이에 항우가 유방을 용서한 후 연회를 베풀었을 때(홍문의 연) 항우의 책사 범증이 심복 항장을 시켜 유방을 암살하려고 했으나 유방을 빼돌려 목숨을 구했다.
잔도 태우기 그리고 한신의 천거
장량은 항우가 유방을 촉, 파, 한중의 왕으로 삼아 파촉의 산지에 가두려 했을 때도 항우가 세운 도읍지로 들어가는 잔도(棧道)를 불태워 유방이 관중으로 진출할 의사가 없음을 나타냈다. 그러는 한편 항우 몰래 군사를 일으켜 관중을 평정했다. 또한 장량은 한나라 건국 3걸 중 한 명인 한신을 천거했다. 한신은 이후 한나라의 대장군으로 관중을 탈환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고, 제나라와 초나라 연합군을 대파하여 해하 전투에서 항우를 제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장량의 처세
유방이 항우를 제거하고 완전하게 한 왕조를 세운 후 장량은 정치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또 한 번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장량의 처세를 엿볼 수 있다. 유방은 황제에 등극하자 공신들을 제후왕에 봉해 그 공을 치하했다. 유방은 장량에게 제나라 지역의 3만 호를 다스리도록 하려 했지만, 이를 사양하고 전쟁의 피해가 가장 심해 3천 호에 불과했던 하남성 중부의 유현을 선택했다. 이때 장량은 자신이 유현에서 유방을 두 번째로 보았는데, 이는 하늘의 뜻이었으며 한나라 건국에 자신의 공은 미미하다고 말하며 스스로 몸을 낮췄다. 권력에 초연한 모습을 보여 권력 다툼에서 생명을 보전하고자 함이었다.
또한 장량은 기원전 201년 자신의 건의로 유방이 낙양에서 관중 지역으로 천도한 후부터는 항상 신병을 이유로 조정에 출석하지 않고 두문불출하여 권력의 중심에서 비켜서 있었다. 실제로 기원전 196년 개국공신 한신은 유방의 정부인인 여태후의 농간에 죽임을 당했고, 후에 소하는 수감되었으며, 함께 해하 전투를 치렀던 양나라 왕 팽월도 살해되었다. 이들 모두 개국공신으로 한나라가 개국된 후 권력과 부의 중심에 있던 인물들이었다. 장량은 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장량이 건국 후 단 한 번 정치에 개입한 적이 있었는데, 바로 유방의 후계자 문제로 여태후가 장량을 닦달했을 때다. 유방은 말년에 애첩인 척희를 사랑해 그가 낳은 아들 여의로 황태자 유영을 대신하려고 했다. 다급해진 여태후는 장량을 다그쳤고, 장량은 유방이 존경해 마지않던 상산사호(常山四皓)에게 황태자의 보좌를 맡기면 유방이 황태자를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과연 유방은 후계자를 바꾸지 않았고, 이로써 장량은 황태자와 여태후를 살린 은인이 되어 자신의 목숨을 보전했다.
기원전 196년 장량은 다시 관직에서 물러나 신선술을 배우겠다는 이유로 다시 두문불출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한신과 팽월의 살해와 이에 공포를 느껴 일어난 경포의 반란 등 살벌한 세상에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처세술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여태후가 장차 장량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모함하자 유방은 장량이 머물고 있던 장가계(張家界)를 공격해 왔다. 하지만 유방은 천연의 요새인 이 지역을 끝내 정벌하지 못했다. 장량은 유방이 세상을 뜨고 8년 후 세상을 떠났고 이곳에 묻혔다.
평가
장량이 유방을 돕게 된 데는 조국 한(韓)나라에 대한 충성심과 진나라에 대한 보복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장량은 자신의 뜻을 단순히 진나라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를 하는 것만으로 끝내지 않았다. 장량은 다른 사람을 존중할 줄도, 의로운 일에 목숨을 걸거나 죽음을 태연하게 받아들일 줄도 모른데다 참을성까지 없었던 유방을 한나라의 건국자로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장량의 뛰어난 계책과 가르침은 한 고조 유방을 완전한 대륙의 패자로 만들었다. 장량이 한 고조 유방을 돕지 않았다면 중국의 역사상 가장 강대했던 시기 중 하나인 한나라의 시대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참고문헌
사마천, <<사기2, 진실로 용기있는 자는 가볍게 죽지 않는다>>, 김진연 역, 서해문집, 2002 ISBN 8974831686
사마천, <<사기, 역사와 삶의 철학이 만나는 살아 있는 기록>>, 고은수 역, 풀빛, 2006 ISBN 9788974745387